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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8화)
1. 게임의 시작(5)


185년 가을.
제갈현이 H.I.D를 시작한 지 G.T로는 12개월, 현실로는 72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애초에 1년을 클로즈 베타 기간으로 잡아 놨지만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기에 추가로 5만의 2차 클로즈 베타 테스터들을 뽑았다는 것이 그동안의 가장 큰 이슈라면 이슈였다.
조금 더 미시적으로 보자면, 제갈현 개인이 이 게임을 위해 1년 휴학을 더 했고, 때문에 그는 졸지에 24살에 2학년인 늦깎이가 되어 버렸다.
“휴우…… 이제 이런 단순 반복 노동으로는 더 이상의 스텟은 오르지 않는군.”
휘두르던 구환도를 내려놓은 제갈현은 조금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구환도를 휘두르던 곳은 화웅의 거처로부터 약간 떨어진 대나무 숲이었다. 그는 6개월 전부터 도끼 대신 도를 잡기 시작했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갈현의 레벨은 여전히 1.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겪어온 갖가지 고행들로 그의 스텟 수치는 레벨 1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승해 있었다.
“상태창”

이 름:제갈현
레 벨:1 ―아시아― 계 급:?
칭 호:무(부가 효과 없음)
직 업:무 소 속:무
H.P :465 M.P :255
근 력:50 민 첩:45
체 력:53 지 능:43
손 재 주:10 동체시력:5
인 내 심:15 맷 집:5

잔여 상태치:0

그동안 해 오던 것들로는 추가 스텟이 오르지 않자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인 제갈현이었다.
“그나마 이것 하나라도 건져서 다행인 건가? 기술정보. 도술.”
6개월 동안, 제갈현이 도끼에서 도로 바꾸고, 조금 더 스스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도를 휘두르기 시작하자 생긴 것이 바로 ‘도술(刀術)’이라는 기술이었다.

기 술:도술(刀術) ―자동―
설 명:도를 휘두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도를 사용하면서 필요한 기교 등을 말한다.
효 과:도를 더 잘 다루게 된다.

기본적인 초급 무관에만 가도 책으로 파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가격이 만만치 않기에 제갈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지난 1년간 화웅의 집안일(?)을 하면서 몫으로 할당받은 돈이 13은 10동이었는데, 이 기술책 하나의 값이 10은이란 것을 감안하면 공짜로 배웠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빠!”
5㎏ 정도 나가는 구환도를 들고 다시 한바탕 벌이려던 제갈현은 화옥의 목소리에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지난 1년간 부쩍 자란 화옥이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아버지가 기다리니깐 얼른 와!”
“알았어요!”
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경어를 쓰는 제갈현은 벗어 놓은 흑색 도포를 걸쳐 입고서는 움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현아, 내일 나랑 같이 마을에 좀 다녀오자.”
“예? 저요?”
“너 말고 누가 있냐. 이제 힘이 좀 쓸 만해졌으니깐 데리고 다녀야지.”
조촐하지만 그런대로 알찬 저녁상 앞에서, 제갈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한 화웅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늘 혼자 가던 화웅이었고, 제갈현 스스로도 자기 단련에 푹 빠져 있어 말도 꺼내지 않았었지만, 화웅이 먼저 불쑥 말을 꺼낸 것이다.
스스로가 목표를 정하면 달성하는 데 무섭도록 몰두하는 제갈현이기에 그런 생각도 해 보지 않았지만, 막상 제의를 받고 나니 문득 가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가겠습니다.”
“아버지! 나도 갈래요! 나도! 나도요!”
제갈현의 대답과 동시에 화옥도 질세라 자신도 가겠다고 나섰다.
“안 돼. 너한텐 너무 위험해. 여기 있어야 한다.”
화웅의 거절에 그녀는 애교를 부리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 쓰기 시작했지만 화웅은 요지부동이었다.
“치잇! 너무해! 아버지는!”
탕!
토도도도!
벌컥!
삐져도 단단히 삐진 것인지, 화옥이 밥을 먹다 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화웅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제갈현이 안절부절해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쫓아가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거냐?”
“예?”
화웅이 젓가락으로 소면을 집어 올리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제갈현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이 늙은 몸을 이끌고 달려가리? 네 녀석 말이면 저 녀석이 껌뻑 죽으니깐 잘 달래도록 해라.”
“……예…….”
화웅의 퉁명스럽지만 그래도 화옥을 걱정하는 말에, 제갈현은 빙긋 웃고서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후다다닥!
그런 제갈현의 귀에, 저 앞에서 무언가가 요란스러운 기척을 내면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몸은 다 컸지만 아직도 아이 같은 화옥이 남긴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화옥 소저.”
“씨이…… 아버지는 너무해! 나도 가고 싶은데. 너무하지 않아, 현 오빠?”
“아저씨가 소저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너무 그러지 마요.”
스윽.
투덜대는 화옥의 머리를 쓰다듬은 제갈현은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내가 꼭 화옥 소저를 데리고 갈게요. 이번에 마을에 가서 화옥 소저가 좋아하는 빙당이랑, 예쁜 장신구도 사 올 테니깐 조금만 기다려요. 약속할 수 있죠?”
부드럽기 그지없는 제갈현의 목소리와 미소를 본 화옥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하면서도 여전히 투덜거렸다.
“그래도 오빠랑 같이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번만 참아 줘요. 꼭 예쁜 선물 사 올게요. 자, 약속!”
제갈현이 화옥의 얼굴 앞으로 얼굴을 움직여 시선을 마주치고서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쳇! 선물이랑 재밌는 얘기 많이 해 줘야 돼?”
화옥은 빙긋 웃고 있는 제갈현에게 더 이상 화내지는 못하겠는지 붉어진 얼굴로 다짐을 받듯 재차 말했다. 그리고는 제갈현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예. 당연하구 말구요. 그럼 이만 가실까요, 소저?”
“아잇! 소저란 말은…….”
스윽.
제갈현이 장난스레 미소를 얼굴에 띠고서는 화옥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옥은 몸을 배배 꼬면서도 제갈현이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오빠, 근데 존댓말 불편하지 않아?”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제갈현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재잘대는 화옥의 위로, 가을의 청명한 하늘이 둘을 감싸 안 듯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

“네놈의 무기는 꼭 챙겨라. 워낙 황건적 녀석들이 들끓어서 말이지. 뭐,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다만…….”
화웅의 말에 그동안 잡아서 말려 놓은 육포와 짐승의 가죽이 가득 담긴 지게를 들던 제갈현은 빙긋 웃으면서 구환도를 챙겨 행낭 안에 쑤욱 집어넣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화웅의 뒤를 따라 걸어 나갔다.
“현 오빠! 이쁜 거 사 가지고 와야 해!”
“예, 알겠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툴툴대던 화옥이었지만, 출발할 때가 되니 문 앞에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화옥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제갈현이었다.
“쯧! 다 큰 애가 아직도 저렇게 철이 없으니…….”
맘에 안 든다는 듯이 투덜거리는 화웅이었다.
하지만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아는 제갈현이기에 빙긋 미소 짓고서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는 바쁘게 걸어가도 한나절은 걸리는 거리였으니 볼일까지 보고 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을까. 아직도 길 주위로는 울창한 숲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간간이 한 명씩, 두 명씩 사람들이 눈에 띄고 있었다.
“비켜라!”
“어서 비켜! 장개 님이 나가신다!”
멀리 마을의 모습이 보이는 거리까지 걸어온 화웅과 제갈현은, 주위에서 한 떼의 노란 두건을 머리에 둘러쓴 무리가 우루루 몰려오며 외치는 것을 보고는 길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빌어먹을 황건적 놈들…….”
귀찮은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싫었기에 몸을 피한 화웅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양민들을 위해 일어났다는 녀석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마치 제 세상인 양 활개치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들은 반역의 무리들이었지만 당금의 난세에서는 힘 있는 자가 곧 법이요, 정의였다. 게다가 현 한 황실에는 저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아저씨. 이 길로 가다간 움막에 가는 것 아닙니까?”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황건적 무리가 사라진 방향이 그들이 온 방향과 일치했기에 제갈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화웅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들르겠어. 안 그래도 반황건적 세력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그렇게 한가하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일은 없을 게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눈가에 그대로 떠올랐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리라 다짐하는 화웅이었다.


2. 황건적(1)


“휴……. 마을 분위기가 많이 흉흉하네요.”
마을에 처음 와 본 제갈현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많이 흉흉한 것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진양성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은 규모의 마을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고 유동 인구가 이상하리만큼 적었다.
“지금이 난세라는 증거겠지. 치안이 좋지 않으니 이럴 수밖에 없는 거야.”
익숙하다는 듯이 마을 입구 어림에서 주위를 둘러본 화웅은 상가가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 그거 들었나?”
역시나 상가 밀집 지역에도 사람들은 적었고, 열어 놓은 점포보다 닫힌 점포가 많아 보였다.
사람이 적은 탓인지 제갈현은 상인으로 보이는 듯한 사내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쉽사리 엿들을 수 있었다.
“황건적들이 계로 몰려간다는 이야기 말인가?”
“그렇지. 역시…… 모를 수가 없지.”
“그나저나 큰일이네그려. 유언 님마저 못 막아 낸다면 하북 지역은 완전히 황건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참 어지신 분인데…… 딱하이.”
또다시 들은, 그가 아는 역사 속 인물의 이름에 제갈현의 눈이 꿈틀거렸다.
유언.
유비와 마찬가지로 유씨 성을 가진 명문가 출신, 아니 황족 출신의 사내로서 현재는 북평과 진양 사이에 위치한 계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었다.
후에 사천 지방, 즉 촉이라 불리우는 지역으로 옮겨 자식인 유장에게 물려주게 되는 기반을 닦아 준 것이 바로 유언이었다.
“이봐! 계라고 했나?”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제갈현만은 아니었던 것인지 화웅이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로 일갈을 내질렀다.
화웅의 장대한 체구와 눈빛에 압도당한 사내 둘이 주눅 든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소. 내 듣기로는 분명히 계라고 했소이다.”
“빌어먹을! 제갈현! 나를 따라와라! 빨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섭도록 굳은 표정의 화웅이 제갈현에게 소리치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제갈현은 영문도 모른 채 화웅을 따라 달려 나갔다.
“아저씨! 갑자기 왜 이러세요!”
“화옥이! 화옥이…….”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화웅이 제갈현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 말뜻을 파악한 제갈현 역시 안색이 무섭도록 빠르게 굳어 갔다.
진양성과 계성의 사이에는, 화웅의 움막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건적의 군대가 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흥분이 주는 감각에 사로잡힌 군인들에게, 아니 노란 두건을 쓴 도적 무리에게 혼자 있는 ‘소녀’는 가지고 놀기 좋은…… 노리개일 뿐이었다.

***

“히잉…… 심심한데…….”
제갈현과 화웅이 떠난 집에서 16살짜리의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소녀가 혼자서 할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스럭.
때문에 문 쪽에 쪼그려 앉아 있던 그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집 앞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화색을 띠고는 고개를 번쩍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다…… 응?”
메기수염에 쭉 찢어진 눈매가 야비하다는 인상을 주는 사내가 뒤로 뭐라 말을 하려다가 화옥을 발견하고서는 눈을 반짝였다.
머리 위에 노란 두건을 둘러쓴 일련의 무리들. 바로 황건적이었다.
후다다닥!
이미 화웅으로부터 누누이 말을 들었던 화옥이었기에 몸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이미 황건적의 눈에 딱 띄인 상태였다.
“흐흐흐……. 이런 산속에 소녀라…….”
“낄낄, 대장.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야비한 인상의 옆에 서 있던 사내 역시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음흉한 시선으로 낄낄댔다. 무슨 일인지를 눈치챈 다른 무리들도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아빠…… 현 오빠…….”
화옥은 어리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보내는 끈적하면서도 음흉한 시선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한 소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차 화웅과 제갈현을 애타게 찾았지만 그에 답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벅저벅
“낄낄. 아가야, 이리 오렴.”
단검을 쥔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화옥이 몸을 숨긴 곳으로 걸어왔다.
화옥은 두려움에 젖어 그 자리에 굳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까꿍!”
“꺄아아악!”
불쑥 솟아오른 사내의 얼굴에 놀란 그녀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빼액 질렀다.
사내가 갑작스런 비명성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치켜들었다.
휙!
짜악!
“악!”
“어디서 소릴 질러!”
“꺄악!”
그녀의 뺨을 우악스럽게 내려친 사내는 쓰러진 화옥의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잡아챘고, 이내 그녀를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끌끌. 고거…… 참 귀엽게 생겼다?”
화웅의 움막을 벌써 제집인 양 차지하고 앉은 사내는 음흉한 시선으로 벌벌 떨고 있는 화옥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손을 불쑥 뻗었다.
“꺄아아악! 이거 놔!”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화옥의 가슴 위로 야비한 인상의 사내의 손이 지나가자 화옥은 학을 떨면서 소리쳤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사내의 욕정을 불러일으킨 듯 사내가 바지춤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흐흐……. 네가 아직 어려서 이 맛을 모르는 거다. 들어갈 것도 없이 여기서 황홀경을 보여 주마.”
“오…… 오지 마!”
“낄낄. 대장, 다음은 우립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 수십 사이에서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일을 당하고 있는 화옥의 눈에서는 어느새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빠……. 흑……. 현 오빠!”
“그럼……. 흐흐흐……. 컥!”
푸화아아악!
야비한 인상을 가진 사내의 손이 화옥의 하의로 내려가려는 순간, 답답한 신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그대로 뭔가에 떠밀린 것처럼 화옥의 몸 위로 철퍼덕 쓰러졌다.
“허…… 허억! 저…… 적이다!”
동시에 황건적의 무리들이 크게 술렁이면서 무언가가 날아온 곳을 향해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