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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10화)
2. 황건적(2)
챙! 채챙!
탁!
매섭게 날아드는 화웅의 창을 다 막을 수 없었던 것인지 막아 내던 검은 인형의 손에서 소검이 원을 그리며 창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다가온 화옥이 무서운 듯 제갈현의 소매를 굳게 부여잡았다.
“네놈은 누구냐!”
화웅은 딱딱한 어조로 야행의를 입은 사내에게 말했다.
“후후후…….”
괴한의 목젖에 하얀 이를 날카롭게 드러낸 화웅의 창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괴인은 되레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젊다?’
제갈현은 그 웃음소리가 젊다는 데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금세라도 괴한의 목덜미를 뚫을 것 같은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화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놈은 누구냐.”
주르륵.
말과 동시에 목젖을 조금 파고든 창날에 상처가 생기며 핏줄기가 검은 야행의를 물들였다.
“진양의 화웅이 뛰어난 것은 창술이요,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투창술이라 하였지. 한번 보고 싶군. 투창술을…… 과연…….”
괴인은 화웅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했다.
제갈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창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앉은 자세로 자신의 일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냈다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아무런 연고도 없어 보이는 화웅을 어떻게 알아서 이렇게 찾아온 것일까?
머릿속에서 맴도는 궁금증을 참으며 제갈현은 괴인과 화웅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왕 노사께서 보내서 찾아왔습니다.”
“…….”
괴인의 말에, 화웅은 잠시 상대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기세가 무색할 정도로 창을 슬쩍 밑으로 내렸다.
‘왕 노사?’
왕 노사란 사람이 누군지 알 리가 없는 제갈현이었으니, 그로서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보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었던 거겠지.”
화웅의 걸걸한 목소리에, 복면 사이로 보이는 괴인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이 보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어조로 말하는 괴인의 모습을 보니,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 괴인의 질문에 화웅은 다시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 시끄러워서 말이야. 도통 잠이 오질 않더군.”
“…….”
화웅의 말에 괴인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다.
“화옥 아가씨는 분부대로 저희 쪽에서 모셔 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갈현은 괴인의 말에 화옥이 놀란 듯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화옥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화웅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왕 노사께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전하게.”
“그럼…… 낙양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스르륵.
괴인의 목소리가 끝나자 아무것도 없던 창문에서 흡사 유령이 솟아올라 오는 양, 네 명의 사내가 작은 가마를 들고서는 날 듯이 날아들어 왔다.
‘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한 줄기 바람과도 같은 그들의 표홀함에 제갈현은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공.
무공이란 것에, 신기한 장난감을 본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마구 치솟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차원이 다른 힘에 대한 갈망. 그것이 주는 향기는 제갈현으로서는 차마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빠…….”
갑작스레 다른 사람과 함께 어디론가 가야 될 운명이 된 화옥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불안함이 가득한 눈길로 제갈현을 잡았다.
그로 인해 기이한 열기에서 깨어난 제갈현은 화옥의 처연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봄바람과도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화옥 소저. 아저씨와 함께…… 낙양으로 갈게요.”
“잠깐만, 오빠!”
부욱!
야행의를 입은 괴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화옥은 치맛자락의 밑단을 찢어 냈다.
“기다릴게! 꼭…… 와야 돼, 현 오빠!”
꽈악!
제갈현이 쥐고 있는 구환도의 손잡이 부분에 치맛자락을 매듭지어 매단 화옥이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낮에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화옥이 부쩍 어른스러워 졌다고 느낀 제갈현은 구환도를 쥐지 않은 손을 들어 화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빙긋.
“걱정하지 말아요.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깐.”
화옥의 따스한 온기가 제갈현의 손을 통해 제갈현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파앗!
[스페셜 아이템 ‘약속의 증표’가 생성되었습니다.]
동시에 화옥의 치맛자락이 매여진 구환도 또한 밝은 빛무리를 한차례 뿜어내었다.
***
아이템(Item)
약속의 증표
종 류:무기
공 격 력:5(+3)
부가효과:근력, 민첩 1 상승
내구도 증가
―소녀와의 약속의 증표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깐.
“후우…….”
화옥이 떠나고 난 다음날, 화웅과 제갈현은 지체 없이 황건적 무리들을 격파하러 객잔에서 나섰다.
떡하니 도심 마을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합법적’인 황건적 무리였기에, 화웅과 제갈현은 ‘태평교’라 쓰인 거대한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있었다.
아이템 정보창을 끈 제갈현은 엄청난 크기로 지어진 태평교의 전각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외딴곳에까지 저렇게 큰 전각을 짓다니. 그리고 이 안에서 일전의 그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양산된다고 생각하니 작금의 현실에 절로 아미가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자신들을 굶주림과 역경 속에 몰아넣은 현실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 꾸준히 태평교에 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꽈악!
화옥의 치맛자락이 매여진 구환도의 손잡이를 굳세게 붙잡으면서 제갈현은 대문을 노려보았다.
후한의 하늘은 가고 곧 황천의 하늘이 도래하리라.
“흥.”
대문에 음각된 글귀를 보고 코웃음을 내뱉은 제갈현은 구환도를 하늘 높이 추켜올렸다.
“차압!”
서걱!
제갈현의 기합 소리와 함께, 족히 20㎝는 되어 보이는 두꺼운 나무 문이 잘려져 나갔다.
힘으로 밀어붙여 깨진 것이 아닌, 기술을 이용해 문을 베어 버린 제갈현은 보무도 당당하게 베어 넘어간 태평교의 대문을 밟고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웬 놈이냐!”
“침입자다!”
전각들 사이에서 누런 두건을 눌러쓴 황건적들이 병장기들을 쥐고 뛰어나오는 것이 제갈현의 눈에 들어왔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거대한 정문에 선 채, 까맣게 몰려나오는 황건적들을 보면서, 제갈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고, 눈에서는 한광이 피어올랐다.
“두 명이서 이곳에 들어오다니. 배짱도 좋구나. 쳐라!”
타닥!
몰려나온 황건적들 사이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듯한 자가 검집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화웅과 제갈현도 몰려오는 황건적들에 맞서 달려 나갔다.
슈각!
“크아악!”
“죽여 버려!”
우와아아아아!
***
서걱.
“크악!”
푸화아악!
제갈현이 휘두른 일도에 또 다른 황건적이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헉…… 헉…… 헉…….”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수십의 황건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으나 제갈현도 꽤나 지친 상태였지만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레벨업을 알리는 소리도, 스텟이 올랐다는 소리도 이미 제갈현의 귓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슈악!
창!
“죽엇!”
파박!
제갈현은 그를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두 자루의 검을 쳐 내고, 몸통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창날로 몸을 돌려 피했다. 이어 바람 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내려오는 도끼를 피하기 위해 땅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서거걱!
“크악!”
“크어억!”
몸을 굴리면서 낮게 휘두른 제갈현의 구환도에 황건적 두 명의 다리가 잘려져 나가며 후끈한 피가 뿌려졌다.
움직이며, 베고, 막고, 찌르기만 할 뿐.
그가 지난 1년여 동안 연습해 왔던 모든 도법, 아니 도술이 쏟아져 나왔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제갈현의 모습에 황건적들은 화웅이 주는 두려움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독기와 오기, 그리고 투지.
절대 질 수 없다는 무언가가 제갈현으로 하여금 상처를 입으면서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었다.
“미…… 미친놈…….”
피를 뒤집어써 흡사 혈인같이 보이는 제갈현을 향해 황건적 한 명이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피를 뒤집어쓴 상태에서도, 적의 피와 제갈현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뒤섞이는 데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제갈현의 미소가 섬뜩했던 것이다.
휘리릭!
퍼버벅!
몸을 노리고 또다시 날아든 두 자루의 창을 제갈현이 피하며 구환도를 휘두르자 창을 든 황건적 두 명이 또다시 피를 뿌리면서 땅에 쓰러졌다.
레벨 3이 가지기에는 무리인 높은 스텟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천부적인 운동신경과 지난 1년간의 수련, 몸에 익숙해진 도술이었기에 그보다 레벨이 높은 황건적들을 이렇게 많이 쓰러뜨릴 수 있었다.
“놈!”
그렇게 위태위태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황건적을 죽여 나가던 제갈현의 귓가에 일갈성과 함께 무언가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제길…… 큭!”
츄웃!
성치 않은 몸으로 피하기에는 힘든 정도의 빠르기를 담은 창날 공격에 제갈현이 육두문자를 내뱉으면서 몸을 뒤집었다. 하지만 늦은 것인지 이미 창날은 그의 등에 긴 창상을 새기고 빠져나간 후였다.
“후욱…… 후욱…….”
“역시 한 가닥 하는 놈이었구나!”
제갈현은 욱신거리는 등의 통증을 무시하며 새로이 앞에 나타난 인물을 쳐다보았다.
제갈현 자신과 비슷한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평범한 창 한 자루와 노란 두건이 보였다.
다른 황건적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지만 제갈현의 머릿속에서는 본능에서 울려 퍼지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주위를 살폈지만 싸우느라 화웅과도 멀어진 탓에 현재 제갈현은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빙긋.
“이런 이런……. 노란 옷을 뒤집어쓴 도적 무리에도 쓸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의외군요.”
제갈현이 태연을 가장하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이렇게 가장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닥쳐라! 전장에서는 각자의 무기로만 말하는 법! 난 북해의 관해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미간을 노리고 겨누어진 창날에 제갈현은 아미를 찌푸렸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려고 했건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갈현의 입가에 다시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관해.
관해란 이름 또한 제갈현의 머릿속에 있는 역사 속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창을 들고 자신에게 살기를 피워 내고 있었다.
“합!”
제갈현이 구환도를 움켜쥐고서는 땅을 박차 관해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슈욱!
처음부터 끝장을 보려는 듯 제갈현이 움직일 곳을 미리 예상하듯 공격이 날아왔다.
제갈현은 구환도를 수직으로 가슴께에 곧추세웠다.
캉!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관해의 창날이 튕겨져 나갔다.
관해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서는 다른 손으로 제갈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큭!”
이미 관해와의 한차례 격돌로 팔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제갈현은 팔을 들어 막지 못하고 대신 몸을 들어 어깻죽지에 주먹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휘청휘청.
설마 창을 놓고 자신을 후려칠 줄은 제갈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휘청이면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움직임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안 된다!”
확실히 보통 황건적과 장수급은 하늘과 땅 차이인 모양이다.
팅팅 부어오른 어깨를 느끼며 제갈현이 이를 악물고서는 관해를 바라보았다.
레벨 3으로, 그리고 고작 1년의 경험으로 설정상 20년 넘게 무기를 잡고 실전 경험을 쌓은 자와 대결해 이길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피식.
그래도 장수급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이나마 파악이 된 것이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대로 죽기에는 아깝지?”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기에는 그다지 경험해 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순순히 죽어라.”
창을 비껴들고서는 오만한 표정으로 관해가 다가오는 것이 제갈현의 눈에 띄었다.
“합!”
그리고 관해가 창을 찔러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제갈현의 몸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큭!”
“후후, 방심은 제아무리 강자라도 빈틈을 내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럼 이만…….”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동시에 횡으로 휘둘러진 제갈현의 구환도에, 관해가 침음성을 내뱉으면서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기습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다리를 뺀 관해의 반사 신경에 자르지 못하고 상처를 입히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화웅에게 가기만 하면 끝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제갈현은 화웅의 신위와 실력을 믿었다.
서걱!
“크악!”
뒤로 몸을 날린 제갈현의 구환도가 다시금 혈무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