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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14화)
六. 세상에서 정체를 감춘 건 사실 황궁에 있다(2)
천화는 며칠 전 있었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렸다.
전희와의 대련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상황은 좀 다르지만 천화는 이를 훌륭하게 이겨낸 바가 있었다.
천화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근육도 없는 흰 종아리 위에 새겨진 회초리 자국. 천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문희가 다시 회초리를 들었다. 천화는 그대로 쓰러졌고 앓는 소리를 냈다.
문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시진이 지났다.
천화는 아직도 노려보는 문희의 시선을 이길 수 없어 다시 일어나 옷자락을 걷었고 문희는 한층 더 한 속도와 세기로 종아리에 줄을 만들었다.
“끄으…….”
그날 저녁.
흑희가 앓는 소리를 내는 천화를 데리고 일 층으로 내려와 바르게 눕혔다. 사희가 음한지기(陰寒之氣)로 양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천화가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지켜보고 있던 혈희가 움찔했다.
“조 언니 좀 심했던 거 아냐?”
“이해할 수는 있어. 조 언니가 제일 잘하는 건 역시 그런 쪽의 학문인데, 우리 아들은 공부하는 거 싫어하잖아.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니까 다른 언니들의 공부를 못 따라가는 걸 보면 화가 나기도 하겠지.”
종아리를 휘두르는 회초리에 실린 다재다능한 변화는 천화의 피부뿐만이 아니라 근육, 그리고 내공이 지나는 혈도까지도 막아 버렸다. 문희, 그 유약한 인상 뒤에 남겨진 냉정한 손속을 맛보고 천화는 과연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혈희는 기절이 바로 수면으로 이어진 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희의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인이라면 열흘을 정양해야 할 부상은 궁희들 덕분에 반나절, 아니 수면에서 일어나면 나아 있을 터였다.
흑희는 내상에 강해지는 심법을 가르쳐 준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천화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어리고 귀여운 모습을 보며 혈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음날.
“흑희 엄마, 문희 엄마. 그 침은 다 뭐야?”
“머리 좋아지게 해 주는 심법을 운기해.”
한 뼘보다도 기다란 금색 침을 여러 개 담은 통을 들고 있는 흑희와 그 앞에 선 문희는 잠에서 깨어난 천화를 데려다 놓고 그렇게 말했다. 천화는 대단히 불안해하면서도 속칭 머리 좋아지는 심공인 뇌정심법(雷霆心法)을 운기했다.
인간은 사고하는 방식이 전기에 의해서라는 것이 판명된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이 시대에 인공적으로 전류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극양의 무공이 있어야겠지만, 그 무공 덕분에 뇌의 제어를 뺏는다거나 온몸을 마비시키는 일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뇌의 각성을 촉구할 수도 있었다.
한때 중원 최강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뇌제(雷帝). 그의 유해를 연구한 무림세가들의 노력과 오랜 시간의 연구 끝에 개발된 이 심법을 운기하자 천화의 머릿속이 일순 확장되었다.
수십, 수백의 생각이 한 번에 떠올랐다 사라지고 잊힌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문희가 천화의 곁에 섰고 흑희는 조심스럽게 침을 뽑아 천화의 팔다리, 목에 찔러 넣었다. 뇌력이 폭발하지 않도록, 뇌가 몸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수를 봉인한다.
천화는 동공을 열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얼굴로 머릿속의 정보를 조합했다.
짧은 시간, 말 그대로의 찰나.
그리고 천화가 눈을 떴을 때는 며칠 전까지의 기억이 모두 방금 겪었던 것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쉽게 가라앉지도 않고, 당장이라도 꺼내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천화. 정신 차려.”
이마를 짚은 손길을 느끼고서야 천화는 의식에서 깨어났다. 무어라 설명하기 곤란한 무의식의 세계를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다.
천화는 맥이 탁 풀린 눈으로 문희를 올려다보았고 그녀가 즉각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술에 취한 상태와 비슷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상황도 뚜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몽롱한 기분도 없고 그저 심신이 피곤할 따름.
“……불쾌해요.”
“이해해.”
제대로 듣지도 않았던 시경의 답을 말할 수 있었다. 흘려들은 것인데도 뇌가 기억을 해 버린 탓이다. 정답을 말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 외에도, 정체모를 누군가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의 몸을 자기가 제어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불쾌한 느낌이라니! 이런 기억을 안겨 준 문희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두 번 다시는 안할 거예요. 두 번 다시는!”
효과도 입증되었고 실제로 떠오른 기억은 가라앉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 천화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문희는 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네 마음은 충분히 알았어. 그렇다면 이제 집중하고 공부해야지?”
천화는 순식간에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이런 불쾌한 경험을 하게 만든 문희는 천화가 암기를 못해서 일부러 이런 방식까지 써 준 것이다. 천화는 맹렬한 부끄러움을, 그리고 가슴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방금 그 일은 두 번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겠지?”
“……네.”
남자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
천화는 문희의 지략을 깨닫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말을 한 바를 지키기 위해서 천화는 그날부터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고 필사적으로 문희와 함께 육경을 공부했다. 그리고 맞았다.
많이.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휘둘러 오는 회초리를… 강기마저 뚫고 들어와 피육이 아닌 안쪽에 타격을 주는 일격을… 많이, 무척 많이…….
‘사, 살려 줘! 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회초리를 맞고 그동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공부를 하던 때, 전희가 활짝 핀 미소와 함께 찾아왔다. 손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원통의 상자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고? 고민하던 찰나 문희가 회초리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천화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서적으로 향했다. 반사적으로 익힌 동작은 재빠르긴 했지만 보는 이를 서글프게 했다. 마치 맹수를 나무 기둥에 묶어 놓았다는 모습일까, 영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뭐야 저거, 천화가 공부를 다 하네? 정말로 잘 교육시켰는데?”
“원래 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아이였어요.”
“어머, 그래? 나만 몰랐나?”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응, 네 칼 팔아서 이거 빌려 왔어.”
문희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자연히 배어 나오는 위압에 천화가 움찔했다. 천화의 당황을 알아채고 기세를 죽였지만 문희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뭐요? 빌려 왔다고요, 자연 언니?”
“응, 빌려 왔어.”
“세상에… 그걸 지금 그렇게 당당히 말하는 건가요? 지금 칠성검을 주고 고작 그걸 빌려 왔단 말인가요?”
천화는 두 엄마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했다.
‘칠성검? 어디서 들은 적이…… 아!’
문희 엄마에게 오기 전 전희와 무척 많은 대련을 했다. 말 한 번 잘못 바꿨다가 목숨의 위협을 겪을 뻔도 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던 수업. 그 수업의 끝에는 대장군과 악자연이 만났던 때가 있었다.
그때 들었다.
전희는 대장군, 혹은 대장군부에서 무언가를 빌리려 했고 그쪽은 빌려 주는 대가로 이쪽의 무언가를 요구했다. 그때 말한 명칭이 바로 칠성검이었다.
“어차피 이름뿐인 보검이잖아. 그거 쓸 수 없다고.”
“제 건 일반적인 칠성검과는 다른 거란 말이에요. 알면서 시선 딴 데로 피하지 마세요.”
“어머, 그랬어? 몰랐네.”
“마음대로 팔아먹을 수 있는 보검이 아니라고요. 구경만 한다더니 어째 그걸 팔아 치웠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디다 팔았어요?”
그 차분하던 문희가 언성을 높이다니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문희가 무척이나 아끼는 물건인 것 같았다. 예전에 사희 두 명이 문희의 보석을 훔쳐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전희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대장군부의 대장군이 가져가 버렸어.”
“대장군이 도대체 왜…… 아니, 그거야 어찌 됐든 좋아요. 지금 당장 찾아와요. 어서요.”
전희가 손에 든 원통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이거 금의침(金醫鍼)이야.”
전희의 충격 발언에 문희도, 천화도 얼어붙었다.
“잠깐만요, 뭐라고요? 제가 똑바로 들은 거 맞나요?”
“금의침이라고 들었다면 제대로 봤어. 그러니까 고작 한 번 쓰는데 칠성검을 팔아 버렸지. 칠성검이 그 유명한 물건이라고 해도 금의침의 가치엔 많이 못 미치잖아.”
“저, 전희 엄마. 정말 그거 금의침이야?”
“응, 이걸 사용하면 말 그대로 뇌신이 된다는 금의침이야. 무인들이 각고의 수련 끝에 내공을 이용해서 겨우 따라올 수 있는 반응을. 이 침은 한 방에 해결해 준단 말이야.”
연력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때.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세공 솜씨로 스물두 개의 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동봉되어 있는 의학, 아니 의료법이 하나.
시술을 할 때마다 침이 짧아져 가는 소모품이었지만 그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것이기도 하다.
그 도구의 이름이 바로 금의침.
그리고 금의침으로 구사하는 의술이 바로 천정사상대법(天定四象大法).
그리고 그것을 사용해서 무인이 된 이들은 하나같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어떤 무공 서적보다도 많은 피를 부르고 가격이 더 높아져가는, 말 그대로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도구였다.
“그게 대장군부에 있었다고요?”
“응, 현 대장군도 천정사상대법을 사용했어. 그래서 현재 금의침은 여기에 있지.”
“과연…….”
그 초절한 무예의 비밀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느낌이었다. 문희도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칼 다시 가져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천화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문뜩 물었다.
“자, 잠깐만요. 사용하면 짧아지는 거 맞죠? 소모품인거 확실하죠?”
“그런데?”
“그걸 빌려 왔다고요?”
“응, 잘했지?”
“아니 잘하고 자시고 그걸 빌리다니, 그걸 빌려 줄 수나 있는 물건이에요?”
인간의 오감 중에서 사감을 초인의 수준까지 끌어 올려 주는 천정사상대법과 그걸 위한 금의침. 아무나 시술해 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사용 제약까지 따른다.
금의침은 천정사상대법을 사용할 때마다 확실히 짧아져 간다. 전의가 통에서 꺼낸 것을 보니 확실히 원통의 높이와 비교해 보면 침이 짧은 것이 보인다.
소모품이 확실한 것, 그것을 어떻게 무슨 수로 빌렸단 말인가. 천금을 주고 바꾸자고 해도 거절할 사람이 태반인 그 보물을 겨우 칠성검을 주고…….
칠성검이 대단한 보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예장이 잘되어 있는 보물일 뿐이다. 일곱 개의 보석이 박힌 검집에 장인이 만든 검. 공을 쌓은 무장에게 하사하는 일종의 사치품에 가까웠…….
“응? 칠성검?”
천화의 머릿속에서 섬광이 튀었다.
뭔가 해답이 짜 맞추어지는 기분이었다.
“문희 엄마의 성이 조 씨…… 그리고 칠성검…… 희귀하다고…… 아아아아아! 알겠다!”
천화의 눈이 문희에게 향했다. 문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마주 응시했다.
“문희 엄마가 가지고 있다던 칠성검이 그 칠성검이에요?”
천하에 많은 칠성검이 있지만, 금의침과 견주어 볼 만한 검은 역사상에 딱 한 번밖에 등장한 예가 없다. 사람의 목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잘 드는 칼에, 화려하기까지 하며, 그 가치조차도 무궁무진한!
“응, 그거야. 설하가 가장 아끼고 있던 보물 중의 보물이지.”
전희가 제 것인마냥 으스대며 대답했다.
천화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게 진짜로 있긴 한 거였어요? 그걸 가지고 있었어요?”
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의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엄마의 그걸 팔아서…… 나에게, 그 가치 있는 걸, 엄마, 세상에!”
천화는 감격에 빠졌다. 그 칠성검을 장군부에 넘겨주는 대가로 금의침을 빌리다니! 그리고 금의침을 사용해서 자신을…….
너무 놀라운 사실을 거듭 접하고 그걸 또 어린 감성으로 조합하다 보니 원인과 결과가 좀 이상하게 나왔지만, 그걸 지적해 줄 이는 여기에 없었다.
문희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보검을 잃어 매우 상심에 빠졌지만 천화가 눈물 가득한 눈을 하고서 안겨 들자 가슴을 펴고 상냥히 끌어안았다.
전희가 이 촌극을 말을 잃은 채로 지켜보는 가운데 문희가 그간의 냉정함을 모두 버린 채 자상하게 말했다.
“널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아.”
“엄마, 엉엉! 엄마 사랑해! 제일 사랑해!”
전희는 끼어들 거리를 찾지도 못한 채 금의침만 들고 처연히 서 있었다.
“어째 좋은 관경이긴 한데 이건 나에겐 전혀 좋지 않잖아. 뭐냐고 이 닭 쫓던 개 꼴이라니…….”
그녀가 그렇게 탄식하거나 말거나 격한 모자의 정을 새삼 깨달은 두 명은 그렇게 감동에 젖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