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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5화)
1. 게임의 시작(2)


“콰오오오!”
화르르륵!
푸화아아악!
펑! 펑!
“큭!”
암흑이 천천히 걷혀 간다고 제갈현이 느꼈을 때, 그와 동시에 제갈현의 귓가에 엄청난 무언가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그 굉음에 제갈현은 짤막한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단 한 번 눈을 깜박였을 뿐인데, 제갈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크롸라락!”
그것은 제갈현으로부터 불과 20미터 떨어져 있었다.
족히 100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몸집을 지닌 붉은색의 드래곤이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고서는 박쥐 날개를 거대화 시켜 놓은 듯한 날개를 펄럭이면서 위압감 넘치는 포효를 내뱉고 있었다.
파충류의 눈과 흡사한 눈은 모든 것을 아래로 깔보는 듯 오만했으며, 한 번의 일갈에 대지가 찌르르 울리면서 대지의 모든 생물체들이 공포와 경외감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바탕 성질을 부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방금 전만 해도 초목의 푸르름과 생생함을 내뿜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숲 한 귀퉁이는 형편없이 파헤쳐진 채 화마가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초목들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희한한 광경에 제갈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붉은색의 드래곤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모습에 그곳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진정…….”
그리고 그 하늘 너머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위용 있게 등장한 생명체를 본 제갈현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며 잔경련을 일으켰다.
곧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탄식과도 같은 말이 제갈현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쿠오오오!”
푸른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비늘과 몰려든 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똬리를 틀고 있는 몸체,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강렬한 눈가와 고풍스럽게 휘날리고 있는 수염, 그리고 영롱한 빛을 내뿜는 그 존재의 앞발에 굳건히 쥐어져 있는 여의주까지.
용(龍).
동양의 전설적이면서 신화적인 신수(神獸)가 까마득히 높은 허공에서 거대한 몸체를 드러낸 것이다.
두 개의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신수를 보면서, 제갈현은 자신도 모르게 느껴져 오는 위압감과 압력에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뭔가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이 가슴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고 싶다! 마음껏, 내 마음속의 웅지를 펼쳐 보고 싶다!
드래곤.
용.
신화 속의 영수.
상상 속의 존재들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말 그대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전설이 자신의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선조이자 우상, 그리고 뛰어넘어야 할 라이벌인 제갈공명이 영웅이자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것처럼, 이런 세상이라면 제갈현 자신이라고 못 할 것은 없는 것이다!
“크라라락!”
“크오오오!”
꽈르릉― 꽈릉!
흐으으읍! 푸화아아악!
두 존재가 내뿜는 거대한 포효에, 제갈현은 상념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이 숨을 들이마시자 거대하면서 가공할 만한 열기의 화구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용이 웅혼한 포효를 터뜨리자 허공에서 푸르도록 시린 번개들이 맺혀 그대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아!
두 개의 거대한 힘이 격돌하는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빛무리가 제갈현의 몸을 휘감아 왔다.
제갈현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
“쳐라!”
“물러서지 마라!”
챙! 챙! 카각!
“크악!”
“크아아악!”
제갈현이 눈을 가리고 있을 때, 빛이 사라지고 화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느새 제갈현의 몸은 격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옮겨져 있었다.
족히 수천수만은 되어 보이는 양편의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쥐고 달려들었고, 이내 거대한 평원에는 혈향이 짙게 퍼져 나가며 전쟁의 광기와 죽음의 공포가 자욱이 그 세를 넓혀 갔다.
빛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두터운 마갑을 착용한 일단의 기사단과, 말 두세 마리를 끌고 다니는, 그래서 병력이 두세 배는 많아 보이는 기병단이 어우러졌다.
한쪽에서는 넓게 퍼져 포위하려는 상대의 병사들에 대항해 일련의 부대가 뾰족한 송곳 모양으로 맞서고 있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진다 싶으면 방패 부대가 나와 완벽하게 화살들을 막아 내었고, 장창병이 창을 내지른다 싶으면 같은 파이크 병들이 튀어나와 사정없이 파이크와 장창 들이 어우러졌다.
그리고 격전의 중앙에서는 거대한 원이 만들어지더니 각각의 진영에서 5명씩 기세 좋게 나오더니 각자의 무기들을 들고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일기토(一騎討).
거대한 언월도가 허공을 누비고, 상대의 머리를 쪼개 놓을 것처럼 기세 좋게 휘둘러진다 싶으면 대검이 훌륭하게 그 공격을 받아 냈다. 재빠른 레이피어가 폭사된다 싶으면 날카로운 창날이 가볍게 걷어 냈다.
사람 머리만 한 날을 가진 핼버드가 허공을 찢어발기면서 날카롭게 떨어진다 싶으면 역시나 사람 머리를 두 개는 합쳐 놓은 것 같은 거대한 대부(大斧)가 대지를 가를 기세로 맞부딪쳤고, 장검과 롱 소드의 검날이 어우러지면서 시끄러운 전쟁터 사이로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을 울려 댔다.
꽈르릉― 꽈릉!
쿠아아아아!
제갈현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정확히는 화면이 크게 줌아웃된 것이었지만―허공으로 치솟아 오름에 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댔다. 하나 어지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양 진영의 주술사와 마법사가 부리는 현묘한 기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주술사가 부적을 띄우고 뭐라 중얼거리자 먹구름이 모여들어 번개 덩어리와 우박을 토해 냈고, 마법사의 몸에서 치솟은 한 줄기 화염이 대기를 가르며 거대한 운석을 불러들였다.
푸화아아악!
치이이익―.
화염과 대기 가득한 수분이 서로 맞닿으면서 자욱한 수증기를 뿜어냈고, 이내 순식간에 제갈현의 몸 주위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희뿌연 수증기로 가득 찼다.
“대…… 대단해! 하하하! 이 정도는…… 그래야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제갈현이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살짝 핥은 다음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역사가 만들어 낸 곳에 서 있는 자. 그러나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환상과도 같이 제갈현의 몸을 감싼 안개 저 너머에서 여성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제갈현은 또 어떠한 것이 나올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머엉…….
안개 저 너머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한 제갈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자신하던 이성의 제어도 놓쳐 버리고서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형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상, 극상의 미를 가져다 놓은 것일까.
미의 여신이 강림이라도 한 양, 제갈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과학 기술로 인해 도처에 아름답고 예쁜 사람들이 널린 이 세상에서도 단연 돋보일 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보였던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피부는 백옥같이 매끄럽고 투명하며 하얗고, 누군가가 조각해 놓은 듯한 가지런하면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목구비. 눈은 선해 보이면서도 큰 반달을 옮겨 놓은 것마냥 눈초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기품 있으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매끄럽고 완벽한 높이로 솟아오른 코에, 오밀조밀하면서도 붉고 탐스러워 보이는 입술.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와 그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턱 선과 완벽한 곡선의 목선까지.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제갈현을 향해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여 기품 있게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영웅지로(英雄之路)의 길을 걷게 되실 분들을 영접하러 나온 천신계의 대선녀, 미선(美仙)이 인사 드립니다.”
화들짝
“제갈현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성에 정신을 차린 제갈현은 한낱 미색에 자신이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 창피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이름을 밝혔다.
이것이 게임에서 사용하게 될 아이디를 만드는 절차란 것을 알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설마하니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모를 극한의 미를 가진 영접자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꽤나 놀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회사로군.’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제갈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서는 미선이란 이름을 가진 영접자를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게임에 들어가겠습니다. 강한 빛이 쏟아져 나오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화아악!
“큭!”
환한 빛무리가 미선의 말과 동시에 뿜어져 나왔고, 어디론가로 몸이 빨려 드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느껴지던 환한 빛무리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을 가득 물들이던 환한 빛무리에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가린 제갈현이었다.
하지만 미선은 그런 제갈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분히 설명했다.
“H.I.D는 크게 총 세 개의 지역으로 나뉩니다. 서쪽이 유럽 지역, 동쪽이 아시아 지역이며, 중앙은 중립 지역인 아메리카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이미 숙지해 놓고 있던 사항이기에 제갈현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며 알아 들었음을 보이고는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아시아 지역의 총 면적은 실제 아시아 면적의 4배 크기이며,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 지역이란 현실의 몽고부터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크기입니다.”
“아시아 지역으로 하죠.”
“유럽은…… 예?”
“이미 숙지해 둔 상태입니다. 아시아 지역으로 하죠.”
빙긋
“알겠습니다. 그럼…….”
딱!
사아악!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미선이 허공에 손을 한 번 튕기자 거대한 전신 거울이 제갈현 앞에 생성되었다.
“설정되어 있는 아시아 지역의 관습상,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이념하에 남녀 구분하지 않고 긴 머리를 가지고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으윽!
뭔가 대단히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미선의 섬섬옥수가 제갈현의 머리께를 쓰다듬어 내렸다.
기겁한 제갈현이 어깨를 움츠렸지만 어느새 그의 볼을 간질이는 풍성한 흑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호홋. 너무 쑥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짧았던 머리는 어느새 어깨를 넘을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고, 윤기가 자르르한 흑발이 제갈현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찰랑거렸다.
‘호오…… 괜찮은데?’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던 제갈현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제갈현의 귀에 미선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바꿀 수 없으나, 키는 최고 5㎝ 내외, 체중은 최고 10㎏ 내외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바꾸시겠어요?”
이어진 미선의 설명에 제갈현은 고개를 내저었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긴 흑발이 찰랑거렸다.
“그럼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는 장소는 랜덤이며 영웅지로에 걸맞는 영웅이 되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럼…….”
미선이 고개를 꾸벅 숙임과 동시에, 환한 빛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갈현은 두근거림과 설레임을 동시에 가진 채 검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툭, 툭.
시야가 검게 물드는 것을 느낀 제갈현은 이내 자신의 몸을 툭툭 건드리는 무언가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꿈틀.
화들짝.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제갈현은 옆에서 무언가가 화들짝 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내 시야가 뿌옇게 밝아 오는 것을 느끼면서 시력을 다시 되찾기 위해 눈을 잔뜩 찡그렸다.
“여…… 여기는? 응?”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음을 느낀 제갈현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소녀를 발견하고서는 흠칫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한 15세는 되었을까.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을 가진 소녀는 하얀 피부에 동그란 눈망울, 앵두 같은 입술, 머리카락을 귀엽게 양 갈래로 땋아 늘어뜨려 꽤나 귀여워 보였다.
“오빠는…… 누구세요?”
피부로 느껴지는 모든 것, 후각과 시각으로 모두 느껴지는 이것들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던 제갈현은 소녀의 낭랑한 미성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NPC로구나.’
제갈현은 소녀가 NPC란 것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유저에게는 유저만의 표식이 있어서 얼굴을 가리는 아이템으로 가리지 않는 이상, 이름이 보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앞에 있는 소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제갈현은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NPC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가상현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곳에서 저 소녀의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순간 갈등할 수밖에 없는 제갈현이었다.
만약 이곳의 모든 것이 현실처럼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굳이 자신이 이방인처럼 굴어서 소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어 보였다.
빙긋.
제갈현은 현실에서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를 빙긋 지어 보이고서는 부드럽게 앞의 소녀에게 말했다.
“기억이…… 안 나요. 하나도. 여기가 어디죠?”
울창한 산속에서, 귀여운 소녀와 흑발의 사내가 묘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