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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폭풍 1권 3화


―살려 줘. 난 죽기에는 너무 어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아악! 내 아들, 내 아들……. 악!”
시신들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그녀 또한 멈추지 않고 그 사이를 걸어갔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고통스러운 발걸음은 광장을 가로질러 커다란 나무 앞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진,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울면 모두가 슬퍼해요.
밤바람에 조용히 몸을 뒤척이던 수린목이 낭창낭창한 가지를 흔들며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진심 어린 위로도 그녀의 의식을 건들지는 못했다.
‘왜…… 내게 이런 능력을 주셨습니까? 이따위 능력이 무슨 소용이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데…….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방관만 해야 하는 겁니까!’
숨이 막혀 오는 고통을 누르고 감당하기 힘든 억울함과 울분이 가슴속에 들끓었다. 그동안 쌓였던 회한과 분노가 그 부피를 더하며 터져 나오려 했다. 요동치는 심장에 반응하듯 그녀의 온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진은 눈을 감았다. 주변을 가득 채운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 절절한 아픔에 그녀를 이룬 모든 것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숨이 막혀 오고 억누르기 힘든 울분에 가슴이 들끓었다. 쌓였던 분노가 밖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그녀의 온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의식이 흐려졌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진은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은 땅 위를 가득 메운 인간들의 비극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하늘은 고요하기만 했다.
“흑…….”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온 희미한 울음을 진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울 수 없었다. 눈물로, 울음으로 흘려보내기에는 지금의 슬픔과 통한이 너무 컸다.
‘더는 싫습니다!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듣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모두 하얗게 말라 버리고 횃불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핏기를 잃은 채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이 구차한 목숨을 내어 놓고라도 반드시!’
앙다문 작은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마지막 눈물방울이 툭,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절망과 슬픔에 잠긴 셀람에도 새날은 찾아왔다.
회색빛 새벽이 검은 밤을 조금씩 밀어내는 시각, 동쪽 하늘 한곳이 갈라지고 작은 빛의 틈바구니가 생겨났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이 부시게 희고 밝은 빛 한 줄기가 그 사이로 뿜어져 나와 대지 위로 쏟아졌다.
땅에 굳게 발을 디디고 선 진은 고개를 들어 쏟아져 내리는 빛을 온몸으로 받았다. 상서로운 빛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감쌌다. 빛 속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통통한 뺨과 둥근 턱 선으로 인해 앳되어 보였다. 하지만 깊게 가라앉은 눈빛과 단단히 맞물린 입가는 어린 소녀답지 않은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슬금슬금 주변을 맴돌던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새들의 재잘거림도 멈추고, 완전한 고요가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메웠다.
진은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짓에 응답하듯 위에서부터 하얀 빛의 장막이 서서히 내려왔다. 차분하게 갈무리된 그녀의 눈동자는 눈앞에 펼쳐진 빛의 장막 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펼쳐진 곳을 모두 보고 손짓을 하면 곧 또 다른 장막이 내려와서 이전 것 위에 겹쳐지듯 펼쳐졌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그녀는 꼼짝도 않은 채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했다. 어느 순간 쉼 없이 오가던 그녀의 시선이 장막 위의 한 지점에 이르러 멈췄다.
‘……찾았다!’
짙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긴장과 흥분으로 쿵쾅쿵쾅 거칠게 날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아버지…….’
한 조각 핏덩이로 돌아온 아비를 떠올렸다. 마음을 다잡고 눈을 뜬 진은 앞에 놓인 글에 다시 시선을 집중했다.

「위대한 무우족의 후손들을 위하여 이 글을 남기노라. 새로운 생명이 혈족 가운데 나고 자라면 이 글을 통해 알고 지켜야 할 바를 가르치라.
…….
태초에 이 땅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무우족은 육체적, 정신적, 지적, 모든 면에서 보통 인간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무우족의 수명은 보통 삼백 세를 넘으며, 길게는 오백 년을 넘게 사는 이들도 있다. 무우족의 자손은 귀했고, 능력은 남자들에게만 전해졌다.
무우족의 시작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몇 가지 가설들만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중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설은 죄를 짓고 지상으로 쫓겨난 신의 아들이 무우족의 시조라는 것이다. 무우족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뛰어난 능력들과 긴 수명을 지닌 것은, 이들의 핏속에 녹아 있는 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가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 증거로 신의 자손인 무우족은 인간의 혈통에 구속될 수 없어서 이름을 하나밖에 쓰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무 제국의 사람들이 이 전통을 따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약 이천 년 전, 무우족의 선조들은 무 제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각 세대 가운데 가장 명철하고 강인한 자가 혈족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어 다스렸다. 무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작게는 제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크게는 대륙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 왔다. 혈족의 다른 형제들은 자신들이 세운 황제를 도와 명예롭고도 신성한 무우족의 의무를 다해 왔다.
…….
위대한 무우족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뛰어난 능력과 함께 무서운 저주도 짊어져야 함을 뜻한다. 이들의 뛰어난 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신은 무우족의 모든 자손들에게 하나의 굴레를 씌웠다.
무우족은 삼십 세 즈음해서 육체적 성장을 끝내고, 완전한 성체와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통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얻은 대가인 것처럼 이들은 인간적인 감정들을 하나둘씩 잃어 간다. 그리하여 보통 인간 수명의 한계인 일백 세를 넘어서면서부터 이들은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고, 타인의 감정도 와 닿지 않는, 숨 쉬되 살아 있지 않는 존재들로 변해 간다. 이들의 심장은 열정도, 슬픔도, 절망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점점 굳어져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게 된다.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잃어버린 무우족의 영혼은 공허해지고, 그 영혼의 빈자리는 어둠의 기운이 조금씩 잠식해 간다. 결국 어둠에 영혼이 완전히 먹혀 버린 무우족은 모든 이성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 죽음과 파괴를 몰고 오는 악한 존재로 변한다.
이토록 두렵고 사악한 ‘무우족의 저주’를 끊어 버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인데, 어둠의 기운이 영혼을 완전히 삼켜 버리기 전에 ‘운명의 상대’를 찾아 죽어 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이다. 신이 태초부터 예정하신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만이 굳어 가는 심장을 다시 살리고, 영혼에 깃든 어둠의 기운을 온전히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 영혼의 주인은 하나. 온전한 ‘합일의 의식’을 통해 ‘운명의 상대’를 진정한 자신의 영혼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어둠의 기운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
‘합일의 의식’은 무우족의 신성한 의식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들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무우족의 자손들은 그 자세한 내용을 어디에도 절대 글로 남기지 말라. 보지 말아야 할 자가 보게 될까 두렵도다.
자비로운 신이 그대들을 모두 밝은 빛으로 이끌기를 간절히 기원하노라.
무우족의 모든 후손들은 기억하라.
혹여 그대가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해 ‘운명의 상대’를 찾지 못했다면 이 땅의 삶에 미련을 두지 말라. 어둠이 그대의 영혼을 모두 삼켜 버리기 전에 명예로운 선택을 하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았을 때 영원한 안식에 들라. 스스로 육신을 잠재우고 영혼을 깊이 가두라. 은혜로운 신이 시간과 함께 그대의 남은 생명을 거두어 갈 것이다.
…….
무우족의 모든 후손들은 명심하라.
만약 그대의 형제 중 누군가가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어둠의 기운에 영혼을 빼앗기면 그는 더 이상 혈족의 형제가 아니다. 이런 자는 모든 혈족의 적으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

새벽이 마지막 미련을 떨치며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졌던 빛의 장막도 날이 밝아 오자 조금씩 옅어져 갔다. 진은 급히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무 제국의 역대 황제들의 치세를 기록한 내용들이었다.
“하아…….”
길게 숨을 토해 내며 진은 오랫동안 부릅뜨고 있던 눈을 깜빡였다.
털썩, 순식간에 긴장이 빠져나가면서 몸이 바닥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이슬이 맺힌 풀 위에 뺨을 기댄 채 진은 얕은 호흡을 토해 냈다. 모든 기운을 써 버린 몸은 힘없이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스르륵 다시 눈을 굳게 감아 버렸다.
바샤국이 무 대륙에서 영원히 사라진 다음 날 새벽의 일이었다.
그녀, 라할라 진샤이의 처참했던 열여섯 번째 여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제2장 라할라 진샤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세상도, 사람도 변해 갔다.
일 년이 지나자, 셀람 앞을 가득 메웠던 시신들은 모두 사라지고 모래사막을 붉게 물들였던 핏자국도 모두 흔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이어 갔다. 잊은 듯 담아 두고, 지운 듯 기억하면서.
끼익.
진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한 발 내디뎠다. 아직은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이었다. 새벽의 적막함이 사방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어스름 가운데 눈부신 햇살이 동산 위로 삐죽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동산이었지만 예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탓에 작은 둔덕과 그 위를 덮은 나지막한 수목들은 신비한 기운을 풍겼다. 서서히 번져 가는 새벽 여명 아래 이슬을 머금은 초록빛 잎사귀들이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진은 서둘러 저택의 동쪽 문에 연결된 좁은 오솔길을 따라 동산을 올라갔다. 수목들이 들어찬 동산 위는 아직도 날이 어두워 바로 다음 걸음을 옮겨 놓을 곳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익숙한 길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동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공터에 이르러 멈춰 선 진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스름한 어둠에 잠긴 숲은 평화로웠다. 희미한 새벽안개가 지면 위를 나직하게 뒤덮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안개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슬금슬금 몸을 뒤척이고 한쪽에 자리한 연못의 수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주위를 빙 둘러싼 나무들은 그녀의 기척에 응답하듯 낮은 가지들을 가만가만 흔들었고, 새벽이슬을 머금고 슬슬 목을 돋우고 있던 새들은 그녀의 등장에 소리를 그치고 엄숙한 침묵을 지켰다.
셀람이 ‘사막의 정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과 예 사막 최대의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연못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을 처음 발견한 이가 라할라가의 선조였다. 까마득히 먼 옛날 라할라가의 선조는 아무것도 없는 이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물이 흘러나오는 작은 동산을 찾아 터를 잡고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이 작은 연못을 채우는 수원이 의외로 깊고 풍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도시는 점차 커지고, 몇 백 년 전에는 예 사막 곳곳을 옮겨 다니던 바샤국의 왕실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돌이켜 엄밀히 따지면 라할라가는 옛 바샤국에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사실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고, 라할라가는 옛 바샤국의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서쪽 하늘가 높다란 곳에 푸른 달 루네가 선명한 빛을 발하며 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쪽에 걸린 붉은 달 루아는 어느새 흐릿한 흔적만 남은 모습이었다.
어제로 사흘간 계속되었던 ‘달의 축제’가 끝이 났다. 사흘 동안 나란히 떠올라 함께 대륙의 밤을 밝혔던 두 개의 달은 이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붉은 달 루아는 점점 사그라지며 사라질 것이고, 앞으로 몇 달간 푸른 달 루네가 점점 빛을 더해 갈 것이다. 그리고 땅 위에는 뜨거운 절기가 끝나고, 차가운 절기가 시작된다. 일 년 내내 무더운 이곳 예 사막에서도 그 절기의 변화는 느낄 수 있었다. 슬슬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밤이면 조금 더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