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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11화)
五. 파고들수록 비범해지는 곳이 국가의 기관(3)
다 갈아 놓은 먹에 담비의 꼬리털[紅貂尾毛]로 만들어진 붓으로 일필휘지. 섬세하고 고아한 솜씨가 엿보이는 것이 당대의 문성(文聖)과 겨뤄 볼 만한 솜씨였다. 여성 특유의 매끄럽고 섬세한 놀림에 덧붙여 호쾌한 면이 가는 글체를 바로잡아 주고 있으니 글자 자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점[側]을 찍을 때는 용의 눈을 그리는 것마냥 단호하고 가로획[勒]을 그을 때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세로획[努]은 통쾌하리만치 또렷하며 갈고리[?]에는 주저함이 없다. 책(策), 약(掠), 탁(啄), 책(策)에 이르기까지 그 획은 마치 춤추는 것 같고 완성된 글자는 당장이라도 살아 꿈틀거릴 것 같았다.
볼 때마다 새삼스레 감탄하고 춘희의 글자를 모사하려다 실패한다. 이것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글쓰기의 연장인데다가 춘희가 시범을 보인 후 먹을 대신 갈아 주기 때문에 뜸을 들일 필요도 없고 자재도 최상급이다. 황제나 쓸 법한 최고급의 필기구는 ‘도구가 이상해서’라는 말을 의미 없게 만든다.
“마음이 흐트러졌어요. 그리고 이건 아니죠. 조금 더 마음을 정갈히 할 필요가 있겠네요. 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 보세요.”
춘희의 지적.
부드럽기 짝이 없고 온화한 미소이긴 하지만 천화에겐 무엇보다 힘들었다. 천화는 자신이 쓴 글자를 보면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데 춘희는 쓸 때의 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사실이 거의 대부분 옳다는 것이었다.
천화는 다시 마음을 바로 세우고 붓을 들었다.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자세가 무너지면 춘희의 지적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나왔다.
“허리를 똑바로 펴세요. 어깨를 벌리고 다른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글자에 집중하세요.”
아직도 이 공부의 효용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 글씨는 쓰는데 몸을 정갈히 하고 마음을 깨끗이 비우는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글자를 봐도 별로 대단치 않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럼에도 천화가 하루 종일 서예를 연습하고 춘희가 모사하는 필체를 보는 이유는 내기가 걸려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춘희 엄마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희대의 내공 심법이 단전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도 좋다. 듣도 보도 못한 기술들을 사희 엄마가 가르쳐 주는 것도 좋다. 흑희 엄마가 각종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주는 것도 좋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보다 엄마들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좋았다. 이런 생활을 지키고 싶다.
“좋은 필법이네요.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썼기 때문일까,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서체가 나왔다. 그걸 유심히 바라보던 춘희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 그걸 알겠어요?”
“아무렴요. 글의 위대함을… 서체는 사람의 인격이고 품성이며 살아온 삶이고 현재의 기분이에요. 매우 중요하지요. 이제 알겠죠?”
“그건 역시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천화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춘희가 화를 낼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앞으로 이런 서체를 쓸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동생들의 그것보다 수업이 빨리 끝났군요.”
“수업이 끝난 거예요? 벌써?”
“네, 며칠 모질게 대하긴 했지만 이 서체를 보니 지난 일도 할 만했다 싶어요. 이걸 보면 안심할 수 있어요.”
춘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서 몸을 일으켰다.
“아들의 훌륭한 서체를 보았으니 약속을 지킬게요. 허공섭물의 요령과 사용 방법에 대해서. 아주 조금은 더 함께 있을 수 있겠죠?”
“네!”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수업이라는 명목은 춘희와 천화 사이를 조금 더 가깝게 해 준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인지 하기 싫은 수업 일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화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응? 호오? 흐음, 후웃. 좋아. 과연, 이해했어. 마침내 네 꿈을 이루는구나. 그 같잖은 소설마냥 중원 최강의 무림인이 돼서 무림에서 활개 칠 수 있겠네?”
“끄응, 어째서 엄마들은 다 내가 무림 동경했다는 걸 아는 거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냐? 엄마는 모든 걸 안다고. 후훗.”
전희 악자연이 씩 웃으며 천화의 두개골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딱 봐도 기녀라기보다는 전사의 분위기가 나는 여성.
물론 옷을 잘 갖춰 입고 화장을 한 후 얌전히 앉아 있으면 다른 궁희들 못지않게 매혹적이고 교태로운 기녀가 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희는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마치 사내와 같은 여성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특징이기도 했지만 여성으로 가꿀 시간이 좀처럼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녀는 궁희 중에서 가장 특이한 입장이었는데 그녀는 황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큰 규모의 전쟁에서 장군이나 사령부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황족이 전장에 나서면 남장하여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소명.
덕분에 전장에서 짐이 되지 않도록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를 절정으로 익혔으며 군략과 전술을 잘 이해하는데 반해 유행이나 취미 따위를 좀처럼 가질 수 없었다. 흑옥루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고위 관료들은 전쟁이니 무예 따위의 이야기에 반색하는 전희를 이해하는데 힘들어했지만 그런 야성적인 모습을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천화도 그런 전희를 좋아했다.
전희는 막 전장에서 귀환했는지 모래 먼지를 덮어쓴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조차도 매력적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와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늘어놓는 천화를 힘껏 끌어안았던 전희는 곧 그의 변화를 깨달았다. 몸이 튼튼해지고 몸속에서 열기가 끓어오르는 연유를 묵자 속성 고수 계획의 일환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도 무공을 배우고 싶다 이거지? 아, 무공은 사희들이 가르쳐 주니까 나는 싸움을 가르쳐 주면 되는 건가?”
“잉? 싸움이라니? 무공과 싸움이 달라?”
천화가 반문하자 전희는 날씬한 허리에 손을 얹고 핀잔을 주었다.
“당연하지, 그것도 모르면 곤란한데?”
“어느 정도로 다른데.”
“공자와 달마대사만큼과 달라.”
천화는 전희의 예를 머릿속에서 궁리해 보고 멍해졌다. 뭐랄까, 다르긴 엄청 다른데 이게 제대로 된 비유가 맞나?
그러는 동안 전희가 깔깔 웃으며 다시 천화의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깊이 생각하지 마. 인생 즐기라고 있는 거고 괜히 머리 쓰면 늙기만 한다고.”
“그걸 춘희 엄마에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일 언니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아무튼 원하던 것을 이루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망정이잖아? 무기 쓰는 법은 구희 언니가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이 몸이 할 일도 정해져 있군.”
천화는 여러 명의 엄마에게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다.
요희 관지충에게서 희대의 내공심법인 환우일기담을 배웠다. 정확히 배웠냐고 물으면 이가 갈리지만.
춘희 주아란에게서 금기서화 및 제왕학의 수업을 들었다. 결국 제왕학을 배우고야 말았다.
구희 단리서라에겐 무기 사용하는 법과 안목을 익혔다.
혈희 주란에게서는 요상심법과 혈도, 약점 찍는 법 등등을.
사희 사영령, 사양령은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흑희 옥상아는 무림에서 일어난 일과 여러 가지 배경을 설명해 주어서, 책으로는 몰랐던 것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전희에게서 실전을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헉? 실전이라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쉽게 실전 소리가 나오자 천화는 순간 헛숨을 들이삼켰다.
“무기 사용법은 단리 언니가 가르쳐 주고, 무공은 뱀 녀석들이 가르쳐 주니까 그걸 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얼마든지 덤비라고.”
“갑자기 실전이라니 난이도가 너무 높다고!”
“으음, 그런가.”
전희 악자연이 긴가민가하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내가 보기엔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전희 엄마가 잘못된 거야!”
천화가 격렬하게 외쳤다.
“좋아, 그럼 이건 좀 미뤄 두자. 일단 좀 씻을게.”
막 전장에서 돌아온 전희는 오자마자 천화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벼 대면서 재회를 즐겼던 것이다. 그녀는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럼 잠깐 기다리고 있어. 아참, 무기를 만져도 좋아.”
“응!”
전희의 방은 기녀의 방답게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딱 한군데, 벽의 한 면만큼은 무기로 가득했다. 천화는 가끔씩 전희의 방에 들러 무기를 보면서 눈을 빛내곤 했는데 엄명에 의해 만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져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신나게 이런저런 무기를 집어 들고 휘둘러보았다. 소설에서 나오듯 처음 쥐는 무기를 휘두르다 무언가를 깨는 하찮은 짓을 하지 않았기에 천화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잠시 후 머리를 채 말리지도 않고 한 겹의 옷만 입은 전희 악자연은 마치 막 목욕하고 나온 선녀 같았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데도 빛을 발하는 그녀는, 어떤 장신구가 없을 때야 비로소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엄마 모두가 안 어울린다고 했을 때도 꿋꿋하게 수선화의 향기가 나는 향수를 선택한 전희의 마음을 천화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열기에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면서 걸어온 전희가 벽에서 단봉을 쥐고 옆의 벽에서 폭이 얇은 철검을 꺼내 천화에게 던졌다. 철검이라고는 해도 다소 무거웠기 때문에 폭이 좁은 걸 골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천화에겐 조금 컸다.
“응? 이건 뭐야?”
“철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럼 실전을 위한 무기라고 고쳐 말할게.”
이상해? 하고 묻는 전희를 향해 천화가 소리 높여 외쳤다.
“당연히 이상하지! 아까는 좀 미뤄 두자면서!”
“그렇게 말했지. 그래서 목욕 끝날 때까지 미뤄 뒀잖니.”
“세상에! 그게 뭐야? 그걸 좀 미뤄 두자고 표현하는 게 이상하잖아!”
“뭐냐니? 이상한 말만 하는구나. 자, 군말 말고 시작해 보자. 난 오래 못 있으니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손을 써야 한단 말이야. 주의해, 네 실력을 대강 짐작하고 있으니까 진지하게 할 거야.”
말과 동시에 순식간에 날아오는 단봉이 몹시 매섭다.
“히익!”
천화는 급히 허리춤의 검을 빼어 막았다.
막았다고는 해도, 한 번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 손아귀에서 벗어나 칼은 허공을 몇 바퀴 회전하더니 바닥에 성대하게 떨어져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시작해 보자는 말과 동시에 봉을 휘두를지도 그걸 막았는데 쥐고 있는 검이 날아갈 줄은 몰랐던 터라 천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곧 전해지는 강렬한 충격에 천화는 손목을 부둥켜 쥐고 덜덜 떨었다. 손아귀가 찢어지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저렸다.
등에 흐르는 식은땀.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는 전희가 말하고 있었다.
“이런. 파지법이 틀렸어. 내가 단봉을 쥐고 휘둘렀는데 쾌속검법을 위한 파지법을 쓰면 어떡하니?”
“그, 그게…….”
“아니면 이미 다른 검을 쓰고 있었던 건가? 대단히 가벼운 검으로?”
‘눈치 빨라!’
천화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때 전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상황에 맞춰서 파지법을 고쳐 쥐는 게 중요해. 그건 알고 있었는데도 그랬지? 이해해. 중검(重劍)을 쥐듯이 꽉 쥐도록. 둘째 언니가 가르쳐 줬지?”
“네!”
천화는 이내 검을 완전 감싸듯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이제 대번에 튕겨나가지 않도록, 힘이 강한 이와 무난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은 방법이었다.
“좋아, 다시 간다.”
그 말과 동시에 전희가 다시 단볼을 휘둘렀다. 아무런 수식도 심지어는 도법이라는 이름조차 붙을 수 없는 막무가내의 휘두르기였다.
단봉이라고는 하지만 양 자루 끝 부분에 쇠가 둘러져 있어 무게도 적당히 무거운 무기를 전희는 흥얼거리면서 세엽검(細葉劍)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봉을 휘둘러 댔다.
허공에 단봉의 환영이 떠오를 정도로 빠르고 경쾌하게.
전희의 단봉이 천화가 든 검의 좌우를 두들겼다.
구희가 선물해 준 금고검과는 달리 이름도 없는 단순한 철검이지만 내구성은 기대할 수 있는 듯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쥔 사람의 기량 덕분인지, 상대방의 공세가 너무도 난폭하기 때문인지 철검은 태풍 맞은 풀마냥 난동을 부렸다.
열댓 번쯤 되었을까, 마침내 철검이 바닥을 다시 한 번 나뒹굴었다.
핏방울도 좀 떨어졌다.
“하, 하하하.”
아까의 경험 때문에 손아귀가 찢어질 때가 돼서야 검을 떨어뜨린 것이다.
“아하하하하!”
고통이 심할 텐데도 천화는 소리 높여서 웃었다. 전희는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기 전, 싱긋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