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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3화
3. 눈물과 허세 (2)
놀리듯이 이름을 늘려 부르는 행동이 무례했으나 딱히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못했다. 맬튼은 하얀 손가락이 탁자 위를 두드리는 모양새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결정하는 것은 어지간한 센스와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언젠가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느닷없이 인간도 아닌 다 큰 악마를 정의 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선생님은 당신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질문이 떨어지자 순간 탁자를 짚고 있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맬튼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않냐 재촉을 했다. 창백한 남자는 다시 침대
로 돌아가 드러누웠다.
“노아의 무덤에 데려다줘.”
“선생님의 장례식은 이미 끝났습니다.”
“알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성가시긴.”
맬튼은 자신이 들은 것이 정확한 건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성가신 건 악마 쪽이었다.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성격이었다. 어젯밤에는 의뭉스럽고 신랄하게 굴더니 아침에 일어나고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서 맬튼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맬튼을 울리기까지 했으면서 지금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맬튼이 자신을 버틀러의 묘지에 데려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요구해 대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맬튼이 억울함에 버틀러의 묘지에는 가지 않겠다 강수를 두니 의외로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다. 맬튼은 자신의 대응이 틀렸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했다. 괜히 허세 부릴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이 황당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했다.
“너 일하러 안 가?”
덜 마른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맬튼에게 던져진 악마의 질문은 그를 놀라게 했다. 이미 그가 우는 맬튼을 달래 준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내내 느껴지던 불편함이 무엇인지 마침내 알았다.
악마는 놀라울 정도로 사람의 생활양식과 감정에 익숙했다. 그렇다고 그것에 공감하고 맞춰 주지는 않았지만 맬튼이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화를 내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버틀러의 묘지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도 맬튼은 혹시 이상한 마법에 걸리거나 또는 물리적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각오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례한 손님의 범주를 넘어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현관에 선 맬튼이 악마를 향해 돌아섰다.
“6시까지는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주세요. 밤에 당신에 대한 것을 의논해야겠어요. 선생님의 묘지에 가는 일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맬튼의 말에 악마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위에는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출근 시간이 다 된 맬튼은 왜 그러냐고 물을 수 없었다.
박물관에 도착한 맬튼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운동신경이 좋아 학생 시절에 어떤 클럽에도 들지 않았는데도 여기저기에 용병으로 끌려다니곤 했는데 그때마다 승리의 여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중에서도 맬튼에게 필승의 남자라는 다소 부끄러운 꼬리표를 졸업할 때까지 붙여 준 게임이 있는데, 바로 맨손 겨루기였다. 상당히 비주류였던 그 클럽은 5학년 하계 축제 때 운 좋게 맬튼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그는 타 학교와의 친선 경기에서 혼자서 다섯 명을 해치우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 후 그 클럽이 이전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인기를 얻은 것은 물론이고, 그때의 일로 맬튼은 경호전문학원에 스카웃되어 국립 미술관의 보안팀에 취직하게 되었다.
맬튼은 거의 봉사 활동하는 마음으로 임했던 축제가 인생을 책임져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시합에서 그가 거구의 상대편을 휙 하고 넘겨 버렸을 때 경기를 지켜보았던 이들 중 그가 경호학원에 스카웃 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맬튼은 마법사를 제외한 네 가지의 적성 중, 특히나 전투사에는 감히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맬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명실상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우스운 것은 전투사 다음으로 적성점수가 높게 나온 적성이 성직자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교수들은 그에 대해 의심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내기도 했다.
로비로 나오자 전날 당직이었던 리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오늘부터 출근인 거야?”
“예. 갑자기 빠지게 돼서 실례 많았습니다.”
“아니야. 저번에 바꿔 준 일 갚은 거지 뭐. 그런데 페이드, 얼굴이 안 좋네. 눈이 좀 빨간 것 같아. 갑자기 쉬는가 싶더니 아팠어?”
리가 자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맬튼은 리의 말에 자신이 아침에 어린애 같이 엉엉 울었던 것을 떠올리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맬튼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는 리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통제실에 도착했다. 이틀 만에 나온 맬튼을 보고 다른 직원들이 인사를 해 왔다. 개장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맬튼은 없었던 이틀 사이에 갱신된 블랙리스트와 영상기록을 확인하고, 간단한 서류작업까지 빠르게 마쳤다.
그리고 그는 집에서 가져온 버틀러의 편지를 꺼냈다. 퇴근 후에 악마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낌새를 보면 악마는 지금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걸 맬튼에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어젯밤에 편지를 다 읽었다면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고서 그를 만날 수 있지는, 아니, 어쩌면 아예 만나지 않을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틀러 교수가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에게 이런 중대하고 은밀한 일을 무작정 떠넘기는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은사를 떠올려 보면 마냥 없는 일도 아니었다. 수차례 언급했듯이 그는 교사로서 좋은 인재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버틀러는 교육자보다는 지도자에 적성 점수가 더 높았고 그다음으로는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창의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고지식한 사람이라 늘 학생들을 힘들게 했으며, 특히나 버틀러가 각별히 애정을 가졌던 맬튼은 그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아직까지도 맬튼은 버틀러와 가졌던 면담시간을 생각하면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중에는 적당히 얼버무릴 여유 정도는 생겼지만 그전까지는 스승과의 면담 시간은 항상 벌거벗겨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런 창피함이 결과적으로 맬튼을 구제해 주었고, 그가 버틀러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지만 다시 겪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맬튼은 앞서 읽었던 내용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아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
맬튼 페이드. 저녁식사는 어땠습니까? 조금 더 살이 붙어도 될 것 같다고 늘 생각했어요. 늘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소비하는 열량만큼은 먹어 줘야 합니다.
내가 이제 다시는 따뜻한 야채스튜와 버터를 발라 구운 토끼 요리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먹는 걸 참 좋아했지요. 학교에서 나의 연구실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맬튼은 그 최대의 수혜자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무려 배를 타고 넘어온 과자를 맬튼에게 아낌없이 나눠 줬습니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의 맬튼도 간식시간만큼은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얼굴로 행복해하곤 했습니다.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늘 무언가 부족해 보였던 당신이 충만해지는 그 시간을, 나는 좋아했습니다. 지식이나 조언을 주는 교사로서가 아니라 아버지 같은 심정이었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요.
언젠가는 당신과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가 아니라 정성과 시간이 들어간, 온기가 있는 음식을요. 그러나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나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테죠.
또 여담이 길어졌군요. 선생 시절에 학생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했는지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고질병입니다.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낸 맬튼이라면 제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학교를 그만둔 이유부터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학교에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 또한 선생이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에 몸담았었고, 학교는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모두 바친 곳입니다. 많은 기억이 있고 모두 소중한 것들이었죠.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것들을 포기했습니다. 포기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보다 값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움은 지루함이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 행복한 고요함에 나는 질려 가던 시기였습니다. 뭔가 나를 자극할 만한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운이 좋게도 손님이 한 명 찾아왔습니다. 아주 오래된 인연으로, 내가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을 먹게 해 준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다니면서 그 지역의 전설이나 괴담 같은 것들을 수집하고 그걸 책으로 엮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같이 떠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더군요.
그 순간 나는 단박에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행으로 인해 내가 좀 더 재미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게다가 몇 년 빨리 교직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죠. 학교엔 이미 충분한 시간을 희생했으니까요. 내 안에 오랜만에 타오른 불꽃이 지기 전에 여행 채비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동안 집필하던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반년이 걸렸고 나를 대신할 인재를 찾는 데 또 반년이 걸려서, 그이가 나에게 찾아온 지 1년 만에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베일리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사라지듯이 발걸음을 떼었던 그날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평생 그렇게 흥분되고 설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한 여행은 그때 느꼈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오스딘, 그러니까 내 친구는 이미 여행길에 올라 있었고 1년이나 뒤쳐진 나는 그의 자취를 쫓으며 따라가려는 심산이었습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꽤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조금쯤은 길을 헤매고 돌면서, 나는 서툰 길을 떠났습니다.
내가 제일 처음 도착한 곳은 불과 이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
말 많은 스승이 겨우 이야기를 시작하려는구나, 하고 한숨을 쉰 후 다음 문장을 읽으려던 그때 경보음과 함께 전달석이 요란스럽게 깜박였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방금 들어온 영상이 뒤에 놓아둔 작은 스크린을 향해 쏘아졌다. 오늘 견학 오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던 소학교 학생들이 이제 막 도착한 것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맬튼이 당직을 서고, 영상에서 보이는 귀엽고 작은 말썽꾸러기들의 상대는 리가 맡았어야 했다. 작은 생명체를 다루는 건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 두 아들의 아빠인 리가 이 일을 맡아 준다고 했을 때 맬튼은 감사함에 미술관 지하층의 식당에서 가장 값비싼 브런치를 사 주었을 정도였다. 괜한 돈을 쓴 꼴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로비로 나가자 초록색의 유니폼을 입은 어린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모여 있었다. 맬튼이 선생님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다리에 들러붙어 있는 남자 아이를 겨우 떼어 내고 맬튼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인사했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 일과에 이미 지친 듯이 보였다. 맬튼이 메뉴얼과 함께 박물관의 배치도가 그려진 안내도를 건넸다. 그녀가 메뉴얼을 숙지하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맬튼이 여자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동안에 두 명의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한 명의 아이는 혼자서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여자가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기 때문에 맬튼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데려오겠다 자청했다. 맬튼의 호의에 그녀는 눈을 글썽이며 인사를 하고 제1전시실을 관람하기 위해 아이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전시실로 빠짐없이 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맬튼은 짧은 다리로 벌써 계단의 중간까지 올라간 아이를 붙잡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단 몇 걸음 만에 아이를 따라잡은 맬튼이 잠시 고민하다 아이의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다음 계단으로 발을 올리려던 아이는 맬튼의 방해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투명하고 커다란 눈동자 안에 맬튼의 얼굴이 담겼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 되지.”
짐짓 무서운 투로 주의를 주었지만 아이는 그저 베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팔을 뒤로 쭉 뻗어 가방을 쑥 벗어 버리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2층의 전시홀로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가 전시실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던 맬튼이 주인을 잃은 가방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뒤를 따랐다.
아이의 발걸음으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금방 잡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게 조막만한 머리통을 한 손으로 꾹 잡아 누르니 짤막한 팔을 휘저으며 저항했다. 아무래도 이것이 어떠한 놀이인 줄 아는 듯했다.
“자, 놀이는 끝났다. 선생님에게 돌아가자.”
든 것 없이 가벼운 가방을 아이에게 들려 주며 맬튼이 작은 손을 잡았다. 아이는 귀여운 반항을 쉽게 끝내고 오히려 맬튼보다 살짝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맬튼의 착각으로, 아이는 손을 빼더니 이번엔 중앙 로비를 벗어나 조각상이 전시된 남쪽 정원으로 도망갔다. 짜증이 치솟은 맬튼은 한숨을 쉬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술래잡기를 이어 나가야 했다.
아이는 발이 꽤 빨랐다. 정원을 한 바퀴 다 돌아 입사한 이래 제대로 본 적도 없었던 기괴한 조각 작품을 빠짐없이 보고 숨이 찰 때쯤에야 진정으로 때 아닌 추격전을 끝낼 수 있었다. 맬튼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아예 아이를 품에 안아들었다. 아이는 버둥거리는가 싶더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몸에 힘을 뺐다. 어린애라도 아침부터 허기지게 만든 죗값은 물어야 한다며 맬튼은 아이의 이마를 꿍 찧었다. 놀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맬튼을 바라보았다.
“……아야아아―”
그러더니 한발 늦게 엄살을 피웠다. 맬튼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아이를 고쳐 안았다.
“이제 정말 선생님한테 가자. 여긴 놀이터가 아니야.”
오늘 점심은 밖에 나가서 든든히 먹고 들어와야겠다, 다짐한 맬튼이 아이를 안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맬튼을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어.”
낮고, 묘하게 울려 사람을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소름이 돋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딜 보는 거야.”
또 다시 들려온 그 목소리는 복숭아 빛의 볼을 가진 아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아이의 외모와 목소리가 주는 괴리감은 맬튼을 겁먹게 만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맬튼의 굳은 얼굴에 아이는 웃음을 피식 흘리고는 풀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맬튼의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맬튼의 눈동자가 아이를 불안하게 쫓았다.
“아이에게도 가차 없는 사람이구나? 너.”
더 이상 아이 같지 않은 아이가 순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목소리는 또 다시 완벽한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미술관― 나 미술관은 처음 와 봐. 너네 인간들은 이런 이상한 걸 좋아하는구나? 알 수 없는 취향인걸.”
어린아이의 신장으로는 조금 높은 의자 위로 한 번에 오르더니 겅중겅중 믿을 수 없는 높이와 거리로 정원을 뛰어다녔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제가 분명히 돌아올 때까지 집에 얌전히 있어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그 말을 들을 이유가 있나? 게다가 네 집은 영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여기는 제 직장입니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당장 돌아가 주세요. 그것보다 그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설마 그 아이의 몸을 빼앗았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런 거라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이런 작고 가동성 떨어지는 몸을 탐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 그 말이 진심이 아니길 빌어. 잠깐 빌린 것뿐이야. 인간들은 작은 생물에게 너그럽거든.”
읽기도 어려운 작가 이름이 써져 있는, 의도는 모르겠으나 나름 작품 중 하나인 돌덩이에서 아이가 훌쩍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맬튼이 급히 뛰어가 작은 몸을 받아드니 아이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위에서 낄낄 웃어 대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돌 위에 남자가 본래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정신 차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작은 데 들어가 있으려니 불편하군.”
어깨를 붕붕 돌리며 악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이를 조심스럽게 벤치에 눕힌 맬튼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또 다시 이런 짓을 한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흐음― 뭘 할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또 울기라도 할 건가?”
악마가 빈정대며 말했다.
“악마가 맘대로 내 주변을 활개를 치게 두지 않아요. 버틀러 선생님이 당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다 알려 주셨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직 편지는 반도 읽지 않았으면서 맬튼은 괜한 허세를 부렸다. 딱히 먹힐 것이라고 기대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으나 악마는 정말 훌륭할 정도로 코웃음을 쳤다.
“흐음― 노아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야말로 처음 듣는 소리이군. 당장 해 보지 그래? 안 그러면 몰상식하게 여길 다 부숴 버리고 무자비하게 그 작고 귀여운 생명들을 죄다 집어삼킬 거거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아예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야. 왜냐고? 나는 악마니까! 자고로 네놈들이 원하는 악마의 정석이지. 안 그래? 자, 어디 한번 날 다뤄 보라고. 뭐하고 있어? 내가 이대로 뛰쳐나가서 미친개처럼 활개치고 다녀도 상관없는 거야?”
뿐만 아니라 맬튼의 발언은 악마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웃는 얼굴이나 웃고 있다 말하지 못했다. 눈빛이 흉흉했고 검은 물체와 같이 은근하게 붉은 빛이 까만 눈에 맴돌았다. 작은 불꽃처럼, 그러나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두어 발자국을 남겨 두고 맬튼에게 다가온 남자가 허리를 약간 숙여 밑에서 눈을 맞추었다.
기세 좋게 외친 말에 비해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맬튼이 눈을 피했다. 악마는 굳이 피하는 얼굴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아이가 누워 있는 벤치로 다가가 작은 머리를 들어 제 무릎에 뉘이고 앉았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려니 금방 체력이 닳아 곤란했다. 악마를 다루는 법이라. 거짓말을 할 거면 조금쯤은 제대로 된 것을 골랐어야지. 악마는 버틀러의 제자에게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게 있을 리가 없지.’
차라리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악마가 비집고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 모습이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던지 맬튼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나는 단지, 그러니까. 난, 잘 모르겠네요. 당황스러워요.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악마라는 게 실존할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맬튼이 짧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악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무릎에 누워 있는 작은 아이의 얼굴을 가린 금발을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이 꽤나 조심스러웠다.
제 잘못이었다. 방금처럼 예민하게 굴 작정은 없었다. 익숙해질 만하고,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자 스스로에게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인간과의 첫 만남은 늘 유쾌하지 않았고 버틀러가 조금 특별했을 뿐이다. 노아의 제자일 뿐인 남자에게까지 그런 특별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 의외에 둔감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인간들이 만든 악마라는 존재는 죄 엉터리였고, 그런 왜곡된 이미지를 심은 건 인간들이었다. 편의에 맞게 각색하고 그들의 행동을 변호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또 만들어진 이야기에 사실과 아주 다른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악마가 파괴밖에 모르는 무식한 생물 취급당하더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발끈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존재 자체가 낯선데 겁을 주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노아 버틀러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꼬박 몇 달이 걸렸다. 어떻게 봐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니면 평생을―
‘끔찍하군.’
겨우 몇 년 만으로도 돌아 버릴 것 같은데 평생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적어도 노아가 선택한 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식이면 안 됐다. 일단은 자신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버틀러의 제자가 과연 수긍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어이, 아가야.”
악마의 목소리에 아이가 눈을 떴다. 잠들어 있었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맑은 호수와 같은 색의 눈이 반짝였다. 어리둥절한 금발의 아이와 눈을 맞춘 악마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 일어나. 어지럽니? 아니야? 다행이네. 선생님? 그래, 선생님한테 가자. 저분이 데려다주실 거야. 누구냐고?”
아이가 하는 말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던 악마가 맬튼을 보았고, 맬튼은 몸을 낮춰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난 페이드야. 자, 선생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가자.”
3. 눈물과 허세 (2)
놀리듯이 이름을 늘려 부르는 행동이 무례했으나 딱히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못했다. 맬튼은 하얀 손가락이 탁자 위를 두드리는 모양새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결정하는 것은 어지간한 센스와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언젠가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느닷없이 인간도 아닌 다 큰 악마를 정의 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선생님은 당신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질문이 떨어지자 순간 탁자를 짚고 있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맬튼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않냐 재촉을 했다. 창백한 남자는 다시 침대
로 돌아가 드러누웠다.
“노아의 무덤에 데려다줘.”
“선생님의 장례식은 이미 끝났습니다.”
“알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성가시긴.”
맬튼은 자신이 들은 것이 정확한 건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성가신 건 악마 쪽이었다.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성격이었다. 어젯밤에는 의뭉스럽고 신랄하게 굴더니 아침에 일어나고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서 맬튼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맬튼을 울리기까지 했으면서 지금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맬튼이 자신을 버틀러의 묘지에 데려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요구해 대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맬튼이 억울함에 버틀러의 묘지에는 가지 않겠다 강수를 두니 의외로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다. 맬튼은 자신의 대응이 틀렸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했다. 괜히 허세 부릴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이 황당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했다.
“너 일하러 안 가?”
덜 마른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맬튼에게 던져진 악마의 질문은 그를 놀라게 했다. 이미 그가 우는 맬튼을 달래 준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내내 느껴지던 불편함이 무엇인지 마침내 알았다.
악마는 놀라울 정도로 사람의 생활양식과 감정에 익숙했다. 그렇다고 그것에 공감하고 맞춰 주지는 않았지만 맬튼이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화를 내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버틀러의 묘지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도 맬튼은 혹시 이상한 마법에 걸리거나 또는 물리적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각오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례한 손님의 범주를 넘어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현관에 선 맬튼이 악마를 향해 돌아섰다.
“6시까지는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주세요. 밤에 당신에 대한 것을 의논해야겠어요. 선생님의 묘지에 가는 일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맬튼의 말에 악마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위에는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출근 시간이 다 된 맬튼은 왜 그러냐고 물을 수 없었다.
박물관에 도착한 맬튼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운동신경이 좋아 학생 시절에 어떤 클럽에도 들지 않았는데도 여기저기에 용병으로 끌려다니곤 했는데 그때마다 승리의 여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중에서도 맬튼에게 필승의 남자라는 다소 부끄러운 꼬리표를 졸업할 때까지 붙여 준 게임이 있는데, 바로 맨손 겨루기였다. 상당히 비주류였던 그 클럽은 5학년 하계 축제 때 운 좋게 맬튼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그는 타 학교와의 친선 경기에서 혼자서 다섯 명을 해치우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 후 그 클럽이 이전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인기를 얻은 것은 물론이고, 그때의 일로 맬튼은 경호전문학원에 스카웃되어 국립 미술관의 보안팀에 취직하게 되었다.
맬튼은 거의 봉사 활동하는 마음으로 임했던 축제가 인생을 책임져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시합에서 그가 거구의 상대편을 휙 하고 넘겨 버렸을 때 경기를 지켜보았던 이들 중 그가 경호학원에 스카웃 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맬튼은 마법사를 제외한 네 가지의 적성 중, 특히나 전투사에는 감히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맬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명실상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우스운 것은 전투사 다음으로 적성점수가 높게 나온 적성이 성직자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교수들은 그에 대해 의심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내기도 했다.
로비로 나오자 전날 당직이었던 리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오늘부터 출근인 거야?”
“예. 갑자기 빠지게 돼서 실례 많았습니다.”
“아니야. 저번에 바꿔 준 일 갚은 거지 뭐. 그런데 페이드, 얼굴이 안 좋네. 눈이 좀 빨간 것 같아. 갑자기 쉬는가 싶더니 아팠어?”
리가 자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맬튼은 리의 말에 자신이 아침에 어린애 같이 엉엉 울었던 것을 떠올리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맬튼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는 리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통제실에 도착했다. 이틀 만에 나온 맬튼을 보고 다른 직원들이 인사를 해 왔다. 개장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맬튼은 없었던 이틀 사이에 갱신된 블랙리스트와 영상기록을 확인하고, 간단한 서류작업까지 빠르게 마쳤다.
그리고 그는 집에서 가져온 버틀러의 편지를 꺼냈다. 퇴근 후에 악마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낌새를 보면 악마는 지금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걸 맬튼에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어젯밤에 편지를 다 읽었다면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고서 그를 만날 수 있지는, 아니, 어쩌면 아예 만나지 않을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틀러 교수가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에게 이런 중대하고 은밀한 일을 무작정 떠넘기는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은사를 떠올려 보면 마냥 없는 일도 아니었다. 수차례 언급했듯이 그는 교사로서 좋은 인재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버틀러는 교육자보다는 지도자에 적성 점수가 더 높았고 그다음으로는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창의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고지식한 사람이라 늘 학생들을 힘들게 했으며, 특히나 버틀러가 각별히 애정을 가졌던 맬튼은 그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아직까지도 맬튼은 버틀러와 가졌던 면담시간을 생각하면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중에는 적당히 얼버무릴 여유 정도는 생겼지만 그전까지는 스승과의 면담 시간은 항상 벌거벗겨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런 창피함이 결과적으로 맬튼을 구제해 주었고, 그가 버틀러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지만 다시 겪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맬튼은 앞서 읽었던 내용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아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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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튼 페이드. 저녁식사는 어땠습니까? 조금 더 살이 붙어도 될 것 같다고 늘 생각했어요. 늘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소비하는 열량만큼은 먹어 줘야 합니다.
내가 이제 다시는 따뜻한 야채스튜와 버터를 발라 구운 토끼 요리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먹는 걸 참 좋아했지요. 학교에서 나의 연구실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맬튼은 그 최대의 수혜자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무려 배를 타고 넘어온 과자를 맬튼에게 아낌없이 나눠 줬습니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의 맬튼도 간식시간만큼은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얼굴로 행복해하곤 했습니다.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늘 무언가 부족해 보였던 당신이 충만해지는 그 시간을, 나는 좋아했습니다. 지식이나 조언을 주는 교사로서가 아니라 아버지 같은 심정이었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요.
언젠가는 당신과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가 아니라 정성과 시간이 들어간, 온기가 있는 음식을요. 그러나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나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테죠.
또 여담이 길어졌군요. 선생 시절에 학생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했는지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고질병입니다.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낸 맬튼이라면 제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학교를 그만둔 이유부터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학교에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 또한 선생이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에 몸담았었고, 학교는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모두 바친 곳입니다. 많은 기억이 있고 모두 소중한 것들이었죠.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것들을 포기했습니다. 포기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보다 값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움은 지루함이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 행복한 고요함에 나는 질려 가던 시기였습니다. 뭔가 나를 자극할 만한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운이 좋게도 손님이 한 명 찾아왔습니다. 아주 오래된 인연으로, 내가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을 먹게 해 준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다니면서 그 지역의 전설이나 괴담 같은 것들을 수집하고 그걸 책으로 엮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같이 떠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더군요.
그 순간 나는 단박에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행으로 인해 내가 좀 더 재미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게다가 몇 년 빨리 교직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죠. 학교엔 이미 충분한 시간을 희생했으니까요. 내 안에 오랜만에 타오른 불꽃이 지기 전에 여행 채비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동안 집필하던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반년이 걸렸고 나를 대신할 인재를 찾는 데 또 반년이 걸려서, 그이가 나에게 찾아온 지 1년 만에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베일리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사라지듯이 발걸음을 떼었던 그날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평생 그렇게 흥분되고 설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한 여행은 그때 느꼈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오스딘, 그러니까 내 친구는 이미 여행길에 올라 있었고 1년이나 뒤쳐진 나는 그의 자취를 쫓으며 따라가려는 심산이었습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꽤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조금쯤은 길을 헤매고 돌면서, 나는 서툰 길을 떠났습니다.
내가 제일 처음 도착한 곳은 불과 이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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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스승이 겨우 이야기를 시작하려는구나, 하고 한숨을 쉰 후 다음 문장을 읽으려던 그때 경보음과 함께 전달석이 요란스럽게 깜박였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방금 들어온 영상이 뒤에 놓아둔 작은 스크린을 향해 쏘아졌다. 오늘 견학 오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던 소학교 학생들이 이제 막 도착한 것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맬튼이 당직을 서고, 영상에서 보이는 귀엽고 작은 말썽꾸러기들의 상대는 리가 맡았어야 했다. 작은 생명체를 다루는 건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 두 아들의 아빠인 리가 이 일을 맡아 준다고 했을 때 맬튼은 감사함에 미술관 지하층의 식당에서 가장 값비싼 브런치를 사 주었을 정도였다. 괜한 돈을 쓴 꼴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로비로 나가자 초록색의 유니폼을 입은 어린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모여 있었다. 맬튼이 선생님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다리에 들러붙어 있는 남자 아이를 겨우 떼어 내고 맬튼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인사했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 일과에 이미 지친 듯이 보였다. 맬튼이 메뉴얼과 함께 박물관의 배치도가 그려진 안내도를 건넸다. 그녀가 메뉴얼을 숙지하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맬튼이 여자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동안에 두 명의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한 명의 아이는 혼자서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여자가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기 때문에 맬튼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데려오겠다 자청했다. 맬튼의 호의에 그녀는 눈을 글썽이며 인사를 하고 제1전시실을 관람하기 위해 아이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전시실로 빠짐없이 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맬튼은 짧은 다리로 벌써 계단의 중간까지 올라간 아이를 붙잡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단 몇 걸음 만에 아이를 따라잡은 맬튼이 잠시 고민하다 아이의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다음 계단으로 발을 올리려던 아이는 맬튼의 방해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투명하고 커다란 눈동자 안에 맬튼의 얼굴이 담겼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 되지.”
짐짓 무서운 투로 주의를 주었지만 아이는 그저 베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팔을 뒤로 쭉 뻗어 가방을 쑥 벗어 버리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2층의 전시홀로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가 전시실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던 맬튼이 주인을 잃은 가방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뒤를 따랐다.
아이의 발걸음으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금방 잡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게 조막만한 머리통을 한 손으로 꾹 잡아 누르니 짤막한 팔을 휘저으며 저항했다. 아무래도 이것이 어떠한 놀이인 줄 아는 듯했다.
“자, 놀이는 끝났다. 선생님에게 돌아가자.”
든 것 없이 가벼운 가방을 아이에게 들려 주며 맬튼이 작은 손을 잡았다. 아이는 귀여운 반항을 쉽게 끝내고 오히려 맬튼보다 살짝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맬튼의 착각으로, 아이는 손을 빼더니 이번엔 중앙 로비를 벗어나 조각상이 전시된 남쪽 정원으로 도망갔다. 짜증이 치솟은 맬튼은 한숨을 쉬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술래잡기를 이어 나가야 했다.
아이는 발이 꽤 빨랐다. 정원을 한 바퀴 다 돌아 입사한 이래 제대로 본 적도 없었던 기괴한 조각 작품을 빠짐없이 보고 숨이 찰 때쯤에야 진정으로 때 아닌 추격전을 끝낼 수 있었다. 맬튼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아예 아이를 품에 안아들었다. 아이는 버둥거리는가 싶더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몸에 힘을 뺐다. 어린애라도 아침부터 허기지게 만든 죗값은 물어야 한다며 맬튼은 아이의 이마를 꿍 찧었다. 놀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맬튼을 바라보았다.
“……아야아아―”
그러더니 한발 늦게 엄살을 피웠다. 맬튼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아이를 고쳐 안았다.
“이제 정말 선생님한테 가자. 여긴 놀이터가 아니야.”
오늘 점심은 밖에 나가서 든든히 먹고 들어와야겠다, 다짐한 맬튼이 아이를 안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맬튼을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어.”
낮고, 묘하게 울려 사람을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소름이 돋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딜 보는 거야.”
또 다시 들려온 그 목소리는 복숭아 빛의 볼을 가진 아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아이의 외모와 목소리가 주는 괴리감은 맬튼을 겁먹게 만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맬튼의 굳은 얼굴에 아이는 웃음을 피식 흘리고는 풀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맬튼의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맬튼의 눈동자가 아이를 불안하게 쫓았다.
“아이에게도 가차 없는 사람이구나? 너.”
더 이상 아이 같지 않은 아이가 순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목소리는 또 다시 완벽한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미술관― 나 미술관은 처음 와 봐. 너네 인간들은 이런 이상한 걸 좋아하는구나? 알 수 없는 취향인걸.”
어린아이의 신장으로는 조금 높은 의자 위로 한 번에 오르더니 겅중겅중 믿을 수 없는 높이와 거리로 정원을 뛰어다녔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제가 분명히 돌아올 때까지 집에 얌전히 있어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그 말을 들을 이유가 있나? 게다가 네 집은 영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여기는 제 직장입니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당장 돌아가 주세요. 그것보다 그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설마 그 아이의 몸을 빼앗았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런 거라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이런 작고 가동성 떨어지는 몸을 탐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 그 말이 진심이 아니길 빌어. 잠깐 빌린 것뿐이야. 인간들은 작은 생물에게 너그럽거든.”
읽기도 어려운 작가 이름이 써져 있는, 의도는 모르겠으나 나름 작품 중 하나인 돌덩이에서 아이가 훌쩍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맬튼이 급히 뛰어가 작은 몸을 받아드니 아이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위에서 낄낄 웃어 대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돌 위에 남자가 본래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정신 차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작은 데 들어가 있으려니 불편하군.”
어깨를 붕붕 돌리며 악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이를 조심스럽게 벤치에 눕힌 맬튼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또 다시 이런 짓을 한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흐음― 뭘 할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또 울기라도 할 건가?”
악마가 빈정대며 말했다.
“악마가 맘대로 내 주변을 활개를 치게 두지 않아요. 버틀러 선생님이 당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다 알려 주셨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직 편지는 반도 읽지 않았으면서 맬튼은 괜한 허세를 부렸다. 딱히 먹힐 것이라고 기대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으나 악마는 정말 훌륭할 정도로 코웃음을 쳤다.
“흐음― 노아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야말로 처음 듣는 소리이군. 당장 해 보지 그래? 안 그러면 몰상식하게 여길 다 부숴 버리고 무자비하게 그 작고 귀여운 생명들을 죄다 집어삼킬 거거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아예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야. 왜냐고? 나는 악마니까! 자고로 네놈들이 원하는 악마의 정석이지. 안 그래? 자, 어디 한번 날 다뤄 보라고. 뭐하고 있어? 내가 이대로 뛰쳐나가서 미친개처럼 활개치고 다녀도 상관없는 거야?”
뿐만 아니라 맬튼의 발언은 악마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웃는 얼굴이나 웃고 있다 말하지 못했다. 눈빛이 흉흉했고 검은 물체와 같이 은근하게 붉은 빛이 까만 눈에 맴돌았다. 작은 불꽃처럼, 그러나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두어 발자국을 남겨 두고 맬튼에게 다가온 남자가 허리를 약간 숙여 밑에서 눈을 맞추었다.
기세 좋게 외친 말에 비해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맬튼이 눈을 피했다. 악마는 굳이 피하는 얼굴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아이가 누워 있는 벤치로 다가가 작은 머리를 들어 제 무릎에 뉘이고 앉았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려니 금방 체력이 닳아 곤란했다. 악마를 다루는 법이라. 거짓말을 할 거면 조금쯤은 제대로 된 것을 골랐어야지. 악마는 버틀러의 제자에게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게 있을 리가 없지.’
차라리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악마가 비집고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 모습이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던지 맬튼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나는 단지, 그러니까. 난, 잘 모르겠네요. 당황스러워요.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악마라는 게 실존할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맬튼이 짧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악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무릎에 누워 있는 작은 아이의 얼굴을 가린 금발을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이 꽤나 조심스러웠다.
제 잘못이었다. 방금처럼 예민하게 굴 작정은 없었다. 익숙해질 만하고,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자 스스로에게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인간과의 첫 만남은 늘 유쾌하지 않았고 버틀러가 조금 특별했을 뿐이다. 노아의 제자일 뿐인 남자에게까지 그런 특별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 의외에 둔감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인간들이 만든 악마라는 존재는 죄 엉터리였고, 그런 왜곡된 이미지를 심은 건 인간들이었다. 편의에 맞게 각색하고 그들의 행동을 변호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또 만들어진 이야기에 사실과 아주 다른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악마가 파괴밖에 모르는 무식한 생물 취급당하더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발끈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존재 자체가 낯선데 겁을 주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노아 버틀러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꼬박 몇 달이 걸렸다. 어떻게 봐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니면 평생을―
‘끔찍하군.’
겨우 몇 년 만으로도 돌아 버릴 것 같은데 평생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적어도 노아가 선택한 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식이면 안 됐다. 일단은 자신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버틀러의 제자가 과연 수긍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어이, 아가야.”
악마의 목소리에 아이가 눈을 떴다. 잠들어 있었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맑은 호수와 같은 색의 눈이 반짝였다. 어리둥절한 금발의 아이와 눈을 맞춘 악마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 일어나. 어지럽니? 아니야? 다행이네. 선생님? 그래, 선생님한테 가자. 저분이 데려다주실 거야. 누구냐고?”
아이가 하는 말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던 악마가 맬튼을 보았고, 맬튼은 몸을 낮춰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난 페이드야. 자, 선생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