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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월의 후 1권 (3화)
二章. 적월의 후예 (2)
잠시 후 뒤로 두 사람의 기척이 조용히 따르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발길 닿는 대로 무턱대고 한참을 걸어가자 어느 순간 기척이 사라졌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또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펼쳐진 연못에 놀랄 틈도 없이 그 앞에 서 있는 낯익은 한 사람을 보고는 멈칫했다.
“이곳은 후원인데 이곳까지 어쩐 일이오? 산책을 하고 있었소?”
“예.”
천호국의 황제라고 했던가. 그럼 이마 정중앙에 있는 저 불꽃 문양은 광명의 상징을 뜻하는 것일 터다. 어제는 멍한 정신이라 제대로 볼 생각도 못 했는데 이리 보니 가끔 브라운관을 통해 보던 연예인들보다 더 잘생겼다.
아니 저 정도면 연예인하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도. 키도 190cm에 육박할 것 같고 이래저래 과하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난 사람이다 싶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만났으니 잠시 앉겠소?”
“예.”
청현의 말에 작게 대답한 유하가 반듯하게 깎아 놓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유하의 곁으로 청현 또한 자리하자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불편한 듯 청현이 슬쩍 미간을 찌푸린 찰나 멍하니 호수 수면에 비친 적월을 바라보던 유하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몰라서 묻는 건가? 자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머리카락 색뿐만 아니라 외형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자신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황후가 되어 줄 수 없는 사내가 아닌가. 그러니 연고도 없는 이곳을 떠나는 게 마땅하다. 그런 생각에 유하가 입을 열어 설명하려 했으나 청현이 더 빨랐다.
“그건 안 되오. 천호국의 역사를 봤지 않소. 동방대륙을 통치하는 천호국에는 두 신의 후예가 반드시 필요하오.”
“물론 봤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사내입니다.”
사내가 같은 사내의 반려로 황후가 돼야 한다니. 상상도 못 했던 건 고사하고 거부감부터 밀려왔다. 딱히 자신이 동성애를 경멸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제삼자이기에 그런 것이지 자신이 연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 정확히는 동성애를 떠나서 더 이상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하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청현은 그가 거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보다 당황스러움이 더 해 조급해졌다.
“사내가 후예로 태어난 건 처음이지만 그대가 상징을 타고난 이상 성별은 상관없소.”
“제가 적월의 후예라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대는 적월의 후예가 맞소.”
도대체 어딜 보고? 이곳으로 오면서 외모가 변했다는 사실과 의심스러운 꿈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뭘 보고 그리 단정한단 말인가. 설사 단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다. 황제인 청현의 단호한 말은 마치 자신이 사내인 걸 상관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상징 때문입니까?”
“그렇소. 적월의 상징인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우리 동방대륙뿐만 아니라 타 대륙에도 없는 색이오. 그러니 그대도 의심하지 마시오.”
“하지만 저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닙니다. 역사에 보면 사내도 처음이지만 저 같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적월의 후예들이 나왔고 신분은 각자 달랐지만 모두가 이 대륙 안에서 태어난 공통점이 있었다. 개중 평민이나 천한 천민, 노예에게서 태어난 이도 있었으며 세도가의 교육받은 규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인이라는 점이다. 세도가를 제외하고 평민이나 천민, 또는 노예에게서 태어난 이들은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순간 갓난아기 때 황궁에 바쳤고 그들은 오랜 시간 교육을 받아 황후에 올랐다.
그리고 후계를 가졌을 테지.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비록 그러한 꿈을 꿨지만 자신이 적월의 후라는 걸 믿지 않았다. 아니 허무맹랑한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니 믿지 못한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무엇보다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껏 위험한 일을 해 오며 민감하게 상황을 알아차렸던 자신의 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었기에 유하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무언가 착오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를 찾으십시오.”
“그대가 사내이기 때문이오?”
“그 이유도 있습니다만, 제겐 이 제국 자체가 허구 같게만 느껴집니다.”
황제인 그가 들으면 자칫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유하는 굳이 말을 고르려 하지 않았다. 돌려 말하는 법도 모르거니와 사실상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저 황제의 반려가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 유하를 보며 청현은 절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곧게 폈다.
확실히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고결한 이라도 손안에 권력을 틀어쥘 수 있다면 변모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내 주제에 권력의 중심인 황후로 올려준다는데 저 무심한 거부는 뭐란 말인가. 오히려 자신이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황후 자리를 거부한 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지배하는 이 제국 자체를 부정하는 말을 저리도 태연하게 하다니. 거슬린다.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는 듯 자신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 태도에 아무리 적월의 후예라고는 하나 청현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차라리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상대라면 화를 풀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는 적월의 후예다. 비록 마음으로는 청현 또한 유하를 운명이라 믿고 있지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징이 있는 한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섣불리 판단하고 자칫 그를 적대하다가 정말 떠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닌가. 그가 떠나는 순간 제국엔 또다시 혼란이 찾아올 것이고 이 대륙의 미래 또한 어떤 식으로 변할지 모르기에 청현은 불편했던 심기를 능숙하게 가라앉혔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 처음 예상대로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앞으로도 귀찮아질 것 같아 청현이 속으로 혀를 차고 여전히 호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유하를 바라봤다.
“신들께서 무슨 의도로 그대를 보냈는지는 모르오. 그러나 그대가 이 제국과 황제인 짐에게 필요한 건 사실이오. 만약 그대가 운명을 거부하고 떠난다면 이 제국의 수백만 백성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비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이건 거짓도 아니고 그대를 압박하고자 말하는 것도 아니요. 짐은 단지 그대가 이곳에 남아 주기를 바랄 뿐이오.”
불편한 속내와는 달리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하다 못해 다정하기까지 했다. 누군가 이런 청현을 봤다면 경악할 일이었으나 유하는 그 내용에 놀라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고작 자신이 떠난 걸로 수백만이 비참하게 죽는다니.
제국의 황제가 고작 사내 하나를 잡아 두자고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고 저리 숙이고 들어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그럼 역사에 나온 허무맹랑한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황당한 것도 정도가 있지. 유하의 멍한 시선에 청현이 속으로 만족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은 이곳이 낯설 테니 무리한 것은 요구하지 않겠소. 그러니 짐에게 기회를 주시오. 짐 또한 그대가 이곳에 적응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부탁하오, 유하.”
*****
이곳 천호국에 온 지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특별한 변화가 있거나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식사와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이곳의 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멍한 정신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곳의 글을 읽고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황제가 하루 두 번은 꼬박꼬박 다녀간다는 것 역시 그 혼란을 더해 주었다.
누군가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처음 며칠은 부담스럽고 당황한 마음에 이렇다 할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덕분에 고작 열흘 만에 눈을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 그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였지만 시급한 상황에서도 다그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준다는 의미를 착실하게 지키고자 그리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난 열흘 동안 이곳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충분히 숙지하고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도 인식하며 받아들이면서도 망설여졌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이 선뜻 결정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내미는 손을 잡게 된다면 무언가가 깨질 것 같은 느낌. 과한 반응이라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찝찝하기도 했고 지금껏 제 예감이 틀린 적은 없었다. 유달리 민감한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면 어김없이 일이 터지고는 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기보다는 마치 심장 위로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문제는 마냥 이대로 미적지근하게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에 조급함이 그 무게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여 신들의 뜻을 거부하는 건 아닌지 그 때문에 신들에게 노여움을 받는 건 아닌지. 실상 천호국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것일 테지만 확실히 저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더 질질 끌다가는 자신에 대한 원망마저 쌓일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 그런 시선이 두려운 건 아니다. 26년을 살아온 강유하의 인생은 빠져나올 궁리조차 못 할 정도로 진창을 헤맸으니까. 하루하루 사는 게 끔찍하지 않았나. 온갖 더러운 일도 마다치 않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그리 살았다.
아니 과연 그것을 살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건 그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개처럼 사육당한 것이다. 고아원을 전전하며 받았던 그 상처가 곪아 터져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신처럼 후원자로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만 하지만 그때의 자신은 곪은 상처를 끌어안은 어린아이였기에 그저 희망에 부풀어 고아원을 나가면 사람답게 살 줄 알았다. 그때는 그 사람이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어쩌면 진정한 인간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
하지만 어리석었다. 매번 당하고도 어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는지. 그 사람을 따라 새로운 기대에 부풀어 향한 곳은 진정한 어둠만이 존재하는 지옥이었다.
거대한 저택에 미처 놀라움을 표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을 어둠 속에 가뒀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작은 창문 하나 없어 빛조차 들지 않은 어둠뿐인 지하에 갇혀 일 년을 버러지처럼 빛을 갈망하며 바닥을 기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오는 그 잠깐의 밝은 빛을 원하며 굶주림과 정신마저 갉아먹는 갈증, 끔찍한 공포 속에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차츰 세뇌를 당하고 종국엔 스스로의 영혼까지 저당 잡혔다.
뜻대로 죽을 수도 없었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미칠 수도 없이 일 년을 버틴 끝에 해방되었을 때 자신은 그렇게도 원하던 빛이 두려워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빛보다는 다시 어둠에 갇히는 것이 더 공포였기에 죽어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인간의 감정을 지우고 몸을 단련하고 지식을 익혔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개처럼 기라면 기어가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다시 끔찍한 어둠 속에 갇히기는 죽어도 싫었으니까.
그렇게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어린 나이부터 온갖 더러운 일은 모두 도맡아 했고 어둠의 세계에서 악마라 불리면서 그 사람이 명령하는 건 무엇이든 했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 해도 망설이지 않았다.
애초에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아니 죄책감이라는 자체를 몰랐다. 그리 가르쳤고 습득했으니까. 하지만 마음속의 작은 불씨마저 꺼뜨리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진정한 빛을 보는 날이 올 수 있다는 작디작은 희망의 불씨를.
그럴 자격조차 없음에도 그것마저 놓아 버린다면 정말 살아 있을 이유가 없기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고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황당하게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악마이자 괴물로 통했던 이 눈이 이곳에서는 고귀함의 상징이라니.
공포와 경멸을 담고 보던 이들과는 달리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옷깃만 스쳐도 병이 전염된다는 듯이 피하던 이들과는 달리 완벽하게 호감을 갖고 다가온다. 단지 상징을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당황스럽지만 싫은 건 아니다. 솔직히 원하던 상황이지 않은가. 언제나 인간처럼 살고 싶었으니까. 상하 관계가 아닌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고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는 건 확실히 꿈에도 바라던 일이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인간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이 서서히 그 부피를 달리하기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다 만약 또다시 상처받는다면 그때는 어찌한단 말인가. 희망이 커질수록 두렵기만 하다.
과연 26년간 받아 온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지, 어둠에 지배당했던 정신과 육체가 진정 빛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서인지 한 발을 내딛는 것도 쉽지 않아 자꾸만 움츠러들게 된다. 바보 같게도 26년을 살았다고는 하나 자신은 누구보다 나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만도 못할 것이다. 상처받는 것에는 익숙하나 스스로의 감정을 알고 드러내는 것에는 무지하다는 게 맞을 테지. 그러니 이리도 머뭇거리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이리도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조금만 용기를 내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인데 그것이 어찌 이리도 무섭기만 한지. 가슴을 묵직하게 압박하는 느낌에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실소부터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젠 결정을 해야 한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으니까. 이곳과 그곳은 다르지 않은가. 이왕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 저들의 시선에 원망이 깃들지 않도록 하는 게 이로울 것이다.
그러자면 어지러운 마음부터 진정시켜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는 통에 그마저도 어렵다 싶어 쓴웃음을 흘릴 때였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황제폐하 납시었사옵니다.”
벌써 식사시간인가. 고작 열흘 만에 이런 생각을 당연스레 한다는 것도 우습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리도 거침없이 다가오는지.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노릇이지만 황제의 그런 행동에 더 조바심이 드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고 허락의 대답을 했다.
곧 문이 열리고 들어오며 시선을 마주한 채 부드럽게 웃는 그를 향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낯설다. 하긴 고작 열흘 만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저런 시선도 미소도 낯설기만 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도 뭐랄까. 뭔가 묘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두렵다고 해야 할지.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싫지 않다는 점이다.
“유하, 또 책을 읽고 있었소?”
“예, 폐하.”
“그대는 책을 좋아하는군.”
그야 그 사람이 유일하게 허락했던 것이니까. 무엇보다 죽지 않고 살아가려면 이곳의 지식을 쌓아야만 한다. 무턱대고 부딪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을 테니까.
“유하, 그대가 원한다면 황궁 도서관이나 짐의 개인 서관을 이용해도 좋소. 진귀한 책이 많으니 마음에 들 거요.”
이상하다. 그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어째서 사내인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단 말인가. 거대한 대륙을 다스리는 황제로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을 텐데 뭐가 아쉬워서 자신을 받아들이는지. 솔직히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징이라는 이유 하나로 저리 호감을 보일 수도 있는 건가. 아니면 떠나겠다는 말 때문에 잡아 두려고 저러는 것인가. 하지만 굳이 잡아 두기 위해 저리 웃을 필요가 있나? 힘은 곧 권력의 중심이다. 차라리 억압한다면 몰라도 위선을 떨 이유는 없지 않나.
하물며 이곳은 동성애를 배척하지 않지만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이런 상대는 처음이라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게 생각할수록 더 복잡해지는지.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자 그가 성큼 다가와 옷소매에 반이나 가려진 손을 끌어다가 힘주어 잡아 왔다. 그 생소한 느낌에 움찔한 것도 잠시 운동이라도 한 듯 단단하게 알이 밴 손바닥에 신기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직 시일이 있으니 그리 고민하지 마시오. 그대를 다그치고 싶지는 않소.”
알고 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준다는 것쯤은. 그래서 더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이라 이쯤에서 결정을 내리고자 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나오지 않는 말에 몇 차례 입을 달싹거리다가 끝내 뻔한 질문만 쏟아냈다.
“급한 게 아니었습니까?”
“물론 이 같은 일은 처음이라 짐을 비롯해 모두가 불안해하는 건 사실이오. 그렇다고 그대를 강압적으로 옭아맬 생각은 없소. 그러니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시오.”
마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다는 듯이 손등을 토닥거리는 행동에 또다시 입술을 달싹거리자 그가 시선을 마주한 채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를 휘며 웃었다.
“그보다 유하, 식사하러 갑시다. 식사하고 오늘은 후원을 구경시켜 주겠소. 지난번에는 제대로 구경도 못 했지 않소? 그곳은 짐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곳으로 그대도 마음이 편해질 거요.”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인가. 문득 드는 생각에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자 다시 한 번 미소가 돌아왔다. 그 모습에 움찔거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을 잡은 채 침실을 나와 정갈하게 꾸며 놓은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이들의 예를 받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화려한 요리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자신을 배려하는 것인지 시녀들을 물리고 익숙하게 이것저것 챙겨 주는 그의 행동에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간간이 그가 하는 말에 대답도 해 가면서 그렇게 식사를 끝내자 다시 한 번 손이 잡혀 태양궁으로 향했다. 복도 양쪽으로 늘어선 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기둥과 조형물들을 둘러보며 태양궁 후원에 도착한 유하는 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는 생각에 잠겨 무턱대고 걷다 보니 풍경을 보지 못했는데 이런 느낌일 줄이야. 황금으로 장식한 태양궁이 웅장하고 화려한 멋을 자랑한다면 적월궁은 황금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뤄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후원은 뭐랄까. 자연의 일부를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목 밑으로 소담스레 피어 있는 꽃들과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 부드럽게 깔린 잔디와 산책로 끝 연못 가운데에 떠 있는 듯한 형상의 정자와 작은 폭포. 달빛을 받아 더 고아하게 보이는 풍경에 멍하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음에 드오?”
“예.”
“다행이오. 짐은 어릴 때 답답한 일이 있으면 이곳을 찾고는 했다오. 원래 이곳은 황제와 황후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만 특별히 태상황께서 허락을 해 주셔서 황자 시절 들어올 수 있었소.”
태상황이라면 선황제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신의 힘을 물려주었다고는 하나 아직 건재하다고 들었다. 그럼 태상황과 태상후도 황궁에 있는 건가?
“유하? 뭔가 할 말이 있소?”
“그분들은 황궁에 계십니까?”
“아아, 국혼하고 즉위식을 무사히 치르면 황궁을 떠나실 것이오. 지금은 수정궁(修程宮)에 머무르고 계시오.”
떠나다니? 황위를 물려주면 떠나야 하는 건가 싶어 그를 보자 의문을 이해한 듯 설명을 곁들였다.
“황후에게서 태어난 황자들은 매년 주최하는 사냥철이 아닌 이상은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소. 성인식을 치렀을 때 증표가 나타나지 않는 황자는 그때부터 자유의 몸이 되어 어디든지 갈 수가 있지만 증표가 나타난 황자는 황제로서 다음 후계에게 상징을 물려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오. 인생의 반 이상을 황궁에 저당 잡히는 것이지.”
말끝에 하늘 위로 요요하게 빛을 발하는 적월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짓는 표정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당 잡힌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닐 것이다. 정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지칠 테지. 한창 즐기고 싶은 나이에 황궁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교육을 받아야 하고 증표가 나타난 순간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려야 한다. 기껏 후계가 나타나도 이미 인생 반이 지나 버린 시점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황궁이라는 곳이 끔찍할 테지만 막상 떠나려면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자유를 찾아 작디작은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도 막상 떠나는 것이 막막하고 두려웠던 자신처럼. 아마 그들도 그런 심정일 것이다.
“그대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황후가 된다면 그대 또한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있어야 할 거요.”
황후가 된다면 그럴 테다. 만약 정말 황후가 된다면 그의 옆에서 몇 십 년을 살아가야 한다. 난생처음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에 서고, 처음으로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며, 반려라는 이름의 상대와 함께한다. 범인에게라면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일들이지만 뭐랄까. 낯설어서인지 묘한 기분이다.
“유하,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소. 하지만 동방대륙을 다스리는 황제로서 백성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기에 차마 놓아줄 수가 없소. 그러니 짐을 원망해도 되오.”
원망이라. 물론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를 원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세계에 넘어온 것도, 적월의 상징을 갖게 된 것도 그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역대 황제들과 달리 사내인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가 원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다고 그의 원망을 받고 싶지는 않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버티는 것도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무리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이상 진실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황후가 되겠습니다.”
“진심이오?”
글쎄. 아직 진심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어차피 방법이 없다면야 조금 더 일찍 결정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아직 정리가 안 된 거라면 짐이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소.”
“아닙니다. 정리됐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마음 한편이 무겁고 껄끄러웠지만 이미 입 밖에 낸 이상은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싶어 단호하게 답하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러워 밀어내려고 하자 더 힘주어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움직임을 딱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맙소, 유하. 답답하고 힘든 일도 많을 테지만 내 평생을 두고 그대를 아껴 주겠소.”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는 낯선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하는 말에 진실이 담겨 있는지 한낱 자신을 붙잡기 위한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기묘하고 이상한 기분. 하지만 싫지 않다. 나쁘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그의 진위를 파악하는 건 무리다. 더 생각하자면 두통마저 생길 것 같아 머릿속을 정리하고 가만히 넓은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생소한 세계에서 두려움을 뒤로하고 한 발을 내디뎠다. 이것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그 사실에 멈춰 있던 심장이 서서히 박동하며 마음속의 불씨를 키워 나갔다. 앞으로 미래가 어찌 전개될지는 모르나 언젠가는 온전히 어둠에서 해방되기를. 이곳이 지친 몸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