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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22화)
9. 음속수검(音速水劍)(4)
다음 날, 어째서인지 화선이 깨우지 않았음에도 진초(辰初:7시경) 때에 일어난 궁현은 수분의 물로 대충 씻으려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을 알고 목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물을.”
욕실로 들어간 궁현은 목욕통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유형기류의 수법으로 목욕통을 가득 채운 그는 화기를 일으켜 물을 적당히 데우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아― 시원허다.”
세상천지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 시원하다고 하는 이들은 한국인밖에 없다. 이런 방식의 언어 사용이 정착된 것을 보면 아마도 한국인의 조상들은 온각(溫覺)과 냉각(冷覺)이 반전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혹시라도, 처음에는 시원하다는 말이 따뜻함을 표기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주. 어느 쪽이던 가능성 없는 이야깁니다.―
각설하고, 목욕통에 들어가 몸을 닦던 그는 때수건이 절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태리타월…….”
어릴 적 어머니가 때를 밀어 줄 때는 얼마나 아프고 귀찮았던가. 언제나 때를 밀지 않으려 하는 자신을 꼭 붙잡고 때수건에 비누칠을 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 궁현은 새삼 때수건의 소중함을 자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명대(明代). 한국. 아니, 조선은커녕 이탈리아에 가도 이태리타월은 없을 터였다. 아쉬운 대로 손으로라도 온몸을 세게 닦은 그는 조금이나마 나온 때를 씻어 냈다.
그렇게 반 시진 쯤 지났을까, 자신의 침소 쪽으로 향하는 기척을 느낀 궁현은 서둘러 목욕통을 나와 몸을 말리고는 의복을 챙겨 입고 욕실을 나섰다.
“도련님! 도련님? 주무시나요?”
서둘러 수의를 입고 나왔는데도 화선은 벌써 궁현의 침소의 문을 열고 있었다.
“도련…… 하아.”
“왜 한숨을 쉬는데? 나 가출 안 했어.”
갑자기 바로 뒤에서 궁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며 온몸을 움츠린다.
“히끅, 도. 련. 니임!! 어디 가셨던 겁니까?”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쏘아붙인 화선은 아직도 아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어? 욕실. 그냥 목욕이 좀 하고 싶어서.”
궁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화선이었다.
“깜짝 놀랐잖습니까! 서신이라도 좀 남기시면 아니 됩니까?”
“아니, 목욕하러 가는데 서신까지야.”
궁현은 대답 없이 쏘아보는 화선의 눈빛에 결국 승복하고 말았다.
“알았어, 미안해. 이제부터는 간단한 서신 정도는 남길게, 됐지?”
“예, 여기 무복입니다. 아침을 가져올까요?”
화선의 말에 말없이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간 궁현은 화선이 나가자마자 창(窓)을 열고는 침상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행했다.
일주천, 이주천, 삼주천……. 한참 동안 운기조식에 몰두하던 그의 귀에 화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조반 들이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궁현은 기운을 갈무리하고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후우우우. 응, 들어와.”
조반을 먹은 궁현은 대충 진말(辰末:9시경, 사초(巳初))이 됐다 생각하고는 협소전을 나서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연무장에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앉아 있거나 무리를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궁현은 이렇게 무리를 지어 떠드는데도 주위가 조용한 것에 은근히 감탄하며 자기가 늘 앉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궁현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소협.”
“…….”
그 말에도 궁현은 그저 많은 대화중에 하나이겠거니 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남궁 소협.”
그제서야 눈을 뜨고 오른쪽의 인영을 바라본 궁현의 눈에 익은 이가 보였다.
“제갈 소저?”
푸른빛이 감도는 몸에 딱 맞지도, 너무 퍼지지도 않은 무복을 입은 그녀는 냇가의 물 흐르는 듯한 미색을 풍기고 있어, 유려하다는 말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남궁 소협, 좋은 아침이지요?”
“어느 쪽이시죠?”
뜬금없는 궁현의 말에 잠시 그 고운 아미를 찌푸린 영영은 이내 입을 열었다.
“옥[瑛:옥소리 영]이라 해 두지요.”
“그렇군요, 그럼 제갈 소저. 저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궁현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는지, 영영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하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으셨나요? 소협이 그리 물으시니 저도 바로 말하지요.”
아름답지만 화가 억눌려 있는 그 목소리에 궁현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권하…….”
“거절하겠습니다. 할 말은 그것뿐이십니까? 그럼 비무대로 가시지요.”
아직 기권을 하라는 것인지, 기권하겠다는 것인지도 채 듣지 않고 거절을 표하는 궁현의 모습에 영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화가 났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먼저 비무대로 내려갔다.
“훗, 마지막 싸움에서 기권을 하던, 기권을 받던. 둘 다 기분이 별로 안 좋기는 마찬가지잖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독백이었다.
각설하고, 그렇게 독백한 궁현이 천천히 비무대에 올랐다. 분을 삭이며 포권한 영영은 비무를 시작하라는 남궁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력을 뻗었다.
“려려앵화장, 연!”
수십이 넘는 영영의 장이 틈 하나 만들지 않고 궁현에게로 천천히 날아왔다.
중간에서 흩는 것도 무리, 피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이 장법이라면 막아 낼 방법은 파훼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숙하긴 하지만 연환천뢰신장(連環天雷神掌)으로 모든 장력에 대항한 궁현은 어느새 영영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칫.”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궁현은 멈춰 있지 않고 이리저리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앞으로만 가다가 비도를 맞은 단목청산을 떠올린 탓이다. 그때, 궁현의 귀를 간질이는 파공성(破空聲)이 들려왔다.
쐐애애액!!
여섯의 비도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비무대 위를 누비며 궁현에게 쇄도(殺到)해 왔던 것이다.
푹!
“큭!”
이리저리 뒤엉키며 자신을 노리는 비도를 하나하나 피하던 궁현은 결국 왼쪽에서 날아오는 비도 하나를 놓쳐 왼쪽 어깨를 꿰뚫리고 말았다. 그의 검미(劍眉)가 역 팔(八)자를 그리며 일그러졌다. 작게 억눌린 듯한 신음을 내뱉은 궁현은 단숨에 비도를 뽑아내고 검을 잡아들었다.
“그러게, 진작 기권하셨으면 그리 다치지도 않잖습니까, 소협?”
그 말에 자신의 어깨를 곁눈질로 보며 실소한 궁현은 조금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왼손을 포기하고 한 손으로 검을 잡고 영영에게 겨눴다.
“한 손…… 입니까?”
그런 궁현을 본 영영은 유려한 손짓으로 비도를 회수하고는 비도에 검기를 둘렀다. 영영은 은은한 분홍빛이 흐르는 비도 둘을 두 손에 역수(逆手)로 쥐고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궁현을 향해 쇄도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어째서인지 한순간 그 유명한 ‘나루터’라는 인자(忍者:닌자) 만화를 떠올린 궁현은 피식하고 웃으며 그녀의 비도를 막아 냈다.
“우스운가요?”
그 모습에 오해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궁현에게 화가 나 있던 영영은 더욱 짙은 검사를 뽑아내며 궁현의 검과 부딪혀 갔다.
챙! 챙! 채채챙!
‘대체 왜!’
궁현과 몇 번이나 검을 부딪치던 영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변해 갔다. 일수검(一手劍)으로 자신의 두 비도를 간간히 흘리며 전부 막아 내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딱히 검기로 둘러싸이지도 않은 저 검이 어떻게 역으로 자신의 비도를 상하게 만드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훅! 후, 하앗!”
검을 한 손으로 잡은 궁현은 난생 처음 해 보는 일수검이지만 어설프게나마 펜싱 선수들의 자세도 따라해 보며 간신히 영영의 비도를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으니, 우선 일수검에 익숙해지지 않은 오른팔의 근육부터 그러했고, 또 검 자체가 일수검에 적합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휘두르는 궁현의 검에서 일순간 황금빛 서기(瑞氣)가 빛났다. 검에 금기가 둘려 있던 것이다. 금기가 비록 검기는 아니기에 그 자체로 절단성을 지니고 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철이나 은, 동처럼 금(金)의 속성을 가진 것의 경도와 예기를 훨씬 더 강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탓, 챙! 챙!
금기를 본 영영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몇 보쯤 뒤로 물러나 짜증을 부리듯 비도를 뿌렸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던져서인지 비도에 실린 힘은 그리 무겁지 않았고 궁현은 손쉽게 두 비도를 쳐 냄과 동시에 검과 함께 오른팔을 늘어뜨리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대체 뭐죠? 검기?”
방금 전의 황금빛 서기를 다시 보고 말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궁현의 검을 주시하던 영영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그 기운이 다시 나타나지 않은 탓이리라.
“검기……라. 뭐, 어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검기라는 것의 뜻이 검을 둘러싸고 있는 기운이라면 말이지요.”
“이, 이익!”
궁현의 말이 잘못된 것도, 자신을 놀리는 것도 아니건만. 왜인지 영영은 그런 궁현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잠시 눈을 감고 화를 누그러뜨리던 영영은 이내 그런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어째서 마음 놓고 눈을 감은 거지!!’
어째서인지 그녀는 궁현의 공격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의 침착하고 냉정한 자신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신을 탓해 봐야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궁현은 왜인지 실제로 그녀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자만한 것입니까!!’
물론 궁현의 심중은 자만이 아니라 단순히 아직 지쳐 있는 오른팔을 쉬기 위한 것뿐이었지만, 그것을 그녀가 알 리가 없었고, 눈을 감고 화를 삭이려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오히려 다시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잠시 씩씩거리던 영영은 옷자락을 잡아 단번에 찢어 버렸다.
찌이이익―!!
“으음?!”
“아, 아니!”
그 모습에 궁현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시금 영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영영의 모습은 기대(?)했던 대로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녀의 전신은 완전히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몸과 틈이 있었던 옷이 그녀의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유혹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쓸 데 없는 추측을 떠올리던 궁현의 왼팔에 혈선이 그어진 것은 그때였다.
피슉!
꽤나 깊이 베였는지 피가 많이 새어나왔다.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궁현이 기감을 최대한으로 곤두세운다.
“비도?”
영영의 것이 분명한 은은한 분홍빛의 검기가 넘실거리는 비도들이 비무대 위를 누비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영영의 손가락은 악기를 연주하듯 끊임없이 움직였고, 춤추는 듯한 몸놀림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장내의 몇몇은 넋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영영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비응만조(飛鷹萬爪)!”
영영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허공중을 선회하던 비도들이 일제히 궁현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것을 본 궁현은 아직 근육이 풀리지 않은 오른팔을 들어 간신히 비도가 자신에게 떨어지기 직전에 검막을 형성했다.
조금은 엉성한 검막이었지만 그래도 비도가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뚫지, 못해?!’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지만, 궁현은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쉬익! 쉭!
이제는 익숙해진 파공성이 들리고, 궁현의 몸에 하나둘씩 혈선이 그어졌다. 그제서야 영영의 심산이 무엇인지 알아챈 궁현이 급히 검막을 거두었지만, 이미 궁현의 주위에는 단 한 치의 틈도 없이 비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이라, 검막을 거두자 아직 위에서 머물던 비도가 떨어져 내려왔다.
“제길!”
불평하듯 내뱉은 궁현은 어깨가 꿰뚫려 아직 잘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들어 검을 양손으로 잡고 비도를 쳐 내기 시작했다. 그 작은 옷의 어디서 이 많은 비도가 나왔는지, 가히 몇 백은 넘을 듯 보였다.
‘이걸 일일이 다 쳐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이 장난이 아니야. 어떻게든 빠져나가…… 아!’
무언가 떠올렸는지 궁현의 표정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