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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폭풍 1권 1화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그 땅을 사람들은 무 대륙이라 불렀다. 그곳에서는 하나의 해가 뜨고, 두 개의 달이 떴다.
태초에 혼돈 가운데서 무 대륙을 창조한 신은 이 땅을 특히 사랑하여 오래도록 그곳에 거하였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점차 인간들과 다른 생명들이 땅 위에 넘쳐 나자 신은 하늘 너머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갔다. 비록 신은 떠났지만 그 위대한 능력들은 이후에도 땅 위에 남아 이후에도 오래도록 살아 역사했다. 대륙의 긴 역사 가운데 신의 능력을 이은 인물들이 곳곳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돕고 나라를 일으켰다.
무 대륙의 제일 북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은 험준한 산맥과 척박한 토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일 년 내내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개중 파르바트 산은 너무 높고 험하여 그 꼭대기는 일 년 내내 녹지 않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다고 한다. 험한 지형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소국들과 부족 국가들이 대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서로 합치고 갈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그리고 약 천 년 전 타마국이라는 종교 독립국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대륙의 중간 삼분의 일은 무 제국의 영토로, 이곳에서는 일 년을 주기로 사계절이 반복되었다. 무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로 무우족이라는 신비한 일족이 대대로 황제가 되어 다스렸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무우족은 명예롭고 뛰어난 전사들로, 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의 평화와 번영에 힘썼다.
대륙의 남쪽 삼분의 일은 예 사막이라 불리는 모래사막으로, 일 년 내내 무덥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예 사막에 거하는 여러 유목민 부족들과 소국들 가운데서 바샤국과 에스파국이 가장 컸다. 바샤국은 예 사막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그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아울러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륙의 가장 남쪽 끝에 자리한 에스파국은 바다를 통해 대륙 밖의 세상과 교역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신의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받은 무 대륙은 오랜 세월 동안 평화로웠다. 욕망과 탐욕에 쉬이 물드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탓에 자잘한 다툼은 끊이지 않았지만, 대륙의 흥망을 위협하는 큰 다툼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대륙의 역사가 처음으로 기록된 이래로 이천여 년이 흐른 후, 전에 없었던 큰 피바람이 무 대륙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제1장 끝의 시작
제국력 2035년.
무 제국의 수도 지안.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황궁 정원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싸늘하게 느껴지던 대기는 포근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고, 얼어 있던 대지는 느슨하게 풀어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새싹들이 차가운 대지를 뚫고 솟아나 파릇한 잎을 선보이고, 정원 곳곳에 자리한 나무들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가 한창이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드리운 가지들은 철 이른 옅은 분홍빛 꽃을 터뜨리며 곧 다가올 봄을 예감케 했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이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마하칸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다사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꼭…… 떠나셔야 합니까?”
“이미 너무 지체했다.”
마하칸은 그의 앞을 막아선 라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흔들림이 없었다.
마주 보고 선 두 남자는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둘 모두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움직이지 않아도 숨겨진 힘이 느껴지는 잘 단련된 몸과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깊숙이 자리한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사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풍기는 기운은 완연히 달랐다.
라울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눌러두기 위해 두 주먹을 꼭 쥔 채 턱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다. 모두 담아 둘 수 없는 절절한 감정들이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 녹아 있었다. 그에 비해 마주하고 선 마하칸의 얼굴은 희미한 표정 하나 없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잘 빚어 놓은 조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주변을 가득 메운 봄기운이 무색하게 침중하고 어두웠다. 봄 햇살 아래 길게 드리운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유난히 짙었다.
“이렇게 떠나지 않으셔도…… 마하칸, 당신이라면 이따위 저주는 간단하게 벗어 던질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분명……!”
라울이 한 발 다가서며 격앙된 말들을 쏟아 냈다.
“라울, 예외는 없다! 지금의 너라면 그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을 텐데.”
마하칸의 낮고 단호한 음성이 라울의 열띤 말을 잘랐다.
저주. 무우족의 저주.
라울은 이를 악물고 울분을 삼켰다. 그의 잘 다듬어진 얼굴이 침울하게 굳어졌다.
태초부터 신이 정하셨다는 성스러운 반려인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한 무우족의 자손은 성년이 되면 인간적인 감정들을 하나둘 잃어 간다. 그렇게 공허해진 그들의 영혼의 빈자리를 어둠의 기운이 잠식해 간다.
보통 인간들보다 몇 배나 긴 수명을 지닌 그들은 영겁같이 이어지는 허무와 고독의 시간을 견디며 어둠의 기운과 싸우다가 마지막 영혼의 한 조각마저 사라지려 할 때 긴 여행을 떠난다. 어둠에 완전히 물들어 폭주하기 전에 명예로운 소멸, 영원의 잠에 들기 위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저주로 인해 또 한 명의 위대한 무우족의 전사가 사라지게 된 것에 라울은 치밀어 오르는 격분과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마하칸은 무표정한 얼굴로 라울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말없이 지켜봤다.
얼마 전 신의 은총으로 ‘운명의 상대’를 만난 라울은 그 영혼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기운으로 빛이 났다. 그의 굳은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 있었다. 안타까움, 죄책감, 괴로움. 시시때때로 바뀌는 표정과 음성 뒤로 삶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보였다.
무우족에게 ‘운명의 상대’는 그런 존재였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죽어 가는 그들을 되살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존재. 단 하나의 구원. 그것이 라울에게는 있었고, 마하칸…… 그에게는 없었다.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아마도 이것이 질투 내지는 부러움이란 감정일 것이다. 그가 아직도 감정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말이지만.
마하칸은 라울의 빛나는 얼굴을 보며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자신이 아닌 라울이 되어야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여행길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하칸은 라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그 너머로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황궁의 탑과 지붕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지켜 온 제국의 상징이었다. 그의 선조들이 세우고 지켜 온 무 제국은 대륙의 중심에 우뚝 서서 수천 년 동안 주변 나라들의 발전을 돕고 대륙의 평화를 수호해 왔다.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갈 것은 그 위대한 일에 자신 또한 한몫을 했다는 기억이 전부일 것이다.
“혼례식과 대관식이 열흘 뒤라고 들었다. 미리 축하를 해야겠구나. 오늘 밤 나는 지안을 떠날 생각이다.”
“마하칸, 그렇게 급히 떠나지 않으셔도…….”
라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의 찌푸린 얼굴이나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아직도 다 떨쳐 버리지 못한 미련이 묻어났다. 하지만 마하칸은 단호했다.
“그리하는 것이 좋겠다. 대관식이 치러지기 전에 내가 지안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라울도 딱히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럼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라울은 밀려오는 절망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라울, 고개를 들어라. 그대는 이제 무 제국의 황제다. 누구 앞에서도, 설령 내 앞에서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마하칸의 준엄한 목소리가 감상에 젖은 라울의 정신을 일깨웠다. 라울은 고개를 들고 자신 앞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선이 굵은 얼굴에 깊숙이 자리한 마하칸의 두 눈은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을 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날렵한 콧날과 굳게 다물어진 입가에서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담담하고 도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힘과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자 특유의 오만한 여유가 보였다.
마하칸은 역대 무우족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일컬어졌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힘과 능력, 그리고 그 능력들을 뒷받침해 주는 냉철한 판단력과 추진력. 그가 원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도, 가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마하칸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혈족과 제국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거대한 의무과 책임을 묵묵히 짊어져 왔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도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은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했다.
전 황제가 수명을 다하고 이 땅을 버렸을 때 다음 황제로 지목된 것은 마하칸이었다. 그는 무우족 가운데서도 유서 깊은 집안 출신으로, 오랜 동안 선정을 펼쳤던 전 황제의 조카뻘이었다. 그는 그 세대에서 가장 강한 자를 일컫는 ‘무우족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흠모했고, 그를 다음 대의 황제로 추대하길 원했다. 라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벌써 삼백 년 이상을 이 땅 위에서 보내고도 마하칸은 하늘이 정한 인연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끝이 가까웠음을 예감한 그는 모두의 뜻을 완강히 물리치고 전 황제의 자식인 라울을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다른 이들도 결국 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라울, 그대라면 훌륭한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해라, 무 제국의 황제는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담긴 라울의 시선을 마주하며 마하칸이 담담한 어조로 당부했다.
“새로운 제국의 황제여, 부디 그대의 치세 동안 이 땅이 평안하기를!”
마하칸은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심장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며 정식으로 축복의 말을 건넸다.
이에 라울도 자신의 우상이자 친우에게 고개 숙여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하칸은 이미 사라져,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섭섭한 마음에 바람 한 점 흐트러뜨리지 않고 사라져 버린 그를 말없이 원망했다. 그렇게 라울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라울.”
“……엘라.”
바람결에 익숙한 향기와 목소리가 실려 왔다. 라울은 고개를 들고 돌아보았다. 막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하얀 옷자락이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여인은 막 피어나는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웠고 눈부셨다.
“라울, 무슨 일이에요?”
급히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며 엘라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를 향한 염려와 애정이 선명하게 깃들어 있었다. 라울은 손을 들어 옅게 물든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엘라는 그의 품 안으로 한 걸음 더 다가들며 라울의 표정을 세세하게 살폈다. 이른 아침부터 혼례식 준비로 분주하던 그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더니 억누르기 힘든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 뜬금없는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라울. 그녀의 연인. 신이 주신 그녀의 반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로를 향한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들을 잇는 영혼의 묶임은 점점 더 단단해져 갔다. 어느덧 한쪽의 감정이 격해지면 다른 한쪽이 그 감정을 뚜렷이 느낄 만큼.
라울은 엘라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뒤로 돌려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향긋하고 익숙한 체향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울적하고 무겁던 마음이 그제야 위로를 찾은 듯 편안해졌다.
“라울…….”
“그가 떠났어, 엘라.”
여린 목덜미 사이로 입술을 묻으며 라울이 중얼거렸다. 엘라는 손을 들어 커다란 남자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부디 그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기를 빌면서.
한참 만에야 울적한 마음을 달랜 라울은 살짝 뒤로 몸을 떼어 내며 안심시키듯 그녀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 미소에 응답하듯 엘라의 아름다운 얼굴도 환한 미소로 밝아졌다.
“엘라…….”
신은 그의 마음의 지주를 데려간 대신 영혼의 반려를 인도해 주셨다. 자신을 황제로 세운 마하칸을 위해서도, 이제야 찾게 된 자신의 여인을 위해서도 그는 무 제국 역대 최고의 황제가 될 것이다. 엘라의 손을 마주 잡고 황궁으로 향하는 라울의 가슴은 새로운 다짐으로 벅차올랐다.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그 땅을 사람들은 무 대륙이라 불렀다. 그곳에서는 하나의 해가 뜨고, 두 개의 달이 떴다.
태초에 혼돈 가운데서 무 대륙을 창조한 신은 이 땅을 특히 사랑하여 오래도록 그곳에 거하였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점차 인간들과 다른 생명들이 땅 위에 넘쳐 나자 신은 하늘 너머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갔다. 비록 신은 떠났지만 그 위대한 능력들은 이후에도 땅 위에 남아 이후에도 오래도록 살아 역사했다. 대륙의 긴 역사 가운데 신의 능력을 이은 인물들이 곳곳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돕고 나라를 일으켰다.
무 대륙의 제일 북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은 험준한 산맥과 척박한 토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일 년 내내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개중 파르바트 산은 너무 높고 험하여 그 꼭대기는 일 년 내내 녹지 않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다고 한다. 험한 지형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소국들과 부족 국가들이 대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서로 합치고 갈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그리고 약 천 년 전 타마국이라는 종교 독립국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대륙의 중간 삼분의 일은 무 제국의 영토로, 이곳에서는 일 년을 주기로 사계절이 반복되었다. 무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로 무우족이라는 신비한 일족이 대대로 황제가 되어 다스렸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무우족은 명예롭고 뛰어난 전사들로, 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의 평화와 번영에 힘썼다.
대륙의 남쪽 삼분의 일은 예 사막이라 불리는 모래사막으로, 일 년 내내 무덥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예 사막에 거하는 여러 유목민 부족들과 소국들 가운데서 바샤국과 에스파국이 가장 컸다. 바샤국은 예 사막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그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아울러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륙의 가장 남쪽 끝에 자리한 에스파국은 바다를 통해 대륙 밖의 세상과 교역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신의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받은 무 대륙은 오랜 세월 동안 평화로웠다. 욕망과 탐욕에 쉬이 물드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탓에 자잘한 다툼은 끊이지 않았지만, 대륙의 흥망을 위협하는 큰 다툼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대륙의 역사가 처음으로 기록된 이래로 이천여 년이 흐른 후, 전에 없었던 큰 피바람이 무 대륙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제1장 끝의 시작
제국력 2035년.
무 제국의 수도 지안.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황궁 정원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싸늘하게 느껴지던 대기는 포근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고, 얼어 있던 대지는 느슨하게 풀어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새싹들이 차가운 대지를 뚫고 솟아나 파릇한 잎을 선보이고, 정원 곳곳에 자리한 나무들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가 한창이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드리운 가지들은 철 이른 옅은 분홍빛 꽃을 터뜨리며 곧 다가올 봄을 예감케 했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이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마하칸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다사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꼭…… 떠나셔야 합니까?”
“이미 너무 지체했다.”
마하칸은 그의 앞을 막아선 라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흔들림이 없었다.
마주 보고 선 두 남자는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둘 모두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움직이지 않아도 숨겨진 힘이 느껴지는 잘 단련된 몸과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깊숙이 자리한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사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풍기는 기운은 완연히 달랐다.
라울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눌러두기 위해 두 주먹을 꼭 쥔 채 턱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다. 모두 담아 둘 수 없는 절절한 감정들이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 녹아 있었다. 그에 비해 마주하고 선 마하칸의 얼굴은 희미한 표정 하나 없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잘 빚어 놓은 조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주변을 가득 메운 봄기운이 무색하게 침중하고 어두웠다. 봄 햇살 아래 길게 드리운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유난히 짙었다.
“이렇게 떠나지 않으셔도…… 마하칸, 당신이라면 이따위 저주는 간단하게 벗어 던질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분명……!”
라울이 한 발 다가서며 격앙된 말들을 쏟아 냈다.
“라울, 예외는 없다! 지금의 너라면 그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을 텐데.”
마하칸의 낮고 단호한 음성이 라울의 열띤 말을 잘랐다.
저주. 무우족의 저주.
라울은 이를 악물고 울분을 삼켰다. 그의 잘 다듬어진 얼굴이 침울하게 굳어졌다.
태초부터 신이 정하셨다는 성스러운 반려인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한 무우족의 자손은 성년이 되면 인간적인 감정들을 하나둘 잃어 간다. 그렇게 공허해진 그들의 영혼의 빈자리를 어둠의 기운이 잠식해 간다.
보통 인간들보다 몇 배나 긴 수명을 지닌 그들은 영겁같이 이어지는 허무와 고독의 시간을 견디며 어둠의 기운과 싸우다가 마지막 영혼의 한 조각마저 사라지려 할 때 긴 여행을 떠난다. 어둠에 완전히 물들어 폭주하기 전에 명예로운 소멸, 영원의 잠에 들기 위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저주로 인해 또 한 명의 위대한 무우족의 전사가 사라지게 된 것에 라울은 치밀어 오르는 격분과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마하칸은 무표정한 얼굴로 라울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말없이 지켜봤다.
얼마 전 신의 은총으로 ‘운명의 상대’를 만난 라울은 그 영혼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기운으로 빛이 났다. 그의 굳은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 있었다. 안타까움, 죄책감, 괴로움. 시시때때로 바뀌는 표정과 음성 뒤로 삶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보였다.
무우족에게 ‘운명의 상대’는 그런 존재였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죽어 가는 그들을 되살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존재. 단 하나의 구원. 그것이 라울에게는 있었고, 마하칸…… 그에게는 없었다.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아마도 이것이 질투 내지는 부러움이란 감정일 것이다. 그가 아직도 감정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말이지만.
마하칸은 라울의 빛나는 얼굴을 보며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자신이 아닌 라울이 되어야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여행길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하칸은 라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그 너머로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황궁의 탑과 지붕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지켜 온 제국의 상징이었다. 그의 선조들이 세우고 지켜 온 무 제국은 대륙의 중심에 우뚝 서서 수천 년 동안 주변 나라들의 발전을 돕고 대륙의 평화를 수호해 왔다.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갈 것은 그 위대한 일에 자신 또한 한몫을 했다는 기억이 전부일 것이다.
“혼례식과 대관식이 열흘 뒤라고 들었다. 미리 축하를 해야겠구나. 오늘 밤 나는 지안을 떠날 생각이다.”
“마하칸, 그렇게 급히 떠나지 않으셔도…….”
라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의 찌푸린 얼굴이나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아직도 다 떨쳐 버리지 못한 미련이 묻어났다. 하지만 마하칸은 단호했다.
“그리하는 것이 좋겠다. 대관식이 치러지기 전에 내가 지안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라울도 딱히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럼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라울은 밀려오는 절망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라울, 고개를 들어라. 그대는 이제 무 제국의 황제다. 누구 앞에서도, 설령 내 앞에서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마하칸의 준엄한 목소리가 감상에 젖은 라울의 정신을 일깨웠다. 라울은 고개를 들고 자신 앞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선이 굵은 얼굴에 깊숙이 자리한 마하칸의 두 눈은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을 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날렵한 콧날과 굳게 다물어진 입가에서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담담하고 도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힘과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자 특유의 오만한 여유가 보였다.
마하칸은 역대 무우족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일컬어졌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힘과 능력, 그리고 그 능력들을 뒷받침해 주는 냉철한 판단력과 추진력. 그가 원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도, 가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마하칸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혈족과 제국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거대한 의무과 책임을 묵묵히 짊어져 왔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도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은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했다.
전 황제가 수명을 다하고 이 땅을 버렸을 때 다음 황제로 지목된 것은 마하칸이었다. 그는 무우족 가운데서도 유서 깊은 집안 출신으로, 오랜 동안 선정을 펼쳤던 전 황제의 조카뻘이었다. 그는 그 세대에서 가장 강한 자를 일컫는 ‘무우족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흠모했고, 그를 다음 대의 황제로 추대하길 원했다. 라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벌써 삼백 년 이상을 이 땅 위에서 보내고도 마하칸은 하늘이 정한 인연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끝이 가까웠음을 예감한 그는 모두의 뜻을 완강히 물리치고 전 황제의 자식인 라울을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다른 이들도 결국 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라울, 그대라면 훌륭한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해라, 무 제국의 황제는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담긴 라울의 시선을 마주하며 마하칸이 담담한 어조로 당부했다.
“새로운 제국의 황제여, 부디 그대의 치세 동안 이 땅이 평안하기를!”
마하칸은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심장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며 정식으로 축복의 말을 건넸다.
이에 라울도 자신의 우상이자 친우에게 고개 숙여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하칸은 이미 사라져,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섭섭한 마음에 바람 한 점 흐트러뜨리지 않고 사라져 버린 그를 말없이 원망했다. 그렇게 라울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라울.”
“……엘라.”
바람결에 익숙한 향기와 목소리가 실려 왔다. 라울은 고개를 들고 돌아보았다. 막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하얀 옷자락이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여인은 막 피어나는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웠고 눈부셨다.
“라울, 무슨 일이에요?”
급히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며 엘라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를 향한 염려와 애정이 선명하게 깃들어 있었다. 라울은 손을 들어 옅게 물든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엘라는 그의 품 안으로 한 걸음 더 다가들며 라울의 표정을 세세하게 살폈다. 이른 아침부터 혼례식 준비로 분주하던 그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더니 억누르기 힘든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 뜬금없는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라울. 그녀의 연인. 신이 주신 그녀의 반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로를 향한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들을 잇는 영혼의 묶임은 점점 더 단단해져 갔다. 어느덧 한쪽의 감정이 격해지면 다른 한쪽이 그 감정을 뚜렷이 느낄 만큼.
라울은 엘라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뒤로 돌려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향긋하고 익숙한 체향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울적하고 무겁던 마음이 그제야 위로를 찾은 듯 편안해졌다.
“라울…….”
“그가 떠났어, 엘라.”
여린 목덜미 사이로 입술을 묻으며 라울이 중얼거렸다. 엘라는 손을 들어 커다란 남자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부디 그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기를 빌면서.
한참 만에야 울적한 마음을 달랜 라울은 살짝 뒤로 몸을 떼어 내며 안심시키듯 그녀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 미소에 응답하듯 엘라의 아름다운 얼굴도 환한 미소로 밝아졌다.
“엘라…….”
신은 그의 마음의 지주를 데려간 대신 영혼의 반려를 인도해 주셨다. 자신을 황제로 세운 마하칸을 위해서도, 이제야 찾게 된 자신의 여인을 위해서도 그는 무 제국 역대 최고의 황제가 될 것이다. 엘라의 손을 마주 잡고 황궁으로 향하는 라울의 가슴은 새로운 다짐으로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