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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16화)
七. 황금향(1)


‘이해하지 마라.’
머릿속을 헤집듯 떠오르는 단어 몇 조각.
‘이해하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바다 위에 떠오른 부표마냥 단어가 사방으로 날뛴다.
‘그러나 잊지는 마라!’

천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성대한 박치기에 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싸매고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소란은 짧았다. 천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도 머리를 싸매고 나뒹굴었으므로, 게다가 내려다보던 이는 아이였고 고통은 더 심했을 터였다. 사내라고는 해도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천화와 얼추 비슷해 보일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 비명에 천화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팠지만 급히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소동은 이마를 양손으로 붙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아윽, 머리 아파. 너 괜찮아?”
“안 괜찮지!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귀여운 용모와는 다르게 말하는 투는 앙칼졌다.
“아, 아니. 안 괜찮아 보이지.”
“그럼 묻지 말란 말이야! 망할 돌머리! 뭐가 이렇게 단단해!”
소동은 할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당연히 할아버지가 오지는 않았다.
천화는 할아버지라는 말에 조금 당황했었지만 그냥 울고만 있는 것을 보고 다소 안심했다. 천화는 소동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천화와 얼추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미안해. 어떻게 해 줘야 할까?”
“어떻게 해 줄 필요도 뭣도 없어! 치료도 못해 줄 테니까.”
“음, 치료하는 방법 정도는 알아.”
천화의 말에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던 소동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치료해 줘. 아프지 않게.”
벌써부터 피가 엉겨 부풀어 오르는 이마를 바라보며 천화는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호오, 하고 입가를 가져다 대고 혹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한다고 해도 아픈 것이 사라질 리 없음에도 엄마들은 그런 걸 좋아했다. 물론 소동은 아픔을 참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멍한 얼굴을 감출 생각도 못한 채 천화가 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천화는 몇 번이나 호오, 하고 숨결을 불어넣는 것으로 치료를 끝마쳤고, 떨어져서 으쓱댔다.
“어때? 이러면 아픔이 홀랑 날아가고 치료가 된단 말이야.”
“되겠냐!”
소동의 고함에 천화는 움찔했다.
“되던데.”
“어디의 누가!”
“엄마가.”
소동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동성의 사내 녀석이 이마에 호오 하고 숨을 불어넣는 경험은 처음인 탓에 소동은 화를 내고 싶은데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반대로 천화는 소동이 몹시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도 그렇고 차림새도 화려했다. 소동은 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고는 허리에 당당하게 손을 얹었다.
“그게 치료면 세상 사람 평생 아파 걱정할 일 없겠네!”
“그런데 넌 누구야?”
“말 돌리지 말고!”
“그리고 여기는 어딘데?”
소동은 입을 다물었다.
천화의 말 돌리기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소동은 하려던 항의를 다 접고 한숨을 쉬며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파서 엉엉 울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꽤나 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대단한 고관의 자식일까? 높은 신분이라는 것이 티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당당함을 보건데 문관은 아니고…….
“여긴 황금향(黃金鄕). 훈련소라고 할까, 도장이야.”
“그게 뭔데?”
“말했잖아, 황금향이라고.”
“그러니까 그 의미가 뭐냐고.”
“……몰라?”
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동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뭐야? 황금향의 일원이 아닌 거야? 이름을 대 봐.”
“천화라고 해.”
“성은?”
“모르겠는데?”
“성을 몰라?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춘부장의 성함은?”
“안 가르쳐 주던데?”
소동은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부딪쳐 작은 소리를 냈다.
“너 흑옥루 출신이야?”
“응,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
천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장소였다.
넓기는 대단하게 넓지만 그리 화려하지는 않은 말하자면 어떤 도장(道場)처럼 보였다.
“당연히 알지. 네가 흑옥루 출신이라면 황금향 소속이니까 말이야.”
“아까부터 물었지만 황금향이라니, 그게 대체 뭔데?”
“너 아무것도 못 듣고 온 거니? 진짜 흑옥루 출신 맞아?”
“맞는데…….”
소동은 이마에 손을 얹고 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긴 멈추지 않고 부풀어 오르는 혹에 손등을 가져다 댔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소동이 신음했다.
“그럼 무예는 익혔어?”
“응? 응. 조금이지만…….”
“그럼 이야기가 쉽네. 무림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황궁에서는 고수를 육성하기로 했어. 그건 알아?”
천화는 자신이 무공을 배웠던 이유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눈치챘다.
“아, 그럼 설마 너도?”
“그래, 나는 대장군부에서 기른 고수야. 어림군 소속이지.”
“호오…….”
그 계획에 뽑힌 건 나 한 명이 아니었구나 하고 천화는 새삼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고수 한 명을 기르고자 몇 년의 세월을 낭비할 정도로 황궁이 마음 좋은 이들은 아니다. 기왕 이렇게 고수를 기르기로 작정한 이상 훗날의 후계자를 기르는 셈 치고 대규모로 사업을 벌여 보자 해서 황궁 내의 조직들에서 고수를 육성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추측하자 천화는 다른 아이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생각이긴 했다.
“그럼 다른 군부나 부서 쪽에서도 후계자가 있겠네?”
“그래, 세 명이 더 있어.”
“어디에 있는데?”
“저기에 하나.”
소동이 가르친 쪽으로 바라보자 그늘진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앉아 있는 소년이 한 명 있었다. 천화보다 두어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 앙상한 팔다리에 옷마저 추레한, 눈 밑이 퀭한 소년이었다.
천화는 태어나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처음이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저 사람은 누구? 아니 어느 소속?”
“금위반 소속이라 하더라구.”
“금위……반?”
“지금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뭐 괴상한 신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라던가. 뭐, 그렇대.”
‘아니, 그렇다고 저렇게 존재감 없이 구석에 처박혀 있을 리는 없잖아. 천성 아냐?’
천화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실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른 둘은?”
“아직 얼굴도 못 봤어. 오늘 내에 오긴 할 테지만. 그런데 정말로 모르는 거야?”
“몰랐어, 난 혼자서만 이런 수행을 하는 줄 알았으니까.”
소동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황궁이 그렇게 비효율적인 일을 할 것 같아?”
“나도 알아, 그런데 네 이름은 뭐야?”
“후후후, 잘 물어봐 줬어. 소상영(蘇祥榮)이라고 한다. 훗날의 대장군이 될 사람이라고, 앞으로 잘 보이도록 해.”
천화는 소상영이라고 밝힌 소동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장에 방해되지 않게 잘 짜 맞춰진 근육과 그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내공이 느껴졌다. 천화는 그렇게나 영약을 퍼먹고 최고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무공을 익혀 왔기에 나름 자신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상대도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어디 파고들어 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소상영이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 얹었던 손을 내밀었다.
“뭐야, 벌써부터 역량을 매기는 거야? 뭐, 좋아. 한 번 대련해 볼까?”
“대련이라고?”
문득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앞으로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이와 먼저 붙고 싶진 않았다.
“거절 하고 싶지 않아도 대련하게 될 때가 있을 거야. 그때를 노리도록 하지.”
“뭐야 그건, 재미없잖아.”
소상영이 툴툴거거리자 천화가 대답했다.
“대련이라면 하겠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아. 겨우 하루 본 거고 이름밖에 모르는 사이잖아. 대련이라는 건 어쨌든 서로 드잡이를 하는 거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계획에 참여하게 된 이상은 서로를 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동안 발휘할 길 없었던 궁희들의 교육이 빛나는 언변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소상영은 뜻밖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얼굴을 붉혔다.
“서, 서로를 알아가다니 그게 무슨…….”
천화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소상영이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난 그렇게 생각해. 최소한 관계는 그렇게 맺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
“그… 으, 으악……!”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오른 소상영이 도망쳤다.
천화는 몰랐지만 그는 동작 하나, 표정 하나까지 여성의 환심을 사기 좋도록 길러져 있었다. 생활 전반의 태도에서 그것이 배어 나왔다. 덕분에 천화는 여성에게는 부끄러움을 남성에게도 부끄러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게 되었다.
남자아이인데도 부끄러워 견딜 수 없어 쪼르르 도망가는 모습. 천화는 뭐가 잘못되었나 곰곰이 고민하는 사이 소상영은 한참을 도망쳐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소상영이 쪼르르 도망치고 천화가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맑은 웃음소리가 저 입구 쪽에서 들렸다. 소상영과 천화, 그리고 구석에서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중얼거리고 있던 퀭한 소년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훈련이었는지 곳곳이 헤지고 찢어지고 흙먼지로 뒤덮인 옷을 입고 있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소년이 보였다. 소상영이나 천화보다는 두세 살 정도 많아 보인다. 퀭한 눈빛의 소년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라면 옷이 너덜너덜한 건 비슷하지만, 방금 나타난 소년은 굉장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하, 이거 꽁생원만 있는 줄 알았더니, 꽤나 독특한걸. 수련할 맛나겠는데?”
“……당신 누구?”
소상영이 조금 긴장하며 물었다.
천화는 그 긴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감을 못 잡겠다. 문은 저기 열려 있었는데 열리는 소리는커녕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타난 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이 닫혀 있었던 걸 확인했는데 우리들이 하는 말을 들었던 거야?”
확실히 방금까지 문은 닫혀 있었다. 이 거대한 도장에는 바깥의 바람 한 점 불어올 곳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방금 웃은 소년은 마치 다 들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문을 닫고 벽을 통해서 안의 말을 들을 정도. 그것도 이렇게 넓은 곳에 어느새 들어와서…….
“이것 참. 벌써부터 각 세우지 말라고 너희들 소리가 조금 컸을 뿐이니까. 들어올 시간을 좀 재고 있었을 뿐이야.”
“그래서 당신은 누구야?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정수현(鄭需炫). 현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남자도……라고 말하지만 전부 사내새끼들뿐이군. 재미없는걸.”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천화가 저도 모르게 허하고 한숨을 쉬자 정수현이라고 밝힌 소년이 피식피식 웃었다.
“여자애만큼 귀여운 녀석과 이상한 향기를 몸에 바르고 다니는 녀석은 있지만 말이야.”
“무례해, 너무 무례해. 당신 도대체 뭐야?”
“뭐야, 저 천화라는 녀석처럼 대해 줘. 얼굴 빨갛게 해서 주저하면서 말을 걸어 주란 말이야.”
“당신을 어떻게 대하던지 그건 내 마음이고…… 어디에서 왔지?”
“딱히 소속은 없는데? 난 정해진 위치가 없어. 굳이 말하자면 황궁무고(皇宮武庫) 소속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무슨 말이지? 되묻는 소상영을 향해서 정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말해도 모를 것 같지만 일단 물어보지. 너희들 그거 알고 있어? 황궁에 온 다섯 무림인에 대해서 말이야.”
소상영은 입을 다물었고 눈빛 퀭한 소년은 애초에 말도 하지 않았고 천화는 조금 생각하느라 말을 잃었다. 한동안 침묵, 침묵이 낯설었던 탓인지 정수현이 당황했다.
“어, 어? 반응이 다 왜 이래? 뭔가 반응이 있어야지?”
천화가 곧 흑희 엄마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물었다.
“독행문(獨行門)의 다섯 괴인(怪人) 말하는 거야?”
“오! 뭘 좀 아는데? 그래, 나는 그분들에게서 수련 받고 황금향의 일원이 되었지.”
흑희는 옛날 무림의 이야기에서부터 최신의 정보까지 접해서 조리 있게 들려주며 수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