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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월의 후 1권 (2화)
一章. 천호국(天護國) (2)
“태사부의 말은 그를 황후에 올리고 백리설화를 후궁으로 들여 후계를 보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그리되면 율법도 지킬 수 있고 후계를 볼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후계를 볼 가능성을 놓고 보자면 단순히 후궁이 아니라 그 위의 위치인 황비로 올리는 것이 적당하다 사료됩니다.”
“황비 말이오? 하지만 황비 자리는 오래전에 사라졌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정을 관리함에 있어 후궁은 특별한 사항이 아니면 개입할 수 없지 않습니까? 후(后)에 오르실 그분의 복장으로 봐서는 이곳 분이 아니실 것입니다. 또한 타 대륙의 복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분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셨을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건 곧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 함을 뜻하고 그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이 내정을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황비가 있다면 추후 발생할 문제도 사라질 것입니다.”
또 한 번 장내가 술렁거렸다. 적월의 후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온전한 상징을 타고났으나 후계를 가질 수 없는 사내이자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
그 놀랄 만한 사실에 비해 오래전에 사라진 황비의 지위를 새로이 세우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현실적인 문제만을 놓고 보자면 그리하는 것이 태사부 말대로 추후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태사부의 말이 황비에게 그 권한을 일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건 곧 대조경(大詔卿)이자 백리설화의 오라비인 백리한성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결과이지 않은가.
지금도 젊은 나이에 고위직 벼슬을 가지고 있는 그가 마뜩찮은 판에 여동생을 황비에 앉히고 내정을 틀어쥘 수 있는 권력까지 쥔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황궁의 내정을 보는 것은 막중한 임무가 따르지만 권세 또한 강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짐은 태사부의 의견에 동의한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으니 그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됩니다.”
“지금은 그것만이 최선책인 것 같습니다.”
청현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이들은 백리한성을 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에 반해 다른 이들은 서로의 눈치만 힐끔거릴 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으나 내키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청현의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하자 하나둘 입을 열어 동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뻗대 봐야 다른 해결방안을 내놓으라는 말만 들을 것이다. 어차피 대답하지 못할 바에야 일단은 수긍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그럼 다들 동의한 것으로 알겠다. 태사부는 후의 교육을 맞고 경들은 국혼과 황후 즉위식을 준비하라. 황비 책봉식은 추후 날짜를 따로 잡아 할 것이다.”
청현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일제히 몸을 바로 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대전을 빠져나오는 청현의 미간이 짜증을 담고 찌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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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현은 대전을 빠져나와 집무실로 향하다가 이내 멈칫거리고 발길을 돌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오늘 백리설화와 자신은 국혼을 치르고 백년가약을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을 남겨 두고 국혼은 무산됐다.
지금쯤 울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청현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반쪽이나마 상징을 타고난 사실을 얼마나 감사했던가.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고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녀를 자신과 하나로 묶인 운명이라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만에 하나라도 진정한 적월의 후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의 운명은 그녀뿐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헌데 나타난 것이다. 황제인 자신의 진정한 운명이라 칭하는 이가. 그것도 사내의 모습으로.
“어이없군.”
후계도 볼 수 없는 사내라니. 도대체 신들은 무슨 생각인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자 작정을 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내를 제 반려로 생각해 보지 않았고 자신에게는 이미 마음을 준 이가 따로 있었다.
누구보다 고귀한 위치에 올려 주고 싶었기에 모두가 불안해하는 그 심리를 이용해 최대한 국혼을 서둘렀다. 국혼을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적월의 후만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닥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설사 신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광명의 상징을 받았다고는 하나 신을 향한 믿음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상징을 물려받았을 뿐 어차피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개입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하룻밤을 남겨 두고 나타나다니. 차라리 더 일찍 나타났다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덜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진정 운명으로 엮인 상대라면 이리 거부감이 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머릿속에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이 가득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은애하는 이를 아끼고 한없이 사랑을 줘도 모자라는데 오히려 상처를 줘야 하는 입장이라니.
이 순간만큼 신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어 청현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문제는 적월의 후의 상징을 타고난 이상 그를 황후에 올리고 아껴 줘야 하는 자신의 처지다. 율법이 존재하는 한 운명을 거부해서는 안 되기에 자신 또한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리할 수 있을지 청현은 자신할 수 없었다. 설사 한다고 한들 언제까지 가능할지.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녀가 임시로 기거하는 거처 앞에 도달하자 표정을 감추고 깊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문제를 떠나 우선은 그녀부터 달래야 한다. 착한 심성에 여리기까지 한 그녀라면 보나 마나 울고 있으리라. 어쩌면 불안해할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에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빈실을 지나 침실의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자신이 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잘게 어깨를 떠는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안타까워 청현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울었느냐?”
“아, 아닙니다.”
옥구슬보다 더 맑고 고왔던 목소리가 한껏 잠겨 있건만 울지 않았다고 말을 하며 고개까지 내젓는 설화의 모습에 청현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꼭 잡았다.
“그대가 울면 짐의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 울지 마라.”
“추한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짐이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
“사과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폐하. 부디 황망한 말씀은 거두어 주시어요.”
청현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설화라면 하룻밤 사이에 운명이 바뀌었음에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렇기에 청현은 더 미안하고 더 안타까웠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상처 주지 않고 지켜 줄 수 있을까.
청현은 황후에 올려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면서도 황비의 위치로나마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게 되었음에 안도하며 감사했다. 자신의 이기심에 씁쓸해졌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을.
“설화, 그대를 황비로 들일 것이다.”
“예? 그게 무슨…….”
예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번쩍 들고 당황스러운 눈을 하는 그녀를 보며 청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많이 울었는지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 부은 얼굴을 청현이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도밖에 없다. 그대도 알겠지만 황비의 지위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대를 위해 다시 지위를 세울 것이다. 그대를 제대로 된 대접조차 못 받는 후궁으로는 들이고 싶지 않아.”
“하오나 폐하, 그리하시면 대소신료들의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없었다. 모두 동의한 것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마라.”
“폐하, 진정 소녀가 폐하의 곁에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불안한 것인가. 기뻐하면서도 정처 없이 흔들리는 설화의 눈빛에 청현이 날카로운 눈매를 휘며 미소로 화답했다.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이 풀어지는 설화를 보며 청현 역시 내심 안도했다.
“약속하겠다. 비록 상징 때문에 그자를 후로 받아들이기는 하나 절대 그대를 두고 다른 이를 마음에 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도 짐을 믿고 따라 주기를 바란다.”
“예, 폐하. 소녀 그리할 것입니다. 오로지 폐하만을 바라보며 따를 것입니다.”
황비라 하나 황후와는 위치가 다르다. 하물며 운명의 상대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졌을 것이 분명함에도 애써 아픔을 숨기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자신을 위해 참고 있는 것이리라. 왜 모를까. 알기에 청현도 더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여린 사람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라 다시금 물기가 맺힌 얼굴로 단호하게 답하는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가녀린 몸이 품 안에 쏙 들어오고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물을 보이는 그녀의 등을 눈물이 그칠 때까지 청현이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이제 다 울었느냐?”
“못난 모습만 보여 송구합니다.”
“괜찮다. 그보다 국혼과 즉위식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황비 책봉식을 치를 것이니 세가로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 있어라.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짐이 속이 타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애가 탄다는 듯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내는 청현을 보며 설화는 수줍게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적월궁에 있을 후가 떠올라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왜 그러는 것이냐?”
“폐하, 그분을 만나 보셨습니까?”
“아직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대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오나 신이 정한 운명이온데…….”
“바보 같기는. 짐의 운명은 그대이지 그 사내가 아니다. 또한 짐이 사내를 안을 일은 더더욱 없고. 그는 그저 황후의 자리만 지킬 것이야. 그러니 괜한 걱정으로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라. 그럴 가치도 없는 상대다.”
진정 신이 맺어 준 운명의 상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으나 청현은 그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그 사내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고운 여인이라 믿었다. 무엇보다 머릿속을 채우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그리하도록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데에 청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율법이니 겉으로나마 그를 대우해 주더라도 짐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짐은 그대만을 가슴속에 담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한시도 잊지 말고.”
“예, 믿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이시든 소녀는 폐하의 마음과 약조를 믿을 것입니다.”
한결 불안이 가신 듯 비로소 부드럽게 풀어지는 표정에 청현이 설화의 손등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 그 작은 표현에도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나직하게 웃음을 흘린 청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그만 가 봐야겠다. 나중에 또 들르마.”
“예, 폐하. 살펴 가시어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중으로 후를 만나 봐야 했기에 청현은 그녀의 거처를 빠져나오며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다. 그러나 율법을 어겼을 시 어찌 되는지 알기에 청현은 마지못해 적월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양궁과 중앙 통로를 두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적월궁이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인지 청현의 발걸음은 느릿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느긋하게 걸어도 일각이면 도착할 거리를 한참이나 지나서야 도착한 청현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그가 있을 거처 앞에 멈춰 섰다.
“고하라.”
“귀인께 고하옵니다. 황제폐하 납시었사옵니다.”
적월궁 시녀장이 고하는 소리에 마땅히 들려야 할 기척도 대답도 들리지 않아 청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는 것인가. 그리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과는 달리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들어왔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다니. 황제인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보이는 행동은 뭐란 말인가. 절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청현은 치미는 짜증에 살짝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자리에 앉아 여전히 창밖만 보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자신에게는 훨씬 못 미치지만 사내라 그런지 키가 제법 크다. 애초에 안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지만 저리 큰 사내를 안으라고 한다면 자신이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고사하고 역겨울 테지.
그러니 절대 그런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하며 뒷모습을 훑었다. 사내이면서도 여인처럼 허리까지 길게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에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잠시 앉아 보겠소?”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시선을 돌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듯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 드러나는 모습에 청현은 내심 놀랐다.
묘한 분위기. 여자처럼 예쁘거나 가녀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미녀보다는 선이 고운 미남에 가까운 얼굴이다. 새하얀 피부에 연분홍빛 입술, 높고 날카롭게 솟은 코, 붉은 적안을 감싼 눈매는 큼지막하고 끝이 살짝 올라간 것이 나른하다 못해 관능적인 미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뭐라 할지…….
마치 가면이라도 덧씌운 듯 아무런 감정조차 담고 있지 않은 표정의 그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멍하게 보고 있던 청현은 맞은편에 앉은 그에게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적당히 낮으면서도 나른하게 퍼지는 듯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곳이 천호국이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이곳은 네 개의 대륙 중 동방대륙으로 광명의 신과 적월의 여신의 가호를 받는 제국이오. 짐은 이 제국의 황제이고.”
청현의 설명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다시 한 번 창밖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을 뿐이다. 그런 그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던 청현은 정확하게 부딪혀 오는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제국의 황제께서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그저 그대를 보러 왔소. 아직은 이곳이 낯설어 당황스러울 테니 글을 읽는 데 무리가 없다면 우선 이곳의 역사책을 봐 줬으면 하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합시다.”
“알겠습니다.”
여전히 표정이 없다. 좀 전에 실소를 흘린 것 외에는. 그는 당황스럽지도 않은 것인가. 처음에 이곳에 올 때만해도 본론부터 얘기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려 했으나 막상 평온한 그를 보자 오히려 자신이 더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청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색다르고 당황스럽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잖은가. 그가 난리를 피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어 청현은 곧바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창가 쪽으로 다가가자 청현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청현의 뒤늦은 물음에 다시 몸을 돌린 그가 마치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빤히 바라봤다. 일단 후로 올리기는 해야겠기에 물은 것인데 왜 저리 보는 것인지. 청현이 입을 열려는 찰나 툭 한마디를 뱉고 다시 몸을 돌려 버리는 그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강유하.”
그것이 이름인가. 청현은 입안에서 한번 굴리듯 불러 보고 이내 멈칫하며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이곳에 오는 것부터 내키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 기분이 나빠졌다. 황제인 자신에게 저 뻣뻣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아무리 이름뿐인 황후라 하나 대놓고 그리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청현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생각했는데 왜인지 강유하라는 사내를 대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았다.
“골치 아프군.”
二章. 적월의 후예 (1)
광명의 상징과 적월의 상징이라니. 역사라고 하기에는 꼭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말이다.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럼에도 믿기를 강요한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도대체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유하는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두꺼운 제국 역사책을 덮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니 생각하자면 절로 고통부터 떠오를 지경이다. 붉은 눈동자의 악마라 칭해지고 괴물 소리를 들으며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자신이 이곳에서는 누구보다 고귀한 존재라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황당하지 않은가.
믿을 수 없는 건 고사하고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태어난 순간부터 결코 평범하지 못했고 그랬기에 평범한 삶 또한 살지 못한 인생이었다. 언제나 일그러진 일면을 드러내며 마지못해 살았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소름 끼치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갓난아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고아원에 들어가서도 원장들에게 몇 번이나 되풀이하듯 버림을 받았다.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붉은 눈동자를 마주치면 하나같이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아무리 예의바르게 행동해도 괴물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가까이 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수많은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혼자였던 삶. 아니 그것을 과연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결코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는 친구가 갖고 싶고 따뜻한 부모의 품이 그리워 온기를 찾아 다가가기도 했었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쏟아지는 폭력이 전부였으니까. 간혹 호기심에 입양이 되어도 채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버려져야만 했다. 그것이 괴물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러면서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온통 어둡고 칙칙해 암울한 절망. 자신과 마주한 이들의 눈은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괴물이라도 마주한 눈빛에 혐오를 담고 옷깃만 스쳐도 더러운 전염병 환자 취급한 건 예사였다.
혹 병이 아닐까 싶어 병원을 찾았을 때 이상이 없음에도 특이한 실험쥐를 보는 듯한 시선에 바로 뛰쳐나온 후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반복되는 상황에 고립되고 지쳐 삶의 의지조차 잃은 자신을 그 사람이 후원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듯 살아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특이해서 이용할 가치가 있어 후원했다고는 해도 자신에게는 생명의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살았던 것인데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하루를 꼬박 멍한 정신으로 보낸 것 같다.
자신이 어째서 세계 역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저 익숙한 붉은 달이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성인이 되는 초봄이었던 것 같다. 별조차 없는 새까만 밤하늘에 지구의 노란 달과 달리 거대한 크기의 붉은 달이 떠 있는 꿈이었다. 자신은 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다가 꿈에서 깨고는 했었다.
26살, 이곳으로 오기 전날까지 매일같이 같은 꿈을 꿨다. 그것이 이곳으로 넘어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저들이 하는 말도 그렇고 이곳 동방대륙 천호국의 역사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자신이 적월의 후예라면 앞뒤가 맞아떨어지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자신은 사내가 아닌가. 사내가 되어서 여신의 후예는 뭐고 후계를 낳아야 할 황후라니. 터무니없는 내용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싶음에도 그리할 수 없는 건 이곳에 오며 변화된 외양 때문이다.
새까만 숏컷이었던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으로 변해 버리고, 몇 개의 칼자국을 비롯해 수술 자국, 담배 자국으로 무수히 도배됐던 피부가 상처 자국 하나 없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으며, 체형은 좀 더 왜소해졌다.
게다가 이 얼굴은 또 뭐란 말인가. 이목구비는 원래 얼굴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이렇듯 계집처럼 선이 곱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운 이미지에 가까웠다. 거기다 얼굴 나이도 많이 봐야 20살로 보인다는 게 정말 황당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보다는 허탈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원래 있던 세계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라 딱히 그립거나 미련이 남는 건 아니지만 이제 와서 생판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어쩌다가 이리됐는지.
이상한 게 한두 가지도 아니고 적월과 자신이 연관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외형이 이리 변했으니 안 믿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저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사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후계야 어차피 안 되는 것이고 황후에 오르는 것도 싫기는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이곳에 떨어졌다고 해서 굳이 저들의 요구대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곳이라고 해도 그곳과 크게 다른 것도 없지 않은가.
개처럼 사육당하며 화풀이 대상이나 되는 건 이제 더 이상 사절이다. 그러자면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직 이곳에 대해 허무맹랑한 역사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 당장은 무리다. 하다못해 지도라도 봐야 할 것 아닌가.
문제는 돈이다. 살려고만 한다면 어딜 가서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만 돈 한 푼 없이 무작정 모르는 곳을 헤매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머리카락하고 눈동자도 문제다.
역사서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붉은색은 적월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타 대륙에도 없다고 했다. 그건 곧 이곳을 나가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곳에 염색약이나 렌즈가 있다면 모를까, 이곳의 발전 상태로는 확실히 없다고 봐야 한다.
이곳은 뭐랄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단순한 종교차원에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의 힘을 행사하는 신녀와 신관들이 있고 마법이 상당히 발달한 세계다. 다만 이곳 동방대륙은 마법보다는 신의 권능이 더 강하다는 것만 다르다.
반면 이곳의 건물이 동서양을 합친 듯하다는 점은 익숙한 느낌을 준다. 이곳 적월궁만 해도 달빛이 가장 잘 드는 곳으로 규모는 크지만 익숙한 형태의 전각들이 많다.
그러나 옷은 또 상당히 특이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러하다. 황제가 화려한 용포를 입고 있었다면 자신은 푸른색과 황금색 바탕에 붉은 달과 붉은 봉황을 수놓은 옷을 입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려하긴 해도 바지 위에 치마를 덧댄 형식의 옷이라는 점이다.
만약 치마만 입으라고 했다면 그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가 아닌데 하도 황당한 상황에 처하다 보니 별 쓸모도 없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아 유하는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했더니 오히려 머리만 지끈거린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애초에 자신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자라 왔으니까. 아니 생각이라는 걸 하면 안 되었기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생각할수록 더 복잡하게 꼬이기만 한다. 아직은 당황스럽기만 하고 이곳을 나가는 것도 엄두가 안 난다. 그렇다고 저들의 요구대로 황후에 오르자니 그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이래저래 피곤한 느낌에 진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런 터무니없는 걸로 고민하는 것도 귀찮다. 딱히 삶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확 죽어 버릴까. 그곳에서야 마지못해 살았다지만 굳이 이곳까지 와서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잖은가.
지금까지는 단지 살아 있으니 숨을 쉰 것뿐이다. 지키고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았다. 목적도 무엇도 없이. 이런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전히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과연 그 이유를 찾을 날이 올지 자신할 수도 없다. 살아갈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인간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상징이니 후예니 지금이야 가장 고귀한 인간으로 대접해 주고 있지만 그것이 끝까지 가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이미 인간의 이중적인 면은 겪을 대로 겪어 보지 않았나. 이 이상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기만 하다.
그저 할 수만 있다면 쉬고 싶을 뿐. 그렇다고 여기서 죽자니 그것도 민폐일 것이라 뭘 어찌해야 할지 좋을지 생각하다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 결국은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비웠다. 지금은 고민한다고 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시야에 들어온 적월 아래 펼쳐진 고즈넉한 정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봤다. 확실히 지구의 밤과는 다른 느낌. 묘하게 머릿속이 진정되는 것 같아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밤이 늦었사옵니다. 어디 나가시옵니까?”
“산책.”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호위를 부르겠나이다.”
고작 정원에 나가는데 호위는 왜. 아무리 붉은색이 신의 후예라는 증거라지만 이건 너무 극진해도 탈이다 싶어 나이 지긋한 시녀장의 말에 고개를 저어 거부하고는 망설임 없이 정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