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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칼과 머리색과 같은 큰 눈망울은 아름다웠지만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
스물일곱이라 했던가…….
그가 머릿속으로 앞에 앉은 여자의 나이를 떠올렸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저런 초연한 눈빛을 가질 수 있는 여자라?
태혁의 시선이 은수에게 닿은 것을 본 최정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참을성도 강하고 자신의 본분이 뭔지를 알아 어떤 일이든 누구보다 잘 해내고, 책임감 있는 아이예요. 한 번도 집안 뜻을 거스른 적이 없을 정도로 얌전한 성격이니 회장님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최정희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겉보기로는 많아 봐야 마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억의 돈을 쓰며 가꾼 아름다운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담고 태혁을 바라봤다. 남편의 바람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거라는 천박한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녀의 눈빛에 태혁이 정제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보기 드문 타입이긴 하군요.”
그의 시선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은수에게 향하자 그녀는 내리깔고 있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투명한 눈동자가 그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에 얇은 설탕막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은수의 미소를 본 순간 태혁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한 줌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미소는 아스라하게 꺼지려는 초처럼 전혀 생기가 없었다.
지금껏 그에게 보여 줬던 여자들의 미소와는 달리 아무런 욕망도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미소가 그의 심기를 묘하게 거슬렀다.
은수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리기 전에 태혁은 날카로운 표정을 지웠다.
“겸손하신 분이군요. 저는 겸손의 미덕을 아는 사람을 선호하는 편이라.”
“칭찬 감사합니다.”
그의 긍정적인 말에 최정희와 서규한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의 눈에 동시에 지나간 탐욕을 못 본 채 태혁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저와 같은 뜻이시라니 반가운 마음이네요. 이 회장님.”
탐욕을 숨긴 채 화사한 미소를 짓는 최정희를 서늘한 시선으로 보며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다시 은수에게 닿자 최정희는 싹 표정을 바꾸고 사나운 눈빛으로 은수를 노려봤다.
뭐하고 있어? 뭐든 삼키기 좋은 말 내뱉지 않고.
최정희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압박했지만 은수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만 띤 채 앉아 있었다.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는 은수를 태혁이 마주 봤다.
……서은수라.
그의 입술 끝이 천천히 말아 올라갔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성장시켜 세계 각지에 50개가 넘는 지사를 두고 있는 대호그룹 총수 이태혁 회장과 혼담이 진행되자 달랑 작은 철강 회사 하나만을 가지고 있는 서규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소문만으로 막혔던 자금줄이 술술 풀리고 있어. 이대로 결혼까지 진행되면 아무도 우리를 건들지 못할 거야. 저 욱영조차도 말이야.”
태혁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규한 역시 선대로부터 제법 커다란 회사를 물려받았었다. 하지만 방만한 경영과 문어발식 투자로 대형 철강 회사인 욱영에게 실상 흡수합병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동아줄에 매달리듯 이번 은수의 선 자리에 모든 것을 걸고 투자했지만 사실 기대하기엔 이태혁은 너무 높은 상대였다. 그런데 기대조차 힘든 상대였던 이태혁이 결혼을 추진하겠다고 나오자 서규한은 무척 고무된 상태였다.
“경영권 되찾아오기만 해. 빌어먹을 욱영 놈들한테 아주 더러운 맛을 보여 줄 테니까.”
“입 다물어요. 아직 식 올린 것도 아닌데 설레발치지 말고.”
차 안에서 규한의 옆자리에 앉은 최정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규한은 대번 눈을 부라렸다.
“설레발이라니? 저 이 회장이 설마 뒤집을 혼담을 대놓고 진행하겠어? 이 바닥에 소문 돌아 좋을 거 뭐 있다고.”
서규한이 큰소리치자 최정희가 붉은 입술을 싸늘하게 비틀었다.
“입 다물라고 했어요.”
그녀의 서슬에 서규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은수는 그들의 대화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내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최정희와 서규한 역시 그 결혼의 당사자가 앞자리에 앉은 은수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방인.
그들의 자식이었지만 은수는 언제나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통제되고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늘 역시 결혼 발표 때 입을 은수의 옷을 사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최정희가 모든 것을 결정했고 은수는 그저 형식적으로 동행했을 뿐이다.
은수의 무감한 시선이 창 너머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훑었다.
이태혁이라는 남자가 자신과 결혼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 정도의 남자가 아내로 선택하기엔 자신의 조건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적어도 서너 레벨은 높은 상대여야 최소한의 구색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이를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태혁…….
소문으로만 듣던 재계의 황제 이태혁은 차갑고 오만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냉정함일 수 있겠지만 관찰하듯 집요하게 훑던 서늘한 눈동자에선 어떤 호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결혼을 원한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하얀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조용히 지워졌다.
은수는 결혼 발표 이후 첫 사교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태혁의 옆에 그림자같이 서서 그가 사람들과 인사 나누는 동안 조용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날렵하게 재단한 슈트를 입은 태혁은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왔을 때 인사를 나눈 이후로는 그녀에게 일체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필요에 의한 결혼임을 그녀에게 주지시키듯 그녀에게 말 한 마디 걸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나아.
그의 그런 태도에 은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그저 이런 인형같이 가만히 있는 존재라면 좀 더 이해하기 편했다. 처음에 봤을 때부터 그는 자신에게 그런 부분을 확인했을 테니까. 인형같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줄지 아닐지…….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네. 그날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랍니다.”
“영광입니다. 회장님.”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의 옆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맴돌았다. 아니 어쩌면 이태혁이라는 남자는 원래 그런 존재인지도 몰랐다. 재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익숙해져야해.
이 모든 것에.
은수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로 두 시간 내내 인사를 나누는 그의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 후 그가 로열패밀리들 사이에 섞이고 난 뒤에야 겨우 의자에 앉아 뭉친 다리를 펼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배치된 샴페인 대신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인 은수가 시선을 들었다.
국내의 재벌 3세들과 나란히 서 있는 이태혁은 위압적일 정도로 큰 키와 빼어난 외모 덕에 단번에 눈에 띄었다. 은수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곧 자신의 남편이 될 남자이지만 전혀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낯선 남자…….
그저 그뿐.
그에게 잠시 머물렀던 그녀의 시선이 무감하게 자신의 발로 향했다. 최정희가 이태혁의 위치를 생각하라며 은수의 옷장을 모조리 갈아치운 덕에 신발 역시 모두 새 구두였다. 구두가 흉기처럼 발을 옥죄어 왔다. 처음 최정희에게 받을 때부터 작은 사이즈였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과도한 광택이 흐르는 힐은 최정희를 닮아 겉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안에서부터 조여들어 상처를 내고 피를 흐르게 만들고 있었다.
“서은수 씨죠?”
그 때 머리 위에서 들린 낭랑한 목소리에 은수가 구두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 또래의 여자 몇몇이 은수에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결혼 축하해요. 우리 사교장에서 종종 본 적 있는데, 기억나요?”
“감사합니다.”
은수가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기억은 나지 않는 여자였지만 형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난 대한중공업의 윤이화예요.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친하게 지내요.”
“나도요. 난 해주유통 차현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네.”
“어머, 서은수 씨 맞죠? 전에 H호텔 파티장에서 봤었는데 여기서도 보네요. 너무 반갑다.”
은수가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은수는 전혀 기억에 없는 그들이 거는 인사에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앞으로 결혼식 전까지 두 번의 자리가 더 있을 거야.”
연회장을 빠져나오며 태혁이 하는 말에 뒤를 조용히 따르던 은수가 대답했다.
“네.”
이런 사교 파티야 평생 겪어 오던 일이었다. 새로울 건 없었다. 태혁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조금 앞서 걸었다. 은수는 걸을 때마다 피가 스며 나올 듯한 구두를 신고 태연하게 그를 따라 걸어갔다.
“서은수? 서은수 맞지? 그 여자.”
갑자기 들린 자신의 이름에 은수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복도와 복도가 이어진 커다란 통로에 여자들 몇몇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자신에게 웃으며 말 걸던 무리였다.
“그 여자는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와서 이태혁을 채가? 내가 그 남자한테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게 말이 돼?”
앞서 걷던 태혁이 은수가 멈춘 것을 알고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나는 쪽을 힐끗 본 그가 은수를 내려다보자 그녀의 표정은 최정희에게 손찌검을 당할 때처럼 무표정했다.
“얘는. 그런 식으로 하면 여기서 그 남자한테 공 안 들인 사람이 어딨어?”
“분해서 그렇지. 이태혁도 그래. 급이 떨어져도 정도가 있지. 다 망해 가는 서강철강은 뭐야? 여자가 눈 돌아갈 정도로 미인인가 해서 봤더니 그것도 아니고.”
그가 가만히 주시했지만 은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생기 없는 인형처럼 여자들 쪽을 향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태혁은 흥미를 잃은 듯 은수에게서 시선을 떼고 여자들 쪽으로 한 발 다가갔다.
“이태혁이라면 나를 말하는 겁니까?”
낮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세 여자가 흠칫해선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의 뜨악한 시선이 대번 은수와 태혁에게 닿았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태혁은 은수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 쪽으로 가까이 끌었다.
“제 사람입니다. 마음에 썩 들지 않더라도 결혼식에는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길.”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자기들 말을 다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여자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벌게졌다. 그녀들을 뒤로한 채 태혁이 은수를 이끌고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태혁의 손이 그녀에게서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잠시 바라본 은수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 사람입니다.’
방금 전 그의 말을 가만히 되새김질 하며 은수는 대기시켜 놓은 차가 있는 쪽으로 멀어지는 그를 따라가려 걸음을 옮겼다.
“……!”
뒤꿈치에서 느껴지는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은수의 하얀 이마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고개를 들자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