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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19화)
8. 제갈영영(諸葛永瑛), 제갈영영(諸葛永英)?(2)
한편, 당가의 출전자 중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는데도 져 버렸다는 책임감에 잠을 설친 설혜도 산보를 나왔었다. 이리저리 거닐던 설혜는 어느새 도원호에 도착해 있었다.
‘하아, 가가와 처음 만난 곳도 여기였는데…… 그러고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사람의 마음이 며칠 새에 이리도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처음엔 ‘이 사람 정도라면 혼인해도 상관없다’였던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로 바뀌어 있었다.
도원호 주변을 잠시 거닐던 설혜는 자신이 머물던 동굴로 향했다. 역시 자신이 머물던 때와는 달리 동굴은 물기가 흘러 축축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째서인지 설혜가 누워 있던 곳만은 따뜻했던 것 같다.
“그게 가가의 무공이려나?”
잠시 자신이 누웠던 곳의 물기를 대충 훔치고는 다시 한 번 누워 눈을 감아 보는 설혜였다.
“치이, 하나도 안 편하잖아.”
아무도 들어 줄 리 없는 불평을 내뱉은 설혜는 왠지 자신이 유치해졌다고 생각하며 동굴을 나섰다.
“응?”
설혜가 다시 동굴을 나오자, 호숫가에 못 보던 옷이 잘 개어져 있었다.
“뭐지?”
촤라락!
갑자기 물소리가 들리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설혜는 재빨리 풀숲에 숨고는 기척을 죽였다.
‘가, 가가?!’
그곳에는 궁현이 멱을 감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발가벗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설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려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궁현을 향해 돌아가는 고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호수에서 나온 궁현은 전신에서 약한 화기를 일으켜 몸을 말리고는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한 궁현은 발밑에 있던 돌 하나를 주워 설혜가 있는 곳으로 던지며 외쳤다.
“누구냐?!”
핑!
“히, 힛?”
갑작스런 궁현의 공격에 깜짝 놀라 돌을 피한 설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풀숲에서 나왔다.
“다, 당 소저? 미안해요! 다친 것 아니에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 아니. 근데 왜 거기에 숨어 있었던 거죠?”
궁현의 말에 귀까지 벌겋게 물들이며 굳어 버리는 설혜였다. 그녀로서는 절대 훔쳐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몰라욧!”
고개를 팍 돌리며 그렇게 말하는 설혜를 보고 궁현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생각했다.
‘하긴, 내기가 실린 돌멩이를 맞을 뻔했는데…… 겨우 사과 한마디로 끝내는 건 좀 무신경했지?’
“아아, 미안하다니까요. 에,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거죠?”
자신이 했던 일이 부끄러워 아직도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설혜는 그런 궁현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 혼인?”
설혜의 말에 조금 표정이 굳는 궁현이었다.
‘나랑 혼인하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가?’
“농담이에요, 가가. 그냥, 조금 걷는 건 어때요?”
궁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 버리자 조금 실망한 설혜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 정도라면 뭐. 아,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천주산 안이라면 어디든지 데려다 드릴게요.”
사실 궁현도 천주산 이곳저곳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여자 앞에서…… 아니,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이 아는 것을 뽐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궁현의 말에 설혜는 조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달이 잘 보이는 곳으…… 꺅?!”
훙!
속으로 내심 안도한 궁현은 설혜의 등 뒤로 손을 얹더니 풍뢰천리호정을 극성(極成)으로 펼쳐 천주산의 최고봉인 천주봉에 올랐다.
“휴우, 꼭 이렇게까지야.”
하지만 설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경공이 이리도 빨랐던가?
‘역시 뭔가 있어, 가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소곳이 자리에 앉는 설혜였다. 그것을 본 궁현도 따라 앉았고, 잠시 둘은 하늘을 응시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설혜였다.
“가가.”
“예?”
설혜가 자신을 부르자 맑은 눈으로 설혜에게 시선을 돌리는 궁현이었다.
“가가는, 무공을 못하는 게 아니던가요? ……아?!”
무의식적으로 그리 물은 설혜는 깜짝 놀랐다. 이리 좋은 분위기에 어찌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예, 못했죠. 사실 무공을 배운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엄연히 말하자면 제가 배운 무공은 남궁세가의 무공이 아니라 일인전승의 무공이랄까요.”
“예에…….”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달이, 참 밝네요.”
“풋, 그러게요.”
아직 어색한 둘의 사이를 알려 주듯, 실솔(픞푲:귀뚜라미)만이 자기만의 곡(曲)을 연주하며 천주봉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다음 날, 어김없이 칠천회는 진행되었고 첫 번째 단목청휘와 팽가의 소가주인 팽천호의 비무에서는 팽천호가, 두 번째 황보소미와 모용운강과의 비무에서는 모용운강이 승리를 점했다.
결국 비무회는 오늘의 마지막이자 16강전의 마지막인 황보세가의 소가주 황보진평과 천천의 비무만을 남겨 두고 있다.
“소가주끼리의 대결이구려, 어찌 보면 제일 볼 만한 비무가 아닌가 싶소.”
“그런가요? 허허.”
그렇게 장내의 모든 이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비무대에 오른 둘은 정중히 포권했다.
“벽력황권(霹靂黃拳) 황보진평이라고 하오.”
“남궁천천이오, 부끄럽게도 아직 별호는 없소.”
짧은 인사를 나눈 그 둘은 남궁섬의 일성과 함께 서로에게 쇄도했다.
천천은 검을 빼어 들고는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펼치며 황보진평을 베었다. 하지만 진평은 이미 천천이 어떤 초식으로 나올 줄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발을 들어 검을 막고는 일권을 내질렀다.
“하아! 벽력신권(霹靂神拳)!!”
진평의 권이 번개처럼 천천에게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로 뛰며 충격을 줄인 천천은 남궁세가의 쾌검인 섬전십이검뢰(閃電十二劍雷)를 펼쳐 진평의 다리를 노렸다. 계속 공격이 막힐 바에는 차라리 그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천천의 검이 섬뢰(閃雷)가 되어 진평의 다리로 꽂혔다. 다리를 들어 검을 막으려 하던 진평은 그제서야 천천의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성급히 다리를 빼지만, 종아리를 일 촌 정도 베이고 말았다.
“칫! 벽력호영(霹靂虎影)!”
진평은 약간 베인 다리를 신경 쓰지 않고 벽력신권의 제이초인 벽력호영을 시전했다. 천천은 자신을 꿰뚫을 듯 달려오는 뇌호(雷虎)의 모습이 보이자 창궁무애검법의 창궁한조(蒼穹悍雕)로 상쇄시켰다. 그러고는 뻗어 오는 진평의 권을 검면으로 막고 다리를 들어 진평에게 내질렀다.
원체 권각법(拳脚法)에 비중을 두지 않는 남궁세가인지라 아무런 초식도 없는 평범한 발차기였으나, 내기가 실리자 그렇지도 않았다. 진평은 잠시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듯 숨을 내뱉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전신에 기를 돌리고 섬광처럼 천천에게 달려가며 수백 개의 권영(拳影)을 뿜어냈다.
권기가 둘린 주먹이다. 보통 칼로는 막아 내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천천은 조심스럽게 검에 검기를 둘렀다.
“후우.”
여기서부터가 고비였다. 천천의 무공은 최근 들어 빠른 성장을 겪었다. 하지만 잃는 것 없이 얻기만 할 수는 없는 법. 특히 제왕검법(帝王劍法)의 연성(練成)을 시작한 이후로는 기의 파장이 어지러워 기세를 뿜어내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해야 할 정도였다. 여차하면 살인을 일으키게 될지도 몰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좋아, 간다!’
간신히 검기를 다잡은 천천은 진평의 권영을 일일이 피하거나 막는 것이 무리라고 알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어디, 끝까지 해 보자. 어차피 대부분은 허초다. 전부 피할 필요는 없어. 실초만을 상대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한 천천은 제왕검법 상의 제왕만뢰(帝王萬雷)로 진평의 권에 맞섰다. 아직은 부족한 제왕검법인지라, 만(萬)은커녕 채 천(千)도 되지 않는 검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평의 권을 당하기에는 충분했다.
탁, 타탁, 탁! 퍽! 서억!
한두 번씩 맞고 베이기를 벌써 수십 합(合)째. 둘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 상태는 일 다경(약 15분)쯤 지속되었다.
그러다 먼저 결정타를 날린 것은 진평이었다. 천천이 허초로 보고 무시했던 권영이 무서운 기세로 천천의 배 한가운데로 적중한 것이다.
“쿠…… 욱!”
시고 씁쓸한 위액을 내뱉으며 신형을 굽힌 천천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진평의 권배(拳背:손등)가 꽂혔다. 꼴사납게도 천천은 한줄기 선혈을 내뱉으며 비무대 바닥에 쓰러졌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진평은 등을 돌려 비무대를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을 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직이다. 아직 멀었단 말이다!!”
천천의 엄청난 기세에 깜짝 놀란 진평은 서둘러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단전에서 기를 끌어 올렸다.
굉장한 기세로 검을 들어 올리는 천천이 보인 것이다.
“으아앗―!! 제왕검법, 오의(奧義)! 난세평천하(亂世平天下)!!”
천천의 검에서 검기가 난무(亂舞)한다. 이내 하나의 기류를 형성한 검기는 비무장 주변을 소용돌이치며 황보진평에게 빨려 들어간다.
오의!
무공에서 오의는, 진정한 깨달음이 뒷받침되었을 때야말로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같은 오의라도 사람에 따라 그 위력이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데, 깨달음은커녕 아직 대성하지도 못한 천천이 이런 오의를 시전하다니! 그렇다. 이것은 그야말로 편법. 한 번뿐이기는 해도 내공만은 이 오의를 사용할 정도로 충분한 천천이 남궁건이 펼쳤던 것과 똑같이 오의를 시전한 것이다.
“크윽?!”
그대로 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황보진평은 온몸에 수미천왕신공(須彌天王神功)의 기운을 두르며 버텨 보지만, 이내 기막(氣幕)을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기류에 온몸에 상처를 입고는 쓰러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하아, 커……헉!”
역시 오의를 펼치는 것이 무리가 되었는지 또다시 한 줌 선혈을 내뱉는 천천이었다. 지친 눈으로 남궁섬과 태상가주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은 이미 자기들끼리의 의논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의논을 마친 듯 모용일천이 일어섰다.
“방금 남궁천천 소협이 펼친 오의는 분명 살초에 들어가나, 깨달음이 부족하여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의 위력을 지니지 않았었으니, 그의 진출을 허락하기로 했소.”
천천은 모용일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힘겹게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궁현은 그를 부축할까, 생각했지만 괜히 천천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잠시 멀어지는 천천의 신형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세가의 정문을 나섰다. 도원호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의 다음 상대는 모용서현. 검을 조금 날카롭게 벼려 놓는 것도 좋았다.
‘모용서현…… 강하다. 하지만 그도 제갈영영에게는 고전했었어. 완벽한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야.’
그렇게 생각한 궁현은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듯.
―허허, 이거야 원.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9. 음속수검(音速水劍)(1)
다음 날, 다시 궁현의 차례가 옴을 알리는 아침이 밝았다.
“하아 아암.”
간신히 사초(巳初:9시경)에 일어난 궁현은 세면을 하고도 잠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연신 하품을 해 댔다.
“하암.”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궁현이 일어나는 시간을 정확히 맞춰서 찾아온 화선이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응, 꿀꺽. 아, 오늘 내 차례였지! 아침은…… 못 먹겠다. 그럼, 간다.”
“예? 도련님! 아직 조금 정도는 여유가…… 어휴.”
붙잡으려는 화선을 뒤로하고 연무장으로 향한 궁현은 벌써 칠대세가의 사람들이 대부분 연무장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러다 마침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팽은설을 볼 수 있었다. 잠시 눈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던 궁현을 그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어째서.”
“예?”
차분히 뒤돌아보며 말하는 궁현에 오히려 화가 난 것일까, 고운 얼굴을 잔뜩 구기고는 다시 입을 여는 은설이었다.
“어째서 나와 싸울 때는 그렇게 행동한 거죠?”
은설의 말에 궁현은 당황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기한테는 그렇게 얼간이처럼 싸워서 운으로 이긴 것처럼 하고선 팽조운과의 싸움에서는 그와 동등하거나 조금 높은 무위를 자랑하다니. 자칫 깔보았다고 생각해 자존심이 깎일 만도 했다.
“할 말이 없군요. 죄송합니다. 제 행동에 자존심이 상하셨다면…….”
짝!
“……?!”
은설의 손바닥이 궁현의 뺨을 때…… 리지는 않았고, 바로 궁현의 코앞에서 손뼉을 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팽가 측으로 돌아갔다. 궁현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대체 무슨 뜻이지. 이건.’
하지만 내심 손뼉에 무슨 암호나 비밀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궁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