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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23화)
9. 음속수검(音速水劍)(5)


“검기류, 한예풍!”
단전에서 목기를 끌어 올린 궁현이 목즉풍(木卽風)의 법칙에 따라 목기를 운용했고, 그것을 검에 씌웠다. 그러자 궁현의 검이 날카롭고 차가움을 머금은 바람에 휩싸였다. 궁현은 그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비도를 쳐 내 궤도를 완전히 바꾸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필사적이었던 방금 전과는 달리 단순히 비도의 날에 닿으면 그만이라는 듯 긴장감 없는 검놀림이었다.
챙! 채챙! 챙, 챙!
그런데도 영영의 비도는 궁현의 검에 닿는 족족 튕겨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영영은 아미를 찌푸리며 점점 더 빠르게 비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궤도를 벗어나 땅에 떨어진 비도의 실은 과감히 끊어 버린 것은 물론이다.
“연식(燕式)!”
갑자기 비도들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고는 땅에 거의 붙다시피 하며 궁현에게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제비[燕]를 보는 듯했다.
챙! 채챙!
검을 땅으로 향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 비도를 막으려던 궁현은 당황했다. 서너 개를 튕겨 냈을 때 갑자기 비도가 솟구쳤던 탓이다.
도대체 이것이 열 개의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이던가? 궁현은 영영의 손가락이 수백 개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 봤다. 아니, 의심하려던 순간 그의 신형이 빠르게 무너져 갔다.
쿵!
“아!”
“이익!”
“휴우.”
궁현의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것 몇 올이 비무대로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그 정도라면 장내가 이렇게 술렁거리지는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란이 인 걸까?
“호호, 졌다는 건가요?”
궁현을 보며 영영이 입을 가리고 나지막이 웃었다.
“졌다니요? 전 패배를 인정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궁현의 말에 득의양양하던 영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릎을 꿇는 것이 패배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인지요?”
그랬다. 궁현은 솟구쳐오는 비도를 피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자세를 낮춘 것이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복종이나 패배의 의미로 쓰여 왔다. 다른 이들이 오해를 할 여지가 다분한 것이다.
“달리 비도를 피할 방도가 없었을 뿐입니다.”
“후, 아무리 그래도 무릎을 꿇는 것이 패배의 증거라는 것을 모르는 분은 없을 터. 각 세가의 태상장로님들께 여쭤…… 어, 어째서지요!!”
하지만 태상장로들은 제갈공청을 제외하고는 전원 시합 속행을 결론지었다. 또, 그 제갈공청마저도 잠시 휴식을 주자 청했을 뿐이었다.
어째서인가, 꼭 굴복(屈伏:무릎 꿇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황상 자신의 승리가 분명하지 않은가! 잠시 이유를 생각해 보던 영영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권세의 차이라는 건가요?’
그랬다. 제갈세가는 말이 좋아 칠대세가지, 무력이나 세력만으로 따지자면 다른 중소세가들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앞서는 정도였다. 만약 신기제갈(神機諸葛)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태조(太祖)라 할 수 있는 와룡선생(臥龍先生)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도(八陣圖)와 여러 진법에 대한 해설이 남겨진 서책들이 아니었다면, 분명 제갈세가는 세월에 묻혀 사라져갔을 터였다.
그런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를 비교해야 한다면, 물론 남궁세가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은 궁현의 승리나 나름 없다는 것을 안 태상장로들의 마음이 뒤바탕되어 있긴 했으나, 분명 남궁세가의 세력을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좋아요. 권세에 기댈 수 없을 정도로 압도하면 된다는 거군요!’
“그렇다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 전력을!”
영영의 기도가 달라졌다.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강맹해졌던 것이다.
“으, 윽!”
툭.
제갈세가가 위치한 곳에서 누군가의 신음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잠시 움찔거린 제갈영영이지만, 이내 손에 묶인 실을 당겨 비도를 회수했다. 아니,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끌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한 영영이 손을 펴 보는 사이, 그녀의 목에 차갑고도 섬뜩한 것이 닿았다. 그것은 바로 궁현의 검이었다.
“…….”
“한예풍이라는 겁니다. 본래는 무생물인 실을 타고 소저의 손에 묶인 매듭을 잘라 비도를 다루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바람이 너무 날카로웠는지 실이 맥없이 잘리고 말더군요.”
그 말에 영영의 눈이 흔들렸다. 만약, 만약 이자의 바람이 조금만 더 섬세했다면, 자신은 벌써 비무대를 내려가 있었을 테니까.
태상가주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패배를 선언하지 않았다.
“졌습니다.”
잠시 한숨을 쉰 영영이 궁현의 검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그리 고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멎어 있었고, 곧게 궁현의 눈과 마주했다.
“다음번에는, 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잠시 말을 멈춘 영영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소협…… 현도, 그 기술을 완성하세요.”
친우로 인정했다는 뜻일까, 자신을 대하는 호칭이 달라진 것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궁현이 답했다.
“예, 그리하지 말라 해도 그럴 겁니다. 영영 소저.”
궁현의 대답을 들은 영영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천천히 뒤돌았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렸는지 얼굴 가득 사색이 번지며 제갈세가 가솔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린다.
‘현이 저 녀석. 저리도 기를 섬세히 다룰 경지에 올랐다니. 아니면, 섬세한 성질을 지닌 신공을 익힌 것인가.’
태상장로들은 혁혁한 눈길로 궁현을 바라보았다.
영영이 서둘러 비무대를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궁현 또한 의아함을 애써 감추고는 의방으로 향했다. 대충이나마 치료를 받으려던 것이다.
“에궁, 쯔쯔쯔. 혼절해서 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이리 만신창이가 되서 오누? 몹쓸 것.”
언제나 궁현이 다치면 맡아서 치료하던 고선재(高宣渽)라는 의원이었다. 금창약과 함께 여러 이름 모를 약들을 상처 부위에 바른 그는 붕대로 어깨를 감싸고 궁현의 등을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다 됐다, 이것아. 칠칠맞게 어디서 칼침 맞고 다니지는 마라. 이 늙은이가 이리 고생을 해야겠느냐?”
천인공노할 짓인지도 모른다. 고작 세가 내의 의원 주제에 이공자(二公子)에게 저런 행동을 하다니?
하지만 궁현의 얼굴에는 한가득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 고 의원. 아니, 노야(老爺). 늘 감사합니다.”
최대한 예를 차려 고마움을 표하며 의방을 나선 궁현이 협소전으로 향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 천천의 비무는 보지 못할 것이다.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 다 챙겼…… 아!’
결국 궁현은 그 이후로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세가 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날 온 천지가 어둠에 휩싸인 그때에, 남궁세가에서 그림자 하나가 사라졌다.



10. 가출(家出)(1)


다음 날 아침.
“도련님!!”
누군가의 방, 한참을 뒤척이던 한 여인이 그 한마디 말과 함께 깨어났다.
그것은 바로 화선, 궁현의 전속 시비를 맡고 있는 당찬 여인이다.
왜인지 오늘따라 잠을 설친 화선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궁현의 침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화선을 반겨 준 것은 그녀의 도련님, 남궁세가의 이공자 남궁현이 아니라, 하나의 쪽지였다.
처음에는 목욕을 하러 간 것이라 생각하고 실소한 화선이었지만, 서신의 내용을 읽어 내린 그녀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녕, 화선?
아…… 막상 쓰려니까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네.
그러니까 이것저것 말하지 않고 결론만 말할게.
나, 가출한다.
― 남궁현.

“가출. 아아, 그러시구나.”
마지막 글을 읽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한 듯 보였던 화선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나, 가출한다. 나, 가출…… 한다. 나, 가……출한……다. 나, 가출…… 도련니이이이임!!”
궁현의 전각, 협소전에 때아닌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시각, 가주인 남궁건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펼쳐 보고 있었다.

작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버님.
가을이 한창인지 천주산은 온통 붉은 물결로 뒤덮여 있습니다.
소자가 무례를 무릅쓰고 이리 서신 올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중략)
……하여, 소자는 도저히 형님에게 검을 겨눌 수 없습니다.
그런 고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소자, 가출하겠습니다.
― 남궁현 배상(拜上)

“허, 허허. 허허허…….”
잠시간 허탈한 웃음을 짓던 남궁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봐라.”
“예.”
남궁건의 말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노(侍奴:일반적으로 많이 쓰이지 않으나, 시중을 드는 남자 종을 말한다. 시비와 비슷한 개념.)가 대답했다.
“나갈 채비를 하거라.”
“예.”
말과 함께 시노의 기척이 멀어져갔다. 그것을 확인한 남궁건이 정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이가 사라졌다. 뇌영(雷影)들을 데리고 가서 찾아와라.”
“…….”
아무 대답도 없다. 하지만 남궁건은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정붕 위에 숨어 있었을 무영뢰(無影雷)가 사라졌으리라는 것을.
무영뢰!
본래 남궁세가 가주 직속의 무사들은 창천대(蒼天隊)와 무한대(無限隊)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남궁건이 6년 전, 비밀리에 뇌영대(雷影隊)라는 가주 직속 부대를 신설했는데, 이들의 대장이 바로 무영뢰인 것이다. 이 뇌영대는 칠대세가는 물론 무림의 어떤 문파도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훈련, 양성, 업무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뇌영대란 무엇인가.
총 3명의 부대장을 두어 3대로 이루어진 이들은 무언가를 추적, 미행하거나 정보를 캐내는 데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 자신할 만한 자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에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문파의 장문인도 암살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춘,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최고 최강의 부대인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기척을 지우고 흔적을 지우는 데에 특출나다는 것이다.
그래,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이들은 가출을 상습적으로 일으키는 남궁현을 추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사실, 이들은 만들어졌다기보다는 형성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데, 가주의 명을 따라 가출한 남궁현을 추적하기는 해야겠고, 추적이 붙은 것에 눈치챈 남궁현은 그 명석한 두뇌로 점점 더 주도면밀하게 흔적을 숨기니, 무사들 중에서 남궁현 추적대로 한 번, 두 번 씩 뽑힌 이들의 추적술(追跡術)은 점점 더 뛰어나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진 부대가 이들인 것이다.
남궁현을 추적하는 와중에 친밀감도 생기고, 서로의 추적술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보완하며 책무를 계속하던 그들은 어느새 일반 무사들의 부대는 지금까지처럼 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남궁건의 생각을 돌릴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쌓고 만다. 물론, 그들의 실력이 늘고, 추적술과 은신잠행술이 치밀해지는 만큼 남궁현의 흔적 지우는 솜씨가 그 이상으로 훨씬, 점점 더 늘어나 버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저번의 가출 때에는 신입 두 명 ―이형종과 허정휘― 의 실력을 키우느라 1년 가까이를 소모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 찾아온 것을 보면 뇌영대의 미래는 밝았다. ―사실, 진상(眞相)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궁현이라는 행운을 만난 것이었으나, 남궁건이 그것을 알 리는 없었다.―
각설하고, 잠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남궁건이 눈을 떴을 때, 시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칠천회 회실로 나갈 채비를 마쳤습니다. 의복을 들일까요?”
“그래.”
전각을 나서는 남궁건의 표정은 약간 그늘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