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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15화)
3. 무공을 배우다(2)
조금이라도 이 ‘거래’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수년간 내로라하는 학자와 비평가 들과 사투를 벌여 왔던 제갈현에게 있어 남경화의 화를 돋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더군다나 그 연계 효과로 남포까지 허술해지는 것이 보임에야…….
‘대충 화를 돋웠으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슬슬 자초지종을 불기 시작하겠지.’
솔직히 자초지종도 모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 제자 노릇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속사정을 끌어내기 위해 강하게 나가는 것이기도 했다.
“난 전 무림맹의 비호단주이자 현재는 하남표국의 국주인 남포라고 하네.”
‘빙고!’
다짜고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인’이 되란 말부터 꺼내던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제대로 된 자초지종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쉰셋이네. 젊은 시절에는 소림에 있느라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에 지금 이 나이까지 부인 하나, 자식 하나 없이 살아왔지. 이제는 슬슬 후계자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는데…… 때마침 자네가 눈에 띈 거네. 솔직히 자네 정도의 재능을 가진 아이를 좀 더 일찍 찾았으면 아쉬울 게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찾았으니 다행이란 생각이네. ”
“고작 그 이유입니까?”
남포가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 설명이 너무나도 진부하고 뻔한 것이었기 때문에 제갈현에게는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는것도 아니고, 단순히 ‘재능 있어 보이는’ 후계자를 찾았을 뿐인데, 이토록 막무가내로 전인으로 들이려 안간힘을 쓰다니…….
“…….”
“오라버니?”
하지만 더 말을 잇지 못하는 남포의 모습에서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제갈현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그저 지그시 남포의 얼굴을 주시했다.
“좋아. 자네에게 다 말해 주지.”
얼마 있지 않아 결단을 내린 듯 남포의 눈에 결의가 서렸다. 그 뒤에 남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남포의 겉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하남표국을 그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굳건한 단체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냥 소림사의 후광을 업어 하남성을 주름잡고 있는 표국으로 알고 있던 제갈현으로서는 소림의 속가제자답지 않게 엄청나게 야망이 큰 남포의 모습에 땀이 삐질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포의 국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소림사의 속가제자이니만큼 이제 와서 장가를 들 수도 없었다. 결국 뛰어난 재능을 가진 후계자를 받아 기름으로써 그 후계자가 무림에 이름을 떨치게 되고, 부수적으로 따라올 여러 가지 명예들을 하남표국의 이름으로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깐, 남 대협은 이 중원의 표국을 휘어잡고 뒤흔들 수 있는 그런 대국주가 되고 싶다, 뭐 이런 겁니까?”
앞뒤 다 잘라먹고 대충 요점만 간추려 직설적으로 말하는 제갈현이었다.
남포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로 멋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한편으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적을 망설임 없이 죽이는 모습에 잔인하다 생각했었다. 상처를 입어도, 포위가 돼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끈질기다 생각했었다. 죽여야 할 때와 빠져야 될 때를 알고 실천하는 모습에 치밀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대포에다가 무례하고, 망나니 같은 모습까지. 예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벙 찔 수밖에 없는 남포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대를 거는 이유는 흐트러지지 않는 눈빛과 바뀌지 않는 미소 때문이었다.
남경화는 남포가 왜 그렇게 핏대까지 올리고, 참아 가면서까지 제갈현을 끌어들이려는 것인지는 잘 몰랐다.
전후 사정을 다 말한 남포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제갈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전, 싫습니다!”
“뭐…… 뭣?”
“당신! 너무한 거 아니에요? 보아하니 무공도 안 배운 거 같은데……. 아까 황건적들 죽는 거 못 봤어요? 무공을 쓸 줄 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고요!”
거듭 이어진 제갈현의 거부 의사에 남포와 남경화를 핏대를 올리며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제갈현은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배우려는 것은 기를 느끼는 방법과 그것을 운용하는 데에 따른 방법이지, 무공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몸을 쓴다는 것이 다른 것이지 무공도 엄연한 ‘학문’의 한 종류였다. 무공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인데, 다른 종류의 무공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큼 제갈현에게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싫습니다!”
“왜! 대체 왜 그러는 건가!”
“이건 기연이에요, 기연!”
“싫습니다!”
자신들이 왜 이렇게 제갈현에게 매달리는지는 그들 스스로도 몰랐지만,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에,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는 남포와 남경화였다.
“후우……. 그럼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말을 들어줄 텐가?”
제발 내 전인이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웃긴 꼴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주도권은 제갈현이 굳건히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소위 말하는 ‘마이 페이스’ 식 전법에 완전히 휘말린 남포와 남경화였다.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말이 나오자 제갈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한껏 더 화사하게 만들며 남포와 남경화를 쳐다보았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기를 다루고 느끼는 법과 신법, 보법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전인을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머엉…….
제갈현의 당돌한 제안에, 남포와 남경화는 순간 얼이 빠진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고 싶은 것을 골라서 배운다?
무공이란 것이 원래 딱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포와 남경화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우다 보면 다 배우고 싶어지겠지!’
‘당신은 이제…… 앞으로 심심할 것 같지는 않다니깐? 호호호.’
남포는 자신이 창안한 무공의 뛰어남을 믿었고, 남경화는 호감과 흥미가 뒤섞인 눈길로 제갈현을 쳐다보았다.
“좋네. 그 제안, 받아들이기로 하지.”
***
하남표국
업에서 진양만큼이나 먼, 아니 훨씬 더 멀리 있는 대도시인 허창에 자리한 하남표국은 그 크기 자체가 애초부터 제갈현이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훗날 조조의 위나라의 수도이자 황제가 천도해 중국의 거대 대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는 허창은 185년인 그때에도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성세를 자랑하는 하남표국은 일견하기에도 유동 인구가 많고 활발해 보였다.
본문인 소림사가 있는 숭산과는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소림사의 가호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보험과도 같았기에 하남 제일 표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혀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그 국주는 무림에서도 일절로 소문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고객들의 신용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엄청…… 크군.”
현실에서도 단일 규모로 이 정도의 거대한 건축물군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기본 2, 3층은 되는 전각들이 하남표국의 본관 터를 가득 매우고 있었으며, 건물을 구성하는 외곽 구조물 하나하나에도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 건물들 사이로 하남표국의 사람들로 보이는 수많은 이들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고, 한쪽은 의뢰 접수를 받는 곳인 듯 많은 의뢰인들로 북적이는 것이 보였다.
“전 어디로 가야 되는 겁니까?”
천천히 하남표국으로 접근해 감에 따라 제갈현은 남포와 남경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한겨울로 접어든 터라 한마디, 한마디씩 입을 열 때마다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고, 옷도 두껍게 입고 있었다.
하나 셋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모두 평온해 보였다. 남포와 남경화야 내공으로 추위를 쫓아낼 수 있으니 멀쩡할 수 있었고, 제갈현 또한 사냥할 때의 경험을 십분 살려 비교적 추위로부터 의연하게 버틸 수 있었다.
“자넨…… 내 전인이 되었으니 아마 하남표국 내에 따로 거처가 생길 걸세.”
“그럼 절대로 다른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사전 교육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네, 알았어.”
배우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요구를 하는 제갈현의 모습에 두 손 다 들었다는 듯이 남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국주님.”
“오랜만이오, 총관.”
그렇게 북적이는 전각 사이를 누벼 국주의 거처로 보이는 큼지막한 건물 앞에 도착한 일행은 총관의 인사를 받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소림사의 십팔나한들과 현공 대사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형이?”
총관의 말에 남포는 얼굴에 반가운 듯 화색을 띠며 안으로 들어갔다.
제갈현도 ‘소림사’와 ‘십팔나한’이란 소리에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면서 남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소림사(少林寺).
중국하면 떠올리는 것이자, 지난 20세기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꽤나 유명해진 사찰 중에 하나라고 알고 있는 제갈현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소림사란 곳에서 불도를 닦으며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 있는, 역사가 유구한 곳이란 것을 어딘가 책에서 본 것 같았다.
‘읏…….’
그리고 총관이 문을 연 순간, 진중하면서도 묵직한 기세가 제갈현의 전신을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갈현은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안을 둘러보았다.
‘저들인가?’
먼저 들어선 남포는 방 안의 기세를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 19명의 중들 중에서 그와 비슷한 연배의 승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앉아 있는 18명의 승려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주변을 압박하는 것이리라.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고 정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니,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것 같았다.
‘십팔나한이라는 건가……. 과연…….’
십팔나한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제갈현이었지만, 남포의 반응을 보니 십팔나한이 한꺼번에 소림사 밖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거의 유래가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십팔나한 개개인의 실력으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들이 펼치는 십팔나한진이야말로 무림에 알려진 진법들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무림 정상급 고수라고 해도 십팔나한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 십팔나한들이 소림사를 떠나 현공 대사란 인물을 호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 현공 대사가 가지고 온 소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할 터였다.
그렇게 차례차례 십팔나한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제갈현은, 자신을 부르는 남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형, 이쪽은 제 전인인 제갈현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갈현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면서 현공 대사에게 인사했다.
“아미타불. 만나서 반갑소, 시주.”
십팔나한들과는 달리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현공 대사였지만, 이전에 보여 준 남포의 신위를 볼 때, 그와 사형제지간인 현공의 무공 수위가 낮을 리는 없었다.
오싹.
순간 현공 대사의 눈에서 시퍼런 정광이 피어오르는가 싶어 제갈현은 오싹함을 느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느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과연…… 근골은 좋아 보이나…….”
현공 대사가 제갈현을 힐끗 살펴보고서는 남포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제갈현은 자신을 물건 보듯이 재 본 것이라는 사실에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부처를 믿는 중들이라 들었건만, 상당히 무례하군.’
사람의 모습을 무슨 수로,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투나 눈초리가 마치 상품을 보고 평가하는 것 같아서 당사자인 제갈현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포의 사형이었기에, 그의 도움을 받기로 한 이상 현공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대문파 중에 하나인 소림사와 감정의 골을 만들어 좋을 것이 없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사형,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나오신 겁니까?”
남포는 제갈현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오랜만에 재회한 현공 대사가 마냥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갈현의 예상과는 달리 현공은 무공으로 이름이 드높은 것이 아니라 가진 바 지략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것이다.
무승이 많은 소림사이기는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불도를 닦고 경전에 정진하는 불승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현공은 가진 바 무공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탁월한 지략을 보임으로써 현 소림방장의 최측근이자 천뇌불(天腦佛)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소림사 내에서 보내는 그가 산문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소림사 내에 무슨 문제가 생겼거나, 일 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거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서는 그가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림맹 회의가 열리는 달은 8월, 지금이 12월이었으니 무림맹 회의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소림사에 문제가 생겼네.”
“소림사……에 문제라뇨?”
현공의 말에, 남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