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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18화)
7. 칠천회(二)(3)
“어, 어찌 된 거지?”
“대체?”
비무대는 흙먼지. 아니, 비무대였던 석분(石粉:돌가루)으로 인해 그 안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장내의 이들은 비무의 행방에 대해 궁금증을 터뜨리고 있었고, 정작 그것을 일러 줘야 할 남궁섬과 각 세가의 태상가주들은 입으로 석분이 들어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지, 벌린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쿨럭,”
“……쿨럭.”
드디어 석분이 조금씩 걷히고, 그 안의 두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둘은 아직도 서로의 검과 도를 맞대고 있었다.
결국 장내를 뒤덮었던 석분이 완전히 걷히자 두 사내, 조운과 궁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의 입에서는 한줄기 핏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직도 승부를 포기하지 못했는지 그 검과 도를 뗄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이번 비무는 무승…….”
보다 못한 남궁섬이 무승부를 외치려는 그때, 궁현이 힘겹게 검을 회수했고 조운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탱그랑!
그랬다. 둘은 서로의 병기(兵器)에 기대어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약간이나마 힘을 회복한 궁현이 검을 뗐고, 아직 버틸 곳이 필요하던 조운은 그대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부가 아니라 남궁현 도련님의 승리인 것 같습니다. 허허.”
“하하하하하하―!”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남궁섬에, 장내가 웃음에 휩싸였다. 하지만 팽은란은 연신 불평을 내뱉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안 들어도 뻔했다. 사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팽은설에게 이길 것이 거의 당연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아, 가가. 상처 입은 모습도 한 마리 아기 새 같아서 귀여워.”
그리고 이미 몇 겹으로 모자라 그 안에 티타늄 합금을 덧댄 콩깍지가 씌인 여인이 한 명.
덧붙이자면, 이 시대에 티타늄 합금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생각하면 지는 거니까.
남궁섬의 승리 선언을 들은 궁현은 거의 발을 끌다시피 하며 비무대를 내려가려다가, 왜인지 다시 비무대 중앙으로 돌아왔다.
“하아. 끙.”
짝, 짝, 짝짝, 짝짝짝짝.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팽조운의 몸까지 끌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팽가로부터 시작된 박수가 장내 전체로 뻗어 그에게로의 갈채가 남궁세가 안에 울려 퍼졌다.
털썩.
그렇게 박수갈채의 속에서 팽조운을 끌고 가던 궁현은 비무대를 내려오자마자 쓰러지고 말았다.
***
쓰러진 궁현은 팽조운과 함께 의당(醫堂)으로 옮겨졌다. 내상도 그리 심한 것은 아님에도 이러한 종류의 내상을 처음 당해 본 궁현은 다음 날까지 내내 잠들어 있다가, 사정(巳正:10시경) 때가 되어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으으.”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켠 궁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의당인데. ……아!”
그제서야 자신이 팽조운을 끌고 오다 쓰러졌다는 것을 자각한 궁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윽.”
온몸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궁현은 침상을 벗어났다.
“나와 같이 쓰러졌으니까, 분명히 의당에 있을 텐데.”
두리번거리며 조운을 찾던 궁현은 의당의 구석 자리에 팽조운이 뉘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낯빛이 편안해 보였다.
“아, 역시. 누구랑 싸우게 될지를 모르니까. 이런 상태라도 비무는 구경해 두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궁현은 들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팽조운에게 나지막한 사과를 내뱉고는 의당을 빠져나와 잠시 자신의 전각인 협소전에 들러 환복한 궁현은 서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8. 제갈영영(諸葛永瑛), 제갈영영(諸葛永英)?(1)
한편, 연무장에서는 당설혜가 단목청비와의 일전을 치루고 있었다.
단목세가의 검은 쾌검(快劍)보다 빠른 속검(速劍)이다. 간혹 중검(重劍)을 고집하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단목세가의 무공의 전반은 속검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단목청비는 보통의 암기보다도 훨씬 빠르게 날아오는 설혜의 암기들을 여유롭게 쳐 내거나 피하며 설혜를 베어 나갔다.
“윽.”
설혜는 배산장법(背山掌法)을 펼치며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무언가 수를 쓰지 못하면 금방 당할 것이 눈에 훤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이기고 가가한테 가야 하는데.’
그랬다. 그녀가 이리도 쉽게 당하고 있는 이유는 마음이 성급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던 마음과 몸이 함께해야지, 마음이 너무 성급하면 오히려 몸은 안 따라 주기 마련이었다.
“어? 어어?”
결국 간간이 장력을 발하며 천녀보(天女步)로 검을 피하던 설혜는 어느 순간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달려온 단목청비는 검법을 쓸 것도 없이 검을 내리 질렀다.
우뚝!
바로 설혜의 위에서 검을 멈춘 단목청비는 그녀의 입을 쳐다보았다.
이내 기다리던 대로 그녀의 입이 열렸다.
“졌어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당가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설혜는 어두운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흠! 험, 험.”
당천명은 역시 가주로서 창피했는지 연신 헛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자리에 도착한 설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궁세가 쪽을 보았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궁현은 언제나 자신이 앉던 자리에 앉아 비무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그녀였다.
“어!”
“아니?”
그런 그녀를 두고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음은 제갈세가의 제갈영영(諸葛永瑛)과 단목세가의 단목청산과의 비무였는데, 누가 제갈영영 아니랄까 봐 제갈영영(諸葛永英)과 똑같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것이다.
제갈영영의 1회전 상대인 모용운혜가 기권했기 때문에 그녀가 비무대에 오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면사를 쓰는 것이 위반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던 단목청산은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아무런 행동도 못했다.
“제갈영영이에요. 잘 부탁해요.”
휘익!
“……?!”
“어허!”
“저런?!”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 듯 영영을 쳐다보았다. 제갈영영은 목소리와 얼굴, 체형까지 그 제갈영영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제갈 가주!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남궁건의 말에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주평(諸葛朱萍)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 ……영영아?”
“예, 아버님.”
그 목소리에 제갈세가의 가솔이 아닌 장내의 사람들은 전부 제갈세가가 머물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이럴 수가! 그곳에는 또 한 명의 제갈영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영영이 둘이라는 말인가?
“쌍생아(雙生兒:쌍둥이)……인가?”
“그렇소, 남궁 가주. 영아(英兒)와 영아(瑛兒)는 쌍생아이오.”
뜻밖에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자 장내는 잠시 혼란이 일었다. 그 와중에 영영이 입을 열었다.
“남궁섬 대협, 비무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남궁섬은 아직 얼떨떨한 정신을 붙잡고 비무 시작을 외쳤다.
“비, 비무 시작!”
남궁섬의 말과 함께 장내가 전부 조용해졌다. 그들도 내심 또 다른 제갈영영의 실력이 어떨지 궁금했던 것이다.
“자, 갑니다. 소협. 려려앵화장!”
장력을 뻗은 영영은 신형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은밀히 단목청산에게 다가갔다. 대성하면 환상진을 펼쳐 환각을 펼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인다는 그 보법은 바로 천기미리보였다.
단목청산은 어제 장력을 피했던 서현이 려려앵화장, 산(散)에 당했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자신도 장력을 발출했다.
“섬정신장(閃霆神掌)!!”
장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청산의 장력은 너무도 쉽게 영영의 장력과 상쇄되어 버렸고, 그것에서 이상함을 느낀 청산이 그제서야 영영을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결국 자신의 등 뒤에 비도를 꽂기 직전인 영영을 찾아냈다.
푹!
“큭!”
튕겨지듯 앞으로 달리며 피한 청산이었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영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비도라는 사실이었다. 직접 꽂는 것에 실패한 영영은 너무도 쉽게 비도를 던져 청산의 등에 비도를 꽂은 것이다.
“후후, 소협.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군요. 자, 이제 진심으로 해 볼까요?”
이제 진심으로 해 보자니? 그럼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에 분노한 단목청산은 거의 이성을 잃으며, 세가의 독문검법인 뇌영십삼검(雷影十三劍)을 펼치며 영영을 베어 들어갔다.
“후우…… 안 닿을 걸요?”
우뚝!
하지만 그의 검은 결국 영영의 몸을 두고 한 치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서현의 소소검 때처럼 이미도 검이 포박당해 있었던 것이다.
검이 몸에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한 영영은 마치 무희(舞姬)처럼 춤을 추며 청산의 주위를 돌고 돌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청산의 손이 검을 돌려 청산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가!! 청산은 서현이 했던 것처럼 어설프게나마 검기를 끌어 올려 보았지만, 이 실은 그때의 실과는 다른지 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검기를 흡수하며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어, 어어?”
결국 영영의 춤이 절정에 달했을 때, 청산의 검 끝은 이미 청산의 목을 약간 파고들어가 있었다. 목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자, 청산이 아무리 담이 크더라도 그 이상은 무리였는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져, 졌다!”
“후우.”
그 말에 틱! 하는 실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청산의 신형이 무너졌다. 죽을 수도 있다는 극한의 상황을 처음 접했기 때문에 온몸의 힘이 쫙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런 청산을 뒤로하고 영영은 유유히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녀의 승리를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리도 압도적일 줄은 생각도 못했던 장내의 모든 이들은 오히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 후, 마지막 비무가 치러지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갈영영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비무를 볼 생각이 없었고, 결국 남궁수혁은 비무에 승리했음에도 울상을 지으며 비무대를 내려갔다.
“제갈영영인가. 훗, 역시 아직 다 보여 준 게 아니었군.”
비무를 보고는 나지막이 미소 짓는 서현이었다.
그리고 감기려는 눈을 오기로 붙잡으며 모든 비무를 끝까지 본 궁현은 천근만근(千斤萬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협소전으로 돌아가자마자 침상에 쓰러져 잠들었다. 역시 아직 내상이 완전히 치료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궁현이 다시 눈을 뜬 시각은 한밤 중인 자초(子初:11시경)였다. 맑은 정신으로 어떻게든 다시 잠을 자려고 시도하던 궁현은 역시 안 된다는 것을 느꼈는지 내상도 다스릴 겸 축기를 행했다. 원래 기라는 것은 생명이 움트고 깨어나는 새벽에 모으는 것을 제일로 치나, 궁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소리였다. 궁현의 입장에서는 새벽에 모으는 것은 새벽대로, 밤에 모으는 것은 밤대로 좋은 점이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는 반대로 밤에 생명을 움트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정(子正:0시경)까지 축기를 한 궁현은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피식하고 실소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밤 산책이나 하기로 마음먹은 궁현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자신이 아직까지 경장을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을 찡그러고는 침상 옆에 있던 수분(水盆)을 가져다 대충 얼굴을 씻고 침소를 나섰다.
“후우― 와아, 밤공기 조오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한국어로 감탄한 궁현은 내심 실소했다.
‘아, 한국어 써 본 게 얼마만이더라? 벌써 2년인가. 그래, 이번 칠천회가 끝나면 조선이나 한 번 가 봐야겠어. 지금이 아마 1420년대 말이니까. 세종(世宗) 때지? 캬아, 이참에 확 훈민정음을 현대식으로 개편해 버려?’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는 말도 안 되는데다, 그런 식으로 역사를 바꾸면 뭔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관두기로 한 궁현이었다.
일부러 안 떠올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궁현의 생각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딜 생판 모르는 이가 찾아와서는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이 고심해서 만든 훈민정음을 확 뒤엎겠다는데, 그걸 허락할 왕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국사나 중국사를 띄엄띄엄 떠올리며 이런저런 것을 바꿔 버리면 어떨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궁현은 어느새 자신이 도원호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 사람은 언제나 걷던 길을 가게 마련이라는 건가.”
이왕 이렇게 된 것 호수에서 멱이나 한 번 감기로 한 궁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