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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3화)
프롤로그(3)


달칵!
살금살금.
엘리베이터 사건으로 인해 결국은 수업에 늦고 만 제갈현은 강의실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고서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빈자리에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서는 앉았다.
“이미 중국에서 시작된 문명은 기원 후 몇백 년까지는 서양에 비해 월등히 앞서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다각적으로 비춰지고 있는 홀로그램 프로젝터의 영상 앞에서 중국 지역으로의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적으로 시행하면서 강의가 한창이었다.
달칵.
몰래 들어왔던 탓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문 쪽에 앉아 있던 제갈현은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음에 힐끗 쳐다보았다.
‘하긴……. 나만 늦은 것은 아니겠지. 내가 시간을 얼마나 끌었는데…… 쩝.’
결과적으로는 자신 때문에 늦었을 그 사람에게 미안함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동지애를 느끼면서 시선을 교수에게로 옮겼다.
“헉!”
아무래도 방금 들어온 사람 역시 앉을자리가 마땅치 않았기에, 제갈현의 옆자리로 왔지만 조용한 강의실에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제갈현이 앉아 있는 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기겁을 넘어선 경악의 표정으로 제갈현을 바라보고 있는 아까의 소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운 것인지 얼굴에는 붉은 기가 가득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으며, 머리는 단발인데도 불구하고 잔뜩 엉크러져 있었다. 챙이 큰 하얀 모자는 구겨진 채 가방에 처박혀 챙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너…… 넌!”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른 소녀가 지금이 강의 시간이란 것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뒤에 들어온 사람. 수업 시간이니 조용히 좀 하도록 하지.”
중후해 보이면서도 점잖아 보이는 교수가 소녀를 보면서 말했고, 소녀는 당황해 하면서도 다른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남아 있는 자리는 제갈현의 옆자리뿐이었다.
“흥!”
제갈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코웃음을 친 소녀는 최대한 제갈현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피식.
애 같은 소녀의 행동에 제갈현은 피식 웃어 버렸다.
소녀가 제갈현의 웃음을 보고서는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제갈현은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에…… 이름이 이지나 양인가요? 지각으로 마이너스 들어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히…… 히잉…….”
교수가 점잖게 말했고, 소녀, 아니 이지나라 불린 소녀는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히야…… 저 애가 걔야? 최연소로 우리 학교 사학과에 들어왔다고 하는?”
앞에서 속닥거리는 소리에 제갈현은 귀가 솔깃했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들어온 지가 언젠데 그러냐……. 17살이던가? 어린애가 사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모를 수도 있지, 뭐. 하아……. 난 저 나이 때 뭐했나?”
“꼴통 짓했겠지, 뭐. 큭큭큭.”
금세 잡담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꺼 버린 제갈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힐끗 이지나를 쳐다보았다.
“흥!”
제갈현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인지, 눈이 마주치자 지나는 나지막한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지만 제갈현은 개의치 않았다.
23살이었지만 휴학만 거의 3년을 한 제갈현이었다. 공부에 딱히 뜻이 없었던 탓에 대학은 명문이라 불리우는 곳에 갔으나 이제 2학년인 것이 현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옆에 있는 어린애가 조기 입학인지 뭔지는 알 필요가 그다지 없었다. 단지, 싸가지 없는 어린양을 인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만이 투철할 뿐이었다.
“그럼 여기서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수의 수업의 끝을 알리는 말과 동시에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학생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나 제갈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도통 길을 내주지 않는 지나 때문이었다.
“…….”
“…….”
제갈현이 지나를 응시하자 지나도 눈을 들어 제갈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누구도 얼굴을 돌리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대치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다른 새로운 인물의 개입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깨질 수밖에 없었다.
“갈현아!”
쾅!
사람이 거의 빠져나간 강의실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고서 뛰어들어 오는 거구의 사내의 소란스러운 등장에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제갈현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거구의 사내에게 말했다.
“내 성은 제갈이고…… 이름이 현이라고 자식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갈현은 너무나도 익숙한 듯 팔을 내밀어 미친 듯이 달려오는 거구의 사내에게 내뻗었다.
거구의 사내는 달려오던 그 힘 그대로 관성의 법칙에 의해 제갈현의 팔에 진로가 막히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전부 보고 있던 지나의 동그란 두 눈이 놀라움에 한층 더 커졌다. 하지만 그 후의 결과에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고맙다, 갈현아.”
“성이 제갈이고 이름이 현이라고!”
지나가 탄성을 내지르건 말건, 제갈현과 거구의 사내는 꽤나 친한 듯 어느새 거구의 사내가 달려오던 방향 반대쪽, 즉 강의실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앗! 이익……!”
달칵!
지나가 정신을 차리고 제갈현이 없어진 것을 눈치챘을 땐, 제갈현이 거구의 사내와 함께 강의실 문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강의실 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제갈현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

190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에, 근육으로 인해 어깨는 떡 벌어져 있었고, 구릿빛 피부 때문에 흑곰을 연상시키게 하는 사내의 얼굴은 의외로 순진해 보였다. 눈초리가 처져 있는 실눈에, 동그란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은 누가 보더라도 사내가 덩치와 달리 사납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호웅아! 대체 어딜 갈 생각인데 이래?”
제갈현은 호웅이라 불린 거구의 사내의 손에 우악스럽게 끌려 사람 많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제갈현도 180은 되는 작지 않은 키였지만, 호웅의 키와 덩치가 얼마나 큰지 뒤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어쨌건, 거구의 호웅 때문인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많은 인파 속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호웅(虎熊).
호랑이와 곰이라는 이름처럼, 얼굴만 제외하면 야수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 호웅과 제갈현이 만났던 건 제갈현이 WUK(Worldwide university of Korea)를 입학한 4년 전인 2,218년이었다.
제갈현이 휴학했던 지난 3년간, 호웅은 자원 입대하여 특전사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이번 학기에 더욱더 커진 그리고 단단해진 덩치를 뽐내며 복학한 것이었다.
“우리도 언제까지 아싸 생활을 할 수는 없지! 좀 파릇파릇한 새내기들과 어울려 보게, 친구!”
원래 같이 생활했던 동기들이 3년간의 공백 기간 동안 졸업하거나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같이 입학했던 동기들 중에는 호웅과 제갈현만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23살이나 먹고 새내기들이랑? 염치없어! 안 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그러나 단호하게 안 간다고 말한 제갈현이었지만 호웅은 씨알도 안 먹혔는지 무작정 걸어갈 뿐이었다.
힘으로는 호웅에게 당할 수가 없는 제갈현이었기에 눈에 난감하단 듯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2,222년 학번의, 갓 열아홉, 스물이나 됐을 법한 애기들을 보러 가야 한다니!
비록 학년은 1학년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4살이라는 나이 차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더 내키지 않는 제갈현이었다.
그리고 호웅을 보고 나서도 자신들과 친해지려 할지 미지수였기에 확실하지 않은 것에 시간과 힘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응?”
그렇게 호웅의 손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계속해 가고 있던 제갈현의 눈에 익숙한 영상 하나가 잡혔다. 그것을 보려고 고개를 주욱 뻗었지만 끌려가고 있는 터라 불가능했다.
분명 제갈현이 수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려 보았던 상상 속의 이미지와 굉장히 똑같았던 그 영상이었다. 제갈현은 홀린 듯이 호웅이 굳건히 붙잡고 가던 손목을 비틀어서 순식간에 빼낸 후에 코너 쪽에 설치된 스크린을 보러 뛰어갔다.
“야! 야! 갈현아!”
학교 내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인지 스크린에서는 그 흔한 소리 하나 없었다.
그저 뒤에서 부르는 호웅의 목소리와 주위의 잡음만이 제갈현의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하고서는 그 영상을 홀린 듯 쳐다보았다.
탐스러운 수염을 배까지 드리운 사내, 제갈현이 상상해 오던 관우가 그 큰 청룡언월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병사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있었다.
그 관우의 손에서 정신없이 희롱당하고 있는 병사들의 차림새가 꽤나 특이했다. 삼국시대의 중국 갑옷이 아닌 중세 시대 서양에서나 입을 법한, 촘촘히 짜여진 체인 메일에 헬름(helm)을 뒤집어쓴 그런 차림이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투구 속의 눈동자도 갈색이나 검정색이 아닌 푸른색인 것을 보니 확실히 동양인은 아니었다.
그렇게 제갈현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분명히 삼국시대, 후한 말에 색목인들과 관우가 저런 식으로 접전을 벌였다는 역사적 자료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영상은 계속해서 관우를 비추다가 허공으로 높게 줌아웃을 했다. 이내 공중에서 전체적인 전장의 상황을 비추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관우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줌인해 들어갔다.
“뭐…… 뭐지?”
그리고 바뀐 영상을 지켜보던 제갈현의 입가의 미소가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준수하게 생긴 동양인 사내 하나가 시퍼런 예기를 내뿜고 있는 창을 움켜쥔 채로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었고, 그 공격을 받아 내고 있는 사내는 놀랍게도 서양인이었다.
자유자재로 휘둘러지는 창의 궤적이나 그 오묘함, 준수한 얼굴에 허리춤에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검을 끼고 있는 것을 보니 삼국지의 조운 자룡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조운과 공세를 주고받는 저 서양인은 누구란 말인가!
제갈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영상 속의 서양인은 놀랍게도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이었다. 그로써는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인물의 얼굴이 비춰지면서 그 아래로 이름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눈부신 금발에 감정이 없는 듯한 눈, 그리고 붉으면서도 얇은 입술이 전투가 주는 희열감과 피의 향에 희미하게 비틀어져 올라가 있는 드라큘라 백작은 조운이 내지르는 창을 거대한 플랑베르주로 맞받아치며 대등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드라큘라 백작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누비고 다닌 조운의 창술을 받아 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는 역사적 사실도 없었지만, 이렇듯 버젓이 한 영상에 등장한 두 명의 인물들을 보면서 제갈현은 당황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화려한 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로브 사이로 드러난 손에 지팡이를 쥔 붉은 머리의 여자가 손을 앞으로 뻗고서는 두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는 시리도록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머리를 제외한 온몸을 빈틈없는 황금색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채, 자신의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은빛 대검을 치켜들고서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뽑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반대편에서는 온연한 동양인의 생김새를 지닌 남녀가 서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앞의 두 남녀에 비해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황금빛의 용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검은 곤룡포를 입은 사내는 대검을 치켜든 사내와는 달리 얇아 보이는 검을 늘어뜨리고서는 오만한 표정과 자세로 마법사와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붉은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하면서 곤룡포와 잘 정돈되어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내의 옆에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생긴 여자가 서 있었다. 푸른색 비단에 붉은색과 금색으로 연꽃무늬가 수놓아진 치파오 아래로 뻗은 늘씬한 다리와 숨 막힐 정도로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나 손에 들린, 체구와는 전혀 맞지 않아 보이는 거대한 도에서는 백색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로브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점점 더 빠르게 달싹임에 따라 마법사의 로브가 펄럭거렸다.
마침내 붉은 머리카락과 함께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의 몸에서 타는 듯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그것을 신호로 대치 상태가 깨졌다.
쾅! 콰과과광!
화르르륵!
팟! 팟! 팟!
분명 사운드는 없었지만, 제갈현의 귓가에서는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음향이 같이 들리고 있을 정도로 영상이 주는 화려함에 푹 빠져 있었다.
대검을 든 기사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풍압에 땅이 꺼졌고,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화룡은 허공을 누비며 불꽃을 쏘아 대고 있었다.
반대로 곤룡포를 입은 사내의 몸에서는 거대한 적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그 기운과 압력에 주위의 돌들이 부서져 나갔다.
치파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가 기사의 대검과 부딪치며 연신 폭발을 터뜨리고 있었다.
폭풍과도 같이 기사의 대검이 휘둘러진다 싶으면 치파오를 입은 여인의 도가 똑같이 거세게 부딪쳐 왔다. 곤룡포를 입은 사내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색 기운이 반월형을 그리며 허공을 뒤덮는가 싶으면, 화룡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 덩어리들이 그와 상쇄됐다.
용호상박(龍虎相搏)!
가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치열함이 넘쳐 났고, 영상의 화려함은 더해져만 갔다.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그리고 우열이 가려지려는 순간, 영상은 검은 화면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 가운데에는 번쩍이는 황금색으로 몇 개의 숫자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