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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24화)
4. 게임 생(Game 生)(3)


하남표국에 도착한 지 어언 일주일이 다 됐는 데도 왜 날 안 찾나 싶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날 ‘연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곤륜의 제자가 이제야 제갈현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보자면 정확히 지금부터 남경화와 한 약속이자 임무의 시작이었다.

임 무:남경화의 남자 친구
설 명:남포의 여동생인 단월화(斷月花) 남경화는 자신을 유혹하고자 애쓰는 곤륜 제자인 영돈이 부담스럽고 싫다. 곤륜파라는 후광 때문에 직접적으로 싫다는 표시는 못 하기에 가짜 남자 친구를 내세워 곤란한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
달성목표:곤륜 도사가 남경화를 단념하고 하남표국을 떠나야 한다.
보 상:남경화의 호감도 상승, 무공서 1종, 10금.

“휴우…….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더럽게도 없다고 해야 하나.”
임무 정보창을 끈 제갈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된 것이 시작하고 나서부터 받은 임무들은 최소 C급에서 최대는 A급까지였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레벨이 높은 상태에서의 고급 임무라면 그 보상도 크고, 힘든 레벨업에도 도움을 주는 만큼 쌍수 들고 환영했겠지만, 거의 초보나 다름없는 현재의 제갈현의 레벨로서는 짐이었다.
곤륜의 일대 제자 영돈.
나이가 서른 남짓인데도 불구하고 장문인의 직전 제자 다음으로 높은 일대 제자라면, 나중에 크면 거의 장로급에 필적할 정도의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대외적인 곤륜파의 일이라든지, 세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곤륜파의 무력 집단인 제마이십사검수(制魔二十四劍手)들도 일대 제자로 이뤄져 있었으니, 일대 제자란 위치가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레벨로 따지자면 140인 명인급의, 일류에서 절정의 사이이며, 내공만 봐도 일 갑자 반에 이르는 절륜한 실력을 가진 것이 영돈이었던 것이다.
이제 반 갑자에, 갓 무공에 입문한 제갈현은 조족지혈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제갈 소협!”
“응? 남 소저시군요.”
영돈이 제갈현을 찾다는 소식을 그녀도 들었던 것일까. 경공을 써서 달려온 듯 조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남경화가 제갈현에게 걸어왔다.
“약속, 잊지 않으셨죠?”
눈을 반짝 빛내며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하는 남경화였다.
제갈현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면서 말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인으로 가장하는 것. 지금부터 시작인 겁니까?”
제갈현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채 남경화에게 물었다.
“네. 다행히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 영돈이라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해요. 지금부터 저랑 같이 들어가시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턱.
꽉!
“뭐……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에 제갈현은 남경화의 팔을 잡아서는 자신의 팔에 걸어 팔짱을 꼈다.
“연인 티를 내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깐 최대한 ‘연극’을 해야 하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아 참, 그리고 이제부터는 남 소저가 저를 ‘가가’나 ‘현랑’으로 바꿔서 부르셔야 합니다.”
남경화는 당황스러움과 외간 남자와 갑작스럽게 팔짱을 끼게 됐다는 수줍음에 얼굴을 붉혔다.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해야겠죠, 경화?”
제갈현은 남경화를 보며 물 흘러가듯 자연스레 말하면서 이내 눈을 찡긋했다.
부드러운 미소에 흑발을 늘어뜨리고, 총기 넘치는 눈을 찡긋거리는 제갈현을 본 남경화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은 기분에 붉어지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현랑.”

***

‘대……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두근두근.
남경화는 제갈현과 팔짱을 낀 후부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나이 방년 22세.
다른 집안의 자녀 같았으면 일찍이 짝을 만나 혼인을 했을 나이였다. 하지만 무림인에게는 그다지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여자 후기지수 중에서는 수위에 드는 그녀인만큼, 장신구보다 검을 더 좋아하는 검광(劍狂)이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구애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나 이상하게도 지금 그녀의 뇌리 속에는 지금 옆에 있는 제갈현의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것도 그녀가 부탁을 해서 지금 이러는 것인데도 말이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드러운 미소,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와 윤기 흐르는 탐스러운 풍성한 흑발. 더불어 현기가 느껴지는 맑은 눈까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어떤 매력이 제갈현에게는 있었다.
또 저번에 지주동에서 보았던 제갈현의 도무는 차라리 하나의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남경화의 뇌리 속에 남아 있었다.
맨처음엔 호기심이었고, 그다음은 귀찮은 곤륜 제자를 떼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 그녀였지만, 제갈현이란 존재가 색다른 존재로 그녀의 가슴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꼬옥.
“먼저 들어가세요, 경화.”
“네…….”
제갈현의 옷자락을 꽉 쥔 남경화는 그의 지시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선 제갈현의 얼굴에는 아니나 다를까, 그런 남경화의 심경 변화를 모두 알고 있었던 듯 미소에서 사악함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순진한 아가씬데?’
남경화의 태도를 유심히 지켜본 제갈현은 그녀의 변화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여자와 남자 간의 유교적 개념이 강한 중국에서, 현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제갈현에게 팔짱이란 스킨십이 큰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남경화에게는 감정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도 있는 그런 행동이었던 것이다.
‘발판! 미안하지만 내 웅지를 펼치기 위한 발판으로써 하남표국을 이용하는 수밖에.’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갈현 스스로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단일 세력으로 최고가 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고에 오르기 위한, 그리고 올라서도 그 자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세력! 힘!
그것이 하남표국이 되었든, 아니면 이용 수단이 되었든 간에 무명소졸인 제갈현에게 하나의 연고를 만들어 놓는 행위 자체는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그 방법으로 여자를 유혹한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방법이 뭐 중요하랴. 중요한 것은 결과인 것을.
덜컥.
전각 내 남포의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제갈현은 익숙한 풍경과 더불어 집무실에 마련된 탁상 한 켠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사내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가 곤륜 제자인가? 생각보다…… 괜찮게 생겼는데?’
짙은 청록색과 연청색이 적절히 섞여 있는 도복을 정갈히 차려입고, 이마에는 영웅건을 둘렀으며,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수려한 이목구비는 남성미를 물씬 풍겨 내고 있었다.
남경화가 그 남자를 거부한 것이, 보기 역겨울 정도로 못생겼거나 그런 종류일 줄 알았는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랐던 것이다.
“오오. 왔나 자네?”
이미 일련의 ‘연극’에 대해서는 남포에게도 일러두었기에, 남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친근한 말투로 말했다.
제갈현은 그 연기력에 속으로는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마주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밤새 강녕하셨는지요.”
“그래. 어서 저쪽에 앉도록 하게. 경화야, 너도 앉으려무나.”
다정해 보이는 제갈현과 남포의 모습을 보며, 영돈의 얼굴이 한층 더 굳어졌다.
‘비…… 빌어먹을. 이미 남 대협도 인정한 사람이란 말인가.’
처음 같이 들어올 때만 해도 눈에서 불똥이 튈 정도로 제갈현을 쏘아본 영돈이었지만, 남포와 제갈현의 모습을 보자, 아니 정확히는 남포가 제갈현을 대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감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스스로가 곤륜의 일대 제자이며 곤륜의 제마이십사검수 중에서도 수위에 들고, 제마검이란 명호까지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일검단월 남포의 명성과 실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런 남포에게 인정을 받는 남자라니…….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지! 남 대협의 인정을 얻어 내고야 말 테다!’
산속에서만 수련해 무공을 빼놓고서는 다른 면에서는 문외한에 미숙하기 그지없는 영돈은 그 무식함으로 견뎌 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무림인은 무공으로 인정받는 법!
“인사하거라, 이쪽은 곤륜파의 일대 제자이자 곤륜의 제마이십사검수로 활동 중인 제마검 영돈 도사님이네. 도사, 이쪽은 내 미흡한 제자인 악멸도 제갈현이라 하오.”
드르륵.
“곤륜의 제마검 영 도사를 만나게 돼서 영광이오! 본인은 제갈현이라 합니다.”
“본인은 영돈이라 하오. 남 대협이 인재를 얻으셨다고 하길래 왔는데, 과연 남 대협께서 탐낼 만한 재능인 것 같소.”
“과찬이십니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했던가. 각자 본심과 의중이 달랐으니, 두 사람을 보는 남포와 남경화로서는 고역이었다.
“내, 제갈 소협을 보고자 남 대협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남 소저 때문이오.”
생각보다 대단히 직설적으로 곧장 용건으로 넘어가는 영돈이었다.
“남 소저 때문이라뇨?”
역시나 놀란 눈을 한 남경화를 돌아본 제갈현은 미소를 띤 채로 되물었다.
“난, 남경화 소저를 사모하오.”
“그러시군요.”
“……!”
“아…… 아니…….”
엄청나게 직설적인 영돈의 말에, 제갈현은 되레 당연하다는 듯이 ‘그래서 뭐?’ 식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당사자인 남경화나 남포는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버버거리는 남포와 입만 벙긋거리지 말은 하지 못하는 남경화를 본 제갈현은 약간 놀란 기색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영돈의 시선에 응수했다.
“놀라지…… 않소?”
영돈이 물음에 제갈현은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영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이 여성을, 그것도 경화같이 아리따운 소저를 놓고 그런 마음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 소저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받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남성으로서의 기준을 의심해 봐야 겠지요.”
“그…… 그건…… 그렇소만…….”
“좀 아리따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백옥 같은 피부에, 폭포수 같은 탐스러운 이 머릿결. 탱탱한 피부에 큰 눈망울과 코,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은 물론, 무공으로 다져진 군살 없는 몸매까지.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그…… 그렇소.”
이야기의 당사자, 즉 남경화를 앞에 앉혀 놓고서, 그것도 이미 부끄러움에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녀를 놓고 할 만한 이야깃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제갈현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만 영돈이었고, 이야기를 시작한 본래의 목적은 저 멀리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산속에서 이십 년이 넘게 무공만 수련하다가 나온 영돈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제갈현에게는 한낱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뭐든 일에는 기세가 중요한 법. 이미 기세가 꺾여 버린 영돈은 제갈현에게 있어서는 그냥 먹기 좋은 밥일 뿐이었다.
‘자…… 잘한다!’
남경화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발가벗기고 있는 것처럼 적나라하게 말해 버리는 제갈현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자신이 이쁘다는 칭찬이고, 찰거머리 같았던 영돈이 순식간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근데…… 내가 예쁘긴 예쁜 건가?’
제갈현의 말을 곱씹으며 그녀는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히 봉긋이 솟아 있는 가슴과 그 아래로 떨어지는 잘록한 허리선, 탱탱한 둔부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다리 선까지.
흡족하게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경화를 두고 제갈현의 입이 열렸다.
“우리 경화가 매력적이라는 말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퍼뜩!
‘제길! 이…… 이럴 수가! 지금 이야기를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잖아!’
정신없이 제갈현의 화술에 끌려다니던 영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모든 것은 지나간 후였다.
‘무공으로라도 본때를 보여 줘야지. 억울해서 도저히 안 되겠어!’
이미 남포의 인정 같은 것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을 앗아 간 녀석에게 뭐라도 하지 않고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냥 물러선다면 억울함에 주화입마에 빠질 정도로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복수를 하기로 한 영돈은 찻잔을 들어 차를 따르면서 내공을 담아 제갈현에게 건넸다.
우우웅―!
영돈의 심후한 진기가 잔에 주입되자 찾잔 안의 찻물이 진동음과 함께 회전하기 시작했다.
영돈은 겉으로 웃으며 찻잔을 제갈현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이 영 모가 제갈 소협 같은 걸출한 인재를 만나 한없이 기쁘오. 술이 없어 아쉽지만 차로나마 성의를 표하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소이까?”
“내공이 담긴 잔이다! 네 내공으로는 턱도 없다!”
영돈이 잔을 내밈과 동시에 남포의 전음이 귓가를 때렸다.
이런 방법은 고수들끼리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하는 ‘인사치레’ 같은 것이었기에 안 받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