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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2화
1. 유언의 상자 (2)
“식사를 하시고 버틀러 씨의 묘지에 가시겠습니까?”
“예. 그러도록 할게요. 식사는 하셨나요? 안 하셨으면 같이 드시죠.”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이드 씨. 고맙습니다.”
신사의 거절에 맬튼은 얼굴을 긁적이다 결국 혼자서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의 어색함과는 달리 음식이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에 먹는 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디저트로 나온 푸딩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다시 민망함이 밀려온 맬튼이 멋쩍은 웃음을 짓자 남자 역시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미스터…?”
“베일리. 이든 베일리입니다.”
“미스터 베일리.”
“베일리면 충분합니다.”
“베일리 씨는 선생님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친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오, 버틀러 씨와 저는 좀 더 사업적인 관계이지요. 저는 그의 개인변호사입니다. 페이드 씨는 모르시겠지만 버틀러 씨는 꽤 사고뭉치였거든요. 저는 그에게 고용된 것을 굉장한 행운이라고 여깁니다. 일을 힘들게 만드는 만큼 버틀러 씨는 씀씀이가 좋은 분이었거든요.”
베일리가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내내 굳어 있던 맬튼이 희미한 한숨을 흘렸다.
“아직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돌아가신 겁니까? 앓고 계시던 지병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사고?”
“버틀러 씨는 교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반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으셨죠. 편지 한 장도 없이요. 어디서 사고사 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무렵, 어느 날 겨울에 돌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일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맬튼이 물었다.
“연구―라면?”
“버틀러 씨는 무얼 연구하고 있는 건지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굉장히 몰두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죠. 그는 책장을 가득 채웠던 역사 서적을 다락방으로 치우고 새로운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그 방에서 보셨겠지요. 처음에는 마법과 관련된 책이 주류였던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니 외국 서적이 가득하더군요. 어느 나라의 문자인지도 모르는 것들요. 페이드 씨는 알아보시겠습니까?”
맬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그는 서적에 그치지 않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마법도구인가 싶어 간단한 것을 발동시켜 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잔고를 털어서까지 열중하기에 그것들이 뭐냐고 물어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죠. 그는 날이 갈수록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고, 점점 말라 갔어요. 명을 다하기 얼마 전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죠. 이유도 모른 채 점점 쇠약해졌고 몇 명의 의사가 다녀가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결국 이겨 내지 못하셨죠.”
냉정하던 베일리의 주름진 눈에 슬픔이 스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맬튼 역시 갑작스럽게 속이 불편해졌다. 기껏 잘 먹은 음식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버틀러 씨의 서재를 채운 책들이 그가 무얼 이루려고 했었는지 알려 줄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알 수가 없더군요. 그것이 그를 병들게 했는지조차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페이드 씨,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맬튼은 잠시 고민했다. 편지는 겨우 서론만 읽은 참이고, 검은색 돌멩이의 정체도 몰랐으며, 자신이 과연 스승의 서재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베일리가 버틀러의 변호사임을 떠올렸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편지를 마지막까지 다 읽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스승은 맬튼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버틀러의 마지막 부탁이 무엇이든, 베일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처리하기엔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은 제게 서재의 열쇠를 남기셨습니다. 서재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저에게 남겨 주신다고 같이 들어 있던 편지에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편지의 내용은 그것이 다인가요?”
“아니요. 편지를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까 베일리 씨가 말씀하셨던 ‘그 여행’에 대해서 쓰여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기 전에 밥이라도 먹고 오라고 하셔서 말이죠.”
저는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답니다. 맬튼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말 그답다며 베일리가 맞장구쳤다.
“그러면 서재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유언을 따르자면 이제 그 서재는 페이드 씨의 소유니까요.”
“허락해 주신다면 약간 정리를 한 후에 보존했으면 하는데, 저는 단지 선생님의 제자일 뿐이고 아내분도 계신데 제 맘대로 그분의 물건을 건드려도 되는지…….”
저택에 온 뒤로 당연히 안주인이 맞아 줄 거라 생각했었지만 식사를 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 맬튼이 슬쩍 운을 띄우자 베일리의 입가가 묘하게 굳었다.
“이 저택은 아들인 윌 버틀러에게 상속되어 있지만 그는 열여덟 살에 이 집에서 나간 이후에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연락할 방법도 모르구요. 버틀러 부인은 버틀러 씨가 앓기 시작하면서 이곳을 나가셨습니다. 심약한 분이셨지요. 장례식이 끝나고 본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윌에게 연락이 닿기 전까지는 제가 임시로 저택을 관리하게 될 텐데 페이드 씨만 괜찮다면 윌이 돌아오기 전까진 서재의 관리를 맡으셔도 될 겁니다.”
이든 베일리가 싱긋 웃으며 권유했다.
2. 빼앗긴 침대
버틀러의 묘지에 다녀온 후 저택에서 하룻밤을 더 지낸 뒤, 맬튼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저 하룻밤일 뿐이었지만 여느 때보다도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는 침대에 꾸물꾸물 기어올라 이불을 덮었다. 축축하던 시트는 오히려 온기를 품고 있었다.
잠이 들려는 찰나, 맬튼은 꺼림칙한 기분을 무시하지 못하고 일어났다.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상자를 가지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편지를 펼쳤지만 침대 옆에 밝혀 둔 불은 글을 읽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사실 그것은 핑계고 일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8할 정도 차지했다. 베일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당장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박물관은 저택에서 너무 멀었고 자신이 서재를 상속받았다고 해도 정해진 기간도 없이 계속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버틀러는 분명 맬튼에게 인생의 조력자 역할을 해 주었지만 그 사실이 그에게 이제껏 없던 책임감을 생기게 해 주지는 않았다. 분명 음식은 맛있었고 침대의 매트리스는 그의 것보다 훨씬 푹신하고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맬튼은 스승의 평가대로 언제나 한 방울의 열정이 부족했다.
자연스레 맬튼의 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로 향했다. 주변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하늘을 가두어 놓은 것 같은 내부는 조각난 빛의 입자가 천천히 소우주를 유영하는 듯 보였다. 맬튼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그것을 손에 쥐었다. 의외로 따뜻했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무질서하게 흐르는 내부의 빛은 보면 볼수록 어떠한 규칙을 갖춰 가다가 이내 가장 안쪽의 물방울 모양을 중심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방출되었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그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기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빛을 눈으로 쫓던 맬튼은 문득 이 물체를 갈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투명한 막에 싸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단단해서 가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맬튼은 속는 셈치고 칼을 찾았다. 다루는 것이 익숙지 않은 양날 과도를 쥐다가 손을 베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벌거벗은 채로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하게 숨을 죽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과도로 돌을 벨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굉장히 견고하고 이음새도 없는 유리 같은 그것을 칼로 가르려 했던 자신이 우스워진 맬튼이 헛바람을 내뱉었다.
표면에 묻은 피를 대충 손으로 슥 닦은 그는 선반 위에 돌을 올려 두고 불을 껐다. 버틀러 저택의 매트리스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제 집의 익숙함을 이기지는 못해 잠이 안 온다 투덜거렸던 것에 비해 맬튼의 숨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눈부심에 잠에서 깼다. 스탠드를 분명 끄고 잔 것 같은데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막 깊이 잠들려는 찰나였기 때문에 짜증이 솟았다. 눈을 반쯤 뜨고 수면을 방해한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맬튼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선반 위에 올려 두었던 돌에서 빛이 요동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인지, 발동조건이 무엇인지,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인지, 회수는 할 수 있는 건지. 수많은 의문들이 순서 없이 떠올랐지만 그에 대한 답을 내기도 전에 하얀 장막이 방 안에 드리워져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맬튼이 눈을 가리기 위해 팔을 들고 뒤로 물러나려던 그때, 묵직한 무게가 그를 갑작스럽게 덮쳐 왔다. 허우적거리며 뒤로 넘어간 맬튼은 다행히 베개 위로 쓰러져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머리를 다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혹은 이상한 마법에 걸려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의 위에 올라타 있는 무게와 온도는 허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빛의 잔상이 남아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몇 번을 깜박여도 눈앞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고, 맬튼은 결국 손을 들어 창백하다 못해 백색에 가까운 이상한 피부를 만지고야 말았다. 손에 닿은, 사람의 체온보다 낮고 매끄러운 느낌은 그가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거운데, 내려와 주실래요.”
맬튼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자에게 말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과는 달리 그는 맬튼의 위에서 선선히 물러났다. 맬튼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주범이 된 물건을 찾았다. 다행히 사라져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투명하지 않았고 그저 검고 단단했다. 더 이상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눈앞에 멀뚱히 서 있는 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멍청이라도 알 수 있었다.
맬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지인 중 마법에 능통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에 큰 뜻이 없었던 맬튼은 마법사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그나마 잘 어울려 다녔던 세실리아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은 4년 전 동창회 때였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어떠한 종류의 소환마법이라면― 그는 누군가를 부를 수 없었다. 마법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소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더군다나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도 아닌,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 되지만 심지어는 사람도 아니라면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마법을 발동시킨 것은 맬튼이었으며, 마법의 매개 또한 버틀러의 편지를 읽고 검은 상자를 집에 가져온 순간부터 맬튼의 것이었다. 만약 해명을 하게 된다면 그는 불법적인 마법도구의 소유자가 실제로는 버틀러임을 밝혀야 하고, 그것은 고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실을 숨기면 그는 잘 알지도 못하고 얼결에 발동시킨 금지된 마법 때문에 죗값을 치러야 했다.
맬튼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득 버틀러가 썼던 글귀가 뇌리에 박혔다. 그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될 것이라 확신하던 문장이 말이다. 멍하니 제 스승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범죄자가 되는 것은 그가 계획했던 미래에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맬튼은 비적비적 몸을 일으켰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그는 맬튼이 검은 물건을 손에 쥐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안 가만히 기다려 줬다. 맬튼이 드디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단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맬튼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다. 그리고 지성을 지닌 사람을 닮은 생명체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방어본능을 일으켰다. 낯선이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지만 문득 현실감각이 돌아온 맬튼은 뒤늦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침대 맡에 바짝 붙었다.
그러자 창백한 낯을 한 이가 한순간 비식 웃었다. 손가락을 거미처럼 움직여 보며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 행동은 맬튼을 더욱 경악스럽게 만들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맬튼을 두 팔 안에 가두었다. 알 수 없는 눈빛이 벌거벗은 맬튼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맬튼은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윽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동공이 까맣게 확장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맬튼은 다리를 모으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마음은 두려움에 잡아먹혔고 단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맬튼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제대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남자가 맬튼의 팔을 잡아 내렸다. 서늘한 온도가 낯설어 팔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뿌리칠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니었다. 맬튼은 눈을 감았다. 팔을 붙잡힌 채로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았다. 그때, 서늘하지만 확실한 온도를 지니고 있는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노아는 어디에 있지?”
머릿속에 바로 울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노아는 어디에 있어? 되돌아온 질문에 맬튼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나는 한 번 더 똑같은 질문을 할 거야. 그리고 그건 내가 베풀 수 있는 친절의 마지막이겠지. 손 내리고 눈 뜨고 똑바로 대답해.”
남자의 명령조에 맬튼은 천천히 팔에 힘을 뺐다. 여전히 손이 떨렸고 눈물마저 고여 왔지만 도저히 거스를 수 없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고 사람의 것이 아닌, 이 일의 원흉인 검은 물체와 닮은 밤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남자는 맬튼의 팔을 놓아 주더니 대신 눈을 마주친 맬튼의 용기를 치하하듯이 귓바퀴를 쓸어 내렸다. 그 손길에 맬튼의 속눈썹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노아 버틀러는 어디에 있지?”
맬튼은 남자가 찾는 것이 제 스승임을 알았다. 버틀러를 이름으로 부를 일이 없었던 그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은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에게서 자신이 아는 인물의 이름이 나오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맬튼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는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5일 전에 죽었어요.”
맬튼의 대답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결국 그렇게 된 건가.”
담담하게 버틀러의 죽음을 받아들인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맬튼에게 관심을 돌렸다.
“노아의 시신을 보고 싶다.”
“이, 이미 매장한 뒤입니다. 볼 수 없어요.”
안 된다는 말에 해코지를 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남자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맬튼을 지긋이 보았는데 맬튼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보다가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이불을 몸에 두르자 남자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좋아. 여기는 어디지?”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버틀러의 집에 비하면 턱없이 좁고 격 없는 공간이었지만 아늑한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 집이에요.”
“그럼 너는 누군데?”
“전, 버틀러 선생님의 제자예요.”
“제자? 아아― 그래. 노아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해. 그럼 다음 질문. 왜 노아의 물건을 네가 가지고 있지?”
남자는 맬튼의 발치에 있는 검은 물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선생님이 저한테 남겨 준 겁니다.”
“노아가 그걸 너한테 줬다고? 그걸 어떻게 믿지? 너는 노아가 그걸 넘겨줄 만큼 긴밀한 관계인 거야?”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히 제 겁니다. 편지에 써 있었죠. 원한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요.”
맬튼은 편지를 찾아 남자에게 건넸다.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맬튼이 가리킨 부분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낙서 같은 글씨는 분명 노아의 것이야.”
남자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방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다닐 만큼 넓은 방이 아니었기에 침대의 주변을 빙 돌아 걸은 것이 전부였다. 침대 끝에서 맬튼이 있는 곳까지 걸어온 남자는 침대에 풀썩 앉았다. 맬튼이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남자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쭉 펴고 누워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안락한 안식처를 빼앗긴 맬튼이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신은 뭐예요? 이것에서 나타난 겁니까?”
형편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는 한쪽 눈만을 뜨고 맬튼을 구경했다.
“그걸 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어이가 없군. 노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너에게 넘겨준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도대체 선생님은 이걸 왜 나한테 남겨 준 건지……. 나는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는 학생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답해요. 당신이 뭔지.”
“벌벌 떨면서 잘도 말하네. 내가 뭐냐고? 내 생각에 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내 입으로 확인받으려는 이유는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이야? 그렇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걸?”
남자는 순식간에 침대를 넘어와 맬튼을 벽에 밀쳤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지만, 맬튼은 이를 꽉 물고 버텼다.
“아아― 그래. 나는 거기서 나왔어. 이제 보니 노아가 너에게 이걸 준 이유를 알겠군.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인식도 못 하면서 날 불러낸 걸 보니 말이야.”
남자는 검은 물체를 들고 있는 맬튼을 손을 그의 손으로 감쌌다. 손안의 물건이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맬튼의 귀를 깨물듯이 입을 바짝 댔다.
“소질이 있어. 노아가 죽은 건 아쉽지만 너는 꽤 괜찮을 것 같아. 내가 뭐냐고 물었지?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자, 말해 봐. 내가, 뭐지?”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맬튼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내가 뭔지 말해 봐. 어떠한 주문처럼, 맬튼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 당신은 악마라고.
3. 눈물과 허세 (1)
남자는 맬튼의 침대를 빼앗고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쿨쿨 잠들었다. 맬튼은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혹시 자는 새에 영혼이라도 훔쳐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뒤척이지도 않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오히려 눈 밑이 까만 맬튼의 얼굴을 보며 놀렸는데, 그 바람에 내내 긴장하고 있던 맬튼은 힘이 빠져 눈물을 쏟아 내고야 말았다. 어젯밤부터 참아 왔던 눈물은 한 번 터지니 둑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멈추지 않았고, 처음에는 우는 맬튼을 손가락질하던 그도 나중에는 맬튼의 등을 어색하게나마 토닥이며 달래 주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발갛게 부은 눈은 찬물로 몇 번이나 씻어 내도 가라앉지 않았다. 꼴사납다. 맬튼이 한숨을 쉬었다. 날이 밝고 보니, 자칭 악마라는 자는 어젯밤에 느꼈던 두려움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부스스한 꼴로 저를 놀리던 모습은 그저 성격 나쁜 한량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저녁까지는 오늘까지 마저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악몽이라 여겼던 악마가 날이 밝아 해가 뜬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젖은 머리를 쥐어짜 물을 빼낸 맬튼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고 화장실을 나섰다. 악마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로 맬튼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맬튼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고 옷장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멈칫했다.
뒤를 돌아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숙한 척하는 것 같고, 악마의 생태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외관상 남자이니 그리 유난 떨 것도 없다 싶었다. 그러나 웃옷을 갈아입고서 아무리 그래도 바지까지 갈아입으려니 망설여졌다. 그는 지난 밤 이미 알몸으로 손님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맬튼이 바지를 손에 쥐고 돌아섰다.
“이봐요.”
“왜?”
“저 옷 갈아입을 건데요.”
용기 내어 말한 것이었지만 악마는 그래서 뭐 어쩌라는 얼굴로 맬튼을 올려다보았다. 결국에 맬튼은 자신의 집에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저 뻔뻔한 작자에게 흘린 눈물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정말 악마가 맞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그 이상한 물건에서 나온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악마라는 증거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저자세일 필요는 없다며 세면대를 쾅 내리쳤으나 곧 지난 밤 손에 닿았던 그 서늘한 온도가 떠올랐다.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맬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제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손님을 안 보이는 척 무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젯밤 왜 편지를 다 읽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하늘에서 버틀러가 스승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 사달이 난 것이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시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시선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에 말을 건 것은 맬튼이었다.
“이름이 뭡니까?”
“내키는 대로 불러. 알려 줄 이름은 없으니까.”
“하지만…….”
“생각이 안 나면 그냥 악마라고 불러도 되고.”
“그건 좀…….”
그건 인간보고 인간아, 하고 부르는 일이지 않느냐 소심하게 대꾸하니 악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릿한 걸음으로 맬튼이 기대있는 탁자 앞으로 와 비딱하게 손을 짚고 섰다.
“그러니까 네가 정해. 맬튼―”
1. 유언의 상자 (2)
“식사를 하시고 버틀러 씨의 묘지에 가시겠습니까?”
“예. 그러도록 할게요. 식사는 하셨나요? 안 하셨으면 같이 드시죠.”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이드 씨. 고맙습니다.”
신사의 거절에 맬튼은 얼굴을 긁적이다 결국 혼자서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의 어색함과는 달리 음식이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에 먹는 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디저트로 나온 푸딩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다시 민망함이 밀려온 맬튼이 멋쩍은 웃음을 짓자 남자 역시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미스터…?”
“베일리. 이든 베일리입니다.”
“미스터 베일리.”
“베일리면 충분합니다.”
“베일리 씨는 선생님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친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오, 버틀러 씨와 저는 좀 더 사업적인 관계이지요. 저는 그의 개인변호사입니다. 페이드 씨는 모르시겠지만 버틀러 씨는 꽤 사고뭉치였거든요. 저는 그에게 고용된 것을 굉장한 행운이라고 여깁니다. 일을 힘들게 만드는 만큼 버틀러 씨는 씀씀이가 좋은 분이었거든요.”
베일리가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내내 굳어 있던 맬튼이 희미한 한숨을 흘렸다.
“아직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돌아가신 겁니까? 앓고 계시던 지병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사고?”
“버틀러 씨는 교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반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으셨죠. 편지 한 장도 없이요. 어디서 사고사 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무렵, 어느 날 겨울에 돌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일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맬튼이 물었다.
“연구―라면?”
“버틀러 씨는 무얼 연구하고 있는 건지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굉장히 몰두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죠. 그는 책장을 가득 채웠던 역사 서적을 다락방으로 치우고 새로운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그 방에서 보셨겠지요. 처음에는 마법과 관련된 책이 주류였던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니 외국 서적이 가득하더군요. 어느 나라의 문자인지도 모르는 것들요. 페이드 씨는 알아보시겠습니까?”
맬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그는 서적에 그치지 않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마법도구인가 싶어 간단한 것을 발동시켜 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잔고를 털어서까지 열중하기에 그것들이 뭐냐고 물어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죠. 그는 날이 갈수록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고, 점점 말라 갔어요. 명을 다하기 얼마 전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죠. 이유도 모른 채 점점 쇠약해졌고 몇 명의 의사가 다녀가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결국 이겨 내지 못하셨죠.”
냉정하던 베일리의 주름진 눈에 슬픔이 스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맬튼 역시 갑작스럽게 속이 불편해졌다. 기껏 잘 먹은 음식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버틀러 씨의 서재를 채운 책들이 그가 무얼 이루려고 했었는지 알려 줄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알 수가 없더군요. 그것이 그를 병들게 했는지조차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페이드 씨,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맬튼은 잠시 고민했다. 편지는 겨우 서론만 읽은 참이고, 검은색 돌멩이의 정체도 몰랐으며, 자신이 과연 스승의 서재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베일리가 버틀러의 변호사임을 떠올렸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편지를 마지막까지 다 읽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스승은 맬튼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버틀러의 마지막 부탁이 무엇이든, 베일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처리하기엔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은 제게 서재의 열쇠를 남기셨습니다. 서재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저에게 남겨 주신다고 같이 들어 있던 편지에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편지의 내용은 그것이 다인가요?”
“아니요. 편지를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까 베일리 씨가 말씀하셨던 ‘그 여행’에 대해서 쓰여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기 전에 밥이라도 먹고 오라고 하셔서 말이죠.”
저는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답니다. 맬튼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말 그답다며 베일리가 맞장구쳤다.
“그러면 서재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유언을 따르자면 이제 그 서재는 페이드 씨의 소유니까요.”
“허락해 주신다면 약간 정리를 한 후에 보존했으면 하는데, 저는 단지 선생님의 제자일 뿐이고 아내분도 계신데 제 맘대로 그분의 물건을 건드려도 되는지…….”
저택에 온 뒤로 당연히 안주인이 맞아 줄 거라 생각했었지만 식사를 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 맬튼이 슬쩍 운을 띄우자 베일리의 입가가 묘하게 굳었다.
“이 저택은 아들인 윌 버틀러에게 상속되어 있지만 그는 열여덟 살에 이 집에서 나간 이후에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연락할 방법도 모르구요. 버틀러 부인은 버틀러 씨가 앓기 시작하면서 이곳을 나가셨습니다. 심약한 분이셨지요. 장례식이 끝나고 본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윌에게 연락이 닿기 전까지는 제가 임시로 저택을 관리하게 될 텐데 페이드 씨만 괜찮다면 윌이 돌아오기 전까진 서재의 관리를 맡으셔도 될 겁니다.”
이든 베일리가 싱긋 웃으며 권유했다.
2. 빼앗긴 침대
버틀러의 묘지에 다녀온 후 저택에서 하룻밤을 더 지낸 뒤, 맬튼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저 하룻밤일 뿐이었지만 여느 때보다도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는 침대에 꾸물꾸물 기어올라 이불을 덮었다. 축축하던 시트는 오히려 온기를 품고 있었다.
잠이 들려는 찰나, 맬튼은 꺼림칙한 기분을 무시하지 못하고 일어났다.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상자를 가지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편지를 펼쳤지만 침대 옆에 밝혀 둔 불은 글을 읽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사실 그것은 핑계고 일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8할 정도 차지했다. 베일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당장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박물관은 저택에서 너무 멀었고 자신이 서재를 상속받았다고 해도 정해진 기간도 없이 계속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버틀러는 분명 맬튼에게 인생의 조력자 역할을 해 주었지만 그 사실이 그에게 이제껏 없던 책임감을 생기게 해 주지는 않았다. 분명 음식은 맛있었고 침대의 매트리스는 그의 것보다 훨씬 푹신하고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맬튼은 스승의 평가대로 언제나 한 방울의 열정이 부족했다.
자연스레 맬튼의 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로 향했다. 주변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하늘을 가두어 놓은 것 같은 내부는 조각난 빛의 입자가 천천히 소우주를 유영하는 듯 보였다. 맬튼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그것을 손에 쥐었다. 의외로 따뜻했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무질서하게 흐르는 내부의 빛은 보면 볼수록 어떠한 규칙을 갖춰 가다가 이내 가장 안쪽의 물방울 모양을 중심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방출되었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그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기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빛을 눈으로 쫓던 맬튼은 문득 이 물체를 갈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투명한 막에 싸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단단해서 가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맬튼은 속는 셈치고 칼을 찾았다. 다루는 것이 익숙지 않은 양날 과도를 쥐다가 손을 베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벌거벗은 채로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하게 숨을 죽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과도로 돌을 벨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굉장히 견고하고 이음새도 없는 유리 같은 그것을 칼로 가르려 했던 자신이 우스워진 맬튼이 헛바람을 내뱉었다.
표면에 묻은 피를 대충 손으로 슥 닦은 그는 선반 위에 돌을 올려 두고 불을 껐다. 버틀러 저택의 매트리스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제 집의 익숙함을 이기지는 못해 잠이 안 온다 투덜거렸던 것에 비해 맬튼의 숨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눈부심에 잠에서 깼다. 스탠드를 분명 끄고 잔 것 같은데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막 깊이 잠들려는 찰나였기 때문에 짜증이 솟았다. 눈을 반쯤 뜨고 수면을 방해한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맬튼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선반 위에 올려 두었던 돌에서 빛이 요동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인지, 발동조건이 무엇인지,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인지, 회수는 할 수 있는 건지. 수많은 의문들이 순서 없이 떠올랐지만 그에 대한 답을 내기도 전에 하얀 장막이 방 안에 드리워져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맬튼이 눈을 가리기 위해 팔을 들고 뒤로 물러나려던 그때, 묵직한 무게가 그를 갑작스럽게 덮쳐 왔다. 허우적거리며 뒤로 넘어간 맬튼은 다행히 베개 위로 쓰러져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머리를 다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혹은 이상한 마법에 걸려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의 위에 올라타 있는 무게와 온도는 허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빛의 잔상이 남아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몇 번을 깜박여도 눈앞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고, 맬튼은 결국 손을 들어 창백하다 못해 백색에 가까운 이상한 피부를 만지고야 말았다. 손에 닿은, 사람의 체온보다 낮고 매끄러운 느낌은 그가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거운데, 내려와 주실래요.”
맬튼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자에게 말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과는 달리 그는 맬튼의 위에서 선선히 물러났다. 맬튼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주범이 된 물건을 찾았다. 다행히 사라져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투명하지 않았고 그저 검고 단단했다. 더 이상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눈앞에 멀뚱히 서 있는 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멍청이라도 알 수 있었다.
맬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지인 중 마법에 능통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에 큰 뜻이 없었던 맬튼은 마법사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다. 그나마 잘 어울려 다녔던 세실리아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은 4년 전 동창회 때였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어떠한 종류의 소환마법이라면― 그는 누군가를 부를 수 없었다. 마법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소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더군다나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도 아닌,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 되지만 심지어는 사람도 아니라면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마법을 발동시킨 것은 맬튼이었으며, 마법의 매개 또한 버틀러의 편지를 읽고 검은 상자를 집에 가져온 순간부터 맬튼의 것이었다. 만약 해명을 하게 된다면 그는 불법적인 마법도구의 소유자가 실제로는 버틀러임을 밝혀야 하고, 그것은 고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실을 숨기면 그는 잘 알지도 못하고 얼결에 발동시킨 금지된 마법 때문에 죗값을 치러야 했다.
맬튼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득 버틀러가 썼던 글귀가 뇌리에 박혔다. 그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될 것이라 확신하던 문장이 말이다. 멍하니 제 스승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범죄자가 되는 것은 그가 계획했던 미래에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맬튼은 비적비적 몸을 일으켰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그는 맬튼이 검은 물건을 손에 쥐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안 가만히 기다려 줬다. 맬튼이 드디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단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맬튼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다. 그리고 지성을 지닌 사람을 닮은 생명체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방어본능을 일으켰다. 낯선이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지만 문득 현실감각이 돌아온 맬튼은 뒤늦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침대 맡에 바짝 붙었다.
그러자 창백한 낯을 한 이가 한순간 비식 웃었다. 손가락을 거미처럼 움직여 보며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 행동은 맬튼을 더욱 경악스럽게 만들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맬튼을 두 팔 안에 가두었다. 알 수 없는 눈빛이 벌거벗은 맬튼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맬튼은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윽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동공이 까맣게 확장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맬튼은 다리를 모으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마음은 두려움에 잡아먹혔고 단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맬튼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제대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남자가 맬튼의 팔을 잡아 내렸다. 서늘한 온도가 낯설어 팔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뿌리칠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니었다. 맬튼은 눈을 감았다. 팔을 붙잡힌 채로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았다. 그때, 서늘하지만 확실한 온도를 지니고 있는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노아는 어디에 있지?”
머릿속에 바로 울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노아는 어디에 있어? 되돌아온 질문에 맬튼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나는 한 번 더 똑같은 질문을 할 거야. 그리고 그건 내가 베풀 수 있는 친절의 마지막이겠지. 손 내리고 눈 뜨고 똑바로 대답해.”
남자의 명령조에 맬튼은 천천히 팔에 힘을 뺐다. 여전히 손이 떨렸고 눈물마저 고여 왔지만 도저히 거스를 수 없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고 사람의 것이 아닌, 이 일의 원흉인 검은 물체와 닮은 밤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남자는 맬튼의 팔을 놓아 주더니 대신 눈을 마주친 맬튼의 용기를 치하하듯이 귓바퀴를 쓸어 내렸다. 그 손길에 맬튼의 속눈썹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노아 버틀러는 어디에 있지?”
맬튼은 남자가 찾는 것이 제 스승임을 알았다. 버틀러를 이름으로 부를 일이 없었던 그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은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에게서 자신이 아는 인물의 이름이 나오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맬튼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는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5일 전에 죽었어요.”
맬튼의 대답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결국 그렇게 된 건가.”
담담하게 버틀러의 죽음을 받아들인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맬튼에게 관심을 돌렸다.
“노아의 시신을 보고 싶다.”
“이, 이미 매장한 뒤입니다. 볼 수 없어요.”
안 된다는 말에 해코지를 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남자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맬튼을 지긋이 보았는데 맬튼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보다가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이불을 몸에 두르자 남자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좋아. 여기는 어디지?”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버틀러의 집에 비하면 턱없이 좁고 격 없는 공간이었지만 아늑한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 집이에요.”
“그럼 너는 누군데?”
“전, 버틀러 선생님의 제자예요.”
“제자? 아아― 그래. 노아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해. 그럼 다음 질문. 왜 노아의 물건을 네가 가지고 있지?”
남자는 맬튼의 발치에 있는 검은 물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선생님이 저한테 남겨 준 겁니다.”
“노아가 그걸 너한테 줬다고? 그걸 어떻게 믿지? 너는 노아가 그걸 넘겨줄 만큼 긴밀한 관계인 거야?”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히 제 겁니다. 편지에 써 있었죠. 원한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요.”
맬튼은 편지를 찾아 남자에게 건넸다.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맬튼이 가리킨 부분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낙서 같은 글씨는 분명 노아의 것이야.”
남자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방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다닐 만큼 넓은 방이 아니었기에 침대의 주변을 빙 돌아 걸은 것이 전부였다. 침대 끝에서 맬튼이 있는 곳까지 걸어온 남자는 침대에 풀썩 앉았다. 맬튼이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남자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쭉 펴고 누워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안락한 안식처를 빼앗긴 맬튼이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신은 뭐예요? 이것에서 나타난 겁니까?”
형편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는 한쪽 눈만을 뜨고 맬튼을 구경했다.
“그걸 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어이가 없군. 노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너에게 넘겨준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도대체 선생님은 이걸 왜 나한테 남겨 준 건지……. 나는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는 학생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답해요. 당신이 뭔지.”
“벌벌 떨면서 잘도 말하네. 내가 뭐냐고? 내 생각에 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내 입으로 확인받으려는 이유는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이야? 그렇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걸?”
남자는 순식간에 침대를 넘어와 맬튼을 벽에 밀쳤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지만, 맬튼은 이를 꽉 물고 버텼다.
“아아― 그래. 나는 거기서 나왔어. 이제 보니 노아가 너에게 이걸 준 이유를 알겠군.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인식도 못 하면서 날 불러낸 걸 보니 말이야.”
남자는 검은 물체를 들고 있는 맬튼을 손을 그의 손으로 감쌌다. 손안의 물건이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맬튼의 귀를 깨물듯이 입을 바짝 댔다.
“소질이 있어. 노아가 죽은 건 아쉽지만 너는 꽤 괜찮을 것 같아. 내가 뭐냐고 물었지?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자, 말해 봐. 내가, 뭐지?”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맬튼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내가 뭔지 말해 봐. 어떠한 주문처럼, 맬튼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 당신은 악마라고.
3. 눈물과 허세 (1)
남자는 맬튼의 침대를 빼앗고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쿨쿨 잠들었다. 맬튼은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혹시 자는 새에 영혼이라도 훔쳐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뒤척이지도 않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오히려 눈 밑이 까만 맬튼의 얼굴을 보며 놀렸는데, 그 바람에 내내 긴장하고 있던 맬튼은 힘이 빠져 눈물을 쏟아 내고야 말았다. 어젯밤부터 참아 왔던 눈물은 한 번 터지니 둑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멈추지 않았고, 처음에는 우는 맬튼을 손가락질하던 그도 나중에는 맬튼의 등을 어색하게나마 토닥이며 달래 주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발갛게 부은 눈은 찬물로 몇 번이나 씻어 내도 가라앉지 않았다. 꼴사납다. 맬튼이 한숨을 쉬었다. 날이 밝고 보니, 자칭 악마라는 자는 어젯밤에 느꼈던 두려움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부스스한 꼴로 저를 놀리던 모습은 그저 성격 나쁜 한량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저녁까지는 오늘까지 마저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악몽이라 여겼던 악마가 날이 밝아 해가 뜬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젖은 머리를 쥐어짜 물을 빼낸 맬튼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고 화장실을 나섰다. 악마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로 맬튼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맬튼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고 옷장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멈칫했다.
뒤를 돌아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숙한 척하는 것 같고, 악마의 생태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외관상 남자이니 그리 유난 떨 것도 없다 싶었다. 그러나 웃옷을 갈아입고서 아무리 그래도 바지까지 갈아입으려니 망설여졌다. 그는 지난 밤 이미 알몸으로 손님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맬튼이 바지를 손에 쥐고 돌아섰다.
“이봐요.”
“왜?”
“저 옷 갈아입을 건데요.”
용기 내어 말한 것이었지만 악마는 그래서 뭐 어쩌라는 얼굴로 맬튼을 올려다보았다. 결국에 맬튼은 자신의 집에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저 뻔뻔한 작자에게 흘린 눈물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정말 악마가 맞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그 이상한 물건에서 나온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악마라는 증거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저자세일 필요는 없다며 세면대를 쾅 내리쳤으나 곧 지난 밤 손에 닿았던 그 서늘한 온도가 떠올랐다.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맬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제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손님을 안 보이는 척 무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젯밤 왜 편지를 다 읽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하늘에서 버틀러가 스승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 사달이 난 것이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시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시선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에 말을 건 것은 맬튼이었다.
“이름이 뭡니까?”
“내키는 대로 불러. 알려 줄 이름은 없으니까.”
“하지만…….”
“생각이 안 나면 그냥 악마라고 불러도 되고.”
“그건 좀…….”
그건 인간보고 인간아, 하고 부르는 일이지 않느냐 소심하게 대꾸하니 악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릿한 걸음으로 맬튼이 기대있는 탁자 앞으로 와 비딱하게 손을 짚고 섰다.
“그러니까 네가 정해. 맬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