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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5화
4. 꽃의 이름 (2)


눈을 뜬 악마가 고개를 들어 줄기의 일부가 하얗게 변색된 나무 윗부분을 올려다보았다.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희미한 상처였지만 악마의 눈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게 눈에 띄었다.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저기, 지금 뭐 하는…”
“넌 왜 마법을 회수도 안 해?”
악마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맬튼이 악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대답하지 않으니 손을 잡아 이끌어 나무 앞으로 끌어왔다.
“저기 위에. 네 마나가 널려 있잖아.”
“제 마나가 왜―”
상당히 화려하게 사고를 쳤던 터라 그때 상처 입힌 나무는 영락없이 죽었을 줄만 알았더니 그 나무가 이 나무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마법을 회수를 했던가 안 했던가. 기억나지 않으니 회수하지 않은 맬튼의 마나가 나무에 남아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아― 어렸을 때 잠깐…… 근데 어떻게 안 겁니까?”
“멍청하긴. 얼른 회수나 해.”
어떻게 알았냐는 맬튼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악마는 혀를 차고 사용인을 부추겨 먼저 길을 서둘렀다. 멀어져 가는 한 사람과 한 악마의 모습을 멍하니 보던 맬튼은 나무 몸통에 손을 얹어 마나를 회수했다. 파릇파릇하던 나뭇잎의 일부가 한순간에 시들어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의 마나는 그다지 회수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을 텐데 하고 나무를 해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꽤 멀어진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금방 공터를 벗어났다.
버틀러의 묘지에는 손님이 여럿 다녀갔었는지 꽃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시들어 버린 것이었기 때문에 같이 온 사용인이 자리를 정리하고 뒤로 물러났다. 악마는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어린 소년이 얼굴을 붉혔다.
어린 사용인이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자 맬튼은 내내 참아 왔던 질문을 했다.
“여기까지 왔으며 말해 줘도 되지 않나요.”
“뭘 말이야?”
“여기에 온 이유 말이에요. 당신과 선생님과의 관계라든가, 아니면 선생님이 죽은 이유가 당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하다못해 당신의 이름이라도.”
악마는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가져온 로즈마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맬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악마라는 그가 한 인간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하는 걸까. 제 스승과 악마는 어떤 시간과, 말과, 감정을 공유했을까. 마치 부모님의 입맞춤을 목격한 것만 같은 거북함이 그를 휘감았다.
“말했지. 노아는 나를 마계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 노력해 줬어. 그런 이의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딱히 이유가 있어서 온 게 아니야. 그저 고인을 기리기 위해서 온 것뿐이야.”
“그런 식으로 날 매정한 사람 만드는 건 그만둬요. 어쨌든 선생님은 당신을 나에게로 보냈고 우리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요. 자꾸 숨기려고 하면 상황만 복잡해질 겁니다.”
악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웃음이 걸렸으나 감정 없는 인형 같았다. 그는 로즈마리의 향기를 달고 맬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주변을 천천히 걷다가 등 뒤에서 멈췄다.
“감당할 수 있을까?”
“뭘 말입니까?”
“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는 노아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존경하는 선생님이잖아. 그러고 싶지 않을걸?”
“그건 들어보고 나서 생각할 일이겠죠.”
“후회할 텐데.”
“듣지 않아 아쉬워하는 것보다 듣고 나서 후회하는 쪽을 택하죠.”
코끝에서 꽃향기가 떠나지를 않았다. 그것이 묘비 앞에 놓인 보라색 꽃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에게서 나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은근한 목소리는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다 깬 푸르스름함 새벽녘처럼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노아는 호기심이 많은 남자였지. 그리고 그만큼 멍청한 사내였다. 내게 살려 주겠다 속삭인 건 노아였어. 나는 거절하지 않았지. 오― 절대 거절하지 않지. 거절할 리가 없지. 인간들은 이단자에게 손가락질하며 그러지.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숨을 줘 버렸다는 거야. 생명을 줘 버렸다고. 그러니 이렇게 단명한 건 다 제 탓이지 않겠어? 노아의 죽음과 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냐고 물었나? 나에게 추궁하기 전에 네 스승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게 좋아.”
어렵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말이었으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악마는 등 뒤에서 눈앞으로 자리를 옮겨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이 작게 떨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노아가 너에게 나를 넘겨줬다는 건 이제 내가 네 책임이라는 소리지. 이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는 구나, ginger.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이제 나는 노아가 아니라 네 숨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소리야.”
It’s time to bid my dear friend adieu.
그 뒤에 이어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도, 그리 겁먹을 것 없다는 말도, 잘 부탁한다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오랜 친구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이라는 악마의 말에 지난 며칠간 마음을 짓눌렀던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 들었다.
이이의 이름은 비드라고 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말로 악마 같은 얼굴로 자신에게 죽음을 고하는 이에게 둘도 없이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chapter 2. 파란
1. 이른 우정인가, 얕은 동정인가(1)


저녁을 먹는 내내 불편한 공기가 그들을 내리눌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나 맬튼은 내오는 접시마다 반을 채 비우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그 모습이 걱정된 베일리가 디저트로 뭔가를 더 내올까 물었지만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베일리가 맬튼을 불렀지만 듣지 못했다.
묘지에 다녀온 뒤로부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같이 온 손님이 어쩐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베일리도 덩달아 입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남은 손님은 혼자 둘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테이블로 돌아와야 했다.
맬튼과 마찬가지로 같이 온 손님 역시 그다지 좋은 기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직 끝내지 않은 디저트 접시에 수저를 내려놓고 멈춰 있었다. 베일리가 차를 더 내올까 물으니 거절했다. 상을 물리고 그를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시녀가 새로운 베개와 시트로 갈아 둬 쓰지 않았던 방의 먼지 냄새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욕실은 방에서 오른쪽으로 나와 두 번째 문입니다. 물을 데워 두라고 아까 집사가 말해 뒀을 테니 언제든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베일리도 덩달아 내려앉은 분위기에 전염되어 일찍 잠자리에 들까 하며 나가려는데 저택에 도착해서부터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던 남자가 얌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저기, 잠깐.”
“……드디어 뭔가 말을 할 마음이 드셨습니까. 앉을까요?”
베일리가 먼저 카우치에 앉았다. 하지만 남자는 사람을 앉혀 놓고 말이 없었다. 입가를 가리고 다른 곳만 보았다. 해가 일찍 졌기 때문에 방 안은 금방 어두워졌다. 베일리가 시종을 불러 불을 밝히려 했으나 비드가 가볍게 손을 튕겨 먼저 방을 밝혔다. 그러나 불그스름한 빛과 은근한 온기도 둘 사이의 어색함을 녹이지는 못했다. 결국 기다리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베일리였다.
“묘지에 다녀온 뒤로 페이드 씨도 그렇고 내내 말씀이 없으시니, 제가 다 마음이 안 좋군요. 버틀러 씨가 제자는 참 잘 두셨어요.”
“……아니야.”
“예?”
“제자 같은 게…….”
남자는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던져 둔 채였다. 새하얀 손가락이 조용히 움직이며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갈랐다.
“노아, 아니. 버틀러 선생님 말이야.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따로 말씀하신 거 없나……요?”
“따로 말씀하신 거라면 어떤 걸 말하시는지?”
“그러니까 뭔가…… 이상, 한 거 말이야. 그답지 않은 거.”
자꾸만 시선을 피하며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어 보이는데 돌려 물을 뿐이었다. 눈치 없이 그것이 무엇인지 파고들만큼 젊지는 않았기 때문에 베일리는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돌아가시기 전에 버틀러 씨는 뭔가 따로 말씀을 남기실 만큼 건강하지 않으셨거든요. 유언장이라면 정식 유언장과 페이드 씨에게 개인적으로 남긴 것, 두 개가 있습니다. 정식 유언장에는 재산과 장례식에 관한 언급이 전부였고, 페이드 씨에게 남긴 유언장에는 그의 서재를 페이드 씨에게 남긴다는 말이 있었다는군요.”
“노아의 서재를 맬튼에게?”
“예. 그 밖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고 한다면…… 이 말을 안 할 수는 없겠네요. 병색이 완연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기 전까지 그는 계속 이상하셨으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죽기 전뿐만 아니라 근 10년간은 계속 그랬다. 베일리는 버틀러가 반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그가 갑자기 떠나 버린 것은 아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시이스의 돌을 찾으러 가겠다. 버틀러의 말버릇이었다. 모든 마력의 근원이 되는 태초의 땅 아시이스. 현재는 유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고대의 문명을 찾으러 가겠다는 그의 소원은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일이었고, 베일리는 그가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렇게 당장에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렸던 것은 역시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버틀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가 훌쩍 떠난 뒤 아무 연락도 없었던 것보다는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왔던 것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버틀러 부인의 마음이 틀어진 것도 그때부터인지도 몰랐다.
몸에는 스스로 낸 듯한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아물어 흉터만 있을 뿐이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는데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사를 몇 명을 부르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다 공수해 먹여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여행길에 어떤 밝혀지지 않은 병이라도 얻은 것인가 하며 전전긍긍하길 수일, 버틀러는 거짓말처럼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물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마디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 버틀러의 행적을 생각하면 그건 단순 전초에 불과했다.
“말씀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낫겠군요. 잠시 기다리세요. 여분 열쇠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버틀러는 이상한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 모르고, 단지 몸을 상해 가면서까지 무척이나 몰두했었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기에 베일리는 서재로 비드를 데려다준 후 자리를 비켰다.

* * *

침대는 한 번 누웠던 곳이라고 은근히 편하게 느껴졌지만 머리가 복잡해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밖에서 나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창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은 밤의 냄새가 났다.
네 숨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소리야. 그건 무슨 말일까. 말 그대로, 책에서나 보던 것처럼 악마와 수명이라도 거래해야 한다는 소리일까? 그렇다면 버틀러 선생님은 비드와 그런 계약을 맺었던 걸까? 계약이 완료되기 전에 버틀러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버틀러 선생님이 맺은 계약을 내가 마쳐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그러나 얄팍한 맬튼의 지식으로도 이건 영 허술한 상황이었다. 비드가 버틀러와 도대체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런 일방적인 계약 이전이 가능할까? 인간들 사이에서도 안 되는 일인데 하물며 악마와의 계약이다. 맬튼이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비드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건 항상 인간이 먼저 하는 것이었다. 소환이라는 것도 발동자가 마법을 시전하지 않으면 상대방 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소환을 하고 부탁을 하면 그에 맞는 대가를 제시하고 계약을 맺는다. 대충 이런 흐름일 텐데 비드와 맬튼의 사이에는 그 일련의 과정 중 제대로 이행된 것이 하나 없었다.
‘그럼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건가?’
단지 비드의 말과 읽지도 않은 유언장의 서론에 써져 있던 부탁이라는 것이 막연히 이것일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이 비드와 계약관계에 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었다.
유언장에도 단순히 부탁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었으니 맘만 먹으면 이렇게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비드가 악마라고 해도 제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목숨을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이었다.
만약 맬튼이 생각한 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남은 의문은 선생이 왜 이런 성가신 일을 한낱 제자에게 맡겼냐는 것이다. 맬튼이 마법에 능했다면 이해가 갈 뻔도 했지만 그가 실생활 마법 이외에는 백치라는 것은 버틀러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입사할 때 서류가 필요해 한 마력 측정이 마지막 측정이었으니 맬튼은 그동안 꽤나 마법과는 동 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열심히 생각해 뭔가 알아냈다고 생각하자마자 도로 원점이었다. 잠이나 자야겠다며 억지로 눈을 감는데 천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게스트룸의 위층은 버틀러의 서재였다. 서재의 열쇠는 맬튼에게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발소리가 들릴 리가 없지만 조심성 없는 발소리는 도저히 잘못 들은 것 같다며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맬튼은 열쇠를 챙겨 방을 나섰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온 시각이 그리 늦지 않았을 텐데 저택은 이미 한밤중처럼 고요하고 어두웠다. 맬튼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3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서재의 문 앞에 서서는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단 한 번 들어가 본 서재는 기괴하고 불쾌한 공간이라, 악마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그 무엇이라도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 뒤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려왔다. 손잡이에 열쇠를 꽂자 곧 그 인기척이 멎었다. 맬튼의 심장은 더욱 요란스럽게 뛰었다. 눈을 깜빡이는 일도 까먹고, 그는 숨을 참은 채 열쇠를 돌렸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다시 반대쪽으로 열쇠를 돌리자 문이 열렸다. 복도의 불빛이 미미해서 방 안까지 빛이 새어 들어가지 않았다. 도톰한 카펫에 맬튼의 그림자가 일그러져 떨어져 내렸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차단된 시야는 무서움을 키웠고, 그는 2층으로 내려가 다시 잠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곧 고개를 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발을 떼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고 막상 어둠 속에 들어가 희미하게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호흡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맬튼은 손끝으로 가구들을 쓸어 가며 길을 찾았다. 기억을 더듬어 책상에 도착한 그는 커튼을 걷었다.
사물들이 명확하게 보일 때쯤 그는 반대쪽 커튼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창문 아래에 기대어 앉아 웅크리고 있는 어깨가 잘게 떨렸다. 일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하지만 창에서 떨어지는 푸른빛으로 물든 목덜미가 익숙했다. 맬튼은 커튼을 마저 걷고 비드의 옆에 섰다.
“비드? 여기서 뭐하고 있습니까?”
열쇠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 어깨의 떨림은 멎지 않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맬튼이 고민하다 비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는 겁니까?”
악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 어떤 보석이라도 되는 듯이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맬튼은 닦아 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동공에 사로잡혔다. 어깨에 둔 손을 거두었다. 감히 만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뒤로 서서히 물러나는 맬튼은 조용히 바라보던 비드가 뛰어들 듯 맬튼의 품으로 들어왔다. 멈추지 않는 흔들림, 오히려 더욱 강해진 떨림이 낯설었다. 그러나 비드를 처음 만난 다음 날 그가 그랬던 것처럼, 맬튼은 이내 어색하게나마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웅크린 몸은 여전히 서늘했으나 맬튼의 옷을 적시는 것은 인간의 것과 다름없이 뜨거웠다. 인어의 눈물처럼 떨어져 내려 그 모양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했던 것은 그저 착각이었을 뿐, 비드의 슬픔은 고스란히 맬튼의 어깨에 흘러내렸다. 맬튼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그저 등을 두드려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울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 밤벌레의 울음과 함께 비드의 눈물도 멎었다. 비드는 비척이며 맬튼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얀 피부 때문에 눈가가 붉게 상기된 것이 바로 보였다. 축축한 어깨가 신경 쓰였지만 맬튼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비드에게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드는 약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젖어 색이 변한 맬튼의 어깨를 훔쳐보다 그 자리에 이마를 기댔다.
“악마도 우는군요.”
“네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군.”
“뭐긴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죠.”
맬튼의 대답에 비드가 작게 웃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볼을 긁적이며 맬튼이 입을 열었다.
“학생 시절에, 나는 꽤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어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주위에서 꽤나 치켜세워 줬었죠. 하지만 정작 나는 특별하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어요. 그런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학교는 그저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인내해야 하는 관문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거든요. 내 아버지는 마법윤리위원회의 수장이고 어머니는 마법스포츠의 연구원이시니 그분들의 피가 내게 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어쩐지 성격만은 아니더라구요.
위에 하나 있던 누나가 부모님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떠나 버리고 난 뒤에 내 입장은 참 난감했죠. 나는 누나처럼 부모님을 완전히 저버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엔 보통 학교가 아닌 마법학교에 가게 됐어요. 마법학교라 해도 이제는 그 위상이 많이 낮아졌지만 일반 학교에 비해서는 그쪽 관련 권위자들도 꽤 있고, 다른 의무 마법교육보다 상위의 것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으니 여전히 쳐 주는 학교이긴 하거든요.
어쨌든 적성 검사 결과에서 네 가지 항목에 A판정을 받은 건 저에게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제일 못하는 마법 수업을 더 듣기로 했죠. 그런데 마나가 충분해도 흥미가 없으면 못 하는 것이더군요, 마법이란 거. 그때의 난 정말 답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시간 때우기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3학년 땐 그것마저 슬슬 질려 가던 차였거든요.
내 부모님은 내가 적성 검사에서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것에 A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해도 어떻게든 밀어 넣을 생각이었을 거예요. 딱히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반항심만 늘어가던 그때 영락없이 부모님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릴 줄 알았어요. 모든 어린 십대들이 겪는 성장통이었겠지만 나는, 누나가 사라지고 나서 내 편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유난히 그 통증이 아팠어요.
그러다가 버틀러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내가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죠. 내가 잘하는 걸 좋아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그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려 주셨습니다.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좋은 어른이었어요. 아마 버틀러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적성에 무서울 정도로 맞는 일을 하며 죽은 채로 살아갔을 거예요. 당신에게만 말하는 거지만 그림 보는 거, 꽤 즐겁거든요. 지금 박물관에서 경호 일하는 거 부모님은 아주 질색을 하시지만 그래도 내 인생은 평화로워요. 얼마 전 깨져 버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랑?”
“그러니까, 버틀러 선생님은 당신이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말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나도 그의 죽음이 슬퍼요. 당신이 선생님와 어떤 관계였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흘리는 눈물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그럴 만한 분이셨습니다.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예요. 뭐, 나도 비드 앞에서 이미 한 번 울었으니 우리 둘 다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말기로 하죠.”
“위로를 이상하게 하네.”
비드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희한한 얼굴로 바라보자 맬튼이 머리를 긁적이며 위로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변명했다. 다행히 비드는 완전히 울음을 멈추었고 분위기도 어느 정도 편해졌다. 비드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맬튼도 따라 일어나 창가에 걸터앉았다. 맬튼과 마주 보는 자리에 선 비드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직 축축한 눈이 밤중에 반짝거렸다.
“……거짓말이야. 사실.”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하는 옆얼굴이 여태까지 그가 고수해 왔던 오만하고 거만한 정석대로의 악마의 모습이 아니라, 맬튼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거짓말, 뭐가 말입니까?”
“그― 마나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너는 모르지? 그건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제어 장치야.”
“그 돌 말하는 겁니까? 당신이 나왔던…….”
“맞아. ‘흙의 눈’이라는 이름의 마나석이야. 그게 조금 특이한 거라서 말이야. 네가 아는 일반적인 마나석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를 담을 수 있거든. 그 크기면 인간이 그걸 다 채우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야. 특이하다고 하는 건 그 안에 담기는 마나의 형태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이고.”
“그렇구나. 처음 듣네요, 확실히. 그래서 당신이 그 돌에서 소환될 수 있었던 거군요.”
“소환이 아니야. 소환이 아니라―”
비드가 말을 멈추었다. 차마 못할 말을 꺼낸 것처럼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갇혀 있었던 거야. 그 안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