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H.I.D 1권(14화)
2. 황건적(6)


앞에 선 여자를 자세히 보니 귀티가 흐르는 복장에 고생은 전혀 모르고 자라온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앞에 있는 저년은 배고픔과 추위란 것은 모르고 자랐겠지.’
전형적인 기득권자의 모습이라고 단정 지은 여광과 친위대의 몸에서 살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뒤엎어야 할 놈들 중에 하나다! 본보기로 삼아라!”
여광이 칼을 곧추세우고서는 친위대를 독려하며 달려 나갔고, 그 뒤를 친위대들이 눈을 빛내며 둥그런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달려 나갔다.
“흥! 버러지 같은 놈들.”
실전 경험이라고는 일대일 비무 경험밖에 없는 남경화였지만, 자신이 이런 도적 따위에게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도적들에게 지기에는 그동안 무공 수련에 기울인 시간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단월검법(斷月劍法)을 칠 성 이상 수련한, 피와 땀을 흘려 가며 무공을 연성한 무인이지 않았던가.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검병을 움켜쥔 그녀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고, 이내 그 기운들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지난 하루 동안 삭신이 쑤시도록 나무 위에 있었던 그녀였기에 이렇게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솔직히 반가운 일이었던 것이다.
챙!
서거걱!
푸화아아악!
“끄아악!”
“크억…….”
여광과 친위대가 검을 내뻗으며 남경화를 공격하려는 찰나,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그녀의 손이 하얀 빛살을 뿌리는가 싶더니,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친위대 서너 명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죽어!”
슈아아앙!
그러나 그새 그녀의 지척까지 다다른 여광이 검을 휘둘렀다.
여광이 남경화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눈이 광기에 물들려는 찰나에도 남경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캉!
“흥!”
“허억…….”
남경화는 여광의 혼신이 담긴 일격을 너무나도 간단히 한 손으로 막아 냈다. 그리고는 경악해 하는 여광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찬 후 몸을 회전시키며 뒤에서 달려드는 친위대의 몸을 베었다.
“컥!”
“황건적 따위…… 얼마든지 덤비라지!”
남경화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나머지 친위대들에게 달려들었다.
여광은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왜소한 남경화의 등을,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등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보면서 절망에 가득 찬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 무림인! 대적할 수 없어…….”

***

서걱!
푸화아악!
“후우…….”
예전 진양 분타에서처럼 쉬지도 못하고 죽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피로는 덜했지만, 그래도 스무 시간이 넘도록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버틴다는 것 자체가 용한 일이었다.
황건적들의 피로 번들거리는 도신을 보며 잠시 한숨을 내쉰 제갈현은 뒤쪽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고요함에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아까부터 하나둘씩 기척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아무것도 안 느껴져.’
남포와 남경화가 개입했다는 것을 모르는 제갈현이었지만, 지금의 고요함이 긍정적인 상황이라 판단하고서는 황건적을 죽이고서 나온 아이템을 챙겨 넣었다.
“확실히 인간형이라서 아이템이 잘 나온다는 건가?”
거미들의 레벨이 낮은 탓도 있겠지만, 인간형 몬스터가 주는 것이 주로 같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아이템을 얻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단지 인간형이 아닌 몬스터들은 특수한 재료와 더 많은 경험치를 준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슥.
“흡! 차압!”
슈각!
아이템을 행낭에 챙겨 넣고 있던 제갈현은 자신의 뒤, 지척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구환도를 휘둘렀다.
‘없다!’
그러나 휘둘러진 구환도 끝에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제갈현은 옆으로 구르며 다음에 이어질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제갈현이 몸을 굴리며 피한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슥.
“…….”
그리고 느껴지는 싸늘한 금속의 감촉.
검날이 목젖에 닿자 제갈현은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 눈으로 그 검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제갈현은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좋은 움직임이다. 하지만…….”
휙.
제갈현은 자신의 목젖에 닿아 있던 검날이 치워지자 의아한 표정으로 검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보였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라든지 몸을 보아서는 흡사 20대처럼 활기와 패기가 넘쳤다.
“너무 느려. 나 같은 사람에겐.”
“……귀하는…… 누구요?”
여전히 미소를 입에 단 상태의 제갈현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팽이가 돌아가듯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구지? 분명히 황건적은 아니다…….’
누군지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졌던 이상할 정도의 침묵이 이 사내의 작품이었단 것 외에 제갈현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좋아, 좋아. 흔들리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 그 차분함.”
“누구냐고 물었소.”
하나 제갈현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평가라도 하듯 흡족한 어투로 말하는 사내였다.
“내가 누구인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난 자네의 생명의 은인일세.”
“죄송하지만…….”
중년의 사내는 재차 제갈현의 말에 대꾸했지만, 제갈현이 바라던 답은 아니었다.
동시에 저 중년의 사내의 말에서 자신에게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악의는 없다! 그렇다면…… 칼자루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터이고…… 그렇다면…….’
제갈현은 사내로부터 등을 돌렸다.
“응? 뭐하는 겐가?”
제갈현이 등을 돌려서는 걸어가려는 자세를 취하자, 남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아까의 근엄함도 잊고 다급히 불러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이렇게 먼저 굽히고 들어온 이상, 주도권은 내가 잡게 된다!’
제갈현은 사내의, 아니 남포의 말에 쾌재를 부르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를 도와주신 것은 고마우나 내 수련을 방해했기에 그렇소.”
일견해도 제갈현보다 스무 살은 많아 보이고, 실제로는 오십 줄인 남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제갈현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접근한 이상, 공손한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뻔뻔하게 말한 제갈현은, 말을 마치고서는 남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 수…… 수련?”
제갈현의 당돌한 답변에 남포는 황당한 듯 탄식을 내뱉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 이내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띠고서는 제갈현에게 말했다.
“이거…… 보기보다 많이 당돌한 젊은이구먼. 좋아, 내가 졌네.”
스윽.
“기…… 기다리게! 어딜 가는 건가!”
남포의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제갈현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남포는 다급히 제갈현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빙고!’
다급함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다년간의 비평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제갈현이었기에,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주도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 주도권이란 것은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쉬워질 수도, 어려워질 수도 있는 까다로운 것이었다.
“것참. 웃는 낯이랑은 다르게 꽤나 성격이 급한 친구일세. 내 자네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포는 제갈현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이 이미 제갈현에게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간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혹시라도 제갈현이 떠날까 싶어 애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미 페이스는 제갈현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남포의 한마디면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올 후기지수들이 즐비한데도 불구하고 저자세로 나오는 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부스럭.
바로 그때, 약간 떨어져 있던 덤불이 크게 흔들리면서 다섯 명의 황건적이 제갈현을 발견하고서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찾았다! 녀석이다!”
삐이이익―!
다른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호각을 불었으니 더 이상 녀석을 잡으러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황건적들의 얼굴에는 기쁨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 늙은이는 뭐지?”
남포를 발견한 다른 황건적이 중얼거렸다. 방법은 간단했다.
“필요 없어! 같이 죽여 버려!”
살인멸구(殺人滅口).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기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혹시라도 도망갈까 싶어 남포와 제갈현을 가운데에 두고서는 둥그런 포위진을 형성하였다.
“쳇.”
서서히 좁혀 들어오는 녀석들을 보면서 제갈현은 혀를 차 주고서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남포를 쳐다보았다.
“자, 당신.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통성명하기에는 힘들 듯싶은데…….”
제갈현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지척까지 접근한 데다가 그가 움직일 자리까지 예측한 남포가 그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도권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호기롭게 말한 제갈현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는 남포의 모습에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고 싶었지만…….”
스르릉.
살계를 금하는 것이 불도요, 그 자신이 소림의 속가제자인 터라 살인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도 무림인인 데다가 황건적한테만큼은 망설일 필요가 없기에 검을 꺼내 들었다.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도적놈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필요는 없겠지.”
우우웅―!
그리고 제갈현은 난생처음으로 그렇게 선명하면서도 황홀하고,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파괴력을 품고 있는 빛의 유형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검기……인 건가.”
검이 대기와 공명하며 울려 퍼진 소리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유형화된 검기에, 순간적으로 황건적도 굳고, 제갈현의 시선도 검기에 못 박히듯 박혀 버렸다.
“무림인…….”
그제야 남포의 정체를 파악한 제갈현이 남포를 쳐다보았다.
무림인.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림인이 드디어 보인 것이다.
“무…… 무림인이다! 도…… 도망가!”
“대…… 대인, 미천한 소생들이 대인을 몰라 뵙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들도 전혀 문외한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무림인들이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면서 불과 얼음을 부리는, 마치 신선과도 같은 존재였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빨리 왔던 길로 사라지는 황건적을 보면서 남포가 제갈현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됐지 않은가? 다시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봄세.”
제갈현이 잠시 검기에 한눈이 팔린 사이, 제갈현으로 쏠려 있던 추는 어느덧 평평하게 맞춰졌다.


3. 무공을 배우다(1)


“내 전인이 되게나!”
“싫습니다!”
“되면 좋다니깐요? 오라버니가 얼마나 인정받는 사람인데요! 당신 아니라도 부르면 와서 줄 설 사람이 수십이에요! 땡잡은 거라니깐?”
“싫습니다! 가셔서 줄 설 사람 중에 하나 고르면 되지 않습니까!”
“정말 자네 이렇게 나올 건가?”
“저랑 언제 또 만난 적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도와주신 은혜는 언제든지 갚을 터이니 그만 보내 주십시오!”
“에잇! 당신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요! 지금 그 은혜를 이걸로 갚으라니깐요?”
“엇! 잘못하면 아까 죽인 황건적처럼 나도 죽이겠습니다! 그리고 자의가 아닌 타의로 받은 은혜, 저도 당신들이 바라지 않는 다른 타의로써 은혜를 갚겠다 이겁니다!”
“당신 정말!”
“경화야! 진정하거라 진정해.”
남포는 길길이 날뛰며 화내는 남경화를 달래 화를 가라앉히느라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흥!”
실제 나이는 혼기가 훨씬 지난 20대 초반이었지만, 어릴 때 무공에만 집중했던 터라 정신연령은 사실상 10대 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남경화였기에 감정의 기복이 많이 심한 편이었다.
제갈현이 준수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그런 외모에다가 황건적을 상대하면서 보여 준 도술로 인해 호감이 얼마간 있었다. 더군다나 지워지지 않는 미소까지 있기에 망정이지 눈에 보이는 그것마저 없었으면 이미 어디 한두 군데쯤 부러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처음과는 달리 차분함은커녕 완전 개망나니 모습과 말로써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제갈현의 화술에 남포는 당황해 했다. 하지만 연륜이 있는 사람답게 남경화를 효율적으로 제어하면서 제갈현을 유혹하고 있었다.
‘더…… 조금만…… 더…….’
그 와중에 겉으로는 망가지면서 땡깡을 피우고는 있지만 제갈현의 이런 행동은 계산된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적합한 태도라 판단한 것이다.
고육지계(苦肉之計).
연륜이 있는 만큼 속내를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은 남포와는 달리, 남경화는 순진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일부러 그녀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진정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