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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9화)
2. 황건적(2)


“저…… 저 찢어 죽일 놈들!”
제갈현은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흉포한 기세를 흩뿌리며 창을 움켜쥐고는 말릴 새도 없이 달려 나가는 화웅을 멍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화옥의 참담한 모습을 본 화웅의 손이 번뜩 하는가 싶더니, 화옥의 몸을 탐하던 황건적들 중 하나가 투창술에 간단히 목숨을 잃었다. 바로 술렁이는 황건적 무리들을 향해 화웅이 달려 나갔다.
번쩍!
“크어어억!”
푸화아아악!
분노에 사로잡힌 화웅의 창은 전광석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번 그의 창이 허공에 빛무리를 흩뿌릴 때마다 어김없이 두세 명이 목숨을 잃어 갔다.
일당백의 실력이 저러할까.
넋 놓고 신기에 가까운 그의 창놀림을 보던 제갈현은 점점 그를 둥글게 포위하는 스무 명이나 되는 황건적 무리들의 움직임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는 구환도를 움켜쥐었다.
그동안 수백 수천 번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제갈현이었지만, 아무래도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무슨 장치를 한 것인지, 피를 뿌리며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게임이다’란 느낌을 주는 터라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슈각! 슈가각!
“크아아악!”
“컥!”
펄펄 날면서 어김없이 계속 황건적들을 죽이고 있는 화웅이었다.
하지만 제갈현은 일단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접근하는 것을 느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화웅을 도와 적들을 죽이기로 결심하고서는 덤불 속에서 일어나 달려 나갔다.
“누구…… 크악!”
퍼걱!
푸화아악!
빛살을 뿜어내며 휘둘러 왔던 투로를 따라 내뿜어진 구환도에 황건적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적이다!”
“한 놈이다! 죽여!”
예전에는 평범한 백성이었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노란 두건을 뒤집어쓰고, 무기를 움켜쥔 뒤로 맛본 ‘강자’의 향기에 취한 그들은 살기를 번뜩이며 제갈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번쩍!
“크악!”
“바보 같은 녀석! 무엇하러 끼어든 게냐!”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질 무렵, 한차례 섬광이 황건적들의 뒤에서 흩뿌려지더니 황건적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졌다.
그 틈으로 화옥의 허리를 한 손으로 안은 화웅이 몸을 날려 제갈현의 옆으로 다가왔다.
‘살인(殺人)’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을 하고, 그것을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제갈현이었지만 게임이란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황건적과의 첫 격돌에서 그동안 수련한 것이 무리 없이 먹혀들자 부쩍 자신감이 붙은 제갈현이었다.
“이러려고 연습했던 것 아닙니까?”
제갈현은 여전히 빙긋 웃는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노려보는 황건적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구환도를 흔들어 보였다.
“네놈이란 녀석은…… 쯧쯧…….”
화옥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축 늘어진 채로 화웅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었다.
“화옥 소저는 어떻습니까?”
걱정스러운 어조로 제갈현이 묻자 화웅은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행히도.”
“싸움 중에 무슨…… 커억!”
자신들을 앞에 두고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누는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 손도끼를 든 황건적이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채 두 발짝을 땅에서 떼기도 전에, 화웅의 창에 목덜미가 꿰뚫렸다.
“네놈 같은 쓰레기들은 살려 둘 가치도 없지.”
탄탄한 화웅의 몸에서 다시금 패기와 살기가 뒤섞인 기운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의 실력이라면 일다경 안에 여기 있는 황건적들은 모두 전멸시킬 것이다.
그때 제갈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뒤쪽에서 한 무리의 황건적들이 더 오고 있습니다. 화옥이 다칠 수도 있으니 그냥 여기서 몸을 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을…….”
“아저씨.”
“……알겠다. 네 말을 따르도록 하지.”
화웅이 아무리 강하고 날쌔다고는 하지만, 못해도 40㎏은 넘을 화옥을 옆구리에 끼고 싸우는 이상, 한 개의 손이 여러 개의 손을 막아 낼 수는 없을 터였다.
까드드득.
분한 듯 화웅이 이를 갈았지만, 제갈현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참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대신…… 나중에 네놈! 나를 도와 이 녀석들을 쳐부수는 데 도움을 줘야 할꺼다.”
띠링∼!

[영웅록(英雄錄) ‘화웅의 부탁’이 생성되었습니다.]

영 웅 록:화웅의 부탁
내 용:화웅이 제갈현에게 진양성 근처의 황건적 무리를 격파하자고 한다.
보 상:―성공 시, 화웅과의 친밀도 대폭 상승, D급 칭호 부여.
―실패 시, 화웅의 죽음. 화옥과 친밀도 하락. 황건적들의 수배령 발령.

끄덕.
어차피 제갈현 자신도 지난 1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같이 살아온 여동생 같은 화옥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려던 황건적들을 살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슬슬 레벨을 올려서 강해질 때가 왔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러니 화웅이란 뛰어난 동료가 생기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에 제갈현은 미소를 띤 채 수락의 표시를 했다.
“좋아. 그럼 우선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
띠링∼!

[영웅록을 수락하셨습니다.]

파아앗!

[최초의 영웅록 수락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영웅록이란, 일종의 이 세계를 움직이는 ‘스토리’가 되는 것으로써 유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그 보상 또한 막대하여 영웅록의 수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띠링∼

[최초의 영웅록 수락자에게 봉황의 깃털이 주어졌습니다.]

제갈현의 수락에 뒤이어 A.I의 미성이 연달아 제갈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내 그것이 꽤나 큰 사건이란 것을, 기연이란 것을 알아챈 제갈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급박한 상황에 연달아 찾아온 이 기연이 나중에 어떤 식의 결과로 도출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이 게임의 미래.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서걱!
“일단 이곳에서 몸을 피하고 봐야 됩니다, 아저씨!”
스팟!
제갈현의 말이 떨어지고, 화웅과 제갈현이 포위망을 돌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일다경이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황건적들의 신체만이 을씨년스럽게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

진양성으로 허겁지겁 달려와 객잔에 화옥을 눕힌 화웅과 제갈현은 긴장을 풀고 쉬기 시작했다.
“상태창!”

이 름:제갈현
레 벨:3 ―아시아― 계 급:?
칭 호:무(부가 효과 없음)
직 업:무 소 속:무
H.P :475 M.P :265
근 력:52 민 첩:47
체 력:55 지 능:45
손 재 주:10 동체시력:5
인 내 심:15 맷 집:5

잔여 상태치:6

“레벨을 올리는 게…… 쉽지가 않은데?”
제갈현이 미소를 띤 상태로 풍성한 흑발을 만지작거리며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실력을 키웠다는 사실은 상태창을 통해 확인하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 강해지는 데 가장 쉬운 도움을 줄 ‘레벨’이 생각보다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번에 그가 벤 황건적의 수만 해도 대략 8명.
초보자가 사냥하는 몬스터와 비교하자면 레벨이나 주는 경험치 면에서 비교할 수가 없는 ‘몬스터’인데도 불구하고, 8명이나 없앴는 데도 레벨이 두 개밖에 오르지 않은 것이다.
“지능에 6.”
H.P와 M.P의 불균형이 두드러졌기에 제갈현은 망설이지 않고 지능에 올인한 다음, 행낭을 꺼내서는 새로이 얻은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아이템(Item)
봉황의 깃털
종 류:재료
설 명:깃털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없지만, 가공되었을 시에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템으로 변모한다. 단, 가공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흠이다.
―봉황은 슬플 때 눈물 대신 깃털을 떨어뜨리고는 하지.

자신의 팔뚝만 한 기기묘묘한 색의 깃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제갈현은 이것으로 만들 만한 것을 생각하다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자 검지와 엄지를 딱하고 튕겼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자신의 먼 조상인 제갈공명하면 늘 언제나 같이 등장하곤 했던 하얀 섭선.
어느 그림이나 영상에서든, 제갈공명이 들고 나왔던 그 섭선을 자신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문제라면 이것을 가공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정도?
“네놈.”
가만히 누워 있는 화옥을 미동도 하지 않고 지켜보던 화웅이 고개를 들고서는 제갈현을 불렀다.
“황건적 가운데는 네가 상대한 녀석들과 다른 녀석들이 상당히 많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녀석들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정예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지. 특히 ‘청주군’이란 녀석들은…….”
뭔가 길게 말할 듯하던 화웅이 말을 끊자 제갈현이 고개를 들어 화웅을 쳐다보았다.
화웅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됐다. 일단은 쉬어라. 옥아를 맡긴 후에…… 그 후에 녀석들을 친다.”
그 말을 끝으로 화웅은 벽에 기대앉아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기에 제갈현은 말을 붙이려던 것을 포기하고서는 그도 눈을 붙였다.
부스럭.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제갈현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살며시 떴다.
월광이 흐드러지게 창문을 통해 비춰지고 있는 침상 위에서,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낸 화옥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제갈현의 눈에 들어왔다.
악몽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낮의 그 일에서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하얗게 탈색된 얼굴이었지만 화웅과 제갈현을 보고 적이 안도하는 화옥이었다.
스팟!
“…….”
화옥이 바라보고 있던 창문가에서 그림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인형이 불쑥 창틀에 가볍게 내려앉는 것이 제갈현의 눈에 들어왔다.
캉!
순간적인 순발력으로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몸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제갈현의 구환도가 폭사되듯이 창틀의 검은 인형에게 날아들었고, 금속성의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레 공격했는 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창틀에서 조금도 비켜서지 않은 채 상당히 불리한 자세인 앉은 자세로 수월하게 막아 냈다.
“숙여라!”
그 모습에 놀라하던 제갈현의 귓가에 화웅의 낮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각!
카가가각!
좁은 공간에서 쓰기에는 불편한 것이 창이었지만, 화웅은 공간의 제약조차도 간단히 무시하면서 순식간에 창을 찔렀다.
그러나 창틀의 검은 인형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오히려 찔러 오는 창 쪽으로 몸을 날려서는 무기로 창의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는 화옥이 앉아 있는 침상에 내려섰다.
“어딜!”
슈슉! 슈슈슈슉!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월광 아래 번쩍이는 창날이 백색 선을 그어 대며 검은 인형에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