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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월의 후 1권 (6화)
三章. 소헌황후(昭憲皇后) (1)


지난밤 잠을 설치고도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눈을 뜬 유하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기 입에나 들어갈 법한 크기로 작게 말아 놓은 주먹밥 같은 걸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시녀들에게 잡혀 치장에 열을 올렸다.
마사지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려 봉잠으로 장식하고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한 후에 붉은색에 화려한 금박으로 자수를 놓은 대례복을 입었다. 그 모든 일을 끝냈을 때 거울을 본 유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화장한 탓인지 꾸민 탓인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어딜 봐도 사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유하가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있자 시녀장과 시녀들이 웃음을 흘렸다.
“아름다우시옵니다. 황후마마.”
“오늘 누구보다 빛나실 것이옵니다.”
“이리도 아름답게 변하시어 폐하께서 보시오면 분명 놀라실 것이옵니다.”
칭찬은 아니겠고 놀리는 것인가. 사내에게 아름답다 말해 본들 좋은 말은 아니라 유하가 슬쩍 거울에서 시선을 돌리자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붉은 면사가 덮어씌워졌다.
유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이들로서는 무사히 국혼과 즉위식을 치르게 됐으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와는 달리 확연히 들뜬 이들을 보며 유하는 절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마마, 이제 나가셔야 하옵니다.”
시녀장이 호들갑을 떠는 이들을 진정시키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양쪽에서 시녀들이 발등을 덮는 옷가지와 면사가 밟히지 않게 들어 올렸다. 그대로 침실을 나가 복도를 가로질러 적월궁 입구로 가자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절도 있게 예를 갖추며 마차까지 안내했다.
화려한 마차에 올라 금과 옥으로 된 주렴을 내리자 이내 마차는 오늘 국혼과 즉위식이 열리는 경선전(慶先殿)으로 향했다. 이미 경선전에는 수많은 깃발이 휘날리고 만조백관이 각 품계에 맞게 예복을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고 수천에 달하는 궁인들도 열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경선전 입구에 마차가 멈춰 서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반각이 지나고 나서야 유하는 주렴을 걷고 시녀들이 내미는 손을 잡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넓이와 수많은 인원에 짐짓 놀랐지만 위축되는 것 없이 유하는 붉게 깔아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를 장식한 봉잠의 끝에 달린 보석이 청아한 소리로 울었다.
서두르지 않고 곧은 걸음으로, 길고 긴 길의 끝에 선 화려한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장식된 도포를 걸친 청현을 바라보며 걷는 유하는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유하를 보며 청현은 묘한 표정을 하다가 시선을 마주친 듯한 느낌에 황급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변화가 워낙 자연스러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청현의 앞에 당도한 유하는 다정하게 내미는 손을 잡고 단상 위로 올라 역대 황제와 황후들의 제단 앞으로 다가가 먼저 예를 차렸다.
이어 각각 광명의 신과 적월의 신을 모시는 신관들이 축원을 올리고 정식으로 황가의 일원임을 고하는 것이 끝이 나자 두 사람은 단상 옆으로 나란히 앉은 태상황과 태상후 앞에 서서 또 한 번 예를 차렸다.
태상황의 이마 정중앙에는 증표가 사라지고 없었으나 외모는 청현과 똑 닮아 있었고 태상후는 자신과 같은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였다. 그 모습에 신기함이 앞서 잠깐 멍하니 보던 유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여는 태상후의 말에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천호국에 잘 오시었습니다, 황후. 비록 역대에 처음 있는 일이라 하나 그대가 후로서 모자람이 없는 것 같으니 마음을 놓았습니다. 부디 천호국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현명한 국모가 되어 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여인보다는 낮으면서도 묘하게 맑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답하자 태상후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온화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곧바로 태상황이 말을 이었다.
“신이 정해 준 운명이니 의심하지 말게. 후라면 잘할 것이라 믿네. 그리고 황제.”
“예.”
“아끼고 또 아껴 주어라.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면 그것은 곧 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항시 명심하고 중심을 잘 지켜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청현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에게서 물러나 단상의 중앙에 서자 신관들의 축복이 쏟아지는 걸 시작으로 길고 긴 절차가 이어졌다. 이천 년의 유구한 역사가 낭독되고, 유하는 마침내 공현황제의 반려이자 소헌황후(昭憲皇后)로서 황실계보에도 정식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몇 시진이 흘러 예식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시녀들이 발끝까지 뒤집어쓴 유하의 붉은 면사를 걷었다. 그리고 드러난 유하의 모습에 청현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탄성을 쏟아냈다.
아름다운 건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오늘은 더 특별했다. 미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얼굴이 화려한 장식과 옷차림, 화장으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청현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영롱함이 저러할까. 고운 자태가 붉은 작약을 으뜸으로 한 삼 색의 꽃같이 아름다웠고 새하얀 피부는 은은한 향을 품은 것 같아 견주어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 자리에 참석한 미색이 뛰어난 그 어느 여인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유하 특유의 나른하고 위태로운 분위기가 한층 더했다. 밝은 햇살 아래 빛나고 있음에도 마치 고아한 달빛 아래 빛나는 것같이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품고 있어 청현은 취한 듯 아름다운 얼굴에서 선뜻 시선을 떼지 못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살랑거리는 바람에 몇 가닥 내려 온 붉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리는 소소한 동작마저 매끄럽고 매혹적이었다. 그 때문일까.
심장을 잔잔하게 뒤흔드는 파동이 낯설어 청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입안이 바짝 말라 가는 갈증을 느끼고 입술을 달싹였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청현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묘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길게만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고 식의 마지막 진행을 알리는 예관의 말에 청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유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여전히 낯선 감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청현은 애써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하의 손가락에 준비한 반지를 끼우고 맹세의 의미로 입을 맞췄다.
하늘이 정해 준 운명으로 엮인 반려의 인연은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다. 신의 무한한 축복과 저주 아래 한평생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약조하는 맹세이기에 그것은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청현은 이 순간을 그저 형식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였고 유하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 그렇기에 이 맹세를 청현과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폐하, 맹세의 언(言)을 말씀하셔야 하옵니다.”
예관의 말에 청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하를 바라보았다.
맹세의 언은 곧 신들에게 고하는 맹약과 같은 것이다. 그만큼 그 무게가 무거운 것이었으나 여전히 이 모든 절차를 형식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진중했으되, 대수롭지 않았고, 또한 한없이 가벼웠다.
“하늘 아래 허락된 생명을 걸고 맹세하겠소. 공현황제인 짐의 반려로서 천호국의 황후로서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소헌황후인 그대를 아끼고 사랑할 것이오.”
“하늘 아래 허락된 생명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폐하의 반려로서 천호국의 황후로서 사명을 다 할 것이며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폐하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작은 목소리임에도 두 사람의 맹세의 언은 마법에 의해 넓은 장내로 무리 없이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청현이 다시 한 번 반지 위로 입을 맞췄다. 손가락을 스치는 따스한 입김에 유하가 미세하게 움찔거리자 청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꼭 잡은 채 다시 태상황과 태상후 앞에 섰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안심한 태상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하가 한 발 나서 몸을 살짝 굽혔다. 그런 유하의 머리 위로 달과 봉황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관이 씌워졌다.
적월의 후(后)를 상징하는 관을 쓴 유하와 그 옆으로 광명의 제(帝)를 상징하는 관을 쓴 청현이 나란히 서 그 위용을 드러내는 것으로 국혼과 즉위식의 대략적인 절차는 모두 끝이 났다.
청현과 유하가 단상 정중앙에 마련된 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황금옥좌에 나란히 앉자 다음 순서를 알리는 예관의 목소리와 함께 이곳과는 다른 의복을 입은 무리가 차례차례 단상을 향해 다가왔다.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가 전부인 동방대륙과는 달리 화려한 금발에 은발, 푸른 머리에 녹색 머리 등 색색의 머리카락과 화려한 옷차림에 유하가 당황하자 청현이 의문을 이해한 듯 귓가에 작게 속삭여 왔다.
“저들은 다른 대륙에서 온 사절단이오. 각 대륙은 이곳 동방대륙과 달리 몇 개의 제국과 왕국들이 있소. 각 독립국들은 이러한 큰 행사에는 사절단을 보내 우의를 다지고자 하는 것이오.”
청현의 설명에 유하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그곳과는 달리 마력이 있는 곳이었다. 타 대륙은 대륙에 흐르는 마력을 이용하는 마법사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다소 폐쇄적인 전통을 따르는 이곳 동방대륙은 마법사를 배척하는 편이었다.
굳이 인간이 재주나 부리는 마법사가 아니어도 신의 힘이 미치는 대륙이라는 사실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곳 동방대륙에 마탑은 제도에 하나와 타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는 제국의 국경에 있는 것이 유일했다. 그건 곧 저들도 그곳을 통해서 온 것이리라.
새삼 신기한 마음에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유하는 각 제국들부터 나와 자신을 소개하고 축하의 말을 건네는 이들을 지켜보며 배운 대로 간단하게 답했다. 서 대륙에 두 개의 제국, 남 대륙에 세 개의 제국, 북 대륙에 세 개의 제국이 존재하며 수많은 독립왕국이 있었기에 그들의 인사를 받는 데만 해도 한참이나 걸렸다. 그 후에는 태사부와 그 일가족의 인사가 이어지고 다음으로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태사도 문위창을 비롯해 대사공, 대사마, 대장군의 순으로 차례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온 인물들에 유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신 대조경 백리한성이 백리세가를 대표하여 황후마마의 즉위식과 국혼을 감축하옵니다. 제국의 영광이 신들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백리세가는 이후로도 목숨을 다해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옵니다.”
백리세가였나. 백리한성의 축하와 맹세의 말에 청현의 뒤를 이어 형식적으로 답하면서도 유하는 한 사람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옅은 자색과 짙은 자색이 조화를 이룬 단아한 복장에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아름다운 여인.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또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청현과 함께 후원에 있던 그녀일 것이다. 전날은 놀란 마음에 황급히 도망쳐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유하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백리설화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청현의 반응이었다. 백리세가가 앞으로 나올 때부터 눈을 떼지 않고 보던 청현의 시선은 오직 설화 한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 또한 선명했다.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에 유하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주먹을 끌어 쥐었다. 이상하다. 가슴이 답답한 것인가. 아니면 욱신거리는 느낌인가.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생소한 감각이 낯설다.
지난밤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기분에 답답해진 것인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릴 때 주먹 쥔 손을 잡아 오는 청현의 손길에 유하가 황급히 주먹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걱정을 담은 청현의 시선과 마주한 유하가 의식적으로 피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백리세가는 물러가고 다른 세가의 인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세력을 갖춘 세가들과 하급 관리들의 일가, 궁인들의 인사를 받는 동안에도 유하는 내내 시선을 보내오는 청현을 모르는 척 외면했다. 그렇게 유하는 답답한 속내를 능숙하게 감춘 채 몇 시간을 담담하게 버텼다.
지루한 인사는 어느새 해가 기울어 황혼이 드리울 때가 되어서야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그제야 비로소 긴장을 푼 유하는 손을 잡아 일으키는 청현을 따라 모두의 극진한 예를 받으며 경선전을 빠져나왔다.
문밖에 대기해 놓은 마차에 오르자 청현도 뒤따라 오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마차가 출발하자 청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들었을 터인데 오늘 고생이 많았소.”
“아닙니다.”
“황후, 혹 기분이 상한 것이오?”
유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상할 이유가 없으니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기분에 답답했을 뿐임에도 유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생각한들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아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면 다행이나 혹 기분이 상하거나 짐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면 앞으로는 편하게 말씀해 주시오. 이제 그대와 짐은 정식으로 반려가 되지 않았소? 짐도 최선을 다할 테니 그대도 짐을 믿고 따라 주면 고맙겠소.”
“예, 폐하.”
유하의 대답에 만족한 듯 그제야 청현의 굳은 얼굴이 풀어졌다. 인사 받는 내내 자신의 시선을 무시하던 유하의 행동을 생각하면 기분이 상한 것이 분명하지만 청현은 일부러 더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신으로서는 마음에도 없는 유하에게 이만하면 최선을 다한 거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지 않으면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허다해질 것은 뻔한 일이라 청현은 이 이상 유하와 가까워지는 것을 꺼렸다.
어차피 국혼과 즉위식까지 무사히 치렀지 않은가.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굳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은 유하의 마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결론 내린 청현은 유하의 손을 잡으며 거짓된 미소를 머금었다.
“짐의 반려가 되어 주어 고맙소, 유하.”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듯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정한 미소를 짓는 청현을 보며 유하는 습관처럼 울렁거리는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하지 말자. 청현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잖은가. 지금 느끼는 이 불안감도 생소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자신은 그저 청현의 말대로 믿고 따르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지 않나. 부족하다 못해 어긋난 인간이다.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자신이 어찌 변해 갈지는 모를 일이나 지금으로서는 청현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그나마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진정된 것 같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편안하게 풀어진 얼굴을 한 유하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

적월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하루 종일 굶어 허기진 배부터 채웠다. 식사 내내 이것저것 살뜰하게 챙겨 주는 청현의 행동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만족한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황후, 오늘은 적월궁 정원에서 차를 마십시다. 이곳의 운치도 좋지 않소?”
“예, 폐하.”
청현의 말대로 적월궁 정원은 태양궁 후원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다. 여기는 뭐랄까. 과거의 정원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고즈넉한 느낌이라 오히려 유하는 이곳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오늘은 피곤하기도 하고 멀리 있는 후원까지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시녀장에게 차를 준비하라 지시하고 청현의 손을 잡은 채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 한가운데 마련된 작은 정자에 오르자 곧바로 찻잎과 다기가 준비되었고 유하가 직접 우려내 청현에게 권했다.
“많이 익숙해진 것 같소.”
“예.”
비록 간단한 일이라 하나 적월궁을 찾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건 황후인 유하가 직접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차를 알맞게 우려내고 따르는 법을 배우지 않았나.
낯설어 당황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익숙하게 변해 가는 스스로의 모습에 유하는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한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많은 것이 변한 것이다. 마치 몇 년을 이곳에서 보낸 것처럼.
결코 평범한 상황이 아닌 만큼 거부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것인가.
무엇 하나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리 태평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한번 온기를 접한 후에 다시 잃게 된다면 되돌아올 타격은 감당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놓치기 싫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을힘을 다해 붙들고 매달리고 싶다. 처음 느낀 온기는 그만큼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러니 어찌할까. 악착같이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 애써 불안감을 감춘 유하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오?”
“별거 아닙니다.”
“황후, 이제 그대는 짐의 하나뿐인 반려요. 괜한 걱정을 하기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소. 짐도 그대가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리다.”
불안한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째서인지 청현이 불안해하는 것 같이 느껴져 유하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 짓는 청현의 모습에 유하의 얼굴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붉게 물들었다.
“그보다 오늘밤 같이 있어도 괜찮겠소?”
“예? 같이 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첫날밤 말이오. 이제 정식으로 부부가 됐으니 같이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 않겠소?”
마치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청현을 보며 유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봤다. 첫날밤이라니.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말뜻을 이해 못 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국혼을 올렸다고는 하나 두 사람 다 사내가 아닌가.
부부라는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상황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말뜻을 파악하고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빠진 유하를 보며 청현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설명을 곁들였다.
“첫날밤이라 하나 한 침상에서 잠드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잠까지 같이 잘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청현이 유하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황후, 우리는 부부요. 국혼을 올린 첫날밤조차 같이 보내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하겠소? 보나 마나 사이가 소원하다 여기고 불안해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괜한 소문도 퍼질 것이고.”
그 뜻이었나. 달래듯 차근차근 설명하는 말뜻을 이해한 유하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청현이 날카로운 눈매를 휘며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뒤이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나직한 탄식과도 같은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황제와 황후란 사생활이 없소. 기분이 좋거나 나빠도 결코 겉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지. 소소한 행동 하나로도 황궁의 하루를 뒤바꿀 수 있는 게 우리의 삶이오. 무엇을 하든 수많은 눈을 의식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건 결코 행복한 삶은 아닐 거요. 그러니 그대도 마음을 굳게 잡으시오.”
청현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이미 태사부의 교육을 받으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라, 안타깝고 미안한 듯 바라보는 청현을 향해 유하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고맙소, 황후. 앞으로 많이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짐이 항상 곁에서 도와주겠소. 우리 언제까지나 함께합시다.”
언제까지나 함께. 지금껏 이리 말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애써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는 말이다. 언제나 억누르고 배척받는 것이 당연했던 자신에게 너무도 낯선 말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설렌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얼굴로 열이 몰리며 자꾸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이 낯설고 당황스러워 유하는 억지로 입매를 굳혔다. 아마도 지금 자신의 얼굴은 괴상하게 일그러졌으리라. 청현이 의문을 품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알면서도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말로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대화를 이어 가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어린아이조차 할 수 있지만 유하에게는 그 무엇보다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유하는 침묵을 택했다. 속으로는 허둥지둥 당황하면서도 겉으로는 선명하게 와 닿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척 태연함을 가장했다. 오히려 그것이 익숙했다. 감추고 억누르고 꾹꾹 눌러 담아 두는 것은 너무도 익숙하다 보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상대를 답답하게 하고 기분 상하게 한다는 것을 유하는 몰랐다. 그래서 청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큰 동작 없이 깜빡깜빡 느리게 움직이는 붉은 속눈썹을 응시하던 청현은 비죽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지금 유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청현은 궁금했다. 자신의 시선을 피해 버리는 행동에 기분이 상한다. 이유를 물어도 되지만 청현은 일부러 침묵을 지켰다. 본인이 말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귀찮은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시선이 사로잡힌다. 그는 무방비하고 무책임하다. 그래서 불쾌하다. 더없이 불쾌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사내 주제에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저 상징을 타고난 황후이다. 후계를 볼 수도 없는 사내이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하물며 자신에겐 사랑하는 여인마저 있다. 유하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사랑하는 이를 황후 자리에 앉히고 평생 아껴 주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내가 모든 것을 망쳤다. 연인을 슬프게 하고 그 고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모두 눈앞에 있는 가증스러운 사내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무엇이 잘났다고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는가.
생각할수록 불쾌함이 더해져 울컥울컥 치미는 짜증에 청현은 손을 탁자 밑으로 내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상징을 타고난 황후인 이상 불쾌함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알면서도 치미는 짜증을 어찌하지 못하고 청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조용한 기척에 미세하게 움찔거린 유하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추자 청현은 묘한 기분에 무의식적으로 굳은 입매를 풀었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은 만족. 그 사실에 청현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이만 들어갑시다. 오늘 피곤하지 않소? 내일부터 연회와 내정으로 바쁠 터이니 일찍 쉬는 게 좋을 거요.”
다정하고 걱정스럽게 속삭이며 청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 청현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유하가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현이 이끄는 대로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가 침실로 들어가고야 자연스럽게 마주 잡은 손을 놓았다.
“시녀를 부를 테니 먼저 씻으시오.”
“혼자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청현이 창가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유하는 침대 위에 놓인 침의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준비된 꽃잎을 띄운 물을 힐끔 보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놓은 후 두 개의 욕조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향긋하고 따뜻한 물에 목 끝까지 몸을 담그자 알게 모르게 긴장으로 굳었던 근육이 서서히 풀어지며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복잡했던 속도 풀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생각할수록 당황스럽다.
이젠 정말 한 나라의 황후가 된 것이다. 그것도 생소한 세계에서 같은 사내의 반려라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즉위식과 국혼을 치른 오늘에야 진정으로 와 닿는 것 같은 느낌에 유하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전히 가슴은 묘하게 간질거리고 잔잔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드는 불안감.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살아온 지옥에 비한다면 이곳은 천국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신을 극진하게 대하지 않는가.
예전 강유하였다면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다. 게다가 황제인 청현 또한 다정하게 위해 주고 있다. 여기서 더 무엇을 바랄까. 더 바란다면 욕심일 것이다. 둘 다 사내인 이상 평범한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좋은 동반자로서, 친우로서 인연을 이어갈 수는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언제까지고 주춤거릴 수도 없는 일. 애써 가시지 않는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고개를 내젓고 조금은 급한 손길로 씻었다.
시녀들이 가르쳐 준 대로 머리를 감고 기름을 바르고 깨끗하게 몸을 씻고 난 후에야 침의를 입었다. 욕실을 나가기 전 다시 긴장되는 마음을 풀고자 깊게 호흡을 가다듬은 유하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문을 열고 나가자 청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벌써 다했소?”
“예, 시녀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오늘은 짐도 혼자 씻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유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청현이 물기로 촉촉해진 이마에 입을 맞추고 욕실로 들어갔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멍하니 있던 유하는 뒤로 욕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뒤늦은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역시 쉽게 이해하기에는 무리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그는 같은 사내인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저리도 다정하게 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상징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저리 대할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