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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7화
1. 이른 우정인가, 얕은 동정인가(2)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둑해질 때쯤 집에 도착했다. 비드는 그사이 씻었는지 젖은 머리를 한 채 반라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책을 어디서 찾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축축해진 침대 시트를 보니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비드. 씻었으면 제대로 닦고 나오세요. 몸도 안 좋으면서 감기 걸립니다. 안 닦을 거면 침대에 올라가지 말든가요.”
목적은 뒷말이었지만 어쩐지 치사해 보여 걱정하는 말을 앞에 붙였더니 비드가 그 속을 알고 복수라도 하는지 고개를 흔들어 물을 털었다.
“악마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저야 모르죠.”
“근데 어디 다녀왔어?”
“저녁이요. 아침도 잘 안 먹고 와서는 내내 잤잖아요. 조금 이르지만 밥 먹죠. 씻고 나올게요.”
먼저 먹어 버릴 것 같았는데 비드는 의외로 얌전하게 식탁 앞에 앉아서 맬튼이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반라였기에 옷장을 뒤져 옷을 주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창백한 피부인데 목 부분이 헐렁하니 보기가 민망해 맬튼으로 하여금 옷이라도 몇 벌 사 줘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했다.
맬튼도 옷을 입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비드는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역시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아무 소리 없이 먹는 데 집중했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맬튼이 휴지를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뭐가?”
“버틀러 선생님이 당신을 마계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연구를 하셨던 것 같은데 돌아가셨으니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계속 있을 생각은 아니잖아요.”
“나는…… 네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게, 여기서 당신이 지내는 것 정도는 편의를 봐줄 수 있지만 글쎄요. 당신을 마계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을 찾는 건 무리예요. 애초에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지만 노아가 널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이 저도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저는 정말 마법에 재능이 없어요. 부유마법도 제대로 못 하는데 마계의 문을 연다거나 그런 대단한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맬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맬튼도 할 수만 있다면 비드를 도와주고 싶었다. 만약 버틀러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읽을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노력은 해 봤을 것이다. 비드가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게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리 집에 악마가 살고 있으니 마계로 돌려보낼 방법을 알려 달라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을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아, 당신을 소환한 마법사 말이에요. 그 사람과 한 계약은 아직 유효한 거죠?”
“응.”
“그럼 그 계약이 완료되면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맞아.”
“그럼 그 마법사를 찾아가서 계약한 내용을 이행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계약 내용이 뭐였습니까?”
“…….”
비드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노아가 아프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그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마법사를 다시 만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자마자 그가 또다시 가두어 버릴 것만 같았다. 때문에 노아의 연구가 성공하길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비드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지 알았던 노아도 마법사를 찾아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후회하는 것이지만 차라리 그때 떠났어야 했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흙의 눈에서 얼마나 갇혀 있든 간에 인간이 죽지 않을 리 없고,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사는 악마로서는 찰나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공포는 쉽고 깊게 각인되는 것이고 빨리 낫지 않았다. 언젠가는 죽을 텐데 굳이 가서 그 광기 어린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고 했었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잠깐 신세 좀 질게. 노아의 연구를 계속할 수 없다면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남은 방법은 없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 남자, 날 소환했을 때부터 노인이었으니까 얼마 남지 않았겠지.”
지금쯤 백 살은 되지 않았을까 하고 허탈하게 웃으며 덧붙였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맬튼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칫 어영부영 이대로 탈출구도 없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간이 있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법사가 백 살쯤 됐을 거라는 비드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만큼 노인이라면 그다지 오랜 시간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2. 무모함을 위한 결심 (1)


직속 후임인 테일이 면목 없는 얼굴을 했다. 절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려 눈썹을 있는 힘껏 밑으로 내려뜨리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맬튼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테일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녀석이나 그야말로 사고뭉치였다.
작년에 입사한 후에 보안 결계에 손을 댔다가 수식부터 다시 만들게 했다. 그 이후에는 손가락 하나만 한 크기로 혼자 살기에 알맞은 아담하고 작은 집을 구입할 수 있는 값비싼 영상석을 깨트리더니 이번에는 특별 전시에 초대된 하객 리스트를 날려 먹은 것이다.
명단이야 보안 데이터가 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작성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마나를 같이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경매가 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손님들의 신원을 철저히 해야 했다. 때문에 몇 달 전부터 개인적으로 연락을 넣어 그 참석 여부를 알리는 답장에는 반드시 소량의 마나를 첨부해 달라 요청했다. 그것을 같이 날려 버렸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고의 경위를 캐묻자 쭈뼛거리며 털어놓기를, 이번에 새로 장만한 마나석을 가지고 왔는데 마나를 채우지 않은 채 리스트 주변에 두고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편지에 같이 동봉되어 있던 마나가 죄다 마나석으로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명단까지 같이 날아간 이유는 당황한 테일이 분리 마법을 시전하려다가 이미 포화 상태가 된 마나석에서 튕겨져 나가 편지에 발동되어 잉크와 종이가 분리됐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움에 말을 잃은 맬튼과 리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머지 직원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보다 당장의 명단 복원이 급해 궂은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마나석은 기술팀에 넘겨 마나 분리 작업에 들어갔지만 섞여 들어간 각각의 마나가 워낙 소량인 데다가 그 수가 많아 바로 다음 주의 전시까지 복원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전에 쳤던 사고들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감봉이나 정직 처분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무실의 분위기가 워낙 험악해 맬튼은 테일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테일은 날카로운 공기에서 빠져나오자 긴장이 풀린 건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테일이 입사한 지 6일 만에 결계를 건드려 버렸을 때 맬튼은 단지 신고식이 호되다 웃어넘겼을 뿐이고, 영상석을 깨뜨렸을 땐 대단하다 그를 놀려 먹기도 했지만, 이번엔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박물관의 위신이 달린 문제였기에 쉽게 괜찮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맬튼도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얼른 명단 작성을 도와야 하지만 우는 테일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근처에 있는 돌계단에 테일을 앉힌 맬튼이 손수건을 건넸다. 테일은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손에 꼭 쥔 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눈물만 흘렸다.
테일은 지내보면 분명 좋은 아이였지만 워낙 쳐 놓은 사고가 위대하고 그에 따른 소문이 안 좋아 이번 일을 계기로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테일의 뒤에 누가 버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에 해고가 되도 군말하지 못할 법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며칠의 근신과 감봉 수준으로 처벌이 끝나니 뒤에서 누가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은 은연중에 사실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사회 초년생인 테일이 이번에 값비싼 마나석을 구입했다는 것만 보아도 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이번에도 가벼운 처벌로 끝이 난다면 은연중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될 터였다.
“테일. 그만 진정해. 얼른 가서 도와줘야지.”
“저 어떡해요. 선배. 이제 정말 완전히 눈 밖에 나 버렸어.”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하는 소리가 영락없이 애였다.
“실수는 실수고 지금은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이러고 있으면 좋을 거 하나 없어. 자, 그만 울고. 화장실 가서 얼굴 정리하고 금방 돌아와야 해.”
눈꼬리에 여전히 눈물방울을 달고 있는 테일을 억지로 일으켜 화장실로 보내고 맬튼은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 차마 격려의 말을 하기도 민망한 분위기라 조용히 자리에 앉아 복원 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점심까지 걸러 가며 명단 복원에 힘썼지만 퇴근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글을 끼적이는 것은 워낙 성미에 맞지가 앉아 온몸이 근질거렸다. 힘껏 팔다리를 늘려 봤지만 말 못 할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는데 리가 들어왔다. 그 역시 어깨를 붕붕 돌리며 영 시원하지 않은 얼굴을 했다.
“수고하셨어요.”
“으응, 너도. 테일은 뭐 하고 있어?”
“기술팀에 가 본다고 하던데요. 가서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말이죠.”
“흐음― 뭐, 혼 좀 나야지.”
평소 같이 어린애 야단치듯 따로 불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설교를 늘어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리는 의외로 어깨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맬튼이 처음 입사했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개인 면담과 선배의 조언 시간이 이어졌던 걸 생각하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웬일이에요? 따로 안 부르고.”
“사안이 사안인지라……. 내가 굳이 아는 소리해도 뭐 소용이 있겠어? 지난번에는 운 좋게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이번에 정말 잘릴지도 모르잖아.”
“신랄한 소릴…….”
“사실이니까. 가서 얼른 쉬어. 얼굴이 까칠하네.”
“선배도요.”
내일도 수고하자며 리를 먼저 보내고 맬튼도 박물관을 나섰다. 깐깐하고 콧대 높은 기술부서 사람들한테 말로 얻어맞고 있을 귀엽기만 해서 곤란한 후배가 걱정되었지만 맬튼 역시 이번엔 감싸 줄 수가 없었다.
점심을 걸렀더니 꽤 허기가 졌다. 뭐라도 끼니를 때우고 들어갈까 싶어 상점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문을 닫은 곳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불이 켜진 곳도 정리를 하고 있었다.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급격하게 배가 고파 왔다.
평소에는 거의 오지 않는 골목까지 끈질기게 뒤지고 나서야 작고 간판이 낡은 식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가게치고는 내부 인테리어가 나쁘지 않았다. 바에 앉아 있는 혼자 온 손님과 맬튼이 앉은 자리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연인 한 쌍이 있었다.
차분한 공기와 아늑한 분위기에 휩쓸려 도수가 조금 있는 술까지 추가 주문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술과 음식이 그의 앞에 놓였다. 하루 종일 텅 비어 있었던 배를 좀 채우고 나자 집에서 혼자 있을 비드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다음 주에 있을 전시회 준비 때문에 요즘 계속 늦는 날이 많았는데 앞으로 며칠간은 완전히 한밤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신경이 쓰였다. 조금 귀찮더라도 퇴근하기 전에 연락이라도 하고 올 것을 하고 후회했다. 결국 맬튼은 주인에게 송신지를 구매해 집으로 연락을 보냈다. 연락을 받고 바로 온다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할 테고 이미 잠들어 있다면 그만이었다.
다 먹은 그릇을 보내고 술 한 잔을 더 시켜 반쯤 비웠을 때 가게의 문이 열렸다.
비드가 어쩐지 화가 난 얼굴로 맬튼이 앉아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을 빼앗았다. 살짝 멍할 정도로 취한 맬튼은 비드의 행동에 무어라 토를 달지 않았다. 반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비드가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로 술 한 잔을 추가 주문했다. 맬튼은 비드의 흉흉한 눈빛에 턱을 긁적였다.
“빨리 왔네요. 한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비드는 대답 대신 더욱 무섭게 맬튼을 노려보았다.
“틀림없이 내 침대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다구요.”
“그러려던 참이었어.”
그럼 어떻게 이렇게 금방 나왔느냐 묻자 비드는 종종 그러듯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나오던 참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달이 밝아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찾으러 갈 심산으로 외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송신지가 도착했다. 주소와 함께, 이곳에 있으니 술 한잔하고 싶으면 오라는 내용이었다.
누구는 어디서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술이나 마시느라 늦는 것이었다니, 당장 저 짧은 빨간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버리고 싶었다. 저택에서 다녀온 뒤로 계속 바빠 보여 노아의 편지를 침대 옆 선반에 올려 두고는 읽지 않는 것을 보고도 꾹 참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 한소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제가 돌아가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그랬으면서 전혀 진지하지가 않았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 친구가 아니거든.”
싫든 좋든 결국에 맬튼은 비드를 도와야 했다. 지금은 그저 거처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지만 노아가 그 이상의 것을 부탁했다면 맬튼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알기에 노아도 맬튼을 선택한 것이었다. 노아의 편지에 그저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 말고 다른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맬튼이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으니 속이 탔다.
지금 당장이야 상관없을지라도 같이 지내는 기간이 길어진다면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두 번은 사양이었다. 그때의 무력과 무능함은 상당히 아팠다. 비드는 그런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해질 마음조차 없었다.
빨간 머리 청년은 지금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술을 마시고 풀린 눈을 할 순 없었다.
“까짓 거 못 할 건 뭐예요. 내 침대도 마음대로 점령하고 있으면서.”
매정한 말에 맬튼은 몇 번이나 무시당한 불만을 또 다시 제기했다. 왜 자신의 집에서 제대로 잠도 편하게 못 자야 하느냐는 말에 비드는 무서울 정도로 뻔뻔한 얼굴을 하고 물었었다.
‘그럼 내가 바닥에서 자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충 봐도 비드는 바닥에 눕기는커녕 앉지도 않을 위인이었다. 행동하는 것이나 말투가 완벽히 윗사람이었다. 그것이 비드가 원래 속한 마계에서 그의 신분의 잔재 때문인지 아니면 악마와 인간이라는 종족의 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고상한 얼굴과 검고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방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은 차마 상상하기조차 송구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맛있었고, 빨리 취했으며, 술기운에 솟은 용기는 담대했다.
“착각은 당신이 하고 있어요. 알아요? 내가 당신을 책임질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당신을 내 집에서 지내게 해 주는 이유는 버틀러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위층에 사는 여덟 살 꼬맹이 녀석이 세상에 악마같이 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자라게 해 주고 싶은 약간의 정 때문이라구요. 그런데 비드는 나를 바닥에 재우면서 죄책감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니. 당신은 정말 악마 같아.”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데 내뱉는 말이 평소와 같지 않았다.
“직장에선 테일이 사고나 치고. 만약에 다음 주까지 마나 분리가 안 되면 경호부서 전체에 징계가 내려질 게 확실해요. 할리만 자식, 이번 일로 우리 경호팀을 얕볼 계기가 생겼으니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고 있을 겁니다.”
급기야 맬튼은 입사 동기로 들어와서 지금까지도 내내 사이가 좋지 않은 마법기술부의 동료의 험담까지 늘어놓았다. 왜 갑자기 자기 인생이 이렇게 소란스러워졌냐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투정이나 다름이 없는 소리에 비드는 문득 노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 너는 한 줌의 소금이야. 한 번 맛보면 싱거운 건 들쳐도 안 보게 된다고. 나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니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는 그렇게 말해 주곤 했었다. 그 말이 비드를 얼마나 기쁘고 안타깝게 했는지 모른다. 사실 노아는 마법사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정도를 넘어선 호기심과 집착. 지(知)를 향한 무조건적인 집념과, 그 과정이 도리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맹목이 닮아 있었다. 마법사와 노아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지 둘의 차이점은 타고난 선악의 정도뿐이었다.
‘이런 반응이 정상인 텐데.’
그런데 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사실은 흙의 눈에서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뻗댈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노아가 선택한 사람이니 헛된 기대를 하게 되는 건 별수가 없었다.
“박물관에서 무슨 일이 있어?”
드물게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는 비드의 태도에 맬튼이 고개를 슥 들었다. 비드가 말하는 걸 허락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고가 있었거든요. 저번 주부터 계속 바빴잖아요. 다음 주에 있을 전시회 준비 때문에 그런 건데 막내가 초대 명단을 다 날려 버리는 바람에 오늘 늦었어요. 아마 당분간은 바쁠 겁니다. 주말에도 나가야 하구요.”
“흐음― 그렇게 큰일이야?”
“이번에 워낙 고위층이랑 전문 딜러들이 많이 오거든요. 박물관에서 작년부터 신청자를 받아서 선별한 데다가 초대 손님 중에서는 외국 사절단도 있고. 보안을 위해서 신분 확인 절차로 마나를 받았는데 그게 마나석 안에 다 섞여 버리는 바람에…….”
다시 생각해도 앞이 갑갑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일이 터지니 정신이 없었다. 버틀러의 편지도 어서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일이 겹쳤다.
변명을 걷어 내자면 단순히 무서웠다. 비드가 사실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매우 부적절한 존재이고, 어떻게 한 건지 잘 알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비드를 불러낸 것이 엄청난 실수라면? 그 사실을 확정 받는 것이 무서웠다. 눈앞에 앉은, 불만스럽고 짜증이 난 얼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비드의 존재가 무서웠다.
“혹시 로리아나 게른이라는 화가 압니까?”
“게른?”
“이번 전시회 작가예요. 제3의 아시이스 시대에 한 획을 그은 신성파 화가인데― 이런 말해도 잘 모르겠죠?”
괜히 딴소리를 꺼냈다가 이상한 표정이 된 비드의 얼굴에 맬튼은 하하 웃으며 비드의 앞에 놓인 술잔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비드가 잽싸게 그것을 가로채 맬튼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술주정뱅이가 입술을 비죽였지만 비드는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켜고 보란 듯이 빈 잔을 맬튼의 앞에 밀어 놓았다.
“그렇게 큰일이라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어.”
“네?”
무슨 말이냐, 하는 질문에 비드는 별다른 사족을 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따라 나오자 밤이 깊어 상점가에 문 연 곳이 없고 길이 어두워 코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맬튼이 조금 성급한 걸음으로 비드의 옆으로 따라붙으려다가 술기운에 다리를 헛디뎌 휘청였다. 다행히 코를 박기 전에 비드가 팔을 뻗어 잡아 주었다. 이제 괜찮다며 민망하게 웃었지만 비드는 맬튼의 소매 자락을 살짝 잡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어린애 데리고 가는 듯해서 창피했지만 술도 마셨고 길도 어두웠으며 거리에 볼 사람도 없으니 굳이 싫다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비드가 입을 열었다.
“마나에 관한 거라면 내가 인간들보다는 훨씬 잘 아니까.”
필요하면 도와줄 수는 있다, 무심히 말했다.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맬튼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자 괜히 성질을 냈다.
집으로 돌아간 맬튼은 여전히 바닥 신세를 피하지 못했지만 대신 요즘 좀처럼 만나지 못했던 베개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낼 법도 하건만 그것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지니, 그것이 술을 마셔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악마에게 홀려 그런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 * *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네. 하지만 괜히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고. 나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보안상 문제도 있고 하니까 말이야.”
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솔직히 저도 잘 몰라서. 다만 그이가 기술팀만큼 마법에 뛰어난 건 확실해요.”
확신하는 태도에 리는 턱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전시회가 열릴 때까지 마나를 분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 돌았다. 출근길에 마주친 할리만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직원들 중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할리만도 자존심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할 뿐이지 속으로는 꽤나 애가 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고를 친 장본인은 오늘부터 정직 처분을 먹어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집에서 근신하게 되어 가뜩이나 모자란 일손이 더욱 줄어든 상황이었다. 팀 내의 막내가 저지른 사고였기 때문에 경호부서라고 해도 가만히 손 놓고 있기가 송구스러웠다.
어젯밤에는 술에 취해 잘못 들었나 했었는데 비드는 출근하기 전 맬튼에게 다시 한 번 도와줄 수 있다 언질을 놓았다. 사안이 급해 단박에 거절하지는 못하고 리에게 아는 사람이 마법에 해박해 마나 분리를 하는 데 도와줄 수 있다는데 어찌할까 상담하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