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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24화)
10. 가출(家出)(2)
한편, 동생과 싸운다는 죄책감과, 드디어 동생을 꺾고 그녀에게 멋진 모습을 보일 기대감이라는 상반된, 그리고 모순된 감정의 괴리감에 밤새 잠을 설친 천천은 시체처럼 어두운 안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씻은 뒤 환복을 마치고 아침 공기를 쐬기 위해 문을 나서려던 천천에게, 문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검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정확히는 검과 서신이 눈에 띄었다.
“뭐지?”
무심코 검을 집어 들고 그것을 살피던 천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법 날이 서 있긴 하나,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검이었던 것이다. 특이하다면 검병에 새겨진 새의 조각 정도일까. 조심스레 검을 내려놓은 천천이 이번에는 서신을 펴봤다.
형님, 잘 주무셨습니까?
저 현입니다. 이리 서신을 올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략)
……이 검은 뇌붕일섬낙일명이라는, 저희들의 9대조이신 천뢰검신 남궁상현 할아버님의 애검입니다. 제가 우연히 무고에 들어갔다가 얻게 된 것을, 이제서야 형님께 드리게 됩니다. 부디 잘 사용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도저히 형님과 검을 맞댈 수가 없어 이리 서신 한 장만을 남기고 남궁세가를 떠납니다.
훗날, 훗날 제가 돌아왔을 때…… 형님이 저를 용서해 주셨기만을 빌면서 말입니다.
― 아우가.
“…….”
주륵.
천천의 한쪽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나는 너를 그리도 미워했는데. 겨우 여인 하나 때문에 그리도 순식간에 너에게 검을 겨눴는데.’
후회스러웠다. 어째서 이리도 착한 아우를 원망했었던가!
그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나머지 한쪽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한참을 서서 눈물을 흘리던 천천이 궁현이 남긴 검을 허리에 차고는 문을 열고 전각을 나섰다. 어느새 눈물 자국도 지운 채, 무표정한 얼굴로.
당설혜의 침소.
“흐흐흥, 흥 ……응?”
오늘도 궁현의 활약을 본다는 생각에, 더욱이 궁현이 그 궁현과 닮다 만, 짜증나는 남궁천천을 뭉개 버릴 거라는 생각에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을 하던 설혜의 눈에 창틈에 끼인 한 장의 종이가 보였다. 잠시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린 설혜는 그 종이를 들고 펴 보았다.
鳩.
― 歌.
그 두 글자뿐이었다. 뜻을 알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화장에 몰두하는 설혜였다.
“흐흥, 흥흥.”
화장을 마친 설혜는 서둘러 칠천회 회장으로 향했다. 그 옆으로 그녀의 오라버니, 당호영이 함께 걸었지만, 설혜 자신조차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칠천회 비무대회는 이제 결승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제껏 떠들썩하던 연무장은 묘한 침묵이 감돌았고, 설혜는 그런 분위기가 싫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초(巳初:9시경) 말, 비무가 시작되는 시각이 되자, 설혜의 가슴도 덩달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혼약자 ―설혜가 일방적으로 그리 여기는 거지만― 인 궁현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무대에 올라설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천천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혹은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비무대에 올라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는데도, 비무를 개시하는 시간에서 반 시진이 지나도록 궁현이 나타나질 않은 것이다.
결국 남궁섬은 궁현의 기권패를 선언한다. 그것은 즉, 천천이 결승을 부전승으로 이겨, 칠천회에 우승했다는 말과 같았다.
장내가 술렁였다. 여태껏 이런 상황은 없었던 탓이다. 부득이한 이유로 비무에 나가지 못할 경우 사람을 시켜 이유를 고하는 것이 정상인데, 지금은 아무런 상황 설명이 없지 않은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말을 좀 해 주시오!”
“흥, 남궁세가가 이런 치졸한 짓을 하다니.”
개중에는 남궁세가를 욕하는 언행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소가주의 경력을 빛내려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남궁세가의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시각까지 이공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어찌 된 일인지 그들에게는 너무도 눈에 선했던 것이다. 설령 저런 말을 듣는다 해도 상대자인 궁현이 가출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쪽이 소가주의 경력을 빛내려 한다는 것보다 훨씬 치부가 될 만한 일이었다.
“헷, 헤헷.”
그 와중에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번지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사천당가의 금지옥엽, 당설혜였다. ‘누군가’가 남기고 갔던 서신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비둘기[鳩]는 어디를 가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습성이 있죠. 그리고 노래 가(歌) 자에서 하품 흠(欠) 자를 빼면 가가(哥哥)의 ‘哥’ 자. 금방, 돌아오시겠다는 거겠지요, 가가?’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그 비둘기라는 글자에 숨겨진 의미는 자신을 마음의 ‘집’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뜻이 아닌가!
뜻을 알아차린 순간 설혜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하늘을 날아갈 듯 기쁘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느낀 설혜는 연신 화사한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궁현은 비둘기라는 글자를 단지 집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한 거였지만, 궁현의 심중이 정말로 그런지 어떤지는 그녀에게 뒷전이었다. 막말로,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 않던가.
따로 시상이나, 축사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칠천회의 비무대회는 명목상 그저 친분을 다지기 위한 전야제와도 같은 것. 시상을 했다가는 칠천회가 완전한 비무대회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 옛부터 칠대세가의 생각이었다. 어떤 일을 하던 명분을 중요시하는 정파의 기질이 여기서 발휘된 것이다.
어찌 되었던,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칠천회가 끝났다.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칠천회는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
따로 별다른 가구를 두어 꾸민 것이 아닌데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자연스레 엄숙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방, 그 안에는 하나의 커다란 원탁만이 놓여 있었다. 그 원탁의 한쪽 자리에 앉은 남궁건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자, 그럼 지금부터 제419회 칠천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군사?”
“예, 회주님.”
남궁건의 말에 군사인 제갈무령(諸葛舞令)이 원탁 위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흠?!”
군사의 행동에 모든 이들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렇듯 의제도 제시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것이다.
“이 지도를 보아 주십시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지도로 향한다. 예상대로 광활한 중원의 대지가 산맥 하나, 섬 하나까지 세세히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지도 여기저기에 붉은 색의 점이 빼곡히 찍혀 있는 것이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팽가의 가주 팽무벽(彭霧闢)이 물었다.
“음? 이건 대체 무엇인가, 군사?”
“어떤 단체의 움직임이 보인 곳을 표시한 것이지요.”
군사의 말에 남궁건과 제갈세가를 제외한 장내의 회인(會人)들이 술렁였다. 칠천회가 겨우 단체 하나 때문에 총회의 순서를 어길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던가?
엄숙해야 할 칠천회가 이리 시끄러워지자, 모용세가 가주 모용영휘가 그 검미를 둥글게 말며 군사를 향해 물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게나. 군사, 그렇다면 절차를 생략해야 될 정도로 무거운 단체의 움직임은 무엇인가?”
언뜻 사람 좋게 다른 이들을 진정시킨 것처럼 보였지만, 말에 실린 기세를 보면 꽤나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모용영휘를 본 제갈무령이 옅게 쓴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그것은…… 입니다.”
그 순간,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11. 마도(魔道)의 출도(1)
강호.
그곳은 수많은 문파와 무림인들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또 하나의 세계이자, 또 하나의 중원’.
강호는 크게 정파와 사파, 새외세력(塞外勢力), 그리고 마도(魔道)로 나뉜다. 이 중 정파는 소림사(少林寺), 화산파(華山派), 무당파(武當派), 아미파(峨嵋派), 청성파(靑城派), 곤륜파(崑崙派), 점창파(點蒼派), 종남파(終南派), 해남파(海南派) 그리고 개방(짵幇)의 구파일방(九派一幇)과 남궁, 모용, 제갈, 단목, 황보, 팽, 당의 칠대세가를 주축으로 하여 주로 백도맹(白道盟)이라 줄여 부르는 백도방파연맹(白道幇派聯盟)과 칠천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주력 ―이라 주장하는 이― 들을 따로 선출해 간부로 임명하며 정도맹(正道盟)을 세워 그 기치를 드높였다.
사파. 사파는 살막(殺幕), 청도검막(靑島劍幕), 여수검막(麗水劍幕), 포주창막(蒲州槍幕), 남산궁막(南山弓幕), 귀주검문(貴州劍門) 사룡문(邪龍門), 귀정검문(鬼情劍門), 흑호문(黑虎門), 혼천문(混天門), 월하검문(月下劍門), 귀령문(鬼靈門)의 오막칠문(五幕七門)과 사마(司馬), 하후(夏侯), 구양(歐陽), 공야(公冶), 동방(東方), 독고(獨孤), 설(雪), 고(高)의 팔대혈가(八大血家)를 주축으로 흑도맹(黑道盟)이라 불리우는 흑도문파연맹(黑道門派聯盟)과 진혈회(眞血會)를 이루고, 정파의 무림맹과 마찬가지로 그 안의 주력을 모아 간부로 하여 사도맹(邪道盟)을 세웠다. 물론 그 외에도 사도맹에 가입되지 않고 제각기의 세력을 형성한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과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 등이 있었지만, 도적이라는 이유하에 세력으로 잘 쳐 주지 않았다. 즉, 정파는 정파끼리, 사파는 사파끼리 모이되 그 안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뉜 것이 백도맹, 흑도맹, 칠천회, 진혈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외. 새외세력에는 주로 새외삼궁(勢外三宮)이라 불리우는 세 궁. 즉, 북해빙궁(北海氷宮)과 남해태양궁(南海太陽宮), 그리고 검녀(劍女)들의 성지인 검각(劍閣)이 있으며, 또한 천축에 위치하고 새외양사(勢外兩寺)라 불리는 포달랍궁(布達拉宮)과 뇌음사(雷音寺)가 있다. 포달랍궁은 라마교의 성지이며, 뇌음사는 천축 밀교의 총본산인데, 그 이념에 따라 대뢰음사(大雷音寺:대승불교 이념)와 소뢰음사(小雷音寺:소승불교 이념)로 나뉜다. 그 외에도 새외세력에는 수많은 문파나 궁과 탑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마도. 마도를 걷는 이들은 정순하고 깨끗한 기운을 쌓기보다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이 대기 속에 충만한 사기(邪氣)나 탁기(濁氣)를 이용해 손쉽고 빠르게 강한 무공을 얻는다. 하지만 세상은 기본적으로 등가교환이라, 강한 힘을 빨리 얻을 수 있는 대신 마공(魔功)을 수련한 자들의 대부분이 심성이 사악해지고 불안정해지기에 정, 사 할 것 없이 공적으로 삼았다. 이런 마도인(魔道人)들이 몸을 의탁하거나, 그 마도인을 키워 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마교(魔敎)와 혈교(血敎)로 줄여 불리는 천마신교(天魔神敎)와 아수라혈교(阿修羅血敎). 즉, 마도이교(魔道二敎)였다.
본디 마교와 혈교는 둘 다 아수라교(阿修羅敎)에서 파생된 세력이기에, 서로간의 묵언의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으나, 200년 전 정마대전(正魔大戰) 때, 어떤 마교도에 의해 혈교의 소교주가 정체를 숨기고 사랑을 나누었던 정파의 여인이 죽임을 당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불가침 조약이 깨지며 혈마대전(血魔大戰)이 일어난다. 물론, 정·사파의 연합세력들이 그 틈을 타 혈교와 마교를 몰살하려 했으나, 그들이 나타나기도 전에 마교와 혈교도들이 바로 그 칼끝을 정·사 연합으로 돌리는 것을 보고는 포기해 버렸다. 아무리 싸우던 도중이라고는 하나 결국에는 같은 아수라교의 교도. 서로 싸우기보다는 공동의 적을 먼저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결국 혈마대전이 끝난 뒤, 그 둘은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서로의 힘이 워낙 크고 비슷해 어느 쪽이던 더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적어도 정파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두 교에 심어 놓았던 세작들도 그렇게 전해 왔고, 개방도(짵幇徒)들도 틈틈이 두 교의 성지들을 조사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던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파의 귀령문도(鬼靈門徒)들까지 개별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100년간을 조사하고 나서야 마도이교의 완전 해체를 선언했건만, 그로부터 또다시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들이 존재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