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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월의 후 1권 (5화)
二章. 적월의 후예 (4)


국혼과 즉위식을 하루 앞두고 모든 일정을 멈춘 유하는 오랜만의 휴식에 느긋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가. 근 보름 가까이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모르겠다.
첫날 오후에만 태사부에게 교육을 받았던 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다음날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으로 휴식은커녕 식사하고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를 빡빡하게 보냈다.
새벽같이 눈을 뜨면 잠시 산책을 하고 책을 읽다 보면 어김없이 그가 찾아와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차를 마시고 또다시 가볍게 산책하고 그가 돌아가면 오전 내내 황궁 예법과 춤, 차를 우려내는 법, 따르는 법 등을 익혔다.
점심은 가볍게 혼자 하고 오후가 되면 저녁 시간 전까지 태사부에게 붙잡혀 꼼짝없이 수업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태사부가 자신을 골리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루가 지날수록 수업 범위와 양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뚝뚝했던 처음과는 달리 태사부의 얼굴에 자리한 지극히 만족스러운 웃음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쯤은 유하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사부는 항상 말버릇처럼 뛰어난 인재라 가르치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더 많은 수업을 진행하는 통에 어지간한 유하도 죽을 맛이었지만 사람을 알아 가고 호감으로 다가가며 온기를 배워 나갔던 지난 보름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청현과의 사이가 조금 더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치 그동안 보였던 관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보름 전 이마에 처음 입맞춤을 했던 이후로 청현은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다정하게 끌어안는 건 예사였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도 빈번해졌다.
그때마다 유하는 당황스러움에 뻣뻣하게 굳거나 허둥지둥하다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붉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고작 보름 사이에 너무도 많이 변한 것이다. 그 변화에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다.
이제야 어둠 속을 빠져나왔기에 낯설었던 만큼 한번 받아들인 빛에서 벗어나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하의 단단했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입안이 바짝 말라갈 정도인데 더 무슨 말을 할까. 작은 온기에도 애가 타고 거친 파도처럼 밀려드는 수많은 감정에도 물러나기보다는 비록 더딘 걸음이라 하나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언제나 성장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 멈춰 있던 자신이기에 더 거부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 누가 거부하겠는가. 시선을 마주할 때면 미소를 짓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표정을 굳히면 걱정스럽게 안부를 물어 오는 사람이다.
하루를 빡빡하게 보내고 피곤하지 않으냐며 자상하게 물어올 때면 쌓였던 하루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는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손을 잡은 채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통에 도무지 진정이 안 됐다.
과거의 자신은 전혀 느껴 본 적 없는 그 반응에 유하는 묘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어딘가가 살짝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싫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애써 마음속의 불안함을 떨치려고 어색한 웃음을 짓던 유하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그때 때마침 문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시녀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사옵니다.”
안 그래도 저녁 식사를 하러 올 때가 됐다 싶어 기다리던 차에 뜻밖의 서신을 보냈다는 말에 유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신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 읽어 내린 유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곧게 펴졌다.
“오늘 식사는 혼자 하겠네.”
“내일 국혼과 즉위식이라 오늘 많이 바쁘신 것 같사옵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옵소서.”
걱정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하는 시녀장의 행동에 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쯤은 자신도 알고 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정무를 못 볼 테니 오늘 그 일을 모두 해야겠지. 사실 그동안에도 바쁜 일을 젖혀 두고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나.
내심 섭섭하기는 했으나 서신에도 미안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적혀 있어 섭섭함은 이내 사라졌다. 게다가 그는 황제이다. 그만큼 바쁜 건 당연하고 충분히 이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갔다.
여기저기서 공손히 예를 올리는 이들에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요리사와 시녀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식사하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혼자 하는 식사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럴까. 둘이 같이한 식사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리도 허전함을 느끼는 것인지. 하나둘 나오는 요리들을 보고 차마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어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고 식사를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끝마친 유하는 침실로 돌아가 차를 마신 후 입안을 약초 물로 헹구고 다시 침실을 나왔다. 적월궁 정원으로 향하려던 유하가 멈칫거리자 시녀 중 하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필요하신 것이 있사옵니까?”
“후원에 다녀오겠다.”
“입구까지는 모시겠사옵니다.”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후원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들어가지 못할 것이나 황제인 청현과 후에 오를 유하에게만은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은 혼자 산책해야겠지만 후원이라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심 기대를 하며 태양궁으로 향한 유하는 곧바로 후원 입구로 들어섰다.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멈추는 기척에 이곳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으며 정자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조금은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조급해진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
자신이 언제 이리도 변했나.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생각에 실소를 내뱉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정자 지붕 끝에 절로 풀어진 얼굴로 산책로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곧바로 귓속을 파고드는 맑고 청아한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유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연못 중앙에 지어진 정자 위로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황제인 청현과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 정자하고는 제법 떨어진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무엇과도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너무도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유하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눈과 귀가 잘못된 것인가. 후원은 황제와 황후 이외에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하물며 붉은 머리카락이다. 적월의 후예인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색. 그래서 사내이면서도 상징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즉위식과 국혼까지 치르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시야에 들어오는 저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황제와 마주하고 행복하다는 듯 웃는 붉은 머리카락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오늘 바쁘다고 했다.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라고. 보고 싶은데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 서신을 보냈었다.
그럼 저 여인과 같이 있는 사람은 황제가 아닌가. 설마 황제와 똑 닮은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터무니없는 생각에 실소를 흘린 유하의 일그러진 얼굴이 서서히 가면을 뒤집어쓰듯 무표정으로 변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머리가 아픈 건가. 아니면 가슴이 아픈 건가. 아프기는 한데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 왜 아픈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렇기에 유하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고 조금씩 생기를 머금어 가던 붉은 눈동자에서 빛이 꺼지는 것 또한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빛을 잃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어 유하의 마음이 온전히 내려앉은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하는 몰랐다.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왜 그러한지를 알지 못하기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청현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할 수만 있다면 땅속으로 꺼져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었다.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르는 채로 유하는 급히 산책로로 들어섰다. 청현 또한 유하가 혼자서 이곳에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순간적으로 드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낄 사이도 없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청현을 설화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애처롭고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설화를 보며 청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먹을 끌어 쥐었다.
왜 하필 지금 나타난단 말인가. 고작 하루를 앞두고 있는데. 오랜만에 갖는 설화와의 시간을 방해한 유하가 짜증스러우면서도 점점 멀어지는 위태로운 뒷모습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결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청현 자신은 유하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적월의 후였다. 신이 무슨 의도로 이런 시험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이가 나빠져서야 결코 좋을 게 없다. 그랬기에 매일같이 찾아가고 다정한 척 거짓으로 대했던 것이다.
감정표현에 낯설어하는 유하의 경계를 허물어트린 결과, 요 며칠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에 내심 만족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핑계를 대고 힘들어하는 설화를 달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아직 설화를 황비로 들인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부딪힌단 말인가. 무엇 하나 뜻대로 안 풀리는 상황에 청현은 울컥 치미는 짜증을 애써 가라앉혔다.
“설화, 오늘은 그만 가 봐야겠다.”
“하오나 폐하…….”
“미안하다. 대신 밤에 찾아가마. 그대도 알지 않나? 저이는 적월의 후를 거부했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을 돌려 받아들이게 했는데 또다시 말썽이 생기면 그대에게도 좋지 않아. 그러니 오늘은 이해해다오.”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기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청현의 품 안에서 설화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진정 그 이유 때문인지 묻고 싶었으나 설화는 침묵을 지키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만약 물었다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올 것이 두려웠다. 그것을 어리석게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어 애써 웃음을 보이는 설화의 모습에 청현은 안심한 듯 웃으며 붉고 도톰해 탐스러운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청현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정자를 나가 연못의 다리를 건너는 발걸음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유로움을 잃고 급해지고 있었다. 그런 청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지켜보는 설화의 두 눈에서 눈물이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설화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변하지 마시어요, 폐하.”
변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두고 그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서는 안 된다. 다른 건 모두 참아내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어떤 심정으로 버텼는데 그가 변한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단순한 기우일 것이다.
그저 경멸하며 ‘놈’이라 칭하던 이를 ‘저이’라 칭한 것뿐이지 않은가. 황후로 올리고 겉으로나마 사이가 좋은 척해야 하기에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고자 그리한 것일 테다. 그러니 단순한 호칭만으로 그가 변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오선을 같이 하고 밤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만 봐도 알지 않나.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없이 따스하고 다정하기만 하다. 그걸 알기에 결코 그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의심하지 않는데 믿고 있는데도 불안하다. 이상하게 초조하고 그에 더해 심장이 몹시도 아려 오는 것 같아 설화는 생각을 떨치고자 고개를 내저었다. 불길하게 뛰는 심장을 달래고자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설화의 표정이 어둡게 침잠했다.

*****

유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는 통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걸음을 빨리할 뿐이었다. 그렇게 서둘러 후원을 벗어나는 유하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과 호위들이 생각보다 빨리 나온 유하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유하의 표정은 무(無)에 가까웠지만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유하는 그들을 멍하니 지나쳐 앞서서 적월궁으로 향했다. 곧은 허리와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보아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뒤따르는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불안하게 일그러졌다.
자신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나 상징을 타고나고도 황후 자리를 거부했던 사람이지 않은가. 만약 그가 또다시 거부한다면 천호국의 미래도, 자신들의 미래에도 결코 좋은 결과는 없을 것이다.
그건 황후에 오르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저주가 달리 저주겠는가. 유하가 적월의 상징을 가지고 나타난 순간, 이들로서는 좋든 싫든 그를 경외하고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현 또한 유하가 이곳에 정을 붙이도록 다정하게 대했다. 설사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에 지나지 않더라도 다음 대 후예들이 나타날 때까지 황후로 대우해 주면 자신으로서는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자신에겐 사랑하는 상대가 있지 않나.
하물며 그 상대 또한 반쪽이나마 후예의 상징을 타고났다. 사내인 유하와 달리 후계를 볼 수 있는 여인의 몸. 청현의 입장에서는 유하가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고 반감부터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달빛 아래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창백한 얼굴이 잊히지가 않는다.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외면해 버리는 그 모습에 어딘가가 욱신거리고, 위태로운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선명하지 않고 흐릿한 무언가에 청현은 후원을 가로지르며 불평을 토해내듯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하가 상징을 타고난 이상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변명을 해야 한다.
“쯧, 마음에 안 드는군.”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고사하고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기가 막히게도 처지가 바뀌었지 않은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유하 때문에 상처받은 그녀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변명하고 달래 줘야 한다니.
차라리 유하가 확실한 적월의 후예라는 걸 알 수 있다면 속 시원하게 해결을 볼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고작해야 겉으로 보이는 상징이 전부인 것이다. 자신처럼 광명의 상징은 성인이 된 순간부터 이마 정중앙에 불꽃의 형상이 생긴다. 반대로 적월의 후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로 태어난 그 순간, 후예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각성한 후의 힘이다. 광명의 후예는 몸 안에 강한 신력이 깃들어 전투에 탁월한 능력이 보인다. 반면 적월의 후예는 전투보다는 치유와 보호력에 가까운 신력을 지니고 있다. 두 신의 후예가 운명에 순응해 국혼을 올리면, 그 후 두 후예는 각성하여 온전한 힘을 드러낸다.
문제는 청현이 지닌 전투에 깃든 신력은 각성 전인 지금도 쉽게 느낄 수 있고 겉으로 드러낼 수도 있으나 적월의 힘은 다르다는 것이다. 보호와 치유에 깃든 능력은 유하의 몸에 이상이 없는 한은 드러나지 않는다. 당장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 때라면 적월의 후로 인정받은 이의 신력을 확인하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겉모습이 완벽한 상징이라고는 해도 유하는 여인이 아닌 사내였다. 게다가 반쪽 상징인 설화마저 있는 상황이었으니, 확인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하의 힘을 확인하고자 상처를 입힐 수는 없잖은가. 하물며 반쪽을 타고난 설화를 상처 입혀 확인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라 청현이 나직하게 욕설을 쏟아냈다.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다. 사내 주제에 속 좁은 계집도 아니고 뭐란 말인가. 달래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마음에 안 든다. 생각할수록 치미는 짜증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가 어느새 도착한 적월궁 앞에서 깊게 호흡을 가다듬고 표정을 수습했다.
밖에서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던 이들이 적월궁에 들어서는 청현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그들을 지나쳐 가장 안쪽에 있는 침실 문 앞에 당도한 청현이 시녀장을 향해 눈짓했다.
“황제폐하 납시었사옵니다.”
시녀장이 고하는 소리에 아침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슬쩍 미간을 찌푸린 청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 봤던 그때처럼 창밖만을 바라보는 뒷모습에 청현이 살짝 주먹을 끌어 쥐었다가 펴고 천천히 다가갔다.
“유하, 왜 그러고 있는 거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물으며 유하의 허리에 팔을 둘러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잠깐 습관처럼 움찔거렸을 뿐 유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후원까지 오고서 어찌 그냥 간 거요? 무슨 일이 있나 해서 걱정했소.”
다정하게 물어오는 청현의 말에도 유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지금껏 느꼈던 온기가 한낱 먼지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유하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던 탓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듯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마저 한 사람에게 종속되어 복종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가슴 속에 희망의 작은 불씨가 아슬아슬하게 꺼지지 않고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희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도 없이 기계처럼 인형처럼 명령받은 일을 처리하는 삶을 살아왔다.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으나 유하로서는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랬던 자신에게 믿을 수 없게도 새로운 삶이 찾아왔다. 낯설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새로운 인생이.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온기에 당황하고,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다정함에 행복하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잡은 온기가 기꺼워 붙들고 싶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스스로를 알면서도 놓치기 싫어 결국엔 받아들이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이상하게 아플 뿐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오. 혹 후원에 있었던 일로 오해를 하는 것이오?”
오해인가. 무엇에 대한?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다른 문제로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할 지경이었다.
그걸 모르는 청현은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는 유하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바로 펴고 조심스럽게 팔을 풀어냈다. 그리고는 여전히 창밖만을 바라보는 유하의 몸을 돌려세워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짐을 보시오, 유하.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대가 생각하는 게 아니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 같은 아이요. 오랜만에 황궁에 왔기에 잠시 짬을 내서 후원을 구경시켜 준 거요. 그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부디 오해는 하지 마시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너무도 담담한 청현의 말에 유하가 멍한 시선을 들어 바라봤다. 유하의 얼굴은 얇은 유리가면을 덧씌운 듯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청현이 그를 처음 봤던 그때처럼 위태로운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묘한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청현이 절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곧게 펴고 입을 열려는 찰나 침묵만을 지키던 유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상징, 붉은 머리카락 여인이 있으면서 왜 제게 후예라 하십니까?”
같은 상징을 타고났다면 후계를 볼 수 있는 여인이 황후가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헌데 어째서 사내인 자신을 황후로 올리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그도 자신을 이용하려고 다가온 것이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공허했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스르르 눈이 내리깔렸다. 덕분에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청현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마저 검붉은 색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란 듯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유하, 그 때문에 오해를 한 것이오? 짐이 말하지 않았소. 적월의 후예는 그대뿐이라고. 그 아이는 붉은 머리카락만 타고났을 뿐 눈동자는 검은색이오. 적월의 후예가 아니라는 말이지.”
“검은색.”
“그렇소. 그 아이는 그저 반쪽일 뿐이오. 진짜 적월의 후예는 그대이고 짐의 반려 또한 그대요. 그러니 부디 다른 오해는 하지 마시오. 짐이 그대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소?”
안타깝다는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감싸 오는 청현의 행동에 유하는 멍한 눈을 들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착각인지 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청현의 말대로 그가 자신을 속일 이유는 없으니까.
자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뒤를 받쳐 주는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을 굳이 속여 가면서 이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유하는 슬쩍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청현의 말대로 단순한 오해였으리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야 유하는 가면 같은 무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단순히 오해로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통에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건 고사하고 멈추지 않으면 자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유하는 두려웠다. 지친 듯 눈을 감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유하를 보며 청현 또한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안도했다.
“유하, 오늘 일은 본의 아니게 그대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하리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나 짐의 반려는 오직 그대뿐이오. 그 사실을 항시 잊지 말고 짐을 믿어 주면 고맙겠소.”
단호한 어조와 다정함이 어우러진 청현의 말에 유하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현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유하로서는 생소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저 믿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내심은 모른 채 그저 유하의 수긍에 청현은 만족스러운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한 번 이마 위로 입을 맞추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다행이오. 그보다 피곤하지 않소? 내일 국혼과 즉위식까지 치르려면 일찍 쉬는 게 좋을 듯한데. 그대가 원한다면 짐이 옆에 있어 주겠소.”
“괜찮습니다. 그만 가 보십시오.”
“그대가 그걸 원한다면 그리하리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내일 봅시다, 유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청현은 이별이 아쉽다는 듯 이마 위로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붉은 머리카락을 들어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슬쩍 미소를 머금고 침실을 나가는 청현의 뒷모습을 문이 닫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유하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믿음이라…….”
과연 진실로 상대를 믿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자문해도 나오지 않는 답에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나치게 조용한 탓인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린 듯 심해와도 같은 침묵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째서일까. 침묵은 언제나 익숙했는데 오늘따라 이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견디기가 힘들다. 원래 세상이었다면 이런 기분도 못 느꼈을 테지.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상황 또한 달라졌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내이면서 같은 사내의 반려로서 제국의 황후로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 내일이다. 몇 시간만 지나면 자신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결정이 과연 잘한 일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인간으로서 어딘가가 결여되고 불완전한 자신이 아닌가. 그런 자신이 정말 이곳에서 살아도 되는지, 호의를 품고 다가오는 이들을 믿어도 되는지, 또다시 어리석게 이용당하는 건 아닌지. 끝도 없이 차오르는 의문과 혼란, 불신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간절하게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냥 속 편하게 믿어 버리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명령대로 움직이는 도구가 아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새로운 세계에 왔으니 그 정도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어느새 가슴 속에 자리한 작디작은 불씨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탓에 자꾸만 원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나중에 또 어떤 욕심을 부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인간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만약 그마저도 안 된다면 자신은 무너질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거짓이 아니기를.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이기를. 요요히 빛나는 붉은 달을 올려다보며 유하는 간절하게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