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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월의 후 1권
적월의 후 1권
서장(序章)
모두가 떠난 적막한 공간. 구름에 가려진 어스름한 적월의 빛이 창가로 스며들었다. 달빛조차 이 순간을 반기는 것인가. 윤기를 잃고 퇴색한 붉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리고, 탁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어두운 밤하늘에서 시선을 거둬 발밑을 내려다봤다.
검붉은 선혈로 흠뻑 젖어 있는 바닥. 기괴하게 꺾인 팔. 좀 전까지도 천박하게 웃던 이들이 한낱 쓰레기처럼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에 붉은 눈동자를 감싼 눈매가 휘어졌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나온다. 구역질을 해도 마땅한 이 상황이 어찌 이리도 우스울까.
역겨운 피비린내가 후각뿐만 아니라 정신마저 잠식한 것인가. 아니면 이제야 비로소 미쳐 가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가 맞으리라. 미치지 않고서는 더는 버틸 수가 없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미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젠 진정 미치는 것으로 단 하나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큭큭, 신은 있었다는 건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따위 허무맹랑한 신 같은 거 믿지 않았는데. 마지막이 되어서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이젠 마무리만 남은 것인가.
“당신이 진정 있다면.”
진정 신이 있다면 이 추한 육체와 그보다 더 추한 영혼을 거두어 가기를 바란다.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게 영혼마저 소멸시켜 주기를 바란다. 흔적조차 남지 않게.
“소멸시켜 주십시오.”
간절함보다는 허무함을 담고, 붉은 눈동자를 움직여 다시 구름에 가린 적월을 바라보며 웃었다. 얼굴 한쪽이 흉하게 썩고 역한 고름이 흘러내리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홀가분하다는 듯 그렇게 웃을 때였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침실 안으로 뛰어드는 사내의 모습에 그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하!”
진정 미치기는 했나 보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 냉철한 사내가 어찌 저리 애타게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귀가 제구실을 못 하고 헛소리가 들리더니 이젠 눈도 제구실을 못 하나 보다. 탁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잡혀,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한없이 다정했던 사내가 믿음을 깨트리기 시작하더니 등을 보이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기를 뿜고, 자신을 차마 버리지 못해 떠안은 쓰레기 취급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저 냉정한 사내는.
헌데 어째서 땀에 젖어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저리도 절박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환상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말이 안 되는 환상이라니…….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유하, 칼 내려놔라. 제발, 내려놔.”
칼이라. 아아, 발밑의 쓰레기들을 죽였었지. 이제 진짜 쓸모없는 쓰레기만 죽이면 끝이다. 다시는 회생할 수 없도록 단숨에 심장에 이 칼을 박아 넣으면 되겠지. 진정 신이 있다면 흔적조차 남지 않게 이 몸과 영혼을 소멸시켜 줄 것이다.
여전히 주제도 모르고 뛰는 이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순간 자신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망설일까. 이런 생각조차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비수를 심장에 겨눴다.
조금만 힘을 줘도 깊게 파고들 이 검은, 눈앞의 저 사내가 준 것이다. 그런데 왜 울고 있나. 원하던 것을 해 주는데 왜 그는 울고 있나. 어째서 그는 마지막까지 이리도 자신을 흔드는 것인가. 아직도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나. 아니면 바보 같은 자신을 끝까지 우롱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쉬고 싶을 뿐이다. 진정한 안식을 찾고 싶을 뿐이다. 이제 바랄 수 있는 건 그것뿐이기에,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원한다.
“유하, 제발. 내가,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 잘못했어.”
미쳤다. 미친 것이다. 들리지 않아야 할 말이 들리고, 보이지 않아야 할 모습이 보이다니. 죽을 때가 되니 일말의 허망한 자비라도 베푸는 것인가. 우습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추한 자신의 모습에 역겨움만 더해진다.
어차피 이리될 것을 무엇 때문에 그리 추하게 매달렸나. 바보 같다. 참으로 멍청했지 않은가.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다. 아니 알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혼자만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외면해 온 것이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그 웃음이 그 다정한 온기가 자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속절없이 무너져 볼품없이 매달렸다. 그렇게 모른 채 외면해 온 비참한 결과가 이것이다.
왜 몰랐을까. 다정하게 안아 주던 넓은 품이 결코 내 것이 아니었는데. 자신을 향하는 그 시선이 결코 따뜻하지도 않았는데. 미미하게 짓는 그 미소 속에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는 걸 왜 몰랐나. 돌이켜 보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드러나는 진실에 피식 자조하듯 웃음을 짓고 눈물로 얼굴을 흠뻑 적신 그를 바라봤다.
일그러진 얼굴로 온몸에 절망을 드리운 믿을 수 없는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향해 흉하게 썩어 가는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한 발 한 발 다가오던 그의 발이 멈칫했다. 마치 못 볼 거라도 봤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을 머금었다.
마지막이니까, 한 번쯤 더 추한 모습을 보여도 이해하리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단도를 치켜들어 정확하게 심장을 향해 내리 찔렀다. 살을 가르고 단번에 파고드는 비수에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울컥 뜨거운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아, 안 돼. 안 돼, 유하! 신관! 당장 신관을 불러라! 유하, 정신 차려라. 제발 정신 차려!”
추해도 상관없다. 거짓이라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빠르게 흐려져 가는 시선을 들어 무너지는 자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그를 보았다. 나를 위해서 진정 울어 주는 것인가. 되었다. 거짓 눈물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되었다.
“유하! 정신 차려라! 정신 놓으면 안 돼! 유하, 제발. 제발, 신이시여. 제발.”
죽을 때가 되니 감상적으로 변한 것인가. 말해 줘야 하는데. 미안했다고. 그 한마디를 해 줘야 하는데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덩이에 목이 막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점점 귀가 먹먹하게 변하는 것에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달. 적월. 운명이라 했던가.
하지만 자신은 적월의 운명이 아니었다. 단지 그 상징만 타고났을 뿐. 애초에 사내가 같은 사내의 운명이라니. 터무니없는 그 말에 거부했어야 했다. 진정한 적월의 운명은 따로 있었다는 걸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다. 알아채지 못한 결과가 이것이다. 욕심낸 결과가 이것이다.
누구를 원망할까. 어리석은 자신이 모두 자초한 일인 것을. 얼굴에 와 닿는 온기와 귀가 멍멍하게 울리는 감각이 깊어지고 차츰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을 들어 올려다본 적월에 잠시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내리 감았다.
붉은 달이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모두가 아니라고 입을 모아 성토했건만. 적월의 운명은 그녀라고 그 또한 그리 말을 하며 돌아섰었다. 그래서 자신 또한 그리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스러져 가는 자신과 함께 검게 물들어 어둠에 잠겨 가는 저 증표가 있지 않나.
웃기게도 내가 진정한 적월의 후(后)였다.
一章. 천호국(天護國) (1)
동방(東方)대륙을 통치하는 천호국. 네 개의 대륙 중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며 대륙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영향력 높은 위치를 확보하고 있고 자원이 풍부해 부유한 제국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정작 천호국의 이름이 드높아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의 사랑을 받되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라는 모순이 바로 그 이유였다.
고대, 창조주가 하나의 거대한 대륙을 네 곳으로 나뉘어 각각 빛과 어둠의 신을 내려 보내니 그때부터 네 개의 태양과 네 개의 달이 존재하게 되고 인간들이 태어났다.
최소한의 의무만을 행하는 다른 대륙의 신들과 달리 동방대륙을 관장하는 신들은 그 선을 넘어섰다. 빛의 상징인 광명의 신은 인간들의 일에 개입하고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고 어둠을 관장하는 적월의 여신은 인간들을 사랑하며 지켜보기를 원했다.
그에 광명의 신은 자신의 후예를 만들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선사했고 적월의 여신은 그 힘에 반하는 자신의 후예를 만들어 견제했다. 그로 인해 하늘 위에서는 신들의 싸움이, 땅에서는 두 후예로 인한 인간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됐다.
하루도 피바람이 가실 날이 없어 동방대륙이 고통에 울부짖고 병들어 가자 결국 두 신은 창조주의 노여움을 샀다. 그리고 그 결과 동방대륙에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신의 율법이 세워졌다.
신의 축복이자 저주. 창조주는 두 신을 억압하고 두 후예에게 심어 준 신의 힘은 일부만 남겨 두고 거두되 그 힘을 받았음을 표하는 상징은 온전히 남겨 두었다. 또한 두 후예가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들의 운명을 하나로 엮어 버렸다.
만약 또다시 다른 한쪽의 상징을 해하거나 운명을 거부할 경우 그것이 낮의 상징인 태양이든 밤의 상징인 달이든 관계없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더불어 한쪽 운명을 잃은 남은 상징조차 그 영광을 잃고 이 땅엔 진정한 어둠만이 존재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두 후예가 서로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대륙을 평안히 다스리는 것. 그것이 동방대륙이 지켜야 할 신의 율법이었다.
그렇게 신의 율법이 새겨진 이래, 두 신의 힘은 일부라 하나 인간의 범주를 훨씬 벗어날 만큼 강력했기에 광명과 적월의 후예가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병들었던 대륙에 새살이 돋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천 년의 장구한 역사가 평화로이 이어졌다.
타 대륙과 달리 하나로 일통된 거대한 동방대륙을 다스리는 신들의 후예는 대대로 천호국의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 또한 두 신의 힘을 받은 후예들은 한 대에 한 명씩 태어났다.
광명의 상징이자 천호국의 황제는 성인이 됨과 동시에 이마 중앙에 태양의 불꽃이 피어난다. 그건 곧 대물림이라, 다음 대의 상징이 나타난 순간 황제는 상징을 잃고 일 년 안에 황위를 물려줘야 한다.
광명의 상징이 태어날 때 적월의 상징 또한 함께 태어나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천호국의 황후이자 적월의 후예로서 받들고 공경해야 한다. 그건 곧 신의 뜻이니 거부할 시 신의 분노를 사기에 그 누구도 반하는 이는 없었다.
천호국의 이번 대 광명의 상징은 황자 청현에게서 나타났다. 상징이 나타나고 한 달이 지나 순리에 따라 황위를 물려받아 동방청현(東方靑炫) 공현황제(共賢皇帝)가 되었다. 하지만 이천 년 역사에 처음으로 문제가 있었으니, 황후에게서 광명의 상징이 나타날 황자가 태어났음에도 그와 운명이 하나로 엮인 적월의 상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로 적월의 후를 가리키는 상징. 지금껏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신의 율법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지난 이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평화가 가져온 나태함과 인간의 오만함은 어느새 역사 속에만 기록되어 있는 신이라는 존재를 불신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신의 종이라는 신녀, 신관들의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고 귀족들과 백성들은 어느새 신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으며 정작 신의 힘을 물려받은 후예들마저도 율법이기에 받들었을 뿐 더 이상 인간들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신들을 내심 경시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오로지 율법을 굳건히 지키고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이들은 극히 일부분이었으니.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굳건한 천호국이었으나 실상은 속이 곪을 대로 곪아 가고 있었다.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불신만이 남은 것이다. 그로 인해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은 아닌지, 이번 일로 인간들은 비로소 율법을 되새기며 두려움에 떨었다. 뒤늦게 제국 전체를 샅샅이 뒤져 상징을 찾고자 했으나 적월의 후예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황제가 황위에 오른 지 두 해가 속절없이 흘러갔고, 다가올 신벌의 공포와 절망으로 인해 혼란은 더더욱 불거져 제국 곳곳에서 폭동마저 일어났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평화가 완전히 깨어진 것이다.
강력한 황권과 세도가에 억눌렸던 백성들은 앞다투어 제국을 떠나고자 했고, 힘을 가진 이들은 권세를 휘둘렀으며 혼란을 틈타 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이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노략질을 일삼았다. 고작 두 해 만에 동방대륙 전체가 휘청거린 것이다.
그에 보다 못한 황제가 제국 전체에 적월의 후예가 나타났다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온전한 상징을 가진 후예는 아니었으나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반쪽이나마 적월의 상징을 타고난 이였기에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천호국이 오랜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필해 온 가문인 백리세가(百里世家)에 그 반쪽 상징이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와 착한 심성, 지혜와 기예를 모두 갖춘 검은 눈동자에 붉은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난, 백리설화(百里雪花)가 바로 그 반쪽 상징이었다.
백리설화는 공현황제와 어릴 때부터 친우로 자라나며 누구보다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유일한 황자이자 상징을 받을 적통이기에 그 이상의 친분은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청현이 황제의 상징을 받았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 절망했다.
온전한 적월의 후로서 상징을 타고났다면 황제인 청현의 곁을 황후로서 지킬 수 있었겠지만 백리설화는 반쪽짜리 상징으로 인해 결코 황후가 될 수 없었으며, 언젠가는 나타날 적월의 후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시험인가. 20년을 감감무소식인 적월의 후예가 청현이 황제 위에 오르고도 두 해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에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결국 혼란에 폭동마저 일어나자 황제와 만조백관들은 반쪽이나마 적월의 상징을 가진 백리설화를 황후에 앉히고자 한 것이다. 암담한 제국의 현 상황에서 이를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하물며 어릴 때부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청현 또한 백리설화를 반려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반쪽이면 어떤가. 그나마도 있으니 없는 것보다는 괜찮으리라. 제국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건 황제인 청현만이 아니었다. 백성들 또한 못내 버리지 못한 불안 속에서도 그나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입을 모아 찬양했다. 그렇게 천호국 황제와 황후의 국혼과 즉위식 준비로 인해 제국이 불안함 속에서도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해질 때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국혼을 하루 앞둔 그때, 적월의 후가 황궁에 나타났다. 금빛과 요요한 붉은빛에 휩싸여 하늘에서 내려온 적월의 후는 이상한 복장을 했으나 온전한 상징인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당황했으나 비로소 나타난 완벽한 상징에 환호했고 황제인 청현은 표정을 굳혔으며 백리설화는 고작 하룻밤을 남겨 두고 절망해야 했다. 그렇게 각자의 충격과 절망, 환호와 기쁨이 난무하는 하룻밤이 지났을 때 황궁은 또 한 번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것이, 적월의 후께서 여인이 아니라 사내라 하옵니다.”
청현은 기가 막혔다. 지금 시종장이 뭐라 하는 것인가. 기껏 나타난 적월의 후가 사내라니. 적월의 후가 아니면 후계를 낳을 수 없는데 회임도 하지 못하는 사내라는 게 말이나 되는가. 헛소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시 똑바로 알아 와라. 사내일 리가 없다.”
“폐하, 송구하오나 몇 번씩 확인한 사실이옵니다.”
맙소사. 신이 자신을 농락한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여인이 아닌 사내라니! 지금껏 천호국 역사에 단 한 번도 사내인 적월의 후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역대 황제들이 황비와 후궁을 들이더라도 그들에게서 후계자를 본 적도 없었다. 모두 후계가 될 수 없는 이들만 얻은 것이다.
두 신의 막강한 힘을 받은 후계는 오로지 적월의 후에게서만 나왔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그중 하나는 반드시 성인인 20세가 되었을 때 상징이 나타났고 순리에 따라 황제가 되었다. 그건 청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천호국은 동성애를 멸시하지는 않았으나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내인 적월의 후라니. 신이 시험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어째서 자신의 대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청현은 암담함에 눈을 감았다.
“회의를 열 것이다. 대소신료들을 소집하라.”
“명을 받자옵니다.”
시종장이 물러나고 문이 닫히며 청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검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다가 이내 굳은 듯 멈추고 시리게 날을 세우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
넓은 대전을 가득 채운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가진 적월의 후가 사내라는 사실에 그들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천 년 유구한 역사에 이러한 일은 처음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정론과 반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먼저 정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적월의 상징을 타고난 이상 율법에 따라 황후에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 했다면, 반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무리 상징을 타고났다고는 해도 회임을 할 수 없는 사내가 황후에 오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반박했다.
결국 이들의 걱정은 다음 대 후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건 곧 천호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각자 주장을 펼치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했다.
사실 따져 보면 양쪽 주장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대로 황족의 핏줄은 귀했으며 그보다 더 귀한 신의 상징을 타고나는 이는 오로지 적월의 후인 황후의 몸을 통해서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건 결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이 정한 율법이었고 신의 존재를 불신할망정 역사가 살아 있는 이상 그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도 반하지 않았다. 아니 반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낱 인간이 신들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신들의 이기적인 사랑은 오로지 선택된 두 사람에게만 쏟아지는 것이었기에 평범한 인간은 감히 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천 년의 역사 속에서 주제도 모르고 역심을 품었던 이들의 비참한 말로는 역사가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감히 그 누구도 역심을 품지 못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다른 제국과 달리 천호국이 한 대륙을 모두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속이 곪았을망정 실상이 그러했다. 그러나 적월의 상징을 가진 사내 하나 때문에 지금 천호국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평화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폐하, 신 태사도(太司徒) 문위창 아룁니다. 역대 적월의 후를 정함에 있어 이렇듯 늦어진 경우는 처음이니만큼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속히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폐하,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태사도 문위창의 말을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대소신료들을 내려다보는 청현의 표정은 사태와 맞지 않게 무료했다. 검푸르게 빛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불경하게도 청현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료한 표정과는 달리 청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넓은 대전 전체를 압박해 오자 신료들은 잡다한 생각을 떨쳐내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역심을 품는 이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권력에 대한 욕심마저 버린 건 아니었다.
인간이니만큼 권력을 탐하기 마련이니 이 자리에 진정으로 천호국을 위하고 황제를 위해 충성할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저 이들은 자신들이 내놓은 주장에 황제가 손을 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권세를 불리는 것이기에 발밑에서 번들거리는 추악한 눈을 감추고 충신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을 내려다보는 청현의 눈썹이 잠시 잠깐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정도로 청현은 어리석지 않았다. 오히려 역대 황제 중 누구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가 동방청현 공현황제였다. 그리고 자신을 숨기는 것에도 청현은 완벽하리만치 능숙했다.
“의견이 나뉘는군. 양쪽 주장을 정리해 다시 한 번 말해 보라. 단, 천호국의 존망, 나아가 동방대륙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사안이니 해결책 또한 내놓아야 할 것이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무턱대고 주장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것을 알아들은 이들은 좀 전까지도 치열하게 제 주장을 펼치던 입을 꾹 다물었다. 해결책이라니. 쉽게 내놓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설사 내놓는다고 해도 문제는 그때부터다.
책임이 따르는 건 물론이고 반대 의견을 펼친 이들의 공격대상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문제에 누가 앞장서서 나서겠는가. 각자 밀고 있는 세도가의 편에 묻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뭣들 하는 건가? 각자 주장을 정리해 말하라고 하지 않나?”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나 청현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 침묵에 청현의 입가가 잠시간 비틀렸다가 옥좌 밑으로 도열한 대소신료와 다른 위치에 홀로 앉아 있는 태사부(太師父)를 내려다봤다.
“태사부, 따로 고견이 있소?”
“신 태사부 소장환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율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동방대륙뿐만 아니라 타 대륙에도 없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적월의 여신을 나타냅니다. 또한, 율법에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으나 이천 년 유구한 역사 동안 황실은 적월의 후를 통해서만 후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차분한 태사부의 말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 잠시 실망으로 장내가 술렁거리자 청현은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키고 다시 태사부를 돌아봤다.
“계속하시오, 태사부.”
“예, 폐하. 다른 문제를 떠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입니다. 신들께서 정한 율법은 감히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걸 아실 터이니 적월의 상징을 갖고 계신 그분이 후에 오르시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그 무엇보다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온전한 상징을 가지고 있는 그를 군말 없이 황후에 올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내가 아닌가. 지금껏 사내가 회임을 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비단 동성애를 인정하는 다른 대륙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사내와 여인의 몸은 다른 것이다. 헌데 신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이 대륙을 버리고자 하시는가. 그도 아니면 정말 자신들을 시험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한낱 인간이 신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몫. 어떤 선택을 내놓든 그 결과를 받는 것도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듯 난제를 앞두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이 따르기에 태사부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율법부터 따르라는 말이오?”
“예, 폐하. 율법이 그리 정해져 있는 이상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사례를 보자면 적월의 후가 아니면 후계를 볼 수 없는데 사내인 그분이 후계를 낳을 수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났으며 또 다른 예외적인 상황도 같이 생겼다는 건 신의 짧은 생각으로 신들께서 시험을 하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예외적인 상황이라 했소?”
“백리세가의 백리설화 소저가 반쪽 상징을 타고난 것이 후계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며 단호한 태사부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껏 오랜 역사를 이어 오며 사내가 적월의 상징을 타고난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렇듯 또 다른 반쪽 상징이 같이 나타난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상황이 후계를 보지 못할 사내를 후로 만들려고 백리설화에게 반쪽의 상징을 주었다면 말이 된다. 온전한 상징을 타고난 이는 율법에 따라 후에 오르고 백리설화에게서 후계를 본다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신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소신료들은 선뜻 동조하지 못했다. 그 또한 황후에게서만 후계를 볼 수 있다는 율법이나 다름없는 것을 어기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율법을 어겨야 한다니. 어떤 결론이 나오든 모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