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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11화)
2. 황건적(3)
그 무렵, 화웅은 눈에 핏발이 선 채로 황건적들을 쳐 죽여 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잠재웠던 분노가, 소중하디 소중한 자신의 딸을 망칠 뻔했던 황건적에 대한 분노가 태평교의 전각 문이 깨짐과 동시에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슈가각!
“크억!”
“크아악!”
팟!
푸화아악!
화웅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창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황건적들의 목이나 몸에 차가운 이빨을 박아 넣었다. 이후 들리는 것은 온통 황건적들의 비명 소리뿐이었다.
신장(神將).
화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인 양 수십의 황건적들이 공포에 떨 정도로 거침없었다.
쾅!
막는 황건적들을 거침없이 베어 버리며 가장 큰 전각의 문을 부수고 들어간 화웅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예기에 고개를 가볍게 옆으로 꺾었다.
슈욱!
파박!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진양성 태평교의 분타주인 영걸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웬 미친놈 둘이 쳐들어왔단 소리를 듣긴 했지만, 진양성 분타에 있는 황건 병사들의 수만 해도 500이었기에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두 놈이 끈질기게 황건 병사들을 죽이자 태평교주 장각의 명령을 받고 방문 와 있던 관해에게 부탁해 막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중 한 놈이 방어선을 뚫고서는 지금 자신의 방에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옆에는 저 멀리 사천당가에서 초빙한 무림인 둘이 호위를 맡고 있긴 했다. 하지만 기습적으로 던진 호위의 암기에도 화웅이 쉽게 피하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네놈…….”
화웅의 전신에서 풍기는 짙은 혈향과 가공할 만한 살기에, 영걸의 표정이 탈색되듯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영걸의 앞에 서 있던 사천당가의 무인들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자신들이 누구던가. 암기와 독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다는 사천당가의 외당 무사들이 아닌가. 혼신을 다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출수한 공격을 일개 무부가 피했다는 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걱정하시 마시오, 영 대인. 우리가 맡겠소이다.”
“부…… 부탁드리겠소.”
가슴을 탕탕 치면서 나서는 사천당가 무인들의 모습에 영걸의 표정에 안도감이 살짝 꽃피어 났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장풍을 쏘는 이들이 바로 무림인이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이면, 눈앞의 야차 같은 녀석을 죽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영걸이었다.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한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게 손가락 사이에 미세한 침들을 미리 껴 놓은 당가의 무인이 앞으로 나서며 화웅에게 말했다.
“내 딸을 욕보이려 한 죄, 네놈의 더러운 목으로 갚으라.”
저벅저벅.
그러나 화웅은 두 명의 무림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영걸만을 노려보며 창을 비껴들고서는 영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례한 놈이군.”
그리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두 명의 무림인 중 한 명이 번개처럼 출수했다.
파바바박!
일제히 인체의 주요 사혈들을 향해 수십 개의 침들이 날아들었지만, 화웅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창을 허공에 크게 휘저었다.
부아아앙!
후두두둑!
그러자 놀랍게도 창끝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의 압력에 수십 개의 침들이 휘날려서는 땅에 힘없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슈각! 슈각!
동시에 어느새 회수한 것인지 화웅의 손에 들린 창날이 번쩍이며 사천당가의 무인들에게 섬전과도 같이 날아들었다.
“헉!”
카강! 카가강!
“크윽!”
사천당가 무인들의 소매가 펄럭이면서 화웅의 창을 막았지만, 피해를 본 듯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비칠비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둘이 중얼거리자, 화웅의 입이 열리며 한기가 풀풀 풍기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은가.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무림인이 도적 반역 무리들의 호위가 된 거지.”
화웅의 차가운 말에 사천당가 무인들의 눈이 크게 치켜 떠졌다.
관과 무림의 상호불가침 조약.
그 말인즉슨, 앞의 이 허름해 보이는 무부가 관의 사람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무림이 중원 안의 또 다른 세계라고는 하나, 관의 묵시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물론 관에서도 세외의 침략 등 관군으로는 해결하기 벅찬 일들은 발군의 실력을 지닌 무림인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둘은 상호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 대인, 우리는 이 일에 더 이상 참여할 수가 없소이다.”
“이것은 관의 일. 무림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오.”
제아무리 황건의 무리가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럴 정도의 세력과 기세가 있다는 것일 뿐이지 황제는 살아 있었기에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 아니 그런…….”
영걸이 서서히 돌아가는 상황을 감지하고서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죄송하오.”
정중히 고개 숙여 포권을 한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화웅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그를 지나쳐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방 안에 남은 것은 화웅과 영걸 단둘뿐이었다.
“이…… 이봐…… 내…… 내 전 재산을 다 주겠네. 모…… 목숨만은 살려 주게.”
“…….”
저벅저벅.
영걸이 애원하며 화웅에게 말했지만, 화웅은 무서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가갔다.
“제…… 제발…….”
영걸의 간절한 눈과 애처로운 표정이 보였지만 화웅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필요 없다.”
푸화아아악!
***
캉!
서걱!
“끄아아악!”
또 다른 황건적이 구환도에 배가 갈라지며 그 명을 달리했다.
“학…… 학…… 학…….”
제갈현은 눈으로 흘러내리는 적의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 냈다. 그리고 단내가 풀풀 나는 입으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들어올 때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어느덧 노을을 뿌리고 있었고, 정오까지만 해도 웅장함을 자랑하던 태평교 분타는 노을보다 더 진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우……. 힘들다.”
그동안 벤 황건적의 숫자만 해도 50은 넘어간 상황에서, 자잘하게 입은 상처들이 고통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흑의 도포는 손으로 쥐어짜면 핏물이 흘러내릴 만큼 적의 피와 자신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기적처럼 쓰러지지 않고 있었지만 실제 H.P는 50도 되지 않았고, 순전히 정신력과 가끔씩 오르는 레벨과 스텟으로 버틴 것이었다.
“확실히 수련보다 실전이 스텟이 더 빨리 오르는군.”
옆에서 번쩍이는 무기들이 안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린 제갈현은 고개를 들어서는 피식 웃었다.
“난…… 퀘스트라서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진정으로 화옥이 그렇게 된 것이 마음 아파서 이렇게 싸우는 것일까.”
긴 시간 동안 미친 듯이 싸우고 나서야 제갈현은 진정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혼란스러웠다.
화옥에 대한 정과 이것이 게임일 뿐이라고 외치는 이성.
두 감정 중 어느 것이 우선순위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피식.
“하하하하하!”
복잡한 머릿속의 상념들을 대소로 날려 버린 제갈현은 눈을 빛내며 화옥이 묶어 준 치맛자락과 구환도의 손잡이를 굳게 움켜잡고서는 자기 최면을 걸 듯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어떠하랴. 이곳에 내가 서 있는 것이고, 내가 행동하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나의 의지일 텐데!”
파밧!
다시금 제갈현의 발이 땅을 박차고서는 황건적들 사이로 경쾌하게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황건적들을 유린하기 시작한 제갈현의 도가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경쾌했다.
***
H.I.D의 한 대륙인 아시아 대륙, 그리고 다른 대륙과는 차별화 되게 존재하는 무림과 관의 구조. 둘만의 상호불가침 조약은 그 조약이 가지는 의미만이 아니라 게임상에서도 큰 시스템상의 제약과 변화가 존재한다.
관과 무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H.I.D의 A.I는 ‘관 VS 무림’이라는 구조가 성립되면, 관인과 무림인의 전투라는 명제하에서만 내공의 유무에 따른 공평성을 맞추기 위한 조정에 들어간다. 똑같은 실력이라는 가정하에 관인의 모든 스텟은 무림인이 내공을 사용함으로써 상승하게 되는 신체적 능력과 동일하게 상승한다. 즉, 10의 힘을 가진 무림인이 내공을 씀으로써 100%의 힘을 낼 수 있다면, 관인은 80, 90%정도의 힘을 내게 되는 것이다(10%의 차이는 내공을 무한정으로 쓸 수 없기에 주는 어드밴티지이다).
이는 모든 유저가 무림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기본 스텟은 육체 단련을 주로 하는 관인이 무림인보다 훨씬 더 높으나, 내공으로 인해 한쪽만 무조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도 있다. 영웅급 NPC들은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가진 바 본신의 능력이 동 레벨의 무림인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으니, 가히 가공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H.I.D 가이드 아시아 편 중 발췌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하북 지역에서 가장 크고 유동 인구도 최고를 자랑하는 업의 주루에서 상인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음식을 파는 2급 주루인 일향루에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들어왔지만 점소이만이 반갑게 맞아 줄 뿐 다른 이들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소면 하나와 만두 하나.”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색 도포와 흑발을 늘어뜨리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사내의 말에 점소이는 허리를 숙이면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붉은 천이 매달린 구환도를 옆에 내려놓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던 제갈현은, 상인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잘 걸러만 들으면, 이런 곳에서 얻게 되는 정보가 꽤나 쏠쏠하단 것을 지난 한 달 동안의 여행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양성의 황건적들이 씨가 말랐다던데?”
“에잉…… 이제 그 소식을 들은 건가? 난 또 뭐라고!”
“그럼 악멸도(惡滅刀)와 일수탈명(一手奪命) 이야기는 들었나?”
“두 명이서 궤멸시켰다는 그 이야기 말인가? 진양에서는 그 이름들이 자자∼하더구먼.”
‘악멸도라…….’
두 상인의 이야기에서 더 이상의 흥미를 찾지 못한 제갈현이 고개를 돌리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500에 달하는 황건적이 있는 진양 분타에서, 화웅이 죽인 수만 해도 거의 400에 달했다. 제갈현 자신이 죽인 것은 고작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갈현에게 악멸도라는 칭호를 달아 주었다.
“상태창.”
이 름:제갈현
레 벨:10 ―아시아― 계 급:?
칭 호:악멸도(惡滅刀)(근력+3, 인내심+3)
H.P :560 M.P :350
근 력:63 민 첩:58
체 력:65 지 능:62
손 재 주:13 동체시력:15
인 내 심:19 맷 집:7
잔여 상태치:0
아마도 유저 중에서, 이런 칭호를 얻은 것은 자신이 최초일 터였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최고 레벨이 40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니, 슬슬 다른 유저들도 레벨 올리는 방법을 알아내고 올리기 시작하리라.
단지 그런 유저들과의 차이라면, 쌓아온 스텟의 차이로 단기간에 레벨을 많이 올렸다는 정도?
그러나 게임을 한 기간이 G.T로 1년이란 것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느린 편에 속했다.
“화웅과는 나중에 만나기로 했으니…… 이제 무공을 배워야 하는 건가.”
왕 노사란 사람과 무슨 약조를 해 놓았던 것인지, 화웅은 진양성의 황건적을 궤멸시키자 바로 낙양으로 떠났다.
때문에 제갈현은 홀로 한 달 동안 진양부터 업까지 긴 여행을 했던 것이다.
노을번천도란 무공을 배워야 할 시기가 지금이란 것을 느꼈지만, 적어도 이러한 식으로 무공이란 것을 익혀야 한다라고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수련할 공간이 필요했다.
“내 이름이 사해를 울리는 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헤어지기 전, 화웅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는 제갈현이었다.
“그나저나 이 무림인들이란 족속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제갈현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무림인들을 탓하며 투덜거렸다.
물론 여기저기에 무림인들이 세운 문파라든지 세가가 있기는 했다. 하나 그런 곳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리가 없는 것이다.
문파나 세가는 돈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수억의 인구 중에서 무림인이라고 해 봤자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찾기가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탁!
탁자에 동전 몇 개를 놓고 일어선 제갈현은 주루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게 정말 게임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게임에서 말하는 ‘몬스터’ 따위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로 오는 한 달 동안 그다지 특별한 일이 없었다.
“후우……. 정말 이제는 뭐한다?”
무림인을 못 찾으면서 자신이 세워 놓았던 계획이 서서히 틀어지고 있었다.
노을번천도가 완성된 무공도 아니어서 나머지를 찾아야 하는데, 무림인을 찾아서 일단 무공을 익히고, 찾으러 돌아다닐 것까지 생각하면 아찔한 제갈현이었다.
“쳇.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수련 겸해서 무조건 사냥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제갈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냥’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약간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업성에서 나가는 문을 향해 인파를 뚫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의 뒤를 쫓는 여러 쌍의 시선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제갈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