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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월의 후 1권 (4화)
二章. 적월의 후예 (3)


황후가 되겠다는 말을 하고부터는 산책을 하는 내내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진 청현을 보며 유하는 못내 불안하면서도 내심 잘한 결정이라 안도했다. 어차피 더 미룰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도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조금 더 빨리 결정할 것을 그랬다.
고작 한 발을 내딛지 못해 괜스레 호의를 보내는 그와 모두를 초조하게 했다는 생각에 사과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침전에 도착했다. 청현이 한결 시름을 덜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인데 고맙소, 유하.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오늘은 일찍 쉬도록 하시오.”
다정한 미소와 함께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뺨을 매만지는 행동에 유하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으로 유하가 당황스러운 듯 눈만 깜빡이자 청현이 다시 한 번 매끄럽게 입가를 끌어 올려 미소 짓고는 침전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유하가 참았던 막힌 숨을 작게 토해낼 때, 청현은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 위로 떠오른 미소를 흔적도 없이 지웠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적월궁을 빠져나간 후에야 청현의 입가로 조금 전과는 다른 싸늘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인간이라면 권력을 마다할 리가 없다. 떠나겠다는 말에 매일같이 들러 거짓으로 다정하게 대해 주면서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딱히 조급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괘씸했다.
가련한 그녀의 자리를 빼앗고 뒤늦게 나타난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오만하게 군단 말인가. 하물며 후계도 보지 못할 사내이다. 상징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내쳤을 것을 사내놈 비위나 맞춰야 한다는 사실에 청현은 치미는 짜증을 어찌하지 못하고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렸다.
“설화의 처소로 갈 것이다.”
“모시겠나이다.”
시종장의 눈짓에 시종들이 황급히 등을 앞세우고 태양궁 설화의 처소로 향하자 청현이 어지러운 심기를 다스리며 걸음을 옮겼다. 문밖에 도착해 주위를 모두 물린 청현이 빈실을 지나 침실 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그런 청현의 표정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폐하.”
고하는 소리도 없이 들어온 청현을 보며 설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소에 청현의 입가에도 따스한 웃음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왔다.
“늦은 밤인데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그저 적적하여 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하며 살포시 짓는 미소에 청현의 눈 밑으로 짙은 그늘이 졌다. 국혼을 하루 앞두고 무산되어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그녀의 처지가 가련하고 안타까워 가슴이 쓰리다 못해 답답했다.
무엇을 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존귀한 연인인데 고작 하찮은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 처소 밖으로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에 미안한 것이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책봉식이라도 치른다면 그녀가 이렇듯 몸을 낮출 이유도 없을 것을.
황후와의 국혼도 치르지 못한 상황이라 지금으로서는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떠나니 마니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시일만 질질 끈 유하를 떠올린 청현의 검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이런 처지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데. 정작 자신의 반려인 그녀는 이렇듯 처소 안에 갇혀 있다시피 하고, 상징을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 안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유하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폐하?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저 그대에게 미안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녀는 이렇게 폐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 점의 거짓도 없다는 듯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설화를 향해 고맙다며 작게 속삭인 청현이 가녀린 몸을 부드럽게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 누구도 감히 그대를 괄시하지 못하도록 짐이 지켜 주겠다.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라.”
“예. 소녀 또한 폐하를 믿고 따를 것입니다.”
설화는 곱게 미소 지으며 청현의 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든든하게 지켜 주겠다는데 무엇인들 못 참을까. 비록 하루아침에 처지가 바뀌어 버렸지만 연인이 변함없이 이렇듯 자신의 곁을 지켜 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자신을 두고 비웃는 말들로 떠들썩하다지만 그것도 곧 책봉식을 치르고 당당하게 황제인 그의 곁에 서게 되면 차츰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니 마냥 비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설화는 애써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수습하고 조심스럽게 넓은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보다 어찌 됐습니까? 아직도 거부하십니까?”
“안 그래도 오늘 확답을 받았다. 어차피 제깟 놈의 대답이야 뻔하지.”
명백히 무시하는 발언. 제국의 황후이자 신이 맺어 준 운명의 반려를 상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청현은 유하를 떠올리고는 분노를 담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청현을 본 설화의 입가로 조소와도 같은 짧은 웃음이 떠올랐다가 제풀에 놀란 듯 황급히 표정을 감췄다.
“폐하, 황후마마가 되실 분이십니다. 반려를 상대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상징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 주고는 있지만 결코 그런 놈을 반려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하오나 폐하.”
“설화, 짐의 운명은 그대이다. 사내놈이 짐의 운명이라니 터무니없지. 그러니 그대도 그놈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라.”
이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함이 묻어 나오는 말에 설화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자 청현이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원망을 해도 좋으련만 오히려 걱정을 하는 여리고 착한 연인이 안타깝기만 하다.
게다가 떠난다는 유하를 잡아 두고자 하루 두 번씩이나 적월궁에 들러 같이 식사하고 산책까지 하고 있으니 지금 설화의 심정이 오죽할까. 속도 모르고 소문을 퍼트리는 아랫것들의 말을 들었으면 더 속이 상할 터였다.
그런데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힘들어할까 내색 한번 없이 꾹꾹 눌러 참기만 하는 속을 어찌 모르겠는가. 미리 양해를 구하고 하는 행동임에도 청현은 설화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최대한 서두르겠다. 그대를 정식으로 황비로 들인 후에는 더 이상 거짓 관계도 유지할 필요 없으니 그때까지만 참아라.”
“그래도 율법이 있는데.”
“황후로 대하기만 그만이다. 사내놈 주제에 그 이상을 요구하지는 못하지.”
무엇보다 요구한다고 한들 들어줄 마음도 없다. 상징 때문에 가장 고귀한 위치에 오르게 됐으니 딱 그만큼만 대우해 주면 그만인 것이다.
“이제 그놈 이야기는 그만하자. 좋은 기분 망치고 싶지 않군.”
그리고는 그녀의 섬섬옥수를 꼭 잡아오는 청현의 행동에 설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좋다. 그대와 이리 단둘이 있을 때가 좋아.”
“소녀도 그렇습니다, 폐하.”
어느새 다정하게 풀어진 분위기에 청현이 미소 짓자 설화의 단아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대로 그대를 안고 잠들었으면 좋겠군.”
“많이 피곤하시면 그리하시어요. 이제 곧 부부지연을 맺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또다시 흠을 잡고자 말들이 많겠지만 설화는 오히려 청현이 그리하기를 바랐다. 그래야지만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희미한 불안감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화의 바람은 곧바로 표정을 굳히는 청현의 말에 소리 없이 삼켜야 했다.
“그럴 수는 없다. 더 이상 그대를 소문 속에 방치할 수는 없어. 설화, 짐은 소중한 연인인 그대를 혼례도 치르지 않고 함부로 안고 싶지는 않다.”
애가 타고 조급해도 참을 것이다. 그리 속삭이며 다시 한 번 안아 오는 청현의 품 안에서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굳었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되찾았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자신을 소중하게 아끼는 그의 마음을 믿는다. 지금 느끼는 불안감도 단순한 기우에 지나지 않으리라. 설화는 넓은 품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애써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

지난밤 후원에서 황후가 되겠다는 말을 한 지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애타고 불안해하던 이들의 표정이 밝아진 것뿐만 아니라 스스럼없이 웃으며 다가오니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내인 자신의 몸을 여인처럼 마사지하고 화장까지 하려고 했을 때는 기겁하며 거부했었다. 그 때문에 아쉬워들 하는 것 같지만 사내가 화장이라니. 안 그래도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에 지금 입고 있는 옷만 해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나.
하물며 키가 황제보다는 못하지만 176cm로 이곳의 아담한 여인들에 비하면 상당히 큰 키에 속한다. 누가 봐도 사내인 모습으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근 한 식경 가까이 실랑이한 끝에 큰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천만다행이다. 여인들이 이리도 무서운 존재라는 걸 몰랐는데 차라리 거친 사내들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울지도. 실랑이로 지친 몸을 하고 또다시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고 비로소 혼자가 되었을 때야 유하는 진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몇 십 년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곧게 펴고 여느 때처럼 찾아온 그와 아침 식사를 한 후에 혼자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또다시 책을 들었다. 이미 이곳의 역사와 경제관념, 신전, 지리, 예법 서적은 대부분 읽었다.
오늘은 황실 계보와 황궁 내에 종사하는 이들과 관직에 대해 알아 둘 생각이다. 앞으로 그들을 상대하려면 기본적인 사항은 필수일 테니까. 그런 생각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한자와 비슷한 문자가 적힌 책을 펼쳤다.
세로로 빼곡하게 써내려 간 두꺼운 책을 다 읽기까지 유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권을 읽고 또 다른 책을 펼치고 한참을 시간을 보냈을까. 점심때라는 시녀장의 말에 간단하게 식사를 끝내고 잠시 피로를 풀 때였다.
“고하옵니다. 태사부께서 드셨사옵니다.”
태사부라면 황제의 스승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침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린 유하는 잠시 틈을 두고 들어오라 답했다. 곧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사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귀한 적월의 후께 신 태사부 소장환이 인사 올립니다. 제국의 영광과 적월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강유하라 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황제의 스승이라더니 제법 깐깐해 보이는 학자 타입이다. 저런 사람은 상대하기 껄끄럽다. 하긴 누군들 껄끄럽지 않을까.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에 속으로 실소를 흘리고 태사부를 바라봤다.
“즉위식은 보름 후로 잡았습니다. 그때까지 시일이 빠듯할 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미룰 수가 없으니 신을 믿고 따라 주십시오.”
보름이라. 급하기는 급했나 보다. 결코 길지는 않은 시일이지만 딱히 머리가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라 작게 수긍하자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주름진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펴진다.
쉽게 대답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든가 그도 아니면 내심 불안할 것이다. 시일이 촉박하니 더 그럴 수도 있고, 그 마음 모르는 바도 아니라 가만히 있자 태사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이곳의 글을 읽고 쓰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황후로서 행해야 할 일과 그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와 황후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행해야 할 일과 마음가짐이 같으니 안으로는 일곱 가지 교훈을 닦고 밖으로는 세 가지 지극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도리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싶어 가만히 듣고 있자 잠시의 틈을 두고 설명이 덧붙여졌다.
“윗사람이 늙은이를 공손하게 섬기면 아랫사람도 그 본을 받아 더욱 효도할 것이며, 윗사람이 나이를 따져서 존경하면 아랫사람도 더욱 우애할 것이고, 윗사람이 모든 일을 즐겁게 해 주면 아랫사람은 더욱 마음이 너그러워질 것입니다. 또한 윗사람이 어진 사람을 친절하게 대한다면 아랫사람은 더욱 벗을 가려서 사귈 것이며, 윗사람이 재물을 탐하지 않으면 아랫사람 또한 재물을 두고 다투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고, 윗사람이 청렴하고 겸양한다면 아랫사람은 더욱 절개를 지킬 것이니 이 같은 일곱 가지 교훈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해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황후라 하면 황제를 보필하고 만백성의 어머니이자 자식으로서 효를 바탕으로 하되 고상한 성품과 격정을 누르는 참을성, 겸손과 자비심, 신앙심, 나쁜 행동과 생각을 삼가는 절제 그리고 검소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禮)로써 일을 구별하고 의(義)로써 행동을 세우며 순리(順理)로 모든 일을 행한다면 만조백관이 우러러볼 것이고 무지한 백성들 또한 믿고 따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책을 통해 익힌 지식과는 다른 지식이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아 머릿속으로 태사부의 말을 되새기며 기억하려 노력했다. 그런 유하의 차분한 표정에 짐짓 놀란 듯 태사부의 눈빛에 흥미로움이 깃들다가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밖으로 행해야 할 세 가지 일이란 극진한 예와 어진 행동이 그 첫째요, 어질고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는 지혜를 갖추는 게 그 두 번째요, 현명한 판단이 그 세 번째이니 행하고 베푸는 것은 넓게 하며 얻고 친해지는 것은 더욱 많게 하라 했습니다.”
차근차근 설명하는 태사부의 말은 잠깐잠깐 휴식을 제외하고 이후로도 몇 시진은 계속됐다. 황실 계보를 비롯해 예절과 다섯 가지의 인품, 몸가짐의 여섯 가지 근본에 대해 알려 주고 마지막으로 수업시간이 반 시진 정도 남았을 때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수업 방식이기에 자칫 헷갈리는 내용도 있었지만 태사부의 질문에 유하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의 깊은 뜻까지는 온전히 이해하는 데 부족했으나 내용 전체를 머릿속으로 기억하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은 경서와 역사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유하의 비상한 기억력과 이해력에 태사부는 짐짓 놀라웠으나 이렇다 할 칭찬 한마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리고 물러났다. 그런 태사부를 보며 유하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예를 다했을 뿐이다.
그렇게 몇 시진의 수업이 끝나고 나니 이미 창밖으로 어둠이 깔린 상태였고 비로소 유하는 굳어 있던 긴장을 풀었다. 오늘 수업으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줬으니 아마도 내일은 더 빡빡하게 진행될 터다.
몇 시간을 바른 자세로 있어야 했기에 허리가 뻣뻣했지만 그래도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였다. 밖에서 잠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진다 했더니 고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청현이 들어왔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성큼 다가온 청현이 움찔거리는 유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얇은 허리에 짐짓 놀라워하다가 조심스럽게 떨어져 허리까지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청현의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오다가 태사부를 만났소.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분이신데 그대에게는 감탄을 많이 한 듯하오. 그 깐깐한 분이 웃더군.”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내일부터 수업을 늘릴 것 같은데 괜찮겠소? 힘들면 말씀하시오. 짐이 태사부에게 언질을 하리다.”
“괜찮습니다.”
이미 예상하고 각오도 하고 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청현이 다행이라 속삭이며 유하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또다시 익숙하지 않은 접촉에 유하가 움찔거리며 한 발 물러나려고 하자 청현이 마치 달래듯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도 식사하고 후원에 가겠소? 오늘은 후원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십시다. 달빛 아래 차향과 어울리면 더 마음이 편할 거요.”
후원. 한 번 본 것뿐인데 참으로 아름다운 그 광경을 잊지 못하던 차에 청현이 그리 말하자 유하가 저도 모르게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로 입을 꾹 다문 유하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짐에게 할 말이 있소? 있으면 편히 말씀하시오. 그대와 짐은 반려가 아니요?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다면 짐이 모두 들어주리다.”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준다. 26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저리 말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이곳에 와서 너무도 달라진 현실에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우면서도 결코 싫지 않아 차갑게 얼어붙었던 유하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 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감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가도 가벼울 수 있고 헤아릴 수 없이 깊다가도 얕을 수가 있으며 방대하다가도 좁을 수도 있다. 또한 제아무리 단단하게 응어리진 상태라 해도 그것을 녹이는 데 결코 시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그 마음을 품은 당사자조차 당황스러울 만큼 그렇게 변화는 빨리 찾아왔다. 그리고 그 변화에 유하 또한 여전히 낯설고 두려움에 움츠러들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어둠을 당연하다 여겼던 이가 빛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내 그 빛이 내뿜는 온기를 갈망하듯이 생경한 타인의 온기에 유하는 빠른 속도로 마음을 열어 갔다. 누구보다 더 간절하게 갈망했기에 유하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아닙니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그걸 걱정한 것이라면 신경 쓰지 마시오. 그대와 이리 같이 있는 게 짐은 좋소. 그러니 괜한 마음 쓰지 말고 우리 식사하러 갑시다.”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 눈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웃은 청현이 유하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생경한 감촉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유하가 한 발 물러나자 청현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다시 한 번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그대가 사내라 하나 짐은 조금도 개의치 않소. 그만큼 그대는 사랑스럽소, 유하.”
자신의 인생에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유하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반면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범람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신은 사내가 아닌가. 그리 살아왔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스럽다니.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혹 자신을 놀리려고 이러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다가도 곧 다른 생각이 치고 들어오는 통에 무엇 하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대수롭지 않게 농담으로 넘겨 버릴 수 있는 말도 지금껏 농담이라고는 해 보지 않았기에 가벼이 넘길 수도 없다. 누군가를 상대로 온기를 느낀 것도 처음이었고 핍박이 아닌 다정하게 다가오는 상대도 처음이었으며 폭력이 아닌 단순한 접촉조차 처음이기에 더 그랬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굳은 얼굴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유하를 보며 청현이 듣기 좋은 낮은 울림의 웃음을 흘리고는 다정스레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늘씬한 허리를 한쪽 팔로 감고 달래듯 등을 두드렸다.
마치 조금만 힘을 줘도 깨질세라 조심하는 그 행동에도 또다시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유하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살며시 누르는 청현의 눈빛이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과는 대조되게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국혼과 즉위식 준비로 황궁의 모든 이들이 들뜬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일 때 태상황과 태상후가 머무르는 수정궁은 조용하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 황제와 황후로서 살다가 이제야 자유를 찾아 떠날 두 사람을 배려해 모두가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으니 두 사람은 눈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설화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설화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리자 태상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너를 부른 연유를 아느냐?”
“소녀가 어찌 넓은 뜻을 헤아리겠습니까.”
두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은 자신이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설화는 무슨 말을 할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던 두 사람이다. 결코 밉보일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도 황궁에 찾아올 때면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었다.
적월의 후예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과 그의 국혼을 끝까지 반대했던 이들이 아닌가. 아마 제국 내에 혼란과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으리라.
그런 두 사람이 지금 같은 시기에 자신을 부른 연유야 뻔할 것이다. 달갑지 않은 상황에 설화는 미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고자 시선을 내리며 입안을 질끈 깨물었다.
“우리 예비 황후는 만나 보았느냐?”
“아직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입은 무겁고 한 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할 정도로 명석해 태사부의 칭찬이 자자했다. 비록 사내라 하나 신들께서 보내 주신 존귀한 신분이니 당연하겠지.”
두 사람 또한 아직 유하를 보지는 못했지만 매일같이 적월궁 소식을 듣고 있어 흡족한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설화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펴보는 눈빛만큼은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과는 달리 여린 살을 파고들 정도로 매섭기만 했다.
“기껏 너를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미운 것이냐?”
“아닙니다, 태상후마마. 소녀가 어찌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설사 품었다고 한들 결코 내색할 수 없으리라. 눈앞의 두 사람은 청현과는 그 깊이가 달랐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 감추고 억눌러 놓은 내면까지 모조리 파헤칠 듯한 시선에 설화는 흐트러지려는 심기를 필사적으로 다스렸다.
“아니라면 다행이나 미워도 어쩌겠느냐. 우리가 너와의 국혼을 끝까지 반대한 이유는 이렇듯 온전한 상징을 가진 진짜 후예가 나타날 것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평생 가질 수 없는 온전한 상징. 또 그것인가. 붉은 머리카락의 반쪽 상징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의 안타까움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아야 했고 모든 이들의 시선에서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소소한 행동, 향하는 발길 하나에도 감출 수 없는 호기심, 의구심 그리고 비웃음을 담은 시선들은 언제나 숨통을 옥죄이듯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 때문에 무엇 하나 자유로이 행동할 수 없었다.
아니 해서는 안 되기에 못 한 것이다. 조금의 자유도 없이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고자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을 안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답답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루하루 숨이 막혔으니까. 그러나 그를 만난 그 순간부터 반쪽이나마 상징을 가지고 태어난 사실에 감사했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그의 곁에 가까이 갈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했다.
내심 온전한 상징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안도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그의 곁에 당당히 서고자 그리 노력하며 버텨 온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고작 하루를 남겨 두고 이리 비참해지다니.
온전한 상징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아마 자신은 평생을 반쪽짜리 상징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 암담한 현실에 설화는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며 옷자락 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매섭게 꽂히는 시선의 의미를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억울하고 그보다 더 비참하지만 차마 내색할 수가 없어 설화는 설움을 삼키는 대신 가면 같은 미소를 덧그리며 담담함을 유지했다. 그런 설화를 보는 두 사람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진 것도 한순간이었다.
“신들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인간인 우리가 속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아이가 적월의 후로서 완벽하다고 여기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야. 이번 대에 사내인 후예가 들어온 이상 반쪽이나마 상징을 타고난 너를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지. 누군가가 그리 몰아갈 테니까.”
누구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좀 전보다 한층 더 싸늘함을 담고 흘러나오자 설화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너도 알고 있는 듯하니 길게 말하지 않으마. 지금으로서는 너를 황비로 들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법, 이 이상 욕심을 부려 탐해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느냐?”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설화의 대답을 끝으로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냉정하게 축객령이 떨어졌다. 끝까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조용히 물러난 설화는 수정궁을 벗어나고야 일순 멈칫한 후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 설화의 눈빛이 언제 담담했느냐는 듯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