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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4화)
프롤로그(4)
[2222.2.22 AM 2:22]
온통 ‘2’로만 점철되어 있었지만 연도와 날짜, 시간을 나타낸 그 숫자를 보면서 제갈현은 알 수 있었다.
뭔가의 시작을 알리는 숫자.
그리고 그 무엇은…… 바로 이 영상의 실체가 될 것이라는 것.
불끈.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탓에, 굳게 쥐어져 버린 주먹을 보면서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제갈현은 자신이 무언가에 이토록 강한 이끌림과 흥분을 느낀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고서는 이내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60대 노인이나 생각할 법한 것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자신은 이제 파릇파릇한 23살인 것이다.
제갈현은 고개를 돌려 옆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이를 쳐다보았다.
머∼엉.
제갈현을 끌고 가려고 왔던 호웅도 그 영상을 본 것인지, 처진 실눈이 크게 뜨여져 있었고 입은 헤 벌어져 있는 것이, 그 또한 영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그만큼 자신이 영웅이 되는, 역사서에나 나올 법한 영웅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본 사람이라면 저절로 패기와 투지, 열정이 끓어오를 법한 내용의 영상이었던 것이다.
난세.
본디 난세란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는 거대한 무대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비록 가상현실일지라도.
제갈현 스스로가 그 무대에 등장하는 영웅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저…… 저게 뭐지, 갈현아?”
드디어 영상이 주는 충격의 여운에서 헤어나온 것인지, 호웅이 말을 더듬으며 제갈현을 쳐다보았다.
제갈현은 여전히 빙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나도 처음 보는 건데.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평소에 내가 게임 안 하는 건 너도 잘 알잖아.”
“하긴…….”
제갈현의 말에 호웅이 고개를 끄덕였고, 말마따나 제갈현이 저런 영상에나 게임,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이번만큼은 꼭 찾아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제갈현이었다.
2월 12일.
영상에 표기된 2월 22일까지 열흘이 남았지만,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더욱더 자세하게, 일반인들은 확인하지 못할 정보까지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호웅아, 새내기고 뭐고 저게 뭔지부터 알아보자.”
“그치?”
제갈현이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호웅을 보면서 말하자 호웅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월 17일까지…… 모든 정보를 찾아와서 만나는 거다.”
“콜! 이 호웅 님이 이런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피가 끓어서 말이야. 우하하핫!”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나 중얼거릴 법한 대사를 내뱉는 호웅을 가볍게 무시한 제갈현은 그 즉시 몸을 돌려 인파 속을 헤집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쩝, 시작됐군. 저 녀석이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조금 골치 아픈데…….”
긁적긁적.
작별의 인사도 없이 휑하니 떠나 버린 제갈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호웅이 큰일 났다는 눈빛으로 턱을 긁적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제갈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은 호웅뿐만이 아니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꿰뚫을 수만 있다면 골백 번은 더 꿰뚫었을 법한, 지나의 표독스러운 눈빛도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도 저 영상을 봤다는 것도.
1. 게임의 시작(1)
본격적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상용화된 것은 불과 20년 전으로, 그 시대 선이 학자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대부분의 과학 기기가 그러하듯 군용 시뮬레이션 및 인도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실험 등을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 V.R이었다.
인간이라면 모두 꿈꿔 봤을 법한 것―조물주가 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과학자와 프로그래머 들의 상용화 노력으로 오토바이 헬멧과 비슷한 형태의 모양으로 첫 출시되었던 것이 바로 첫 V.R의 대중화의 시작이었다.
뇌세포의 노화도와 시간 지각 능력, 가상과 현실 간의 괴리감 등의 문제점이 없는 최적의 시간 비율이 5:1이란 것을 다년간의 실험으로 알아낸 과학자와 프로그래머 들은 이것을 적용시켰고, 그 결과 하루 24시간이 최대 120시간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개발 초기나 상용화의 첫 단계에서는 뇌와 기기의 주파수 조절, 맷타이머 신드롬(Mattimer Syndrome:23세기의 정신과 의사가 발견한 현실회피성 증후군), 싱크로율 등의 문제점 등이 발생하였으나 가상현실이 주는 장점들은 단점들을 커버하기에 충분했다.
V.R의 개발국인 UC(United Corea:통일 대한민국), EU(Europe Union), SU(Soviet Union:소련 연방), 미국은 이 신기술의 개발로 인해 V.R 과학력의 선두 주자로 나섰으며, 그중에서도 뇌 주파수 조절, 시간 조절 등의 가장 민감하면서도 뛰어난 과학력을 요구하는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것이 UC 과학자란 것이 알려지면서, 개발국 중에서도 손꼽히는 과학력을 가진 것이 UC라는 것이 암암리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체로 불과 20년 만에 자리 잡은 것이 V.R이니만큼, 이전 20세기와 21세기를 주름잡았던 인터넷(Worldwide Web)이 낳았던 문제점들을 똑같이 겪지 않기 위해서는 V.R에서의 법규 제정이 시급히 필요해졌으며,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V.R 경쟁―과거 우주 경쟁처럼―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략)……
― 빌 게이츠의 후예인 클라우드 게이츠(Cloud Gates)의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광범위한 가상현실의 고찰』 중 일부 발췌―
“설검 님. 설검 님께서 이번에 부탁한 자료들은 여기 있습니다만…… 혹시 이걸 하실 생각이십니까?”
“……게임이 역시 맞는 겁니까?”
“역시가 아니라 ‘예정된’ 겁니다. 일반인들한테는 아니지만 여기 판데모니움(Pandemonium)에도 여러 번 올라왔던 주제인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유 기자님.”
고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다던 아고라의 광장 같은 엔틱(Antic)한 분위기가 일품인 곳에서, 뿔테 안경을 쓰고 입가에 미소를 띤 제갈현과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슈트를 차려입은 사내가 대리석으로 만든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신 다음에는 제가 부탁드린 거, 잘 좀 부탁드립니다, 설검 님.”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듯, 제갈현을 설검이라 지칭한 슈트 차림의 사내가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선 뒤 헤퍼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제갈현과 악수를 나눴다.
파앗!
그리고 난 다음, 놀랍게도 사내의 몸이 환한 빛무리와 함께 작게 나뉜 입자화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이 기현상에 대해 제갈현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일체의 관심이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상상하는 것이 현실이 되는 세계, V.R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PC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V.R이었기에 지금 제갈현은 과거의 인터넷의 웹같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A.D(Another Dimentions:다른 차원)에 접속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설검(舌劍)이라는 이름.
과거 21세기 초반 엄청난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된 인터넷이란 매체에서 개개인을 지칭하는 I.D 개념처럼 단순히 글자 몇 개로 개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닉네임과 더불어 자신의 겉모습도 원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게 된 아바타가 바로 V.R이자 A.D에서의 개인이었다.
개인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규정에만 맞는다면 마음껏 꾸밀 수 있는 것이니만큼, 판데모니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개성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현실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
그런 것처럼, 설검이란 것도 제갈현의 판데모니움에서의 닉네임이자 일종의 I.D였고, 이곳 판데모니움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상 다른 이들과 토론을 벌이고, 비평을 할 때면 사신이나 입을 법한 검은 로브(Robe)를 뒤집어쓰고서는 날카로우면서도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화려한 언변과 말발, 그리고 논리로 무장한 제갈현, 아니 설검은 수많은 논객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언변 아래 무참히 짓밟혀져 나간 사회 이슈가 수십 개였으며 회사, 정부 단체들도 가뿐히 수십 개는 넘어갔다.
추적도 불가능한 것이 V.R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단체들이나 기자들로부터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잘 봐 달라는 뇌물이나 신문 등의 비평 코너를 맡아 수입까지 얻게 된 제갈현이었다.
때문에 제갈현이 집에서 독립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제갈현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학교에서 보았던 그 영상의 정보를 수집했고, 그 결과 꽤 자세한 정보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방금 유 기자라 불린 사내가 건네준 서류를 주욱 훑어본 제갈현은 아랫입술을 혀로 살짝 핥은 뒤 서류를 품에 넣었다.
이미 그가 모아 온 정보들 중에서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들과 허위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여러 정보통을 통해 비교, 대조해 보면서 확인했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하는 것이었다.
가상현실 게임.
V.R 개발 후 우후죽순으로 나왔던 허접스런 가상현실 게임들과는 달리, 이번 것은 진국이라는 것이 모든 정보통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V.R의 개발국이었던 UC와 EU, SU(Soviet Union)와 미국의 과학자들이 V.R의 대중화를 강력히 주장하고, 상용화된 V.R을 이용, 지난 10여 년에 걸쳐 다방면의 전문가들과 힘을 규합하여 만들어진 기술의 정수가 바로 그 영상에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V.R의 방대한 세계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잘 아는 과학자들이, 이번엔 새로운 조물주가 되어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해 낸 것이니, 그 완성도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란 것이, 제갈현이 여기저기서 모은 정보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H.I.D ― 영웅은 죽었다.
제목에 쓰여진 서류를 보던 제갈현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쓱 훑어보고서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휘이이익!
허공이 와이퍼에 닦이며 그 뒤에 있던 다른 것들이 보이는 것처럼, 푸른 창이 생겨났고 제갈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로그아웃.”
파아앗!
이번엔 제갈현의 몸이 환한 빛무리에 휘감기면서 입자화됐다.
잠시 후,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클로즈 베타에 당첨되셨습니다.]
“됐다! 후우……. 힘들었어.”
전 세계에 걸쳐서 단 5만 명만 뽑는다는 클로즈 베타에 뽑히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제갈현은 지난 열흘간의 노력을 보상해 주는 듯한 짤막한 미성에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정확히 열흘 전, 제갈현이 영상을 보던 그날에 전 세계적으로 홍보가 시작된 H.I.D는 불과 하루 만에 영상의 조회수가 1억을 넘어섰고, 그 결과 전 세계의 관심이 이 게임 하나에 쏠리게 되었다.
이 게임의 개발 가치만 해도 추정 7,500억 달러, 한화로는 750조원이었다.
V.R에 관한 모든 과학력과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의 지식, 그리고 과거의 동양과 서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역사적 고증 자료들이 모여 만든 가상현실이기에 그 가치는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1,000,000:1
경이적인 숫자의 경쟁률 속에서 당당히 당첨된 제갈현은 옆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호웅의 홀로그램을 보면서 말했다.
“브라보! 됐다!”
[콜! 나도 됐다. 푸하하하.]
“이거…… 운이라고 하기엔 너무 의도된 결과인데?”
[너도 그렇잖아?]
이죽대는 제갈현의 말투에 호웅 또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제갈현은 어깨를 한번 들썩여 보인 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디서 시작할 거냐. 아시아? 유럽?”
[유럽.]
“엥? 난 아시아인데?”
단호하게 말하는 호웅을 보면서 제갈현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럽으로 바꾸기는 싫었다.
[나중에 만날 수밖에…… 나보다 약하면 재미없을걸?]
피식.
능청스럽게 말하는 호웅을 보면서 제갈현은 피식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유럽 대륙에서 날 보고서는 놀라지나 마라.”
[헹! 어련하시겠어! 난 빨리 해 보러 가야겠다. 두근거려서 주체할 수가 없어. 푸하하하!]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호웅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홀로그램과 함께 사라졌다.
제갈현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침대에 누워서는 머리맡에서 V.R 기기를 꺼내 들고서는 머리에 썼다.
“나도…… 두근거려서 참을 수가 없네. 후훗.”
화아아악!
제갈현의 시야가 칠흑 같은 암흑으로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