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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17화)
3. 무공을 배우다(4)
사일비정(斜日非停)
홍천막운(紅天膜雲)
인체의 혈도와 내공심법이 적힌 곳을 넘겨서 초식이 나와 있는 부분을 펼쳐든 제갈현은, 얇은 책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단 두 개의 초식뿐이었지만, 초식의 운용법을 써 놓은 설명만 해도 족히 7장은 넘어가는 것을 보니, 보통 난해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빛살과도 같은 빠름으로,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날카로움으로 적을 꿰뚫는다.
그것이 사일비정(斜日非停)이었다.
허공에 그어진 빛살들이, 이리저리 그어진 빛살들이 모든 공격을 막는다.
붉은 하늘을 구름마저도 뒤덮는다.
바로 홍천막운(紅天膜雲)이었다.
“흐음…….”
끝까지 사일비정과 홍천막운을 읽은 제갈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책자를 덮었다.
자신의 머리가 나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제갈현이었지만, 책자 속의 내용은 그로서도 한숨짓게 할 만큼 난해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할수록 위력이 강하다는 것이겠지.”
몇몇 비급들은 은유적인 표현을 이용해 그 심득을 풀어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는 하나, 노을번천도는 아예 달랐다.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게끔 자세하게 그림까지 곁들여서 풀어진 두 개의 초식은 이해할 수 있음에도 난해한, 이중성을 띤 것이 노을번천도의 초식이었다.
띠링∼!
[노을번천도[夕陽繁天刀]를 습득하실 수 있습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책자를 덮음과 동시에 제갈현의 머릿속에서 미성이 울려 퍼졌고, 책자에서도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예.”
어차피 익혀야 하는 것이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기에 이제서야 승낙을 하는 제갈현이었다.
[직업이 ‘무림인’으로 전환됩니다.]
[계급이 ‘낭인’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소속이 ‘중립’으로 설정되었습니다.]
[M.P가 ‘갑자(甲子)’, ‘년(年)’으로 수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기(氣)’를 느끼지 못해 M.P를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노을번천도를 익힘과 동시에, 직업과 계급, 소속 등의 변화가 생김을 알리는 말이 동시에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상태창.”
이 름:제갈현
레 벨:29 ―아시아― 계 급:낭인
칭 호:악멸도(惡滅刀)(근력+3, 인내심+3)
직 업:무림인―망아지경(忘我之境)
소 속:중립
H.P :560 내 공:25年(635)
근 력:63 민 첩:58
체 력:65 지 능:119
손 재 주:13 동체시력:15
인 내 심:19 맷 집:7
잔여 상태치 : 0
“분명히 내공 수치는 있는데 쓸 수가 없다니…… 정말 ‘기’란 것을 느껴야 하는 건가?”
아까 분명히 ‘기’를 느끼지 못해 M.P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 것을 보면, 따로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쳇! 남포를 찾아서 그나마 다행이군.”
제갈현은 투덜거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아직 밖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오후의 활발함이 전각 사이를 메우고 있었지만, 제갈현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는 잠에 빠져들었다.
***
“화웅 장군.”
“……예, 왕 노사.”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깨끗하디 깨끗한 달만이 얼굴을 빼꼼히 비추고 있는 시각이었다. 어슴푸레한 호롱불만이 사물의 윤곽을 비추고 있는 대청 안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화웅 장군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족히 육 척은 넘어 보이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는,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갑주를 걸쳤고, 갑주 사이로 드러난 팔에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아 있었다.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단련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화웅.
제갈현과 헤어졌던 화웅이 커다란 대청 안에서 초로의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왕 노사라 불린 노인. 화옥을 먼저 데려갔던 그 왕 노사였던 것이다.
왕윤.
한(漢) 황실에서 사도(司徒)의 자리에 앉아 있는 고위 관료에, 오랜 기간 동안 쌓아 온 저력이 만만치 않은 가문의 수장이다. 또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성격으로, 한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자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왕윤의 부탁이란 소리에, 화웅은 의문을 표하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화옥이란 아이, 장군의 딸이 총명하고 미색이 매우 뛰어나더군. 대의(大意)를 위하여 내 별도로 그 아이에게 가르침을 내리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는데, 어떻소이까?”
“화옥이를요?”
왕윤의 뜻밖의 갑작스런 제안에, 화웅은 잠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리 제갈현과 헤어졌고, 그 이후로는 녀석의 생사를 알지 못해 의기소침해 하는 화옥의 모습을 잠시 생각한 화웅은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멀쩡히 돌아오지 않기만 해 봐라!’
“좋소, 화웅 장군. 내일 내 가솔들이 댁을 방문하리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왕윤을 뒤로하는 화웅의 머릿속에 제갈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치잇! 바보 오빠!”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 안에서, 그 방의 주인답게 화려하게 장식된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있었다. 아니 여인으로 변모해 가는 단계에 있는 소녀는 한 손에 쥐인 낡은 치맛자락을 꼬깃꼬깃해질 정도로 잡은 채 투덜대고 있었다.
동그란 두 눈은 호수라도 담을 양 맑은 빛을 담고 있었고, 오똑하게 솟은 콧날 아래 자리한 새빨간 입술과 그 안에 숨은 가지런한 치아, 그리고 살구를 그대로 염색해 놓은 양 뽀얀 피부는 소녀가 미인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냥 아버지를 따라오면 되는데…… 왜 혼자 간 거야! 칫!”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 듯 혼자 볼을 부풀린 상태로 연신 아랫단이 찢어진 치맛자락을 보며 투덜거리는 소녀였다. 그녀는 깨물어 주고 싶은 앙증맞음과 아름다움 또한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치맛자락의 색은 놀랍게도 제갈현의 구환도 손잡이에 매인 천과 똑같은 색의 그것이었다.
화옥.
그녀가 일전에 살던 움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곳에 앉아 있었다.
“히잉……. 보고 싶은데……. 현 오빠…….”
그녀가 객잔을 떠나 이곳 낙양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낸 지도 어언 한 달여.
그동안 귀족이나 공주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귀한 대접과 호사스런 생활을 누린 그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생활이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지날수록 커지는 제갈현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로 하여금 모든 것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드르륵.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홀로 칭얼대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손에 쥐인 투박한 치맛자락을 엉덩이 밑에 숨기고서는 언제 칭얼댔냐는 듯 정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아빠? 뒤에 저 사람들은 뭐예요?”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화웅이 일련의 무리들과 함께 들어오자 화옥은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옥이 낙양의 이 저택에 와서 본 사람들이라고 해 봤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갑자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화웅의 모습에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때 화웅의 뒤에 서 있던 무리에서, 곱게 차려입은 한 중년의 미부가 걸어 나오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앞으로 아가씨의 교육을 맡게 된 미접(美蝶)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육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죠?”
화옥은 화웅에게 의문에 가득 찬 시선과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웅의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왕 노사께서 부탁하셔서, 오늘부로 아가씨께서는 왕 노사의 저택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 마련된 특별 장소에서 서예와 춤 등 앞으로 필요한 것들을 배우실 겁니다.”
미접의 옆에 서 있던, 등 위에 쌍검을 가로질러 질끈 묶어 놓은 애꾸인 여자가 무표정한 말투로 화옥에게 말했다.
“……앞으로 필요한 것들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그건…….”
“시끄러워요. 당신들에게 물은 것이 아니니 빠져 주세요.”
미접이 화옥의 질문에 답을 해 주려 하자, 화옥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노려봤다.
이에 미접의 몸이 흠칫 굳고서는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왕 노사의 부탁이다.”
“하지만…… 아버지랑도 떨어져 있어야 되는 건가요?”
무뚝뚝하기만 하던 화웅의 표정이 처연함으로 일렁이는 화옥의 표정을 보자 순간 흔들렸다.
“미안하다…….”
“……차라리 잘된 걸요. 아버지도 바쁘고…… 현 오빠도…… 그렇고. 뭘 배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갈게요.”
애써 화옥의 표정을 외면하며 말하는 화웅을 보면서 화옥은 처연하고 소박맞은 아낙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화웅은 더 이상 보지 못하겠는 듯 화옥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늘부터 아가씨는 ‘초선’이란 이름으로 불리실 것입니다. 그럼 가시죠.”
화웅이 몸을 돌리자 아까 애꾸눈의 무사로 보이는 여자가 걸어 나왔다.
화옥 역시 별말하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초선(貂蟬).
달조차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게 만드는 희대의 미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내가 너에게 가르칠 것은 총 네 가지다.”
“…….”
“경공(輕功)과 보법(步法), 기를 느끼는 법과 혈도에 관한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예.”
“휴……. 알았다. 그만해라 이놈아! 그렇게 꽁해 있으면 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란 말이냐!”
뚱한 얼굴의 제갈현을 보면서 남포가 드디어 못 참겠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길래 누가 이 사실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라고 했습니까?”
분명히 언제나 똑같은 미소를 띠고는 있었지만, 아우라라고 해야 할까, 기분에 따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갈현의 기분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남포가 말했다.
지금 제갈현의 미소는 분명한 분노였다.
“글쎄, 내 잘못뿐이 아니라니깐? 그리고 내가 제자를 받으러 이 표국을 비웠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던 일이라니깐 자꾸 그러는구나.”
처음의 마치 신선 같던, 무언가 있어 보이던 그 모습은 어디로 집어던진 것인지, 시골 잡배나 쓸 법한 말투를 쓰고 있는 남포였다.
제갈현은 역시 그 동생에 그 오빠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러니깐 내가 왜 그 삼룡삼봉이라는 떨거지들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까!”
웃는 낯 위로 힘줄 하나를 솟아오르게 하며 제갈현이 소리쳤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남에서 제일 큰 표국인 데다가, 무림의 고수가 국주로 있는 하남표국의 국주가, 제자를 구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다. 전인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는 새로운 고수의 등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대의 후기지수, 즉 제갈현의 나이 또래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녀석들 중 여섯 명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남포에게 정식적으로 요청해 온 것이었다.
“나도 표국을 경영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삼룡삼봉이라는 녀석들의 얼굴이 아니라, 녀석들의 뒤에서 버티고 있는 거대 문파와 오대세가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승낙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넌 그들이 죽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뭐 이리 말썽인 거냐?”
“전 수련을 하러 온 겁니다. 다른 녀석들이랑 하하호호 웃으면서 한가롭게 친분이나 쌓고 떠들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인생 수련이라고 생각해라! 강호란 곳이 혼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면, 나도 표국이나 비호단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길……. 누가 혼자서 산다고 했나.”
남포의 말에 반박하던 제갈현은 이내 혼잣말을 하며 더 이상 언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계속해서 뭐라 투덜대 봤자 이미 한번 정해진 것을 돌이킬 수 없었으니, 그들을 만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동시에 다시금 이 세계에 대해서 속으로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준비된 대답이 아니라 인공지능 스스로가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상황 상황에 맞추어 창조까지 할 수 있다니! 사람하고 똑같지 않은가!’
비록 제갈현이 중도에 그만두기는 했어도, 남포와의 짤막한 언쟁에서 남포란 인공지능은 결코 준비된 답변이 아닌 제갈현의 주장에 맞춰 바꿔 대응했다.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재밌어! 역시!’
투덜대느라 숙인 제갈현의 눈동자 너머로 생기 가득한 눈빛이 반짝이다 금세 사라졌다.
“흠……. 흠……. 대충 일단락 지어진 것은 같지만 그래도 너무 내 뜻대로만 한 것 같으니 좀 미안하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피할 방법이 없는데……. 한번 들어 볼 테냐?”
이내 이어진 남포의 말에 제갈현의 눈이 더욱더 빛날 수밖에 없었다.
삼룡삼봉이란 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일지 솔직히 궁금하기는 한 제갈현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방법입니까?”
순식간에 태도가 바뀐 제갈현을 보면서 남포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바꾸고서는 입을 열었다.
“넌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너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아니고, 되레 이것을 완성하기만 한다면 넌 거의 완벽하게 기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너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실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겠느냐?”
남포의 말에 제갈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잃는 것도 없는 데다가, 오히려 더 쉬워진다는 데 거부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 말을 한 자도 놓치지 말고 듣거라. 이제 갓 무공에 입문한 너이니, 기를 최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수순일 터.”
이전과는 다른 진중한 남포의 모습에, 그리고 그가 지금 가르치려는 것이 후의 자신에게 있어 막대한 도움이 될, 아니 가장 기초적인 기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제갈현이었기에 그 또한 귀 기울여 남포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너에게 방법만을 가르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너는, 너 나름대로의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자연력으로 소위 우리가 ‘기’라 불리우는 삼라만상의 기운을 다스리고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기를 느끼는 방법은…….”
쉬지 않고 기를 느끼는 방법에 대하여 듣고 있던 제갈현의 얼굴에 한 줄기 의혹이 서서히 서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경악의 표정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리고 남포의 말이 끝나 갈 때 즈음, 제갈현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더듬거리며 남포에게 말했다.
“무…… 무공은 차력이었던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