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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소개팅 대타(2)
“왔어? 어? 그런데 발은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오다가 돌멩이 잘못 밟아서. 망고 주스네? 고마워, 잘 마실게.”
서인은 다민의 물음에 대충 거짓말을 섞어 대꾸한 뒤에 그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민의 책상 위에 있던 음료수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절반 정도 남아 있던 주스를 벌컥벌컥 다 마시고 빈 병을 내려놓았다. 다민은 펼쳐 놓은 논술 교재 위에 팔을 괸 채 기가 막힌다는 듯 서인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생긴 거랑 다르게 논다니까. 넌 남이 먹던 걸 그렇게 잘 먹냐? 비위 상하지 않아? 게다가 단 거 그렇게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안 그래도 혈당 떨어진 거 같아서 사탕이라도 먹을까 하던 중이야. 그리고 비위 상할 건 뭐래. 설마 주스에 침 뱉었어?”
“뭐?”
“그런 거 아니잖아. 그럼 됐지, 뭐. 강다민, 너야말로 무슨 남자애가 까칠한 척이니?”
서인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논술 교재를 꺼냈다. 다민은 서인을 힐끔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고백하고 차였던 게 불과 3주 전의 일인데 서인은 이렇듯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자신을 일부러 더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게 다행스럽단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서인에게 자신은 결코 ‘남자’로서 인식되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띠링.
그 순간, 문자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서인이 냉큼 휴대폰을 꺼냈다. 다민은 무심코 그녀의 휴대폰을 힐끔 봤다가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너 또 소개팅 대타 뛰려고?”
“응. 그렇게 됐네.”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서인을 보며, 다민은 얼굴을 찡그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너희 이모는 왜 그러는 건데? 네가 미성년자인 건 알고 있는 거 맞아? 그러다가 변태 아저씨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너더러 대신 소개팅에 나가래? 소개팅 같은 게 하기 싫으면 본인이 알아서 거절하든지 그래야지. 왜 너한테 떠넘기냐고! 그리고 너도 문제야, 우서인. 아무리 이모의 부탁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걸 계속 들어주고 있냐?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목소리 좀 줄여.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그리고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잖아.”
다민의 말에 한숨을 쉰 서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다민이 그녀의 말에 잠시 대꾸하지 못하다가 다시 인상을 쓰며 입을 열려는 순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오! 이번에는 얼마 정도 받을 것 같은데? 오만 원? 십만 원? 설마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이, 이십만 원?”
“쯧쯧, 이 저렴한 영혼 같으니라고.”
서인은 책상 앞에 나타난 커다란 덩치의 남자아이를 쳐다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 이십만 원에 영혼을 팔겠다고? 에라, 이 저렴한 영혼아. 몸값 좀 높여 봐라.”
“뭐? 그럼 이십만 원보다 더 받는다는 거야? 얼마나 받을 건데?”
“흠…… 딱 구체적으로 금액을 정하지는 않았어. 넉넉히 챙겨 달라고 했으니까 이모가 알아서 주겠지, 뭐.”
서인은 장난스럽게 브이 자를 그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하여간 이모한테 돈 뜯어내는 건 거의 사채업자 수준이라니까. 서인을 쳐다보던 다민이 혼잣말로 구시렁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렴한 영혼의 소유자, 현우환은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좋았어! 나도 내 몸값을 높여 봐야지. 우리 엄마는 나를 공짜로 부려 먹으려고 한다니까?”
“그건 네가 머슴 스타일이라 그래.”
“야! 도인주!”
그때 우환의 등 뒤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우환이 버럭 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체구가 우환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져 있었던 탓에, 서인이나 다민 둘 다 인주가 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안녕, 서인아. 그리고 다민이도 안녕.”
인주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한 뒤, 서인의 앞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아예 뒤로 돌아보고 앉았다. 그리고 책상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 또 소개팅 나가는 거야? 응? 이번엔 어떤 아저씨래?”
“서른둘. 잘생겼대. 그런데 그 잘생긴 기준이 곰돌이야.”
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간단히 정리해서 말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의자의 등받이를 꼭 잡은 채 그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인주가 바들바들 떨었다. 서인은 인주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웃어도 돼.”
“하하하! 너네 이모는 왜 툭하면 그런 스타일이랑 소개팅을 하는 거야? 대체 누가 주선을 하기에 곰돌이만 모아 놓는 거냐고.”
“우리 이모 다니는 연구소 소장님.”
소장님이 딱 곰돌이거든. 꿀단지 하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 딱이야. 서인이 덧붙여 말했다. 인주가 눈물까지 나온 것인지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웃다가 자신의 옆에 앉으려던 우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얘를 이모한테 소개하는 건 어때? 딱 곰이잖아. 불곰.”
“야! 도인주!”
“그거 좋은 생각인데? 차라리 그럴까?”
우환이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서인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우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우환이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엑스 자로 만들어 보이며 더욱 크게 외쳤다.
“연상 싫어! 난 연하가 좋다고!”
“우리 이모, 완전 동안이야. 내가 이모 대신 소개팅 나가는 것만 봐도 알잖아.”
“웃기지 마! 너희 이모가 동안이 아니라 네가 노안이겠…….”
흐억. 우환은 씩씩대며 말을 내뱉다가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서인이 ‘노안’이라는 말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슬그머니 서인의 눈치를 살폈다. 서인이 싱글거리며 우환을 쳐다보다가 인주를 향해 말했다.
“인주야, 물어.”
“엉!”
인주가 서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환의 손을 잡더니 꽉 물어 버렸다. 아파! 아프다고! 우환이 난리를 치며 인주를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도인견’답게 인주는 우환의 손가락을 문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서인이 웃음을 참다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나 참.”
그중에서 유일하게 정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다민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
― 진짜 내가 제대로 용돈 쏠게.
“어. 쏴, 두 번 쏴. 세 번 쏘면 더 좋고.”
서인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보험사 빌딩이 멀리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빌딩 옆 커피숍이라고 했겠다……. 서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그녀에게 쏠렸다.
하늘색 원피스가 발랄하게 허벅지 위에서 살랑거렸다. 게다가 손에 가볍게 든 노란색 손가방까지, 그녀의 차림새는 ‘스물일곱 권나희’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지만 어차피 거절할 사람, 서인은 무조건 자신이 동안이라 그렇다고 우길 작정이다. 항상 ‘노안’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에 이렇게라도 동안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게 서인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오케이, 도착했어. 이만 전화 끊자, 이모.”
― 고마워, 서인아! 적당히 거절하고 빨리 나와! 절대 들키면 안 돼! 소장님이 알게 되면 그날로 나는 사표 써야 될 거야. 알았지?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야. 이모, 나 미자야. 내가 이모 대신 이렇게 소개팅 대타 뛰었다는 거 우리 엄마 귀에 들어가면 끝장난다고.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가야 돼. 알았지?”
― 참! 다쳤던 발은 어때?
내가 이렇다니까. 이모란 사람이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 나희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인은 가만히 웃으며 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제 발을 보았다.
다쳤던 발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가끔 쑤시고 아플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발이 아니라…….
“참 일찍도 물어보십니다? 벌써 나았거든요? 안 그랬으면 내가 여기 나왔을 거 같아?”
서인은 원피스 속에 가려진 허벅지의 시커먼 멍이 괜히 신경 쓰여서 치맛자락을 아래로 끌어 내리면서도 경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카펫에 묻은 핏자국은 결국 그녀의 엄마, 권나경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나경에게 호되게 매를 맞은 게 어제저녁 무렵이었다. 나경은 서인의 발바닥에 감겨 있는 붕대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아끼던 카펫이 지저분해졌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 그럼 다행이고. 하여간 잘 부탁해!
나희가 안도한 듯 경쾌하게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서인은 커피숍 입구 앞에 서서 휴대폰을 든 채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피식 웃으며 그녀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청승을 떨려고. 됐어.”
너는 열아홉 살의 우서인이 아니라 스물일곱 살의 권나희야. 늦둥이로 태어나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권나희.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는 우서인이 아니라.
서인은 제 뺨을 가볍게 때린 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좋아.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어린 소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 보이는 여인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녀는 노란색 손가방을 팔에 걸친 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 아저씨 전화번호가…….”
물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여전히 열아홉 살의 우서인이 할 법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흐음. 여기 있네.”
서인은 나희에게서 건네받았던 전화번호를 찾아낸 뒤에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곰돌이32’라고 저장해 놓은 연락처를 가볍게 터치한 뒤, 휴대폰을 귀 가까이에 대며 유리문을 열었다. 커피숍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 중에 있으려나.
서인은 신호음이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커피숍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삐죽였다.
뭐야, 아직 안 온 거야?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상대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우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서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우환이 보았다면 ‘우서인 경계경보’를 발령했을 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기분이 나빠서 웃는 것이기에.
이러면 곤란한데요, 아저씨.
나는 시간 개념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던데.
서인은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아서 딱 30분만 기다려 보기로 결정한 뒤,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때, 구석에 놓인 테이블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서인은 계속 신호음이 이어지고 있는 휴대폰을 무심코 손에 쥔 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에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작은 테이블 단 두 개만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테이블은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단정한 생김새의 젊은 남자였다.
덥지도 않은가?
서인은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놓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관심을 끊고 칸막이 너머의 빈자리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어?’
남자가 앉아 있는 자리의 테이블 위에서 깜빡이는 휴대폰 화면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번호가 너무나 익숙했다. 제 것이니 당연했다. 서인은 그때까지 무심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것을 다시 본 뒤, 기가 막혀서 입을 달싹였다.
이 남자라고?
‘곰돌이32’가?
서인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남자의 자리로 다가가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남자의 시선이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에서 떨어져 그녀에게 향했다. 서늘한 시선이었다. 눈매가 길게 뻗어 있는 것이 어쩐지 야해 보였다.
아저씨가 야해 보이다니.
미쳤어.
서인은 제 엉뚱한 생각에 괜히 민망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길모윤 씨?”
열아홉 살의 되바라진 우서인이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권나희예요. 오늘 소개팅하러 오신 거 맞죠?”
스물일곱 살의 권나희로 변신한 서인은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면서 눈짓으로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남자, 길모윤은 뒤늦게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자신의 휴대폰을 보고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휴대폰이 무음으로 되어 있는 걸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처한 기색의 남자를 보는 게 어쩐지 재미있어서, 서인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그런 서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모윤이란 이름의 소개팅 상대는 예의 바른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음으로 되어 있어서 전화가 온 줄 미처 몰랐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약속에 늦은 건 아니었으니 다행이잖아요? 저는 그쪽이 아직 오시지 않은 줄 알았거든요.”
서인은 가볍게 대꾸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170cm가 넘는 키에 오늘은 하이힐까지 신어서 그녀는 웬만한 남자들과 키가 비슷하거나 혹은 더 컸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큰 남자를 앞에 두고 올려다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강다민이나 현우환도 자신보다 키가 커서 올려다보기는 하지만 말이다. 뭐랄까. 그들은 그냥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데, 눈앞의 이 남자는 아무래도 어른이라 그런지 살짝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봤자 오늘 나한테 차일 아저씨잖아. 서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구시렁댔다.
“앉으시죠, 권나희 씨.”
“예.”
서인은 모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꾸한 뒤,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모윤은 서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의자에 앉더니 펼쳐 놓았던 책을 덮어 옆에 가지런히 놓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으응?
서인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 서인을 쳐다보던 모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왜 앉지 않으시죠?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예? 아……. 아니요, 전혀.”
서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희 대신 소개팅을 나갈 때마다 아저씨들이 매너랍시고 의자를 빼 주고 앉으라고 하던 것에 익숙해진 바람에, 이 남자에게서도 자신도 모르게 당연히 그 행동을 기대했나 보다. 서인은 그런 제 모습이 민망해서 속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으아! 창피해!’를 외쳤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은 채 맞은편의 남자를 쳐다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지요. 길모윤이라고 합니다.”
“권나희라고 해요.”
모윤이 예의 바른 자세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서인 역시 이모의 이름을 대신 둘러대며 인사했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 ‘곰돌이’가 아니잖아?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소장님이 잘생겼다고 그랬다며?
서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모윤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길모윤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서인이 생각했던 ‘서른두 살+배 볼록+동글동글+곰돌이=아저씨’와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했던 조건들과 전부 반대라고 하면 모를까.
나이는 서른둘에서 열 살 빼서 스물둘이라고 하면 딱 되겠고, 배는 볼록하기는커녕 초콜릿 복근이 불끈불끈하고 있을 것 같고. 서인은 슬그머니 모윤의 배 근처를 쳐다보다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점원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얼그레이 쇼트케이크 하나 주세요. 아, 그리고…….”
문득 저 혼자 주문해서 먹기가 쑥스러워져서 서인이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며 모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윤이 차분한 얼굴로 점원을 향해 말했다.
“복숭아 쇼트도 하나 추가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점원이 주문받은 목록을 메모한 뒤에 돌아섰다. 서인은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저런 서늘한 얼굴로 달콤한 복숭아 쇼트케이크라니. 안 어울리잖아. 그녀는 ‘아, 맛있떵!’ 하며 혀 짧은 소리를 하는 길모윤을 상상하다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모윤은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 권나희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쉽게 편견을 갖는 성격은 아니지만 소개팅 상대방이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연구원, 그것도 고전 학술 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말에 고리타분하고 깐깐한 여자를 연상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제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앞의 여자는 쾌활하고 밝았다. 어떻게 보면 나이를 헛먹었나 싶을 정도로 외모는 물론 풍기는 느낌 같은 게 어려 보였다.
굳이 이런 차림새로 어려 보이게 꾸미고 나오지 않았어도 될 텐데 말이지.
모윤은 자신도 모르게 권나희를 훑어보며 속으로 평가했다. 하긴 취향이 이런 스타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점원이 주문받았던 아메리카노와 쇼트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저, 잠시 실례할게요.”
“예? ……아아, 예. 그러시죠.”
모윤은 제 앞에 일어선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모양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적중했는지 ‘권나희’는 손가방을 들고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1. 소개팅 대타(2)
“왔어? 어? 그런데 발은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오다가 돌멩이 잘못 밟아서. 망고 주스네? 고마워, 잘 마실게.”
서인은 다민의 물음에 대충 거짓말을 섞어 대꾸한 뒤에 그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민의 책상 위에 있던 음료수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절반 정도 남아 있던 주스를 벌컥벌컥 다 마시고 빈 병을 내려놓았다. 다민은 펼쳐 놓은 논술 교재 위에 팔을 괸 채 기가 막힌다는 듯 서인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생긴 거랑 다르게 논다니까. 넌 남이 먹던 걸 그렇게 잘 먹냐? 비위 상하지 않아? 게다가 단 거 그렇게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안 그래도 혈당 떨어진 거 같아서 사탕이라도 먹을까 하던 중이야. 그리고 비위 상할 건 뭐래. 설마 주스에 침 뱉었어?”
“뭐?”
“그런 거 아니잖아. 그럼 됐지, 뭐. 강다민, 너야말로 무슨 남자애가 까칠한 척이니?”
서인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논술 교재를 꺼냈다. 다민은 서인을 힐끔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고백하고 차였던 게 불과 3주 전의 일인데 서인은 이렇듯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자신을 일부러 더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게 다행스럽단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서인에게 자신은 결코 ‘남자’로서 인식되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띠링.
그 순간, 문자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서인이 냉큼 휴대폰을 꺼냈다. 다민은 무심코 그녀의 휴대폰을 힐끔 봤다가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너 또 소개팅 대타 뛰려고?”
“응. 그렇게 됐네.”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서인을 보며, 다민은 얼굴을 찡그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너희 이모는 왜 그러는 건데? 네가 미성년자인 건 알고 있는 거 맞아? 그러다가 변태 아저씨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너더러 대신 소개팅에 나가래? 소개팅 같은 게 하기 싫으면 본인이 알아서 거절하든지 그래야지. 왜 너한테 떠넘기냐고! 그리고 너도 문제야, 우서인. 아무리 이모의 부탁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걸 계속 들어주고 있냐?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목소리 좀 줄여.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그리고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잖아.”
다민의 말에 한숨을 쉰 서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다민이 그녀의 말에 잠시 대꾸하지 못하다가 다시 인상을 쓰며 입을 열려는 순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오! 이번에는 얼마 정도 받을 것 같은데? 오만 원? 십만 원? 설마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이, 이십만 원?”
“쯧쯧, 이 저렴한 영혼 같으니라고.”
서인은 책상 앞에 나타난 커다란 덩치의 남자아이를 쳐다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 이십만 원에 영혼을 팔겠다고? 에라, 이 저렴한 영혼아. 몸값 좀 높여 봐라.”
“뭐? 그럼 이십만 원보다 더 받는다는 거야? 얼마나 받을 건데?”
“흠…… 딱 구체적으로 금액을 정하지는 않았어. 넉넉히 챙겨 달라고 했으니까 이모가 알아서 주겠지, 뭐.”
서인은 장난스럽게 브이 자를 그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하여간 이모한테 돈 뜯어내는 건 거의 사채업자 수준이라니까. 서인을 쳐다보던 다민이 혼잣말로 구시렁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렴한 영혼의 소유자, 현우환은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좋았어! 나도 내 몸값을 높여 봐야지. 우리 엄마는 나를 공짜로 부려 먹으려고 한다니까?”
“그건 네가 머슴 스타일이라 그래.”
“야! 도인주!”
그때 우환의 등 뒤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우환이 버럭 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체구가 우환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져 있었던 탓에, 서인이나 다민 둘 다 인주가 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안녕, 서인아. 그리고 다민이도 안녕.”
인주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한 뒤, 서인의 앞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아예 뒤로 돌아보고 앉았다. 그리고 책상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 또 소개팅 나가는 거야? 응? 이번엔 어떤 아저씨래?”
“서른둘. 잘생겼대. 그런데 그 잘생긴 기준이 곰돌이야.”
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간단히 정리해서 말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의자의 등받이를 꼭 잡은 채 그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인주가 바들바들 떨었다. 서인은 인주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웃어도 돼.”
“하하하! 너네 이모는 왜 툭하면 그런 스타일이랑 소개팅을 하는 거야? 대체 누가 주선을 하기에 곰돌이만 모아 놓는 거냐고.”
“우리 이모 다니는 연구소 소장님.”
소장님이 딱 곰돌이거든. 꿀단지 하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 딱이야. 서인이 덧붙여 말했다. 인주가 눈물까지 나온 것인지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웃다가 자신의 옆에 앉으려던 우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얘를 이모한테 소개하는 건 어때? 딱 곰이잖아. 불곰.”
“야! 도인주!”
“그거 좋은 생각인데? 차라리 그럴까?”
우환이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서인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우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우환이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엑스 자로 만들어 보이며 더욱 크게 외쳤다.
“연상 싫어! 난 연하가 좋다고!”
“우리 이모, 완전 동안이야. 내가 이모 대신 소개팅 나가는 것만 봐도 알잖아.”
“웃기지 마! 너희 이모가 동안이 아니라 네가 노안이겠…….”
흐억. 우환은 씩씩대며 말을 내뱉다가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서인이 ‘노안’이라는 말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슬그머니 서인의 눈치를 살폈다. 서인이 싱글거리며 우환을 쳐다보다가 인주를 향해 말했다.
“인주야, 물어.”
“엉!”
인주가 서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환의 손을 잡더니 꽉 물어 버렸다. 아파! 아프다고! 우환이 난리를 치며 인주를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도인견’답게 인주는 우환의 손가락을 문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서인이 웃음을 참다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나 참.”
그중에서 유일하게 정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다민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
― 진짜 내가 제대로 용돈 쏠게.
“어. 쏴, 두 번 쏴. 세 번 쏘면 더 좋고.”
서인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보험사 빌딩이 멀리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빌딩 옆 커피숍이라고 했겠다……. 서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그녀에게 쏠렸다.
하늘색 원피스가 발랄하게 허벅지 위에서 살랑거렸다. 게다가 손에 가볍게 든 노란색 손가방까지, 그녀의 차림새는 ‘스물일곱 권나희’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지만 어차피 거절할 사람, 서인은 무조건 자신이 동안이라 그렇다고 우길 작정이다. 항상 ‘노안’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에 이렇게라도 동안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게 서인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오케이, 도착했어. 이만 전화 끊자, 이모.”
― 고마워, 서인아! 적당히 거절하고 빨리 나와! 절대 들키면 안 돼! 소장님이 알게 되면 그날로 나는 사표 써야 될 거야. 알았지?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야. 이모, 나 미자야. 내가 이모 대신 이렇게 소개팅 대타 뛰었다는 거 우리 엄마 귀에 들어가면 끝장난다고.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가야 돼. 알았지?”
― 참! 다쳤던 발은 어때?
내가 이렇다니까. 이모란 사람이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 나희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인은 가만히 웃으며 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제 발을 보았다.
다쳤던 발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가끔 쑤시고 아플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발이 아니라…….
“참 일찍도 물어보십니다? 벌써 나았거든요? 안 그랬으면 내가 여기 나왔을 거 같아?”
서인은 원피스 속에 가려진 허벅지의 시커먼 멍이 괜히 신경 쓰여서 치맛자락을 아래로 끌어 내리면서도 경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카펫에 묻은 핏자국은 결국 그녀의 엄마, 권나경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나경에게 호되게 매를 맞은 게 어제저녁 무렵이었다. 나경은 서인의 발바닥에 감겨 있는 붕대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아끼던 카펫이 지저분해졌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 그럼 다행이고. 하여간 잘 부탁해!
나희가 안도한 듯 경쾌하게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서인은 커피숍 입구 앞에 서서 휴대폰을 든 채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피식 웃으며 그녀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청승을 떨려고. 됐어.”
너는 열아홉 살의 우서인이 아니라 스물일곱 살의 권나희야. 늦둥이로 태어나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권나희.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는 우서인이 아니라.
서인은 제 뺨을 가볍게 때린 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좋아.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어린 소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 보이는 여인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녀는 노란색 손가방을 팔에 걸친 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 아저씨 전화번호가…….”
물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여전히 열아홉 살의 우서인이 할 법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흐음. 여기 있네.”
서인은 나희에게서 건네받았던 전화번호를 찾아낸 뒤에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곰돌이32’라고 저장해 놓은 연락처를 가볍게 터치한 뒤, 휴대폰을 귀 가까이에 대며 유리문을 열었다. 커피숍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 중에 있으려나.
서인은 신호음이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커피숍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삐죽였다.
뭐야, 아직 안 온 거야?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상대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우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서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우환이 보았다면 ‘우서인 경계경보’를 발령했을 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기분이 나빠서 웃는 것이기에.
이러면 곤란한데요, 아저씨.
나는 시간 개념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던데.
서인은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아서 딱 30분만 기다려 보기로 결정한 뒤,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때, 구석에 놓인 테이블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서인은 계속 신호음이 이어지고 있는 휴대폰을 무심코 손에 쥔 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에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작은 테이블 단 두 개만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테이블은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단정한 생김새의 젊은 남자였다.
덥지도 않은가?
서인은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놓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관심을 끊고 칸막이 너머의 빈자리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어?’
남자가 앉아 있는 자리의 테이블 위에서 깜빡이는 휴대폰 화면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번호가 너무나 익숙했다. 제 것이니 당연했다. 서인은 그때까지 무심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것을 다시 본 뒤, 기가 막혀서 입을 달싹였다.
이 남자라고?
‘곰돌이32’가?
서인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남자의 자리로 다가가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남자의 시선이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에서 떨어져 그녀에게 향했다. 서늘한 시선이었다. 눈매가 길게 뻗어 있는 것이 어쩐지 야해 보였다.
아저씨가 야해 보이다니.
미쳤어.
서인은 제 엉뚱한 생각에 괜히 민망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길모윤 씨?”
열아홉 살의 되바라진 우서인이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권나희예요. 오늘 소개팅하러 오신 거 맞죠?”
스물일곱 살의 권나희로 변신한 서인은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면서 눈짓으로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남자, 길모윤은 뒤늦게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자신의 휴대폰을 보고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휴대폰이 무음으로 되어 있는 걸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처한 기색의 남자를 보는 게 어쩐지 재미있어서, 서인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그런 서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모윤이란 이름의 소개팅 상대는 예의 바른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음으로 되어 있어서 전화가 온 줄 미처 몰랐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약속에 늦은 건 아니었으니 다행이잖아요? 저는 그쪽이 아직 오시지 않은 줄 알았거든요.”
서인은 가볍게 대꾸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170cm가 넘는 키에 오늘은 하이힐까지 신어서 그녀는 웬만한 남자들과 키가 비슷하거나 혹은 더 컸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큰 남자를 앞에 두고 올려다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강다민이나 현우환도 자신보다 키가 커서 올려다보기는 하지만 말이다. 뭐랄까. 그들은 그냥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데, 눈앞의 이 남자는 아무래도 어른이라 그런지 살짝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봤자 오늘 나한테 차일 아저씨잖아. 서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구시렁댔다.
“앉으시죠, 권나희 씨.”
“예.”
서인은 모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꾸한 뒤,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모윤은 서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의자에 앉더니 펼쳐 놓았던 책을 덮어 옆에 가지런히 놓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으응?
서인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 서인을 쳐다보던 모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왜 앉지 않으시죠?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예? 아……. 아니요, 전혀.”
서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희 대신 소개팅을 나갈 때마다 아저씨들이 매너랍시고 의자를 빼 주고 앉으라고 하던 것에 익숙해진 바람에, 이 남자에게서도 자신도 모르게 당연히 그 행동을 기대했나 보다. 서인은 그런 제 모습이 민망해서 속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으아! 창피해!’를 외쳤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은 채 맞은편의 남자를 쳐다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지요. 길모윤이라고 합니다.”
“권나희라고 해요.”
모윤이 예의 바른 자세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서인 역시 이모의 이름을 대신 둘러대며 인사했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 ‘곰돌이’가 아니잖아?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소장님이 잘생겼다고 그랬다며?
서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모윤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길모윤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서인이 생각했던 ‘서른두 살+배 볼록+동글동글+곰돌이=아저씨’와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했던 조건들과 전부 반대라고 하면 모를까.
나이는 서른둘에서 열 살 빼서 스물둘이라고 하면 딱 되겠고, 배는 볼록하기는커녕 초콜릿 복근이 불끈불끈하고 있을 것 같고. 서인은 슬그머니 모윤의 배 근처를 쳐다보다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점원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얼그레이 쇼트케이크 하나 주세요. 아, 그리고…….”
문득 저 혼자 주문해서 먹기가 쑥스러워져서 서인이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며 모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윤이 차분한 얼굴로 점원을 향해 말했다.
“복숭아 쇼트도 하나 추가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점원이 주문받은 목록을 메모한 뒤에 돌아섰다. 서인은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저런 서늘한 얼굴로 달콤한 복숭아 쇼트케이크라니. 안 어울리잖아. 그녀는 ‘아, 맛있떵!’ 하며 혀 짧은 소리를 하는 길모윤을 상상하다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모윤은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 권나희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쉽게 편견을 갖는 성격은 아니지만 소개팅 상대방이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연구원, 그것도 고전 학술 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말에 고리타분하고 깐깐한 여자를 연상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제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눈앞의 여자는 쾌활하고 밝았다. 어떻게 보면 나이를 헛먹었나 싶을 정도로 외모는 물론 풍기는 느낌 같은 게 어려 보였다.
굳이 이런 차림새로 어려 보이게 꾸미고 나오지 않았어도 될 텐데 말이지.
모윤은 자신도 모르게 권나희를 훑어보며 속으로 평가했다. 하긴 취향이 이런 스타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점원이 주문받았던 아메리카노와 쇼트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저, 잠시 실례할게요.”
“예? ……아아, 예. 그러시죠.”
모윤은 제 앞에 일어선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모양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적중했는지 ‘권나희’는 손가방을 들고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