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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4화
3. 눈물과 허세 (2)
아이를 품에 안아들고 공원에서 나가려던 맬튼이 악마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파리한 얼굴이었다. 침대를 빼앗아 죽은 듯이 잤던 것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일을 미뤄 둘 수는 없기 때문에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묘하게 바빠 잠시 짬을 낼 시간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곧바로 공원으로 찾아왔으나 악마는 없었다.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이 들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편이 나았다. 어딘가에서 맘대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료 직원들이 겨우 이틀 쉬고 휴가병이라도 걸린 거냐며 놀렸지만 뭐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불안이 지나치다 보니 제가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생각이 뻗쳤다.
분명 그 검고 이상한 물체는 자신의 소유가 맞지만 거기서 악마가 갑자기 소환되었다면 그 악마까지도 나의 것인가? 어쨌든, 무릇 생명이라는 것은 종속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이대로 어딘가로 영영 사라져 버린다면 원치 않던 짐을 더는 것이니 좋은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자기변명에도 불구하고 맬튼은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제 스승에의 의리인지 아니면 필요 없는 오지랖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정말 어딘가로 악마가 사라져 버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형사고였다.
이틀이나 쉬고 왔으면서 맬튼은 5시 정각이 되자마자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런 사소한 일을 해명할 시간이 없었다. 코트를 입지도 않고 팔에 걸친 채 급히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를 뒤에서 후배가 잡았지만 듣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 없이 마음만 앞서서 나온 터라 정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자니 맬튼은 그제야 머리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없으면 다시 찾으러 나오면 되고.’
집으로 향하던 맬튼의 눈에 자주 가는 샌드위치 가게가 들어왔다. 집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론 손님이 있고, 만약 그가 집에 돌아와 있다면 저녁을 해결하기는 해야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맬튼은 주문을 한 뒤 잠시라도 앉기 위해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처음 보는 종업원이 넉살좋게 맬튼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낯선 사람과 금방 말을 나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맬튼은 몇 마디를 겨우 주고받았다. 보일 듯 말 듯 웃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유리창에 비친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악마가 겨우 동네 샌드위치 가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차림으로 맬튼의 앞에 앉았다. 그는 불과 오늘 낮에만 해도 창백하기는 해도 사람 같이 보였는데 지금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까지 보였다. 게다가 옷은 어디서 난 건지 상당히 양질의 것이었는데 맬튼은 곧 그것이 버틀러의 장례식에 가면서 구입한 자신의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
‘집에 있었구나…….’
그 사실은 알자마자 오후가 지나서 내내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청명해졌다. 괜한 걱정을 했다. 악마가 맬튼의 코트를 벗자 주인이 포장으로 주문했던 샌드위치를 접시에 세팅해 내왔다. 처음 보는 친구라며 장사꾼답게 금방 친한 척을 했는데 악마는 그것을 아주 신사적으로 잘 대응했다.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악마는 샌드위치를 입 안 가득히 베어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냥 뭐. 미술관은 처음이라고 했잖아. 조금 구경하다가 집에 갔어.”
“……찾아다녔어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맬튼이 민망한 기색으로 말하니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기다린다고 했던가? 하고 태평하게 묻는 말에 분명 그런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맬튼은 투정할 수가 없었다.
“왜?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이었니?”
악마의 질문에 맬튼은 손에 들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묻은 빵가루를 손을 비벼 털어 냈다.
“그건, 이미 사과한 일이지 않습니까. 사실 난 아직도 당신이 악마라는 걸 믿지 못하겠어요. 아니, 믿기는 하지만…… 낮에 그 아이, 어떻게 한 겁니까?”
“말해 줘도 모를 텐데.”
퉁명한 대꾸에 맬튼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악마의 생리를 듣는다고 이해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런 능력도 있습니까?”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가볍게 물었다. 사실 그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들어도 맬튼은 별로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묘한 돌에서 소환되었다는 사실은 평생 겪을 신기한 일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서늘한 손가락이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훔쳐 가면서 그렇다면 어쩔래? 하고 묻자 맬튼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맬튼은 아무래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를 포기하고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좋아.”
“당신과 버틀러 선생님은 무슨 관계였습니까? 선생님이 당신을 소환한 겁니까?”
맬튼의 질문에 악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네. 조금 복잡하지만 간단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노아에게 소환된 건 아니야. 노아는 단순히… 양도를, 그래 양도 받은 것뿐이지. 그는 분명 마법에 재능이 있었지만 소환 마법을 시동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거든. 나와 지내면서 몇 번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모두 실패했어.”
“양도―라니 누구에게?”
“날 소환한 사람. 나이가 많은 마법사였어. 평생을 소환마법에만 매달린 이였지.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는 좋은 마법사였지만 욕심이 과했지. 그 결과가 바로 나고. 스스로 소환했으면서 감당하지도 못하더군.”
“선생님이 남긴 편지에 여행에 관한 말이 있었습니다만, 분명 그 여행에서 당신을 만난 거군요?”
“그래. 10년 가까이 된 일이군. 꽤 긴 시간이지? 너희 인간들에게는 말이야.”
자신에게도 그리 찰나는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악마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반쯤 벌리고 가만히 있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노아는 호기심이 많은 남자였어. 악마를 보고도 같이 지내자고 할 정도면 너네끼리는 꽤 괴짜취급 했을 테지.”
맬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틀러 선생님이라면 어쩐지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은 의문들이 많았다. 악마와 같이 지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알 수 없는 연구에 빠져들었는가’에 대한 것과 ‘왜 악마를 자신에게 맡겼는지’에 대한 것 말고도 말이다. 결국에 그 답은 편지와 고인의 서재에 있었다.
편지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맬튼은 사무실에 그대로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혀를 찼다. 당장 내일부터는 휴일이니 적어도 이틀은 편지를 가지러 가지 못했다. 차일피일 일을 미뤄둘 수도 없으니 당장은 악마의 요구대로 버틀러의 저택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선생님이 왜 당신을 맡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당신을 소환했다는 그 남자가 선생님에게 왜 그 물건을 넘겨준 건지, 버틀러 선생님은 당신의 정체를 알고서도 그 물건을 양도받은 겁니까?”
끊이질 않는 맬튼의 질문에 악마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선 돌아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으니.”
4. 꽃의 이름 (1)
머리를 감고 나온 맬튼은 이틀째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불청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2’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사 놓고 거의 앉아 본 적이 없는 티 테이블과 의자에 시선을 두다가 한숨을 쉬고 그곳에 앉았다. 딱딱하고 예쁘기만 한 의자는 전혀 안락하지 않았다.
악마를 어디까지 신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틀러가 악마를 위해 그 수많은 서적과 마법도구들을 모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 연구라는 것이 그를 본래 있어야 될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었음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버틀러라고 해도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버틀러 교수는 확실히 보통의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인도에 벗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악마가 선생님을 협박이라도 했던 걸까? 아니, 애초에 왜 선생님이 그런 연구를 시작했어야 하는 거지? 결국엔 편지를 다 읽어 봐야 길이 보일 것 같았다. 남자가 해 준 말을 못 믿는 이유는 스승의 괴짜스러움과는 별개로 그의 정체가 악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신사적이고 이성적이며, 오만한 남자였다. 이런 성격으로 버틀러와 마찰 없이 잘 지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자신에 관해서도 그랬다. 분명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인간적이어서 다행이었지만 그 이면에 어쩐지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숨기고 확실히 말해 주지 않는 것도 그 불쾌한 취급의 연장선상 같았다. 악마라는 존재로서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러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대상이 누구든 결코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맬튼은 마른세수를 했다. 베일리의 제안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혹시 베일리가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희망이 잠깐 솟았다가 사그라들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지만 이 짐은 나눈다고 가벼워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때문에 악마의 요청대로 내일 아침 일찍 버틀러의 묘를 찾기로 했다. 일이 이렇게 복잡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갑갑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깜깜한 맬튼과는 달리 악마는 맘 편히 잠들어 있어 그것이 맬튼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학창시절에 마법 수업에 좀 더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에 때 지난 후회가 밀려왔다.
결국 지난밤과 같이 잠들지 못한 채로 주말은 빨리 다가왔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맬튼은 버틀러의 저택에서 갈아입을 옷과 함께 기묘한 모양이 새겨진 상자를 챙겼다. 가방을 다 챙기고 나서 돌아본 악마는 약간 창백한 듯, 그래도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악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둘둘 말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 밖에서 그들을 부르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짐을 같이 들자고 말을 건네려 했으나 부를 이름이 없어 목적지 잃은 맬튼의 손끝이 허공을 저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맬튼이라고 딱히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악마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어 감히 시시한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리가 덜컹거려 멀미가 났다. 잠을 자려고 하니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렇게나 던져 둔 시야에 마주 앉은 이의 손이 보였다. 하얗고 핏기 없는 손.
저이를 뭐라 부르면 좋을까. 말이 없으니 미뤄 뒀던 일을 해결할 때인 것 같았다. 온갖 민폐를 끼치고 있는 주제에 이름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정작 본인은 민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버틀러 선생님에게도 자기 이름을 정하라고 억지를 부렸을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버틀러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했을 것이다. 은사가 이이를 뭐라 불렀는지는 모를 일이나 맬튼은 그것보다 더 좋고 적절한 이름을 생각해 낼 자신이 없었다.
내내 조용하던 악마가 저택에 도착하기 전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그리곤 맬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맬튼이 영문을 몰라 멀뚱하게 쳐다보자 혀를 쯧 차고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무작정 끌고 간 곳은 작은 꽃가게였다. 로즈마리 한 줌을 포장한 뒤 그냥 가지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맬튼이 계산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꽃을 사고 싶다고 말해 줬더라면 샀을 텐데요.”
다시 출발한 마차 안에서 맬튼이 불퉁하게 말했다.
“너야말로 고인의 무덤에 가면서 꽃 한 송이 사 갈 마음이 안 들었다는 게 믿을 수 없군 그래. 맬튼― 페이드?”
당신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 같다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로즈마리?”
“그래, 로즈마리.”
진한 자색과 향기로,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꽃은 정체되어 있던 마차 안의 분위기를 바꿨다. 코를 가까이 대고 숨을 깊게 들이쉬는 악마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꽃과 놀라울 정도로 어울렸다.
“어째서 로즈마리죠?”
“……이게 좋아.”
이걸로 충분하다는 대답에 맬튼은 어쩐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고 어색한 가운데 저택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넣어 뒀기 때문에 저택 앞에 베일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사용인이 먼저 가지고 들어갔고 악마와 맬튼은 베일리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사용인이 차와 다과를 내오고 나서야 베일리가 입을 열었다.
“페이드 씨, 같이 온 손님을 소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베일리의 요청에 맬튼은 난감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악마는 그저 편안하게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두통을 느끼며 입을 열었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그저 물고기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결국에 현재 상황에서 아주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선생님의 지인입니다. 묘소에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시군요. 학우분이신가요?”
“예?”
“동창생―이 아니신가요?”
베일리의 물음에 맬튼이 멍한 얼굴로 악마를 돌아보았다. 동년으로 보이는 건가― 주름 하나 지지 않은 대리석 같은 창백한 피부 때문인지, 아니면 감히 친근히 대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맬튼은 그의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마냥 어리게 보이기도 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맘대로 어린 아이의 몸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까지 하니 사람 기준의 나이를 그에게 들이대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 못지않게 곧은 베일리라고 해도 괜히 솔직하게 굴어 연장자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일리는 빙긋 웃으며 맬튼이 손님의 소개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는 여전히 부외자를 자청하며 이 일에 관심 없이 굴었다. 찻잔을 든 맬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와중에 베일리는 느긋한 얼굴로 앉은 이를 곁눈질했다. 익숙하게 앉아 있는 폼이 영락없이 오만한 귀족이었다. 베일리와 눈이 마주친 악마가 보란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 것은 운동한다고 해도 빠지지 않는 군살과 안정궤도에 오른 재력, 요령 있게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권리와 사람 보는 눈이 전부였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우나 그만큼 연륜이 쌓이니, 나쁘다 말할 것은 군살밖에 없었다.
베일리는 직업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만큼 수많은 거짓말쟁이들을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부끄럽지 않게 자만할 수 있었다. 특히나 돈이 얽힌 관계에서 베일리의 능력은 아주 유용했다. 그런 능력을 일상까지 끌고 들어오는 것은 반칙이라 할 수 있겠으나 직업병처럼 사람을 읽어 내고야 말았다.
맬튼을 처음 봤을 때 베일리가 처음 한 생각은 만만하다는 것이었다. 확고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려고 연기하는 모습이 베일리의 눈에는 귀엽게까지 보였다. 실제로도 맬튼은 그다지 치밀한 성격은 못 되었고 모든 일에 담담하고 의연해 보이는 것은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조금만 뒤에서 등을 밀어 주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 만큼 어리숙했다.
언뜻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버틀러의 제자에게 선뜻 그가 받은 서재의 관리를 맡는 것이 어떠하냐 제안한 것은 그가 결국엔 거절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맬튼은 곧바로 저택을 찾았고 베일리는 자신의 능력에 새삼 감탄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어리숙한 제자가 데리고 온 손님은 달랐다. 알 수가 없었다. 제 집인 것처럼 조금의 사양도 않는 행동은 그저 건방지다 일축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베일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고 했던 자가 누구였든 지금 당장 이 자리로 데려와 검은 머리의 사내와 눈을 맞추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싶었다. 아무것도 새어 나오지 못하는 완벽한 암흑이 그의 눈과 그 안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다만 내려다보는 시선이 압도적이라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것은 베일리였다.
“…이런, 손님이 왔는데 식사 준비도 일러 놓지 않고. 편하게 있으세요. 페이드 씨.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베일리가 빙긋 웃고 응접실을 나갔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맬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봐요. 정말 이름 안 알려 줄 겁니까?”
불편하다 앓는 소리를 해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가자.”
“네? 어딜―”
“멍청하게 구는 건 일부러야? 노아의 무덤 말이야. 가자고.”
비록 이 동네가 맬튼의 고향이기는 해도 이미 도시로 나가 산 지 10년에 가까웠고 묘지는 걸어서 가기에는 꽤 거리가 있어 제대로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무신경한 재촉에 차마 길을 잘 모르겠다 고백할 수도 없어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행히 사용인 한 명이 길 안내를 위해 따라 나오게 되었다.
저번에는 마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는데 천천히 걸어가니 고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낯선 길도 있었지만 학창 시절의 기억과 하나 다름없는 건물도 많았다. 그리고 그 풍경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맬튼은 드미트리아 마법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회에 나왔을 때 여전히 마법학교 출신을 좀 더 우대해 주는 사조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딱히 대단한 일을 할 것이 아니라면 커다란 이점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 리는 없었고 단지 자신이 마법에 커다란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나로 시동할 수 있는 마법들로, 메시지 발수신마법이나 기초 발광, 발열마법 따위 등이 그것이었다. 도구에 마나만 흘려 넣으면 발동되기 때문에 마법이라기보다는 마나의 제어에 관계된 것이었다.
이것은 굉장히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습득이라 누가 특별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법 학교라 할지라도 교육 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로 진학하면 그에 관련된 연구와 논문에 손이 닿을지도 모르나 어린 아이들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맬튼이 마법학교에 진학하기 싫었던 것은 그런 대단치 않은 마법의 발동을 혼자서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남들 몰래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털어서 산 발열 종이 수십 장을 사용도 못하고 찢어 버려야 했다. 다행히 입학하기 몇 개월 전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제대로 마나라는 개념을 몸으로 느끼고 조절하는 건 1학년이 끝날 때쯤 되어서였다.
때문에 다른 적성에서 A판정이 나온 것보다 마법사에 B― 판정이 뜬 것이 맬튼에게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역시나, 마법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마나를 사용하려고만 하면 딱 필요한 만큼 끄집어내지 못하고 항상 과도하게 방출했다가 시동에 실패해 버렸다. 학교에서 배우는 마법은 일상에서 딱히 유용하지도 않고 까다로운 것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지만, 맬튼에겐 잘하지 못하는 것을 끌어안고 있을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부친은 정식마법윤리위원회의 간부였고 모친은 젊은 시절 마법 스포츠 쿼른의 꽤 잘나가는 선수였다. 그 피를 물려받고서 마나 사용에 능숙치 못하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조금 더 악착같았으면 숨은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맬튼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고, 마법 이론은 골이 아팠다.
어쨌든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해도 마법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열등감이 있었던 터라 4학년 때 완전히 손을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종종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다. 그 장소가 바로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공터였다. 예전에는 조금 더 황량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꽤 아늑하고 멋져 보였다.
어렸을 때 곧잘 찾는 장소였다. 한동안은 가속 마법에 열중해 매일 드나들기도 했다. 말은 가속마법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마나를 손에 응축시켰다가 순간적으로 방출시켜, 가지고 있는 물건이 순식간에 날아가도록 하는 것이 전부라 대단히 거창한 마법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맬튼은 할 수가 없었다. 돌멩이가 날아가는 대신 터져 버린 탓에 어린 나무를 완전히 망쳐 버린 일이 있었다. 그때 그 파편에 맬튼도 적지 않게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땐 그랬지 하며 감상에 젖어 있던 맬튼은 갑자기 발을 멈춘 악마의 뒤꿈치를 밟고 말았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럽니까? 발 안 다쳤어요?”
“……맬튼.”
“예?”
악마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맬튼을 보다가 어느 한곳을 향해 다가갔다. 맬튼의 다섯 배쯤 되는 높이의 커다란 나무였는데 그 앞에 멈춰서더니 나무의 몸통을 손으로 짚고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통에 길을 안내하던 사용인과 맬튼은 말도 걸지 못하고 뒤에서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3. 눈물과 허세 (2)
아이를 품에 안아들고 공원에서 나가려던 맬튼이 악마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파리한 얼굴이었다. 침대를 빼앗아 죽은 듯이 잤던 것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일을 미뤄 둘 수는 없기 때문에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묘하게 바빠 잠시 짬을 낼 시간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곧바로 공원으로 찾아왔으나 악마는 없었다.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이 들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편이 나았다. 어딘가에서 맘대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료 직원들이 겨우 이틀 쉬고 휴가병이라도 걸린 거냐며 놀렸지만 뭐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불안이 지나치다 보니 제가 왜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생각이 뻗쳤다.
분명 그 검고 이상한 물체는 자신의 소유가 맞지만 거기서 악마가 갑자기 소환되었다면 그 악마까지도 나의 것인가? 어쨌든, 무릇 생명이라는 것은 종속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이대로 어딘가로 영영 사라져 버린다면 원치 않던 짐을 더는 것이니 좋은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자기변명에도 불구하고 맬튼은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제 스승에의 의리인지 아니면 필요 없는 오지랖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정말 어딘가로 악마가 사라져 버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형사고였다.
이틀이나 쉬고 왔으면서 맬튼은 5시 정각이 되자마자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런 사소한 일을 해명할 시간이 없었다. 코트를 입지도 않고 팔에 걸친 채 급히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를 뒤에서 후배가 잡았지만 듣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 없이 마음만 앞서서 나온 터라 정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자니 맬튼은 그제야 머리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없으면 다시 찾으러 나오면 되고.’
집으로 향하던 맬튼의 눈에 자주 가는 샌드위치 가게가 들어왔다. 집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론 손님이 있고, 만약 그가 집에 돌아와 있다면 저녁을 해결하기는 해야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맬튼은 주문을 한 뒤 잠시라도 앉기 위해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처음 보는 종업원이 넉살좋게 맬튼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낯선 사람과 금방 말을 나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맬튼은 몇 마디를 겨우 주고받았다. 보일 듯 말 듯 웃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유리창에 비친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악마가 겨우 동네 샌드위치 가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차림으로 맬튼의 앞에 앉았다. 그는 불과 오늘 낮에만 해도 창백하기는 해도 사람 같이 보였는데 지금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까지 보였다. 게다가 옷은 어디서 난 건지 상당히 양질의 것이었는데 맬튼은 곧 그것이 버틀러의 장례식에 가면서 구입한 자신의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
‘집에 있었구나…….’
그 사실은 알자마자 오후가 지나서 내내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청명해졌다. 괜한 걱정을 했다. 악마가 맬튼의 코트를 벗자 주인이 포장으로 주문했던 샌드위치를 접시에 세팅해 내왔다. 처음 보는 친구라며 장사꾼답게 금방 친한 척을 했는데 악마는 그것을 아주 신사적으로 잘 대응했다.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악마는 샌드위치를 입 안 가득히 베어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냥 뭐. 미술관은 처음이라고 했잖아. 조금 구경하다가 집에 갔어.”
“……찾아다녔어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맬튼이 민망한 기색으로 말하니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기다린다고 했던가? 하고 태평하게 묻는 말에 분명 그런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맬튼은 투정할 수가 없었다.
“왜?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이었니?”
악마의 질문에 맬튼은 손에 들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묻은 빵가루를 손을 비벼 털어 냈다.
“그건, 이미 사과한 일이지 않습니까. 사실 난 아직도 당신이 악마라는 걸 믿지 못하겠어요. 아니, 믿기는 하지만…… 낮에 그 아이, 어떻게 한 겁니까?”
“말해 줘도 모를 텐데.”
퉁명한 대꾸에 맬튼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악마의 생리를 듣는다고 이해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런 능력도 있습니까?”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가볍게 물었다. 사실 그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들어도 맬튼은 별로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묘한 돌에서 소환되었다는 사실은 평생 겪을 신기한 일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서늘한 손가락이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훔쳐 가면서 그렇다면 어쩔래? 하고 묻자 맬튼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맬튼은 아무래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를 포기하고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좋아.”
“당신과 버틀러 선생님은 무슨 관계였습니까? 선생님이 당신을 소환한 겁니까?”
맬튼의 질문에 악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네. 조금 복잡하지만 간단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노아에게 소환된 건 아니야. 노아는 단순히… 양도를, 그래 양도 받은 것뿐이지. 그는 분명 마법에 재능이 있었지만 소환 마법을 시동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거든. 나와 지내면서 몇 번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모두 실패했어.”
“양도―라니 누구에게?”
“날 소환한 사람. 나이가 많은 마법사였어. 평생을 소환마법에만 매달린 이였지.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는 좋은 마법사였지만 욕심이 과했지. 그 결과가 바로 나고. 스스로 소환했으면서 감당하지도 못하더군.”
“선생님이 남긴 편지에 여행에 관한 말이 있었습니다만, 분명 그 여행에서 당신을 만난 거군요?”
“그래. 10년 가까이 된 일이군. 꽤 긴 시간이지? 너희 인간들에게는 말이야.”
자신에게도 그리 찰나는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악마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반쯤 벌리고 가만히 있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노아는 호기심이 많은 남자였어. 악마를 보고도 같이 지내자고 할 정도면 너네끼리는 꽤 괴짜취급 했을 테지.”
맬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틀러 선생님이라면 어쩐지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은 의문들이 많았다. 악마와 같이 지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알 수 없는 연구에 빠져들었는가’에 대한 것과 ‘왜 악마를 자신에게 맡겼는지’에 대한 것 말고도 말이다. 결국에 그 답은 편지와 고인의 서재에 있었다.
편지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맬튼은 사무실에 그대로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혀를 찼다. 당장 내일부터는 휴일이니 적어도 이틀은 편지를 가지러 가지 못했다. 차일피일 일을 미뤄둘 수도 없으니 당장은 악마의 요구대로 버틀러의 저택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선생님이 왜 당신을 맡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당신을 소환했다는 그 남자가 선생님에게 왜 그 물건을 넘겨준 건지, 버틀러 선생님은 당신의 정체를 알고서도 그 물건을 양도받은 겁니까?”
끊이질 않는 맬튼의 질문에 악마가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선 돌아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으니.”
4. 꽃의 이름 (1)
머리를 감고 나온 맬튼은 이틀째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불청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2’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사 놓고 거의 앉아 본 적이 없는 티 테이블과 의자에 시선을 두다가 한숨을 쉬고 그곳에 앉았다. 딱딱하고 예쁘기만 한 의자는 전혀 안락하지 않았다.
악마를 어디까지 신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틀러가 악마를 위해 그 수많은 서적과 마법도구들을 모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 연구라는 것이 그를 본래 있어야 될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었음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버틀러라고 해도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버틀러 교수는 확실히 보통의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인도에 벗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악마가 선생님을 협박이라도 했던 걸까? 아니, 애초에 왜 선생님이 그런 연구를 시작했어야 하는 거지? 결국엔 편지를 다 읽어 봐야 길이 보일 것 같았다. 남자가 해 준 말을 못 믿는 이유는 스승의 괴짜스러움과는 별개로 그의 정체가 악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신사적이고 이성적이며, 오만한 남자였다. 이런 성격으로 버틀러와 마찰 없이 잘 지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자신에 관해서도 그랬다. 분명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인간적이어서 다행이었지만 그 이면에 어쩐지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숨기고 확실히 말해 주지 않는 것도 그 불쾌한 취급의 연장선상 같았다. 악마라는 존재로서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러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대상이 누구든 결코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맬튼은 마른세수를 했다. 베일리의 제안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혹시 베일리가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희망이 잠깐 솟았다가 사그라들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지만 이 짐은 나눈다고 가벼워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때문에 악마의 요청대로 내일 아침 일찍 버틀러의 묘를 찾기로 했다. 일이 이렇게 복잡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갑갑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깜깜한 맬튼과는 달리 악마는 맘 편히 잠들어 있어 그것이 맬튼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학창시절에 마법 수업에 좀 더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에 때 지난 후회가 밀려왔다.
결국 지난밤과 같이 잠들지 못한 채로 주말은 빨리 다가왔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맬튼은 버틀러의 저택에서 갈아입을 옷과 함께 기묘한 모양이 새겨진 상자를 챙겼다. 가방을 다 챙기고 나서 돌아본 악마는 약간 창백한 듯, 그래도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악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둘둘 말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 밖에서 그들을 부르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짐을 같이 들자고 말을 건네려 했으나 부를 이름이 없어 목적지 잃은 맬튼의 손끝이 허공을 저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맬튼이라고 딱히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악마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어 감히 시시한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리가 덜컹거려 멀미가 났다. 잠을 자려고 하니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렇게나 던져 둔 시야에 마주 앉은 이의 손이 보였다. 하얗고 핏기 없는 손.
저이를 뭐라 부르면 좋을까. 말이 없으니 미뤄 뒀던 일을 해결할 때인 것 같았다. 온갖 민폐를 끼치고 있는 주제에 이름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정작 본인은 민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버틀러 선생님에게도 자기 이름을 정하라고 억지를 부렸을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버틀러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했을 것이다. 은사가 이이를 뭐라 불렀는지는 모를 일이나 맬튼은 그것보다 더 좋고 적절한 이름을 생각해 낼 자신이 없었다.
내내 조용하던 악마가 저택에 도착하기 전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그리곤 맬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맬튼이 영문을 몰라 멀뚱하게 쳐다보자 혀를 쯧 차고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무작정 끌고 간 곳은 작은 꽃가게였다. 로즈마리 한 줌을 포장한 뒤 그냥 가지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맬튼이 계산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꽃을 사고 싶다고 말해 줬더라면 샀을 텐데요.”
다시 출발한 마차 안에서 맬튼이 불퉁하게 말했다.
“너야말로 고인의 무덤에 가면서 꽃 한 송이 사 갈 마음이 안 들었다는 게 믿을 수 없군 그래. 맬튼― 페이드?”
당신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 같다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로즈마리?”
“그래, 로즈마리.”
진한 자색과 향기로,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꽃은 정체되어 있던 마차 안의 분위기를 바꿨다. 코를 가까이 대고 숨을 깊게 들이쉬는 악마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꽃과 놀라울 정도로 어울렸다.
“어째서 로즈마리죠?”
“……이게 좋아.”
이걸로 충분하다는 대답에 맬튼은 어쩐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고 어색한 가운데 저택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넣어 뒀기 때문에 저택 앞에 베일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사용인이 먼저 가지고 들어갔고 악마와 맬튼은 베일리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사용인이 차와 다과를 내오고 나서야 베일리가 입을 열었다.
“페이드 씨, 같이 온 손님을 소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베일리의 요청에 맬튼은 난감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악마는 그저 편안하게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두통을 느끼며 입을 열었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그저 물고기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결국에 현재 상황에서 아주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선생님의 지인입니다. 묘소에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시군요. 학우분이신가요?”
“예?”
“동창생―이 아니신가요?”
베일리의 물음에 맬튼이 멍한 얼굴로 악마를 돌아보았다. 동년으로 보이는 건가― 주름 하나 지지 않은 대리석 같은 창백한 피부 때문인지, 아니면 감히 친근히 대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맬튼은 그의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마냥 어리게 보이기도 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맘대로 어린 아이의 몸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까지 하니 사람 기준의 나이를 그에게 들이대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 못지않게 곧은 베일리라고 해도 괜히 솔직하게 굴어 연장자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일리는 빙긋 웃으며 맬튼이 손님의 소개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는 여전히 부외자를 자청하며 이 일에 관심 없이 굴었다. 찻잔을 든 맬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와중에 베일리는 느긋한 얼굴로 앉은 이를 곁눈질했다. 익숙하게 앉아 있는 폼이 영락없이 오만한 귀족이었다. 베일리와 눈이 마주친 악마가 보란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 것은 운동한다고 해도 빠지지 않는 군살과 안정궤도에 오른 재력, 요령 있게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권리와 사람 보는 눈이 전부였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우나 그만큼 연륜이 쌓이니, 나쁘다 말할 것은 군살밖에 없었다.
베일리는 직업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만큼 수많은 거짓말쟁이들을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부끄럽지 않게 자만할 수 있었다. 특히나 돈이 얽힌 관계에서 베일리의 능력은 아주 유용했다. 그런 능력을 일상까지 끌고 들어오는 것은 반칙이라 할 수 있겠으나 직업병처럼 사람을 읽어 내고야 말았다.
맬튼을 처음 봤을 때 베일리가 처음 한 생각은 만만하다는 것이었다. 확고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려고 연기하는 모습이 베일리의 눈에는 귀엽게까지 보였다. 실제로도 맬튼은 그다지 치밀한 성격은 못 되었고 모든 일에 담담하고 의연해 보이는 것은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조금만 뒤에서 등을 밀어 주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 만큼 어리숙했다.
언뜻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버틀러의 제자에게 선뜻 그가 받은 서재의 관리를 맡는 것이 어떠하냐 제안한 것은 그가 결국엔 거절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맬튼은 곧바로 저택을 찾았고 베일리는 자신의 능력에 새삼 감탄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어리숙한 제자가 데리고 온 손님은 달랐다. 알 수가 없었다. 제 집인 것처럼 조금의 사양도 않는 행동은 그저 건방지다 일축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베일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고 했던 자가 누구였든 지금 당장 이 자리로 데려와 검은 머리의 사내와 눈을 맞추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싶었다. 아무것도 새어 나오지 못하는 완벽한 암흑이 그의 눈과 그 안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다만 내려다보는 시선이 압도적이라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것은 베일리였다.
“…이런, 손님이 왔는데 식사 준비도 일러 놓지 않고. 편하게 있으세요. 페이드 씨.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베일리가 빙긋 웃고 응접실을 나갔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맬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봐요. 정말 이름 안 알려 줄 겁니까?”
불편하다 앓는 소리를 해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가자.”
“네? 어딜―”
“멍청하게 구는 건 일부러야? 노아의 무덤 말이야. 가자고.”
비록 이 동네가 맬튼의 고향이기는 해도 이미 도시로 나가 산 지 10년에 가까웠고 묘지는 걸어서 가기에는 꽤 거리가 있어 제대로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무신경한 재촉에 차마 길을 잘 모르겠다 고백할 수도 없어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행히 사용인 한 명이 길 안내를 위해 따라 나오게 되었다.
저번에는 마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는데 천천히 걸어가니 고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낯선 길도 있었지만 학창 시절의 기억과 하나 다름없는 건물도 많았다. 그리고 그 풍경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맬튼은 드미트리아 마법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회에 나왔을 때 여전히 마법학교 출신을 좀 더 우대해 주는 사조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딱히 대단한 일을 할 것이 아니라면 커다란 이점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 리는 없었고 단지 자신이 마법에 커다란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나로 시동할 수 있는 마법들로, 메시지 발수신마법이나 기초 발광, 발열마법 따위 등이 그것이었다. 도구에 마나만 흘려 넣으면 발동되기 때문에 마법이라기보다는 마나의 제어에 관계된 것이었다.
이것은 굉장히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습득이라 누가 특별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법 학교라 할지라도 교육 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로 진학하면 그에 관련된 연구와 논문에 손이 닿을지도 모르나 어린 아이들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맬튼이 마법학교에 진학하기 싫었던 것은 그런 대단치 않은 마법의 발동을 혼자서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남들 몰래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털어서 산 발열 종이 수십 장을 사용도 못하고 찢어 버려야 했다. 다행히 입학하기 몇 개월 전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제대로 마나라는 개념을 몸으로 느끼고 조절하는 건 1학년이 끝날 때쯤 되어서였다.
때문에 다른 적성에서 A판정이 나온 것보다 마법사에 B― 판정이 뜬 것이 맬튼에게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역시나, 마법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마나를 사용하려고만 하면 딱 필요한 만큼 끄집어내지 못하고 항상 과도하게 방출했다가 시동에 실패해 버렸다. 학교에서 배우는 마법은 일상에서 딱히 유용하지도 않고 까다로운 것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지만, 맬튼에겐 잘하지 못하는 것을 끌어안고 있을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부친은 정식마법윤리위원회의 간부였고 모친은 젊은 시절 마법 스포츠 쿼른의 꽤 잘나가는 선수였다. 그 피를 물려받고서 마나 사용에 능숙치 못하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조금 더 악착같았으면 숨은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맬튼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고, 마법 이론은 골이 아팠다.
어쨌든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해도 마법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열등감이 있었던 터라 4학년 때 완전히 손을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종종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다. 그 장소가 바로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공터였다. 예전에는 조금 더 황량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꽤 아늑하고 멋져 보였다.
어렸을 때 곧잘 찾는 장소였다. 한동안은 가속 마법에 열중해 매일 드나들기도 했다. 말은 가속마법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마나를 손에 응축시켰다가 순간적으로 방출시켜, 가지고 있는 물건이 순식간에 날아가도록 하는 것이 전부라 대단히 거창한 마법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맬튼은 할 수가 없었다. 돌멩이가 날아가는 대신 터져 버린 탓에 어린 나무를 완전히 망쳐 버린 일이 있었다. 그때 그 파편에 맬튼도 적지 않게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땐 그랬지 하며 감상에 젖어 있던 맬튼은 갑자기 발을 멈춘 악마의 뒤꿈치를 밟고 말았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럽니까? 발 안 다쳤어요?”
“……맬튼.”
“예?”
악마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맬튼을 보다가 어느 한곳을 향해 다가갔다. 맬튼의 다섯 배쯤 되는 높이의 커다란 나무였는데 그 앞에 멈춰서더니 나무의 몸통을 손으로 짚고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통에 길을 안내하던 사용인과 맬튼은 말도 걸지 못하고 뒤에서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