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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폭풍 1권 4화
밤의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 모든 것이 아직은 모호한 이때가 하늘과 땅의 경계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기운을 담은 신성한 것들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진은 눈을 감았다. 가슴을 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기다렸다.
“타마의 골짜기를 지나 무 제국을 지나온 북쪽의 바람아, 내가 기다리는 소식을 전해 주렴.”
그녀의 말을 신호로 주변을 둘러싼 공기들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얕고 미세한 바람의 줄기들이 그녀 곁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둘러싼 공기들은 모이고, 쌓이고, 한데 뒤섞이고 뭉치면서 점점 그 부피와 존재감을 더해 갔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그녀 주위를 꿈틀거리며 맴돌았다. 잠시 후, 나직한 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지난겨울에 부탁하셨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드디어 일 년을 기다려 온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무우족의 수호자, 마하칸, 그 사람의 소식을 가져왔니?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애써 가라앉힌 호흡을 가늘게 토해 내며 천천히 물었다.
―아가씨가 찾는 이는…… 이제 이 땅에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미 수년 전에 영원한 안식에 들었답니다.
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대로 두근거리던 가슴이 예기치 못한 소식에 쿵 내려앉았다.
영원한 안식. 불현듯 지난해 펼쳐 본 ‘혈족의 역사서’에 쓰여 있던 글귀들이 떠올랐다. ‘운명의 상대’라 불리는 반려를 찾지 못한 무우족은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육체와 영혼을 잠재운다고 했던가.
“……정말이야?”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물었다. 바람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미안한 듯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주변을 부드럽게 맴돌았다.
기대하고 기다렸던 만큼 충격은 컸다.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불안하게 들끓는 그녀의 내면에 반응하듯 주위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츰 거세지는 바람의 몸짓에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가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새들이 불안을 느끼고 푸드득 날아올랐다.
진은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약한 살이 찢어지는 예리한 아픔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십 년간 라울 황제의 광기 어린 칼날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대적할 자 없는 그의 파괴적 능력과 광기에 사람들은 절망했다. 그리고 일 년 전, 사막으로 밀어닥친 라울 황제는 진의 조국인 바샤국이 멸망시키고 그녀의 아비를 죽였다.
그날부터 그자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얻어 낸 답이 라울 황제와 같은 혈족인 마하칸이란 자였다. 그 세대에 살아 있는 무우족 가운데 가장 강한 이에게 내려진다는 명예인 ‘무우족의 수호자’. 마하칸은 지금의 라울 황제보다 뛰어나다 일컬어졌었고 그보다 먼저 황제에 추대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라울 황제를 자신 대신 추대하고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찾아야 했다. 그를 만나서 어떻게든 라울 황제와 맞서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런데…….
이럴 수는 없었다. 지난 일 년간 부여잡고 있던 단 하나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허망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말도 안 돼!”
절망과 억울함에 참고 참았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녀의 외침에 주위의 모든 것이 숨을 죽였다. 바람은 완전히 움직임을 지우고, 지면 위를 덮고 있던 새벽안개는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감췄다. 고요한 숲에 울리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진은 꼭 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꾸물꾸물 비어져 나오는 비명을 안으로 삼키고 눈물을 참았다. 여기서 소리치고 울어 버리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것 같아서 소리 내며 울 수도 없었다. 결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시신의 한 조각조차 찾기 힘들어 절망했던 그때의 비통함이 다시 가슴을 후려쳤다.
탁탁. 탁탁.
꽉 막힌 가슴을 두 주먹으로 치며 진은 울음을 삼켰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차마 울음이 되지 못한 꺽꺽거리는 소리가 날이 밝아 오는 새벽의 숲에 퍼져 갔다.
“아직 어린것이 계절이 바뀌자마자 앓아눕다니. 한심하기는, 쯧.”
혀를 차며 못마땅해하는 소리와는 달리 뜨거운 이마에 와 닿는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숙모.”
진은 열에 들뜬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웃기는. 약 먹었으면 그만 자. 한숨 푹 자고 나면 한결 나을 거야.”
“숙모, 그렇게 인상 쓰면 금방 늙어요.”
“그만 떠들고 어서 자기나 해.”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에 진은 빙긋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세심하게 이불을 여미는 손길이 한동안 이어지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마음을 찢어 놓은 절망은 몸마저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난 삼 일 동안 그녀는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그래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서성거리면서 진은 끊임없이 방법을 찾아 헤맸다.
멀어지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익숙한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또렷해졌다.
‘잠들었다면 깨우면 돼. 그래, 내가…… 깨우겠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며칠째 앓고 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침상을 벗어나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진은 이마를 흥건하게 적신 식은땀을 닦았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정원으로 향했다.
“하아…….”
거칠게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자신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가늘고 약해서 귀에 거슬렸다. 올려다본 밤하늘에서는 며칠 새 몰라 보게 기운을 얻은 푸른 달 루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혼자만 편히 쉬도록 둘 것 같아? 처음부터 당신들 무우족 같은 괴물들만 없었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어!’
푸른 달빛이 동그란 얼굴을 서늘하게 씻어 내렸다.
무우족이 영원한 잠에 들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지막을 일컬어 ‘잠’에 들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희미한 가능성 하나에 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반드시!’
열에 들뜬 얼굴에서 두 눈동자만 형형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
바샤국 멸망 오 년 후. 제국력 2052년.
누군가 그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만들어 둔 문을 끈질기게 두드리고 있었다.
―왜…….
의식이 돌아온다는 자각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깊이 침잠된 채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영혼을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두드리고 당기고, 두드리고 당기고 또 두드리고. 점점 무시하기가 힘들어졌다. 흐려지던 의식이 한 가닥, 두 가닥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한 번 돌아오기 시작한 의식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츰차츰 또렷해져 갔다.
―누가…… 왜…….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그의 흐릿한 의식 속을 맴돌았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그의 영혼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진은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닫고 정신을 한곳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의식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새까만 어둠을 찾아 들어갔다.
마하칸, 그의 내면인 어둠은 농밀하고 짙었다. 어찌나 농도가 짙은지 손으로 만지면 찐득찐득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열흘 만인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하칸의 기운을 좇아 그의 흔적을 찾는 것에만 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진은 처음 결심대로 잠든 그를 두드려 깨웠다. 굳게 닫혀 있는 그의 의식의 문을 끊임없이 흔들고 두드렸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 몇 달간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의 의식을 가두고 있는 문은 굳게 닫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은 너무도 희미했다.
사실 그조차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보다 월등히 강한 생명력을 지닌 무우족,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일컬어지는 그였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한 지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처음으로 그의 의식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진은 반신반의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성공의 여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의 세계를 지나 의식의 문을 열고 들어선 진은 더욱 짙은 어둠과 마주했다. 그는 그 어둠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다. 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짙은 어둠이 마치 거부하는 것처럼 그녀의 발목과 몸에 매달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오늘 두 발짝, 며칠 뒤 다시 세 발짝.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는 장님처럼 어둠 속을 헤매고 더듬어서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그렇게 다시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진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내면에 파고들어 그를 찾아갔다. 그녀가 점점 더 깊이 내면으로 파고들수록 그의 의식은 조금씩 뚜렷해져 갔다. 한 달 전부터는 자신의 의식 속을 서성거리는 그녀를 살피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진은 잠시 멈춰 섰다.
‘마하칸, 당신을 내 두 눈으로 마주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곧…….’
“마하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새까만 어둠 속을 찬찬히 훑어가며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가 꿈틀거리며 조금씩 흔들릴 때까지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불렀다.
의식의 바깥에서 진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몸도, 마음도 점점 한계로 치닫고 있었다. 머리는 쪼개질 듯 아파 오고 몸에서는 점점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짙은 어둠 너머에 있는 ‘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주변을 에워싸고 그녀의 접근을 막던 어둠이 조금씩 옅어졌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한 걸음씩 떼어 놓을 때마다 갈라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지난 오 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한결 희미해진 어둠 속을 헤치고 진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당신…… 거기 있죠?”
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검은 안개가 들어찬 공간 한곳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의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기대와 두려움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의 ‘시선’이 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그 느낌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 마치 혀가 벗은 살결을 핥고 지나가듯 뜨겁고 축축했다. 처음 느껴 보는 야릇한 감각에 진은 잠시 주춤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에 몸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자신의 달뜬 숨소리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붉어진 두 뺨을 잠깐 만져 보던 진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드디어 만날 수 있는 걸까.’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희미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점점 뚜렷해졌다.
드디어, 드디어…….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흥분으로 몸이 떨려 왔다. 한 무더기의 검은 안개가 갈라지듯 그녀 앞에서 흩어졌다. 진은 우뚝 멈춰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그 어둠보다도 더 검고…… 무서운…… 괴물……!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괴물은 입을 옆으로 길게 찢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옇게 드러난 이빨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모습이 비웃음인지, 위협인지 알 수 없었다. 경악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던 괴물의 검은 눈동자가 난폭한 열기로 번쩍였다. 사납고 뜨거운 열기. 그녀를 향한…… 무시무시한 욕망……. 진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때까지 꿈쩍하지 않던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악!
밤의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 모든 것이 아직은 모호한 이때가 하늘과 땅의 경계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기운을 담은 신성한 것들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진은 눈을 감았다. 가슴을 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기다렸다.
“타마의 골짜기를 지나 무 제국을 지나온 북쪽의 바람아, 내가 기다리는 소식을 전해 주렴.”
그녀의 말을 신호로 주변을 둘러싼 공기들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얕고 미세한 바람의 줄기들이 그녀 곁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둘러싼 공기들은 모이고, 쌓이고, 한데 뒤섞이고 뭉치면서 점점 그 부피와 존재감을 더해 갔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그녀 주위를 꿈틀거리며 맴돌았다. 잠시 후, 나직한 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지난겨울에 부탁하셨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드디어 일 년을 기다려 온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무우족의 수호자, 마하칸, 그 사람의 소식을 가져왔니?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애써 가라앉힌 호흡을 가늘게 토해 내며 천천히 물었다.
―아가씨가 찾는 이는…… 이제 이 땅에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미 수년 전에 영원한 안식에 들었답니다.
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대로 두근거리던 가슴이 예기치 못한 소식에 쿵 내려앉았다.
영원한 안식. 불현듯 지난해 펼쳐 본 ‘혈족의 역사서’에 쓰여 있던 글귀들이 떠올랐다. ‘운명의 상대’라 불리는 반려를 찾지 못한 무우족은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육체와 영혼을 잠재운다고 했던가.
“……정말이야?”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물었다. 바람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미안한 듯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주변을 부드럽게 맴돌았다.
기대하고 기다렸던 만큼 충격은 컸다.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불안하게 들끓는 그녀의 내면에 반응하듯 주위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츰 거세지는 바람의 몸짓에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가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새들이 불안을 느끼고 푸드득 날아올랐다.
진은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약한 살이 찢어지는 예리한 아픔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십 년간 라울 황제의 광기 어린 칼날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대적할 자 없는 그의 파괴적 능력과 광기에 사람들은 절망했다. 그리고 일 년 전, 사막으로 밀어닥친 라울 황제는 진의 조국인 바샤국이 멸망시키고 그녀의 아비를 죽였다.
그날부터 그자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얻어 낸 답이 라울 황제와 같은 혈족인 마하칸이란 자였다. 그 세대에 살아 있는 무우족 가운데 가장 강한 이에게 내려진다는 명예인 ‘무우족의 수호자’. 마하칸은 지금의 라울 황제보다 뛰어나다 일컬어졌었고 그보다 먼저 황제에 추대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라울 황제를 자신 대신 추대하고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찾아야 했다. 그를 만나서 어떻게든 라울 황제와 맞서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런데…….
이럴 수는 없었다. 지난 일 년간 부여잡고 있던 단 하나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허망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말도 안 돼!”
절망과 억울함에 참고 참았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녀의 외침에 주위의 모든 것이 숨을 죽였다. 바람은 완전히 움직임을 지우고, 지면 위를 덮고 있던 새벽안개는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감췄다. 고요한 숲에 울리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진은 꼭 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꾸물꾸물 비어져 나오는 비명을 안으로 삼키고 눈물을 참았다. 여기서 소리치고 울어 버리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것 같아서 소리 내며 울 수도 없었다. 결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시신의 한 조각조차 찾기 힘들어 절망했던 그때의 비통함이 다시 가슴을 후려쳤다.
탁탁. 탁탁.
꽉 막힌 가슴을 두 주먹으로 치며 진은 울음을 삼켰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차마 울음이 되지 못한 꺽꺽거리는 소리가 날이 밝아 오는 새벽의 숲에 퍼져 갔다.
“아직 어린것이 계절이 바뀌자마자 앓아눕다니. 한심하기는, 쯧.”
혀를 차며 못마땅해하는 소리와는 달리 뜨거운 이마에 와 닿는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숙모.”
진은 열에 들뜬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웃기는. 약 먹었으면 그만 자. 한숨 푹 자고 나면 한결 나을 거야.”
“숙모, 그렇게 인상 쓰면 금방 늙어요.”
“그만 떠들고 어서 자기나 해.”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에 진은 빙긋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세심하게 이불을 여미는 손길이 한동안 이어지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마음을 찢어 놓은 절망은 몸마저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난 삼 일 동안 그녀는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그래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서성거리면서 진은 끊임없이 방법을 찾아 헤맸다.
멀어지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익숙한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또렷해졌다.
‘잠들었다면 깨우면 돼. 그래, 내가…… 깨우겠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며칠째 앓고 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침상을 벗어나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진은 이마를 흥건하게 적신 식은땀을 닦았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정원으로 향했다.
“하아…….”
거칠게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자신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가늘고 약해서 귀에 거슬렸다. 올려다본 밤하늘에서는 며칠 새 몰라 보게 기운을 얻은 푸른 달 루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혼자만 편히 쉬도록 둘 것 같아? 처음부터 당신들 무우족 같은 괴물들만 없었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어!’
푸른 달빛이 동그란 얼굴을 서늘하게 씻어 내렸다.
무우족이 영원한 잠에 들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지막을 일컬어 ‘잠’에 들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희미한 가능성 하나에 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반드시!’
열에 들뜬 얼굴에서 두 눈동자만 형형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
바샤국 멸망 오 년 후. 제국력 2052년.
누군가 그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만들어 둔 문을 끈질기게 두드리고 있었다.
―왜…….
의식이 돌아온다는 자각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깊이 침잠된 채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영혼을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두드리고 당기고, 두드리고 당기고 또 두드리고. 점점 무시하기가 힘들어졌다. 흐려지던 의식이 한 가닥, 두 가닥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한 번 돌아오기 시작한 의식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츰차츰 또렷해져 갔다.
―누가…… 왜…….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그의 흐릿한 의식 속을 맴돌았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그의 영혼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진은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닫고 정신을 한곳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의식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새까만 어둠을 찾아 들어갔다.
마하칸, 그의 내면인 어둠은 농밀하고 짙었다. 어찌나 농도가 짙은지 손으로 만지면 찐득찐득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열흘 만인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하칸의 기운을 좇아 그의 흔적을 찾는 것에만 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진은 처음 결심대로 잠든 그를 두드려 깨웠다. 굳게 닫혀 있는 그의 의식의 문을 끊임없이 흔들고 두드렸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 몇 달간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의 의식을 가두고 있는 문은 굳게 닫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은 너무도 희미했다.
사실 그조차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보다 월등히 강한 생명력을 지닌 무우족,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일컬어지는 그였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한 지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처음으로 그의 의식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진은 반신반의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성공의 여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의 세계를 지나 의식의 문을 열고 들어선 진은 더욱 짙은 어둠과 마주했다. 그는 그 어둠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다. 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짙은 어둠이 마치 거부하는 것처럼 그녀의 발목과 몸에 매달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오늘 두 발짝, 며칠 뒤 다시 세 발짝.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는 장님처럼 어둠 속을 헤매고 더듬어서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그렇게 다시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진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내면에 파고들어 그를 찾아갔다. 그녀가 점점 더 깊이 내면으로 파고들수록 그의 의식은 조금씩 뚜렷해져 갔다. 한 달 전부터는 자신의 의식 속을 서성거리는 그녀를 살피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진은 잠시 멈춰 섰다.
‘마하칸, 당신을 내 두 눈으로 마주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곧…….’
“마하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새까만 어둠 속을 찬찬히 훑어가며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가 꿈틀거리며 조금씩 흔들릴 때까지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불렀다.
의식의 바깥에서 진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몸도, 마음도 점점 한계로 치닫고 있었다. 머리는 쪼개질 듯 아파 오고 몸에서는 점점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짙은 어둠 너머에 있는 ‘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주변을 에워싸고 그녀의 접근을 막던 어둠이 조금씩 옅어졌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한 걸음씩 떼어 놓을 때마다 갈라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지난 오 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한결 희미해진 어둠 속을 헤치고 진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당신…… 거기 있죠?”
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검은 안개가 들어찬 공간 한곳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의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기대와 두려움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의 ‘시선’이 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그 느낌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 마치 혀가 벗은 살결을 핥고 지나가듯 뜨겁고 축축했다. 처음 느껴 보는 야릇한 감각에 진은 잠시 주춤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에 몸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자신의 달뜬 숨소리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붉어진 두 뺨을 잠깐 만져 보던 진은 다시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드디어 만날 수 있는 걸까.’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희미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점점 뚜렷해졌다.
드디어, 드디어…….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흥분으로 몸이 떨려 왔다. 한 무더기의 검은 안개가 갈라지듯 그녀 앞에서 흩어졌다. 진은 우뚝 멈춰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그 어둠보다도 더 검고…… 무서운…… 괴물……!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괴물은 입을 옆으로 길게 찢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옇게 드러난 이빨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모습이 비웃음인지, 위협인지 알 수 없었다. 경악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던 괴물의 검은 눈동자가 난폭한 열기로 번쩍였다. 사납고 뜨거운 열기. 그녀를 향한…… 무시무시한 욕망……. 진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때까지 꿈쩍하지 않던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