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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6화)
1. 게임의 시작(3)
“일단 이 옷을 입으세요. 여기 밤은 꽤 추워서 든든하게 입지 않으면 감기 걸려요.”
“고마워요 소저.”
“아잇, 소저란 말은…….”
제갈현의 부드러운 어조에 소녀는 부끄러운 듯 온몸을 배배 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제갈현의 용모는 15세 소녀의 방심을 흔들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부드럽기 그지없어 보이는 외모를 그나마 중화시켜 주던 뿔테 안경은 사라져 있었고,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와 약간 처져 있어 순해 보이는 눈매, 그리고 날카로워 보이는 턱 선, 아슬아슬하게 눈가를 가릴랑 말랑 찰랑거리는 흑발까지.
더군다나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것 하며, 기품 있어 보이는 행동까지 보여 주고 있었으니, 소녀가 쑥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추계용 흑색 도포를 습득하셨습니다.]
소녀의 안내를 받아 산중에 자리한 외딴 움막에 도착한 제갈현은 소녀의 친절에 옷까지 얻을 수 있었다.
사냥꾼의 집인 듯 손질되어 널려 있는 동물 가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도끼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하나 전체적으로는 아늑한 집이었다.
처음에 입고 있던 갈색 천 옷에 검은색 도포를 겹쳐 입은 제갈현은 허리춤의 띠를 질끈 동여매어 몸에 착 달라붙게 했다. 그리고는 식탁으로 보이는 나무 테이블 옆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흐음…… 어쩌면 운이 좋은 건가? 잘못했으면 산에서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소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적 없는 숲 속에서 맹수에게 당했거나 동사 내지는 아사할 확률이 높았을 터였다.
‘이제 시작인데…… 정말 게임이 맞기나 한 건가? 너무 현실적인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만 같잖아?’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그러면서도 매끄러운 나무의 감촉을 음미하면서 제갈현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일단 이걸로 요기나 하세요. 아버지가 오시면 제대로 된 음식을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아버지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죠?”
소쿠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담아 온 소녀가 제갈현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소녀의 활달함이 싫지 않은 제갈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소녀의 말에 이따끔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제 이름은 화옥이라고 해요. 오빠 이름은 뭐예요?”
한창 재잘대던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제갈현의 이름도 물어 왔다.
제갈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화옥에게 말했다.
“제갈현이에요.”
“그럼 현 오빠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마음대로 하세요, 화옥 소저.”
“아잇, 소저란 말은…….”
화옥이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지만 그리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그럼 쉬세요. 나중에 아버지 오시면 부를 테니…….”
옥수수를 다 먹은 화옥은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려는 것인지, 처음 보는 제갈현임에도 불구하고 턱 집을 맡겨 놓고는 휑하니 나가 버렸다.
“흐음……. 이제 하나씩 점검해 볼까?”
화옥이 나간 것을 확인한 제갈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하나씩 시스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현실 같다지만 게임은 게임. 어느 정도의 시스템이나 인터페이스는 존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상태창.”
팟!
제갈현이 중얼거리자 제갈현의 시야에, 정확히는 허공에 입체식의 숫자가 깜빡이면서 순식간에 생겨났다.
제갈현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름:제갈현
레 벨:1 ―아시아― 계 급:?
칭 호:무(부가 효과 없음)
직 업:무 소 속:무
H.P :100 M.P :100
근 력:9 민 첩:8
체 력:10 지 능:12
손 재 주:0 동체시력:0
인 내 심:0 맷 집:0
잔여 상태치:0
“흠……. 간단명료한데?”
그다지 복잡해 보이지 않는 숫자와 글자들의 나열을 보면서 제갈현은 중얼거렸고, 생각보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수치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근력, 민첩, 체력, 지능.
게임에서의 일반적인 수치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이래 뵈도 해당 당사자의 신체적 능력을 뇌파 등을 통해 수치화시키는 첨단화를 달리는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일반인의 수치가 6에서 7이라고 매뉴얼에 나와 있었으니,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나은 상태’를 가졌다고 표시되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현이었다.
손재주나 맷집 같은 수치는 뇌파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0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웬만한 것들은 현실만큼이나 반영될 터였다.
“아이템 정보, 추계용 흑색 도포.”
상태창을 닫은 제갈현은 화옥이 준 흑색 도포를 손으로 가리키고서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고, 그의 눈앞에 낡은 책자 비슷한 것이 펼쳐졌다.
아이템(Item)
추계용 흑색 도포
종 류:의류
방 어 력:1
부가효과:추위에 노출 시 ‘동상’ 걸릴 확률 5% 감소.
―멋들어져 보이는 도포다. 하지만 실용성은 그다지…….
투덜거리는 듯한 아이템 설명을 읽은 제갈현은 개발자의 머리를 까 보고 싶다는 충동을 불현듯 느끼고서는 손을 공중에 휘저어 책자를 없앴다.
집안 여기저기를 뒤적이고 돌아다니기를 십 분이나 했을까. 애초에 그다지 큰 집이 아니었기에 대충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제갈현은 나무 탁자에 앉으려다가 탁자 다리 밑에 균형을 맞춘다고 깔아 놓은 투박한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집안에…… 종이라…….”
종이의 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런 시대에서는 종이란 물건 자체가 보통 귀찮은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값비쌌다. 이런 외진 산간에 있는 집에, 값비싼 종이가, 그것도 탁자의 균형을 맞추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책자?”
허리를 숙여 탁자를 들고서는 조심스레 그 종이를 꺼냈다. 대단히 얇게 만들어진 책자였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듯 색이 바랠 대로 바래 있었으며 탁자 다리 자국이 깊고도 선명하게 나 있었다.
“……번천도?”
앞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뒤의 글자는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게 쓰여져 있어 나지막하게 그것을 따라 읽었다.
띠링∼
[‘한자’를 독해, 해독하셨습니다. 지능 스텟이 20 오릅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미성에, 잠시 놀란 토끼 눈을 했지만, 이내 득의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한자를 읽는다는 건, 사학을 전공한 그에 있어서는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었다. 현대에 와서는 관련 학자를 제외하고서는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게임 세계인 이곳에서는 귀족이 아닌 이상,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촤라락―
책장을 넘겨본 제갈현은 이내 질린 표정으로 책자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그림 들, 그리고 인체의 모습을 그려 놓은 인체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여덟 개의 한자뿐이었다.
사일비정(斜日非停) ― 지는 해는 멈추지 아니한다.
홍천막운(紅天膜雲) ― 붉은 하늘은 구름도 가린다.
그리고 뒤에 무언가가 더 있었던 듯했으나, 거칠게 뜯겨진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누가 강제로 뜯어 버린 것 같았다.
“석문, 기해, 거궐, 중정, 옥당, 명문, 장강……? 무슨 소리인 거지?”
인체도에 그려진 어지러운 선 위에 적혀진 글자들을 나지막하게 따라 읽는 제갈현의 눈동자에 의혹이 물들었으나 이내 투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그리고 해독하지 못할 ‘책’은 없다!
그런 자부심이 강한 까닭일까, 제갈현은 전력으로 그 얇디얇은 책자의 내용에 침잠하기 시작했다.
벌컥!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낡은 나무 문이 벌컥 열리면서 화옥과 함께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머리를 숙여 집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황건적 놈들! 도통 장사가 되질 않잖아! 어떻게 잡은 녀석들인데!”
사냥을 해서 그 사냥물을 내다 파는 것이 생계 수단인 사내였다. 기껏 잡은 수확물들이 안 팔려 투덜거리던 사내는 자신의 집인 양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열심히 얇은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제갈현을 발견했다.
“저 사람이냐? 네가 데려왔다는 사람이?”
“네, 아빠. 기억이 없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혹시라도 부친이 제갈현을 쫓아내기라도 할까 싶어 화옥은 사내를 안심시키려 말을 했다.
사내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제갈현을 바라보더니 이내 옆으로 다가갔다.
“후우…….”
그리고 때마침 제갈현이 알았다는 듯이, 아니면 무언가를 발견해 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나지막하게 뱉어 냈다.
사내는 다가가려다 흠칫 놀라서는 그 자리에서 제갈현을 쳐다보았다.
띠링∼!
그 순간, 사내와 화옥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는 기계음과 함께 미성이 제갈현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책을 완독하셨습니다. 지능 스텟이 10 오릅니다.]
[책의 제목을 유추해 내실 수 있습니다.]
“무공서……인 건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시간을 내리 독파한 제갈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앞의 글자가 지워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무슨’ 번천도 라는 이름의 무공인 듯했고, 사일비정과 홍천막운이라는 두 가지 초식밖에 적혀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모로 굉장히 유용한 책이었다. 인체도에 그려져 있는 것은 사람의 혈도를 나타낸 것 같았다. 초식을 시전하는 방법이 그려져 있는 그림과 석문으로 시작해 장강으로 끝나는 긴 문장은 잘 살펴보니 ‘심법’이라 적혀져 있는 란에 적혀져 있는 것이었다.
“무공이라…….”
뜻하지 않게 무공서를, 몇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공서를 공짜로 손에 넣게 된 제갈현은 아랫입술을 붉은 혀로 살짝 핥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무림이란 곳이 있는 아시아 대륙.
하지만 제갈현이 바란 것은 자신의 가진 바 능력과 지식을 이용해서 군에 임관하고, 자신의 조상인 제갈공명을 비롯해 당대의 영웅들과 경쟁해 이름을 떨치는 것이었다.
관과 무림이 상호불가침이란 것은 이미 시작하기 전에 했던 조사로 알기에, 공짜로 들어온 무공서를 쥐고서도 제갈현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름부터 완성하고 보자. 사일비정…… 홍천막운…….”
뭔가의 ‘이름’은 대부분 그 세부 항목들의 특성을 통틀어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세부 항목이라고 해 봐야 이 경우에는 두 개의 초식밖에 없었지만, 제갈현은 다시 머리를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스텟이 올랐는데, 이것을 완성해서 또 다른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지는 해…… 붉은 하늘…… 해…… 하늘…… 막지 못한다…….”
조용히 되뇌이던 제갈현은 의외로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답에, 머릿속에 분명하게 떠오르는 하나의 영상에 의심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하게 생각해 보려 해도, 나오는 답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석양?”
띠링∼!
설마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린 제갈현의 독백을 A.I는 놓치지 않았던 것인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제갈현이 든 책자에서 반짝 빛이 솟아올랐다.
[미완성 무공서 ‘노을번천도[夕陽繁天刀]’를 습득하셨습니다. 전 스텟이 1씩 상승합니다.]
스텟이 1씩 오르고, 지워졌던 책자의 글자가 뚜렷히 한자로 ‘석양번천도’, 읽는 것은 노을번천도라 불리우는 책자로 탈바꿈하자 제갈현은 성취감과 동시에 기쁨을 느꼈다.
“이봐!”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제갈현은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예?”
“집주인이 들어왔는데 누가 앉아 있어서 말이야.”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집주인이자 화옥이 말한 그 ‘아버지’임을 알아챈 제갈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집주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제갈현이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내가 무지한 사냥꾼이라 예의 따위는 모르니 이해하도록 해라. 그나저나 이왕에 온 거, 푹 쉬다 가도록.”
일어서서 보니, 사냥꾼치고는 정갈하면서도 형형한 눈빛 하며, 우레가 울리는 듯한 목소리, 그리고 온몸으로 패기와 당당함, 강인함을 내뿜었다. 키는 족히 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였고, 고루고루 발달된 근육은 결코 사냥만 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 요즘 황건적 때문에 통 팔리질 않으니…… 미치겠구먼.”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투덜거린 사내는 어깨를 주무르더니 아직도 서 있는 제갈현을 일견하고서는 퉁명스레 말했다.
“뭐하나? 서 있지 말고 앉아. 옥아! 이제 추워지니깐 어서 들어오려무나.”
“예∼!”
문 밖에서 쾌활한 화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현은 사내의 이름이 문득 궁금한 데다가 은혜를 입었으니 이름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물었다.
“제 이름은 제갈현이라고 합니다. 혹시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특별한 이름도 아닌데. 그냥 산골에서 사냥하는 일개 사냥꾼의 이름을 알아서 뭐하게?”
“신세를 진 사람의 이름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알려 주시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사내는 잠시 제갈현의 두 눈을 또렷하게 직시하더니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고서는 두툼한 입술을 달싹였다.
“눈은 깨끗하니 믿을 만은 하군. 내 이름은 화웅이다. 화웅.”
“화…… 화웅?”
사내의 이름을 들은 제갈현의 눈은 놀람으로 번쩍 떠졌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고서는 화웅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황건적이라고 했어! 그럼…… 아직 동탁의 휘하로 들어가기 전이라는 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린 제갈현은, 대략적인 연대를 잡아낼 수 있었다.
서기 180년에서 184년 사이.
그리고 황건적이라고 했으니, 황건적의 세력이 뻗치는 곳이라면 양자강 위, 중국의 완, 허창, 수춘, 하비를 밑의 경계점으로, 북으로는 현대의 베이징 지역인 남피와 북평까지였다.
화웅이 이런 외진 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몇 년 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180년대라면, 그가 살던 시대부터 자그마치 2,000년 전이며, 그의 조상인 제갈공명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208년보다도 자그마치 28년 전인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역사 속의 인물과 마주하게 된 제갈현은 주체할 수 없는 기대감과 흥분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주먹을 살짝 쥐어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