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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6화
1. 이른 우정인가, 얕은 동정인가(2)


죄를 고백하듯이 떳떳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붉어진 귓가는 울어 그런 것이었을까? 맬튼이 비드의 말에 반응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봉인― 같은 겁니까?”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골라 한 질문이었지만 질문을 듣자마자 비드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하지만 묻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사안이었다. 마나석에 갇히다니 그게 실질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버틀러 선생님이 그런 비인도적인 짓을 저질렀단 말이야? 사실은 이 악마를 맡아 달라는 게 아니라 봉인이 풀리지 않게 간수하라는 것이 편지의 내용이었나? 그런 줄도 모르고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러 버린 건가? 답을 낼 수 없는 의문들이 순서 없이 맬튼의 머리를 채웠다.
비드는 동공이 커진 채 혼란스러운 얼굴의 맬튼을 보며 살짝 후회했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며 살짝 늦은 한탄을 했으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비드를 인간계에 소환한 것은 ‘그’ 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뭣도 모르고 얼결에 소환에 성공한 촌뜨기 마녀였다. 이제 와서는 잘 생각나지도 않는 일이지만 그때는 한창 마법이 화려하게 꽃 피우던 시기였고, 소환 마법이 딱히 금지되어 있지도 않았다. 마계에서 악마든 마물이든 소환하는 것이 심심치 않게 유행을 했었다. 그때 쓴맛을 봤었더라면 두 번 다시 소환에 응하는 일 따위 없었을 텐데. 너무 안일했던 거다. 한참 동안이나 마계에만 있어 좀이 쑤신 것도 있었다.
첫 번째로 소환되었을 때와 같이 가벼운 기분으로 인간계에 오자마자 비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깡마른 몸과 주름진 손과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회색과 검은색이 지저분하게 섞여 있는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눈은 움푹 꺼져 있는 데다 제 빛을 잃어 탁했다. 불온한 분위기가 돌았지만 좁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 판잣집 안에서 시동된 소환이었고 겨우 나이 든 인간이 얼마나 큰 위협을 가할 수 있을 것이냐며 우습게 여겼다.
보통의 인간들이란 두려움에 떨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비드를 보고 겁을 먹었었다. 지금은 그것조차 연기가 아니었을까 의심이 가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가뜩이나 좁고 지저분한 방 안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이가 뭐라 답했던가. 필요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럼 자신을 소환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다음 질문에 단지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라 답했다.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의 나들이였는데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바로 돌아오지 않고 괜히 한 번 더 물은 것이었다. 한심한 것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말해 보라고 말이다.
선심 쓰듯 내뱉은 가벼운 발언이 꾹 눌러놨던 ‘그’의 광기를 터뜨려 버렸다는 걸 그때의 비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죽으면 장례식에 와 달라던, 어이없는 그 소원이 비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것 역시 몰랐다. 어차피 소환은 발동자가 사망하면 자동 철회되는 것이고 마른 장작 같던 ‘그’는 당장 고독사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인간들의 시간은 훌쩍 가니 그 정도야 대단치 않은 소원이었다. 힘들일 것 없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인간계에서 잠깐 유희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계약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못하니 거의 거저나 다름없을 대가를 받을 생각에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이전에 인간계에 왔을 때와는 상당히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할 일 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 않았다. 벌벌 떨면서 귀빈 모시듯, 극진한 태도로 없는 살림에 노력하던 ‘그’의 모습에 마음도 풀어졌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어느 날 답답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몸이 구속구로 묶여 있었다. 어디서 그렇게 질 좋은 물건을 구해 온 건지 먹히는 마법이 없었다.
입은 쿱쿱한 냄새가 나는 천으로 틀어 막혀 있었고 눈은 가려져 있었다. 한참을 몸부림치다가 제풀에 지쳐 늘어지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 몰랐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과 눈을 막아 뒀던 천을 풀어 주었다.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통하지도 않는 구속구에 마법을 때려 붓느라 마나를 거의 다 소진해 반항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비드에게 ‘그’가 뭐라고 했더라. 정말 죽지 않을 만큼의 마나만을 불어넣어 주는 통에 그 턱없이 모자라 더욱 간절했던, 단비와 같은 힘을 흡수하느라 정신이 팔려 잘 기억나지 않았다.
호기심은 정도를 넘어섰다. 감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가 경악할 만한 실험이 악마니까―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금방 낫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죽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마법사는 제 생명을 깎아 가면서까지도 비드를 붙잡아 두었다.
인간과는 다르게 본래 타고나는 마나가 없는 악마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닌 마나로 생명을 얻는 존재였다. 때문에 다른 이의 마나를 빼앗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인간과의 계약을 통해 마나를 공급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나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체내에 머물러 있지 않아 주기적으로 마나를 흡수하지 못하면 육체가 붕괴되고 만다. 악마라는 것은 마나 그 자체로 만들어진 생명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계약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일지라도 비드가 철저히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유 같은 건 말해 주지 않았다. 단순히 그는 세상이 필요로 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지나치게 재능 있고 열정적인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 치욕과 굴욕을 인내하면서 조금만 버티면, 그이가 죽기까지 몇 년만 버티면 되리라고 여겼다. 어쨌든 비드가 인간계에 온전히 머물기 위해서는 마나를 주기적으로 주어야 했고 이미 정해져 있는 수명은 그만큼 줄어들 테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영악하고 악독했다. 흙의 눈을 가지고 온 것이다. 흙의 눈이 내부에 담기는 마나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다고는 해도 설마 살아 있는 생명까지 담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비드는 조막만한 돌 안에 갇히고 말았다. 밖에서 하는 소리는 막에 감싸인 것처럼 아득했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육체는 사라지고 정신만이 남아 까만 물속으로, 추를 단 것처럼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돌을 쓰다듬으며 절대 보내지 않으리라,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걸던 ‘그’의 푸석한 손길만은 어쩐지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세는 것을 관뒀다. 분명 쏜살같다 느꼈던 인간계의 시간인데 그토록 더딜 수가 없었다. 그 허무의 공간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것임이 분명했다.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나마 또렷하던 정신마저 시간이 지나니 흐릿해졌다. 이대로 흙의 눈 중 하나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점점 소멸해 가던 비드는 까만 어둠을 유영하던 중 강렬한 힘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쫒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눈에 희미한 붉은 빛이 보였다. 소리 이외에 한참 만에 느끼는 다른 감각은 황홀했고 게걸스럽게 그것을 탐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몸뚱이가 돌아와 있었다. 마나가 부족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지만 드디어 계약을 완수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비드가 눈을 뜬 것은 그 지저분하고 잡동사니가 가득한 판잣집이 아니라 생판 처음 보는 숲의 한가운데였다.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노아와 오스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지. 듣기에 과히 좋은 말은 아니군.”
그의 탓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떳떳한 과거가 아니기에 비드는 말을 아꼈다. 맬튼도 그걸 느껴 자칫 배려 없는 질문이 우수수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집어 삼켰다.
“그럼 선생님이 당신을―”
“아냐! 노아가 그런 게 아니야. 날 소환했던 마법사가 그런 거야. 노아는 날 흙의 눈에서 꺼내 줬어. 그러니까, 노아가 날 양도 받았다는 거. 거짓말이야.”
훔쳐 왔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그 마지막 말은 바람 소리라고 착각하게 될 만큼 작은 소리였다. 맬튼은 짧게 쳐올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비드를 소환한 남자가 악마를 흙의 눈이라는 마나석에 가두었고 버틀러 선생님은 어떤 경위로 그 사실을 알게 돼 그 마나석을 훔쳐 왔다는 거지. 이 서재에 가득 차 있는 건 비드를 흙의 눈에서 꺼내기 위한 것이고. 하지만 비드는 내 방에서 나오기 전까지 마나석에 계속 갇혀 있었던 거 아닌가? 잠깐― 그러면 선생님이 부탁하려고 하신 게 비드를 그 마나석 안에서 구해 달라는 건가? 아닌데. 만약 선생님이 연구에 실패하셨다고 한다면 비드가 선생님을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비드는 분명 선생님을 알고 있는데 왜 거기에 갇혀 있었던 거지?’
생각할수록 의문만 늘었다. 침묵을 지키던 비드가 겨우 입을 열었는데도 해결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 들키지 않았나 보군요.”
“노아가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인 건지 나는 잘 알지 못해. 힘이 너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의로는 돌 안에서 나올 수가 없었거든.”
“그 남자는, 마법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몰라. 하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았겠지.”
“무슨 의미죠?”
“넌 정말 마법에 관심이 없군. 거짓말할 때도 느꼈지만 말이야. 모든 생명체에는 고유의 마나가 있어. 마법을 실현할 때 필수적으로 이 고유의 마나에 관여하게 되지. 마법을 반드시 회수하는 이유는 그 고유의 마나가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회수하지 않는 이상 소멸되거나 없어지지 않으니까 흩어지면 흩어질 뿐이지. 아까 낮에 네가 회수한 마나처럼 말이야. 정말 이런 이론적인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 거야?”
비드가 질린다는 얼굴을 했으나 맬튼이 꽤 진지하게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마나는 생명력 그 자체야. 너희 인간들이 고유의 마나 이상의 힘이 필요한 마법을 발동시킬 때는 다른 생명들에게서 빌려 오는 거지. 나무나, 동물이나. 그렇기 때문에 회수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너처럼 그렇게 마나를 아무 데나 흘려 놓는 건 네 숨을 버리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지만 마나가 영원한 건 아니야. 나이를 먹으면 점점 자연적으로 방출되면서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거지. 마나를 회수하지 못하는 일도 있을 거고. 발동자가 죽으면 이미 마법 실현에 소비된 마나도 같이 사라져. 사실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고 마계로 흘러들어 오는 거지만. 어쨌든 마법발동에 필요한 마나에 구멍이 나면 그 마법은 취소되는 거지. 다시 말해서 내가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최소한 죽지는 않았다는 소리야.”
불쾌한 곳을 건들고 만 건지 비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맬튼도 슬슬 졸음이 몰려왔기에 내일 마저 이야기하자며 갈무리하고 방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금방 잠들지 못했고 그나마도 심란한 마음에 밤새 악몽에 시달리느라 다음 날 일어나는 데 고생을 해야만 했다.
맬튼이 식당으로 내려온 것은 베일리의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이었다. 비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맬튼의 앞으로 가벼운 전채요리가 나오고 그는 입 안에 채소들을 밀어 넣는 데에 집중했다.
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은 베일리가 안경을 바꿔 썼다.
“제 제안은 고민해 보셨습니까?”
“제안― 아.”
비드의 등장으로 내내 잊고 있던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일단은 무작정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비드의 주장에 오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게, 직장도 그렇고 주말에 와서 짐을 정리하는 것 정도는 하겠지만 지속적인 관리를 맡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베일리 씨가 저보다는 훨씬 더 잘하실 테구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실 제 욕심이었을 뿐이죠.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답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가뜩이나 큰 저택이니 저와 사용인들만으로는 허전하거든요. 부디 부담 갖지 말고 종종 놀러와 주세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예. 그렇게 할게요.”
“그나저나 친구분이 늦으시는군요.”
베일리가 하인 하나를 불러 모셔 오라 하니 맬튼이 손을 저어 말리고 자신이 올라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문 앞에 서 그냥 열까 하다가 노크를 했다. 하지만 기다려도 들어오라는 답이 없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하얀 침대에 하얀 이불로 둘러싸인 커다란 덩어리의 끄트머리에 검은색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일어나라 흔들어도 미동이 없었다. 이불을 끌어 내리니 어미 젖 찾는 새끼 강아지처럼 눈도 뜨지 않고 빼앗긴 이불을 따라 몸을 움직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보이는 목덜미와 얼굴이 아침 해에 비추자 하얗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비드, 일어나세요. 아침을 못 먹게 됩니다.”
그 가벼운 협박에 비드가 몸을 움찔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어제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란한 마음에 늦게 잠들었던 모양이라고 맬튼은 멋대로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의 집에 와서 이렇게 늦잠을 자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간 비드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침만 먹고 얼른 돌아가야 한다 했지만 듣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깨워야겠다 싶어 이불을 확 걷어 버리고 몸을 일으키려 어깨를 잡았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 차가웠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싶어 안색을 살피려 해도 창백한 낯과 원래 하얀 낯이 구분이 안 되니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도 차갑지 않았던가?’
처음 비드가 나왔던 날을 떠올려 봤다. 확실히 사람에 비해 서늘한 온도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놀랄 정도로 차갑지는 않았다. 역시 어디가 아픈 건가 싶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귀를 가까이 대 숨소리를 들었다. 내뱉는 숨 역시 따뜻하지는 않았는데 이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뭔가가 잘못된 건지 헷갈렸다. 악마가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데려가도 되는 일인가 고민이 들기 시작할 무렵 비드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줘.”
“네? 비드, 어디가 아픈 거예요?”
잘 들리지 않아 얼굴에 귀를 바싹 대고 되묻는데 비드가 맬튼의 뒷머리를 콱 움켜잡았다.
“나 좀, 일으켜 줘.”
혼자서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겠다는 하는 목소리가 우스울 만큼 잠겨있었다. 곧이어 툭 떨어진 팔을 제 목 뒤로 둘러메고 등과 머리를 받쳐 어린애 안듯이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비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휘청거렸다.
“비드? 어디가 안 좋은 건데요?”
으레 환자에게 하듯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가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거두었다. 고개를 떨구고 숨을 색색 내쉬는 모습에 슬슬 정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 되겠네요. 다시 누워 있어요. 밑으로 내려가서―”
의사를 불러오겠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비드가 일어나는 맬튼의 옷자락을 잡아 말렸다. 왜 그러나싶어 미약한 힘이 이끄는 대로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비드가 양손으로 맬튼의 팔목을 꽉 부여잡았다. 얼마나 힘주어 잡았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맬튼의 팔도 하얗게 질려 비드의 피부와 비슷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아픈 것은 아니어서 뿌리치지는 못하고 남은 손으로 오히려 비드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 시간에 빨리 의사에게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붙잡은 손이 워낙 완강했다.
그러기를 수 분, 악마가 맬튼의 손을 놔주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주름진 옷을 손으로 폈다. 미묘하게 안색이 괜찮아진 것 같기는 했지만 역시 걱정되어 이마를 손으로 짚으려니 고개를 흔들어 피했다.
“괜찮아.”
“정말요?”
“그래. 오랜만에 나와 있으려니까 지쳐서 그래. 잠도 못 잤고.”
잠을 설쳤다는 소리가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이 내려왔을 땐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식은 음식을 다시 데워 왔지만 비드는 몇 술 뜨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 일어났을 때처럼 확연히 어디가 안 좋아 보이지도 않고 본인도 괜찮다고 하니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마차 안은 조용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른 저녁시간이 되어 있었다. 비드는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파고들었다. 하루 동안 방치된 집은 공기가 탁했다. 문을 열고 싶었지만 누워 있는 이가 신경 쓰여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하루 묵고 오는 것이었는데도 가져간 짐이 한가득이라 가방을 정리하고 나자 땀이 솟았다. 그냥 씻을까 하다가 주말마다 거르지 않았던 운동을 하지 않아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가기 전 이불을 들추니 비드는 잠들어 있었다.
30분 정도 평소보다 빠르게 뛰니 금방 지쳤다. 맬튼은 속도를 늦추고 광장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이 많으면 운동하는 데 신경이 쓰여 언제나 새벽에 나왔던 터라 늘 오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꽤 낯선 느낌이었다.
광장을 넓게 천천히 도는데 한쪽 구석에서 가판대를 놓고 꽃을 파는 상인이 있었다. 개중에 로즈마리 또한 있었다. 향이 강해 다른 꽃들의 향을 전부 가리고 있었다.
맬튼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버틀러가 로즈마리를 좋아했던가 떠올려 보았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로즈마리 차라면 몇 번 얻어먹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마저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저택에서도 로즈마리는 보이지 않았는데 비드는 왜 하필이면 로즈마리를 샀을까 궁금했다. 이게 좋다―고. 로즈마리에 자신이 모르는 마법적 효능이 있던가 생각해 봤지만 그런 건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결국 짐작할 수 있는 건 로즈마리는 선생님이 아니라 비드가 좋아하는 꽃이거나, 아니면 비드와 버틀러 사이에 어떤 추억이 있는 것이라는 결론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맬튼은 어쩐지 유쾌하지 않았다. 비록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년에 두 번 보내는 안부편지 말고는 따로 찾아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 스승이라는 사람이 악마와 이것저것 추억할 만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비드가 악마라고 해도 선생님과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은인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그게 악마라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아니면 그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선생님은 왜 비드를 구하고 다시 그 마나석 안에 집어넣었을까. 결국엔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 지금 가장 납득이 가는 가정이었다.
어쨌든 다른 일은 전부 제쳐 두고,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 어떡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비드는 당연하게 그의 집에서 지낼 마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에서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돈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신분증은 당연히 없으니 뭔가 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악마라고 밥을 안 먹는 것도 아니니 당장 한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됐다는 게 현실이었다.
비드가 딱히 너의 목숨을 가져가겠다― 하고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막무가내의 악당처럼 굴지 않는 이상 그가 악마라는 사실보다 당장 빠듯한 주머니 사정이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비드에게 ‘난 버틀러 선생님의 유언을 지킬 마음이 없으니 여기서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돈도 없고 신분도 증명이 안 되는 이를 길바닥으로 내보낼 만큼 맬튼은 성격이 냉정하지 못했다.
“로즈마리 드릴까?”
일단은 저녁으로 뭐라도 사 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상인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맬튼이 가판대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로즈마리를 노려보고 있던 탓이다. 정신을 차린 맬튼이 됐다고 손을 내저으니 상인이 실망한 낯을 했다. 민망함에 할 수 없이 로즈마리 두 줄기를 집어 포장해 달라고 했다. 갈색 종이에 대충 싸서 끈으로 묶는 것이 이전에 샀던 꽃다발과 너무 차이가 났다.
“여기 있습니다. 애인한테 선물할 건가요?”
길에서 파는 것치고는 조금 비싸다 싶은 값을 치르는 게 아까워 배가 아플 지경인데 상인은 그런 맬튼의 속도 모르고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아뇨. 그냥 향이 좋아서. 꽃말이 사랑― 뭐 그런 겁니까?”
“로즈마리는 향이 오래가거든. 그래서 나를 사랑해 줘요. 기억해 줘요. 그대와의 추억. 뭐 그래.”
“네에―”
“그리고 재밌는 꽃말이 하나 더 있는데, ‘당신의 존재가 나를 소생시킨다’라는 꽃말이 있거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건데 특별히 애인분한테 아는 척 좀 하라고 알려 주는 겁니다?”
‘당신의 존재가 나를 소생시킨다―라. 확실히 어울리기는 하는군.’
마나석에 갇혀 있던 비드를 버틀러가 도둑질까지 해서 구해 줬으니 비드에게는 그야말로 구원자나 다름이 없는 존재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애인이 장미는 안 좋아해? 오늘 아주 꽃이 크고 좋은데.”
분명 그냥 향이 좋아서 사는 거라고 대답한 것 같은데 상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말이 길어질 것 같기에 얼른 인사를 하고 맬튼은 광장을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손에 꽃을 쥐고 달리는 건 모양새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두 명분을 주문하자 가게 주인이 애인이 생겼냐며 음흉한 눈을 했다. 왜 다들 뭐만 하면 애인 타령을 하는지 급격하게 피곤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