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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폭풍 1권 2화
아직은 이른 봄이란 것을 상기시키듯 밤바람이 제법 찼다. 바람이 불어와 달을 가린 구름을 쓸어 갔다. 검은 밤하늘 위로 붉은 달 루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름을 맞은 루아는 툭 건드리면 붉은 눈물을 뚝뚝 쏟아 내기라도 할 듯 잔뜩 부풀어 있었다.
언덕 위에 우뚝 선 마하칸은 머리 위에 자리한 붉디붉은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밝고 요사스러운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서늘하고 단단하기만 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달빛 아래 드러난 도시를 둘러보았다. 그의 발아래 펼쳐진 지안은 ‘빛이 떠나지 않는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게 환한 불빛들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었다. 점점이 밝혀진 불빛들 사이로 넘실대던 각가지 소리들과 냄새들이 날아와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마하칸은 그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에 담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쏘아 올린 폭죽들이 긴 꼬리를 달고 밤하늘을 갈랐다. 파파팍,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터지자 환하게 빛나던 달도 잠시 빛을 잃었다. 와아아, 뒤이어 사람들의 거대한 함성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마하칸은 몸을 돌렸다. 새로운 황제와 새 시대를 축하하는 축제로 요란한 지안을 뒤로한 채 그는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그의 등 뒤로 다시 한 번 밤하늘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지난 삼백여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여행길에 올랐었고, 대륙 곳곳을 다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과거의 그 어느 여행과도 달랐다. 그도 최종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번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고, 그의 발길이 멈추는 곳이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둘 곳이란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여행은 계절이 돌고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곳을 지나쳐 왔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계절이 두 번 반복되고 남쪽에 위치한 예 사막의 한곳에 이르러 그의 여행은 끝이 났다.
마하칸은 낮의 열기가 채 다 식지 않은 사막의 모래 위에 몸을 뉘었다. 어스름이 깔리는 하늘을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시간이 흐르면 지나는 바람이 자신의 차가워진 육신을 모래로 덮어 주리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세월이 흘러 그의 강한 생명력이 조금씩 소진되어 갈 것을 믿고 자신을 가두고 깨지 않을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제국력 2037년, 라울이 황제로 즉위한 지 이 년째 되는 해 여덟 번째 달의 어느 날이었다.
*
라울 황제 즉위 십이 년 후.
제국력 2047년 첫 번째 달.
온종일 극성을 부리던 태양이 마침내 서쪽 하늘 너머로 몸을 누이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위로 서녘 하늘이 붉디붉게 타올랐다. 그 노을빛만큼이나 붉은 피가 바샤국의 수도, 셀람 앞의 사막을 적시고 있었다. 막 전투가 끝난 전장은 이름 모를 시신들과 이들이 흘린 피로 넘쳐 났다. 그 위에 드리운 대기는 비릿한 피 냄새와 살이 타는 연기로 가득차서 살아남은 자들의 호흡마저도 힘들게 했다.
“으으…… 오늘로 바샤국도 끝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으아악…….”
시간이 지나면서 전장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 갔지만, 남은 자들의 신음 소리와 통곡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의 애통한 울음은 채 다 식지 않은 전우들의 시선 위를 지나 사막 위로 끝없이 퍼져 나갔다. 울음과 탄식을 삼키며 이들은 힘겹게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죽은 전우들을 둘러메었다. 그들은 아직도 이 땅 위에서 숨 쉬고 있었기에,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기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고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성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아비를,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된 전우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들이 남루한 모습으로 황량한 전장의 폐허 위를 헤매는 사이, 그렇게 길고 긴 하루도 끝이 나고 핏빛 석양마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석양과 함께 바샤국도 역사의 저 끝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 무 대륙을 휩쓸던 피바람이 한 달 전 이곳 바샤국에도 불어닥쳤다. 그때부터 시작된 피의 향연은 오늘 바샤국의 수도인 이곳 셀람의 함락으로 끝이 났다. 바샤국은 이제 무 제국 라울 황제의 광기의 칼날 아래 쓰러져 자취를 감춘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로 대륙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십이 년 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인 무 제국에 새로운 황제로 즉위할 때만 해도 그가 이토록 처참한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무 제국의 황제가 된 라울은 즉위한 지 채 두 해가 지나지 않아 그때까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던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향해 느닷없이 칼을 빼 들었다. 특별한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라울 황제는 자신이 일으킨 살상의 현장인 전장들을 누비며 직접 칼을 휘둘렀다. 그는 피비린내를 맡으면 희열을 느끼는 듯 자신이 죽인 자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광소를 터뜨렸다. 전장에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는 듣는 이들을 얼어붙게 했다. 그렇게 지난 십 년간 무 대륙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 달 전, 라울 황제는 사막이 갖고 싶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바샤국에 선전포고를 해 왔다. 바샤국은 무 대륙 남단에 있는 예 사막에 위치한 소국이었다. 영토라고 해 보았자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모래사막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커다란 오아시스 몇 곳에 도시를 형성하고, 그곳을 지나는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교역을 했다. 딱히 다른 나라에서 탐을 낼 만한 자원이나 기름진 영토가 없는 관계로 바샤국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바샤국에게 라울 황제의 선전포고는 예고 없이 닥친 재앙이었다. 바샤국 왕실과 국민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 몰라 했다. 선전포고 후 삼 일째가 되던 날, 바샤국의 국왕과 신료들이 모여 한창 항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라울 황제가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수도 셀람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무 제국의 수도인 지안이 셀람에서 열두 날 동안 말을 타고 달려야 하는 거리인 것을 감안하고, 선전포고 후 이레를 기다리는 것이 대륙의 오랜 관례인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사태였다.
그리고 무 대륙 최악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항복을 바라는 바샤국 국왕에게 라울 황제는 나와 싸우기를 요구했다. 나와 싸우지 않으면 성안으로 밀고 들어갈 것이고, 그리되면 셀람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선포했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자신이 이끄는 정예부대의 공격을 한 달 동안 버티면 살아남은 자들 모두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고도 공언했다.
그렇게 처참한 전투 아닌 전투가 시작되었다. 말이 전투이지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이요, 도륙이었다. 전투를 총지휘한 바샤국 대장군 라할라 무쿤에게 이 전쟁의 최종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든 한 달간 전멸을 면하고 버텨서 성안에 남은 이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한 달을 맞은 오늘, 대장군 라할라 무쿤은 마지막 남은 부대를 이끌고 손수 전장으로 나섰다. 그는 노련했고 용맹했지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라울 황제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기 조금 전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무쿤은 웃었다. 그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나라는 지키지 못했지만 성안에 남은 이들의 목숨은 지켰다. 그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퇴각 나팔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말발굽 아래 사막의 모래가 하늘을 뿌옇게 가리는 것을 보았다.
“……진……. 내 딸…….”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처절한 전투는 끝이 났지만, 셀람 안에서 이 사실을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끼익, 끼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병사들이 마차를 끌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병사들은 처참한 시신들이 자신들의 키보다도 더 높게 쌓인 마차를 끌어다 광장에 대어 놓았다.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시신을 마주한 사람들은 주저앉아 통곡했다. 애끓는 울음과 울분에 찬 신음이 곳곳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아수라장에서 채 다 자라지 않은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광장 한쪽에 서 있던 진에게 이 모든 광경들은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풍경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휘적휘적 성안으로 들어서는 패잔병 무리를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덧없는 희망조차 없었다. 부친인 대장군 라할라 무쿤의 마지막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어미도 없이 자라는 딸이 안쓰러워 항상 노심초사하던 아비는 미친 자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질 딸을 걱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못난 딸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그녀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뒤, 라울 황제가 아비의 뜨거운 피를 흩뿌리며 터뜨린 웃음소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
진의 짙은 푸른 눈동자가 차오른 물기로 가늘게 흔들렸다.
“진 아가씨!”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는 한 병사를 보고 진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부친의 부관 중 한 명인 칸토 아저씨였다. 달려오는 그의 모습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군데군데 찢기고 피에 얼룩진 갑옷은 본래의 색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지저분한 천으로 동여매어진 그의 오른쪽 어깨 아래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 쾌활하고 활기 넘치던 칸토 아저씨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의 두 눈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진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윽……으으윽!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만 이렇게 살아와서…… 대장군께서는…… 윽!”
“아저씨가 왜 미안해요. 아저씨 잘못이 아닌데.”
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덩치 큰 사내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끅끅거리며 통곡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야 해요. 찾아서 마지막 유언을 들어 드려야 하는데.”
“진아, 미안하지만 내 시신 한 부분이라도 찾아서 꼭 네 어미 곁에 묻어다오. 그렇게 해 주겠니?”
전장으로 떠나기 전 그녀에게 남긴 아비의 마지막 당부이자 유언이었다.
“……시신 한 조각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흐리멍덩하게 뒤엉킨 머릿속에 그 한 가지 생각만이 또렷했다.
진은 고개를 돌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시신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죽은 자들은 대답할 수 없는데 산 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높고 낮은 울음과 외침이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진은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칸토 아저씨를 뒤로하고 아비의 시신을 찾아 광장 바닥에 나란히 눕혀진 시신의 행렬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린 사막의 도시 위로 바람이 불었다. 광장 곳곳에는 횃불이 켜지고, 비탄에 찬 울음소리를 따라 횃불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곁을 스치는 바람이 속삭였다.
―진, 이쪽이 아니야. 반대편으로 가.
―진, 여기가 아니야. 저쪽이야.
그 소리들을 듣기나 한 것인지, 진은 방향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들었다 해도 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은 이 땅을 떠나지 못한 생명의 잔영들이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혼자만 들을 수 있기에 그들의 말을 들어 주어야 했다. 비록 그녀의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무서워. 엄마! 살려 줘, 엄마!
―여보! 명아! 이제는 다시 못 보겠구나.
―난 살고 싶어. 아직 죽기 싫어. 제발 살려 줘!
갑작스럽고 억울한 죽음에 막 육신을 떠난 영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영혼의 그림자마저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직은 여리게만 보이는 작은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창백한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작은 턱 끝에 매달려 방울져 떨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더할 때마다 눈물도 쌓여 갔다.
‘너무하십니다! 어찌 피에 목마른 미치광이에게 저토록 강한 힘을 허락하셨습니까? 저자만큼 힘이 없는 것이 이들의 잘못입니까? 왜 이들이 덧없이 목숨을 잃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저자 때문에 통곡해야 합니까? 정녕 저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진의 소리 없는 외침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점점 커져만 가는 산 자들의 애끓는 울음과 죽은 자들의 공포에 가득 찬 외침뿐이었다. 사람들의 슬픔과 공포, 통한이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처럼 그녀의 몸과 정신을 찢어발겼다. 진의 몸이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아파서……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아직은 이른 봄이란 것을 상기시키듯 밤바람이 제법 찼다. 바람이 불어와 달을 가린 구름을 쓸어 갔다. 검은 밤하늘 위로 붉은 달 루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름을 맞은 루아는 툭 건드리면 붉은 눈물을 뚝뚝 쏟아 내기라도 할 듯 잔뜩 부풀어 있었다.
언덕 위에 우뚝 선 마하칸은 머리 위에 자리한 붉디붉은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밝고 요사스러운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서늘하고 단단하기만 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달빛 아래 드러난 도시를 둘러보았다. 그의 발아래 펼쳐진 지안은 ‘빛이 떠나지 않는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게 환한 불빛들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었다. 점점이 밝혀진 불빛들 사이로 넘실대던 각가지 소리들과 냄새들이 날아와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마하칸은 그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에 담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쏘아 올린 폭죽들이 긴 꼬리를 달고 밤하늘을 갈랐다. 파파팍,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터지자 환하게 빛나던 달도 잠시 빛을 잃었다. 와아아, 뒤이어 사람들의 거대한 함성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마하칸은 몸을 돌렸다. 새로운 황제와 새 시대를 축하하는 축제로 요란한 지안을 뒤로한 채 그는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그의 등 뒤로 다시 한 번 밤하늘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지난 삼백여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여행길에 올랐었고, 대륙 곳곳을 다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과거의 그 어느 여행과도 달랐다. 그도 최종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번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고, 그의 발길이 멈추는 곳이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둘 곳이란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여행은 계절이 돌고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곳을 지나쳐 왔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계절이 두 번 반복되고 남쪽에 위치한 예 사막의 한곳에 이르러 그의 여행은 끝이 났다.
마하칸은 낮의 열기가 채 다 식지 않은 사막의 모래 위에 몸을 뉘었다. 어스름이 깔리는 하늘을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시간이 흐르면 지나는 바람이 자신의 차가워진 육신을 모래로 덮어 주리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세월이 흘러 그의 강한 생명력이 조금씩 소진되어 갈 것을 믿고 자신을 가두고 깨지 않을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제국력 2037년, 라울이 황제로 즉위한 지 이 년째 되는 해 여덟 번째 달의 어느 날이었다.
*
라울 황제 즉위 십이 년 후.
제국력 2047년 첫 번째 달.
온종일 극성을 부리던 태양이 마침내 서쪽 하늘 너머로 몸을 누이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위로 서녘 하늘이 붉디붉게 타올랐다. 그 노을빛만큼이나 붉은 피가 바샤국의 수도, 셀람 앞의 사막을 적시고 있었다. 막 전투가 끝난 전장은 이름 모를 시신들과 이들이 흘린 피로 넘쳐 났다. 그 위에 드리운 대기는 비릿한 피 냄새와 살이 타는 연기로 가득차서 살아남은 자들의 호흡마저도 힘들게 했다.
“으으…… 오늘로 바샤국도 끝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으아악…….”
시간이 지나면서 전장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 갔지만, 남은 자들의 신음 소리와 통곡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의 애통한 울음은 채 다 식지 않은 전우들의 시선 위를 지나 사막 위로 끝없이 퍼져 나갔다. 울음과 탄식을 삼키며 이들은 힘겹게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죽은 전우들을 둘러메었다. 그들은 아직도 이 땅 위에서 숨 쉬고 있었기에,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기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고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성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아비를,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된 전우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들이 남루한 모습으로 황량한 전장의 폐허 위를 헤매는 사이, 그렇게 길고 긴 하루도 끝이 나고 핏빛 석양마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석양과 함께 바샤국도 역사의 저 끝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 무 대륙을 휩쓸던 피바람이 한 달 전 이곳 바샤국에도 불어닥쳤다. 그때부터 시작된 피의 향연은 오늘 바샤국의 수도인 이곳 셀람의 함락으로 끝이 났다. 바샤국은 이제 무 제국 라울 황제의 광기의 칼날 아래 쓰러져 자취를 감춘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로 대륙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십이 년 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인 무 제국에 새로운 황제로 즉위할 때만 해도 그가 이토록 처참한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무 제국의 황제가 된 라울은 즉위한 지 채 두 해가 지나지 않아 그때까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던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향해 느닷없이 칼을 빼 들었다. 특별한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라울 황제는 자신이 일으킨 살상의 현장인 전장들을 누비며 직접 칼을 휘둘렀다. 그는 피비린내를 맡으면 희열을 느끼는 듯 자신이 죽인 자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광소를 터뜨렸다. 전장에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는 듣는 이들을 얼어붙게 했다. 그렇게 지난 십 년간 무 대륙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 달 전, 라울 황제는 사막이 갖고 싶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바샤국에 선전포고를 해 왔다. 바샤국은 무 대륙 남단에 있는 예 사막에 위치한 소국이었다. 영토라고 해 보았자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모래사막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커다란 오아시스 몇 곳에 도시를 형성하고, 그곳을 지나는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교역을 했다. 딱히 다른 나라에서 탐을 낼 만한 자원이나 기름진 영토가 없는 관계로 바샤국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바샤국에게 라울 황제의 선전포고는 예고 없이 닥친 재앙이었다. 바샤국 왕실과 국민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 몰라 했다. 선전포고 후 삼 일째가 되던 날, 바샤국의 국왕과 신료들이 모여 한창 항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라울 황제가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수도 셀람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무 제국의 수도인 지안이 셀람에서 열두 날 동안 말을 타고 달려야 하는 거리인 것을 감안하고, 선전포고 후 이레를 기다리는 것이 대륙의 오랜 관례인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사태였다.
그리고 무 대륙 최악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항복을 바라는 바샤국 국왕에게 라울 황제는 나와 싸우기를 요구했다. 나와 싸우지 않으면 성안으로 밀고 들어갈 것이고, 그리되면 셀람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선포했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자신이 이끄는 정예부대의 공격을 한 달 동안 버티면 살아남은 자들 모두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고도 공언했다.
그렇게 처참한 전투 아닌 전투가 시작되었다. 말이 전투이지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이요, 도륙이었다. 전투를 총지휘한 바샤국 대장군 라할라 무쿤에게 이 전쟁의 최종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든 한 달간 전멸을 면하고 버텨서 성안에 남은 이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한 달을 맞은 오늘, 대장군 라할라 무쿤은 마지막 남은 부대를 이끌고 손수 전장으로 나섰다. 그는 노련했고 용맹했지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라울 황제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기 조금 전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무쿤은 웃었다. 그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나라는 지키지 못했지만 성안에 남은 이들의 목숨은 지켰다. 그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퇴각 나팔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말발굽 아래 사막의 모래가 하늘을 뿌옇게 가리는 것을 보았다.
“……진……. 내 딸…….”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처절한 전투는 끝이 났지만, 셀람 안에서 이 사실을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끼익, 끼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병사들이 마차를 끌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병사들은 처참한 시신들이 자신들의 키보다도 더 높게 쌓인 마차를 끌어다 광장에 대어 놓았다.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시신을 마주한 사람들은 주저앉아 통곡했다. 애끓는 울음과 울분에 찬 신음이 곳곳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아수라장에서 채 다 자라지 않은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광장 한쪽에 서 있던 진에게 이 모든 광경들은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풍경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휘적휘적 성안으로 들어서는 패잔병 무리를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덧없는 희망조차 없었다. 부친인 대장군 라할라 무쿤의 마지막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어미도 없이 자라는 딸이 안쓰러워 항상 노심초사하던 아비는 미친 자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질 딸을 걱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못난 딸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그녀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뒤, 라울 황제가 아비의 뜨거운 피를 흩뿌리며 터뜨린 웃음소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
진의 짙은 푸른 눈동자가 차오른 물기로 가늘게 흔들렸다.
“진 아가씨!”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는 한 병사를 보고 진은 흐트러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부친의 부관 중 한 명인 칸토 아저씨였다. 달려오는 그의 모습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군데군데 찢기고 피에 얼룩진 갑옷은 본래의 색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지저분한 천으로 동여매어진 그의 오른쪽 어깨 아래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 쾌활하고 활기 넘치던 칸토 아저씨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의 두 눈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진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윽……으으윽!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만 이렇게 살아와서…… 대장군께서는…… 윽!”
“아저씨가 왜 미안해요. 아저씨 잘못이 아닌데.”
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덩치 큰 사내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끅끅거리며 통곡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야 해요. 찾아서 마지막 유언을 들어 드려야 하는데.”
“진아, 미안하지만 내 시신 한 부분이라도 찾아서 꼭 네 어미 곁에 묻어다오. 그렇게 해 주겠니?”
전장으로 떠나기 전 그녀에게 남긴 아비의 마지막 당부이자 유언이었다.
“……시신 한 조각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흐리멍덩하게 뒤엉킨 머릿속에 그 한 가지 생각만이 또렷했다.
진은 고개를 돌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시신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죽은 자들은 대답할 수 없는데 산 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높고 낮은 울음과 외침이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진은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칸토 아저씨를 뒤로하고 아비의 시신을 찾아 광장 바닥에 나란히 눕혀진 시신의 행렬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린 사막의 도시 위로 바람이 불었다. 광장 곳곳에는 횃불이 켜지고, 비탄에 찬 울음소리를 따라 횃불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곁을 스치는 바람이 속삭였다.
―진, 이쪽이 아니야. 반대편으로 가.
―진, 여기가 아니야. 저쪽이야.
그 소리들을 듣기나 한 것인지, 진은 방향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들었다 해도 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은 이 땅을 떠나지 못한 생명의 잔영들이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혼자만 들을 수 있기에 그들의 말을 들어 주어야 했다. 비록 그녀의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무서워. 엄마! 살려 줘, 엄마!
―여보! 명아! 이제는 다시 못 보겠구나.
―난 살고 싶어. 아직 죽기 싫어. 제발 살려 줘!
갑작스럽고 억울한 죽음에 막 육신을 떠난 영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영혼의 그림자마저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직은 여리게만 보이는 작은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창백한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작은 턱 끝에 매달려 방울져 떨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더할 때마다 눈물도 쌓여 갔다.
‘너무하십니다! 어찌 피에 목마른 미치광이에게 저토록 강한 힘을 허락하셨습니까? 저자만큼 힘이 없는 것이 이들의 잘못입니까? 왜 이들이 덧없이 목숨을 잃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저자 때문에 통곡해야 합니까? 정녕 저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진의 소리 없는 외침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점점 커져만 가는 산 자들의 애끓는 울음과 죽은 자들의 공포에 가득 찬 외침뿐이었다. 사람들의 슬픔과 공포, 통한이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처럼 그녀의 몸과 정신을 찢어발겼다. 진의 몸이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아파서……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