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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10화)
4. 카챤터스(3)


하연은 지하철을 갈아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정욱이 사는 동네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정욱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겐 찾아야 할 존재가 있었다.
‘갑자기 기척이 지워졌어.’
얼마 전 정욱을 처음 대면하고 나서 보았던 여자의 기운을 하연은 기억해 두었었다.
혹여 정욱과 자신의 위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을까 싶어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사방팔방 기운을 찾아 뒤지고 다니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지워져 버렸다.
‘그녀가 설마 카챤터스로 간 건가.’
하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곳은 카챤터스밖에 없었다. 카챤터스의 상인들은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하연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카챤터스로 갔다니. 왜?’
그것은 그녀가 하연을 그만큼 두려워했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비록 기운을 여과 없이 내뿜었다고는 하더라도 덥썩 카챤터스로 향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든든한 빽이 있어 보였고 비록 자신이 강한 기운을 내뿜었다고는 하더라도 카챤터스에서 구슬을 살 정도의 능력자가 뒤를 보아준다면 한번 자신에게 도전을 해 볼 만도 했었던 것이다.
‘뭔가 다른 것이 두려웠나?’
하연은 정욱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미세한 오해를 알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방향을 틀었다.
카챤터스가 개입했다면 그녀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했다.
상인들에게 이만한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생각보다 더욱 대단한 능력자가 그녀의 뒤를 봐주고 있을 것이었기 분명했다.

***

별안간 혼돈이 쥔 무기가 파공성을 내며 길쭉해졌다.
처음 보는 기괴한 현상이었다.
정욱은 예상치 못한 혼돈의 일격에 공격을 접으며 뒤로 성큼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무기가 정욱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뭐지, 이놈?’
평소처럼 정욱은 밤마다 몰려드는 혼돈들을 잡기 위해 기운을 추적하고 있었다.
실체를 가진 환영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갔기 때문에 혼돈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제 부족함이 없었다.
혼돈의 기운이 느껴지면 빠른 속도로 추적해 녀석들을 처단하고 구슬을 흡수하는 일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기운이 조금 짙은 녀석이었는데 직접 상대해 보니 여지까지 상대해 왔던 것들보다 실력이 뛰어났다.
혼돈은 기본적으로 무질서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신들의 내기가 시작되면서 그 거대한 무질서로부터 창조된 혼돈은 능력자들의 기와 인간들의 혼란스러움을 먹고서 힘을 키워 나간다.
만약 혼돈이 능력자를 죽인다면 엄청난 진화를 하게 된다.
그것들을 아콘이라고 부르는데 정욱이 사는 지역의 혼돈들은 성장한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의 분쟁도 없는 조용한 동네였기에 혼돈이 성장할 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능력자들 주위에 모인다는 혼돈들은 오히려 능력자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옛날의 정욱처럼 능력을 받자마자 혼돈과 마주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능력자가 혼돈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정욱과 대치하고 있는 혼돈은 다른 녀석들과는 격이 달랐다.
우선 짙게 뿜어 나오는 기운의 농도부터 달랐다.
평범한 혼돈들 5마리가 응축되어 있는 것 같은 기운이었다. 모습 또한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등 뒤에 긴 뿔이 돋아나 있었고 꼽추처럼 몸이 휘어져 있었다.
그리고 양손에 든 칼은 자유자재로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할 수가 있었다.
혼돈의 붉은 눈이 정욱을 노려보았다.
거리를 둔 정욱의 움직임을 지켜보려는 것 같았다.
정욱은 빠르게 손을 놀려 허공에서 떠돌아다니는 환영들을 불러 모았다.
순식간에 정욱의 머리 위에 아홉 개의 다과용 칼들이 떠다니게 되었다.
그것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벌어져서 하늘을 헤집고 다녔다.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됐어. 속도가 너무 빨라.’
움직임 자체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칼을 쳐 내는 속도가 상상 밖이었다.
칼을 날리는 족족 무기를 휘둘러 모든 것들을 막아 내었던 것이다.
정욱은 주머니 속에서 붉은 구슬 두 개를 꺼내 쥐었다.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제대로 된 능력이 나오길.’
정욱은 최근 들어 붉은 구슬을 모으는 족족 흡수해 나갔지만 위기 상황을 대비해 세 개 정도는 항상 여분으로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항상 신중을 기했다.
언젠가 위험한 순간에 붉은 구슬을 혼돈에게 던진 적이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웬 당근 하나가 혼돈의 머리로 툭 떨어져 버린 적이 있었다.
‘그땐 정말 죽을 뻔했었지.’
붉은 구슬의 능력은 정말 랜덤이었기에 웬만하면 잘 사용치 않았었다.
하지만 이 정도 녀석을 만날 줄은 더욱 상상도 못했기에 붉은 구슬을 모두 써 버릴 각오를 하였다.
혼돈은 정욱의 위에 모인 칼 아홉 개를 바라보는 듯하더니 갑자기 옆으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정욱의 시야에서 거대한 몸집의 혼돈이 사라졌다.
‘제……길…… 이 녀석이.’
정욱은 재빨리 벽을 등에 대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정욱 머리 위에 있던 칼들이 넓게 퍼지는 것 같더니 정욱의 몸 주변에서 뱅뱅 돌았다.
그리고 정욱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것 같더니, 사람의 형체가 두 명 더 늘어났다.
정욱이 자신의 환영을 만들어 양옆에 세운 것이다.
캬오.
그때 정욱의 오른쪽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온 혼돈이 환영 하나를 덮쳤다.
놀라운 속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정욱의 환영일 뿐이었다.
정욱은 재빨리 허공에서 돌던 아홉 개의 칼을 모두 혼돈에게 날렸다.
혼돈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뒤로 빠지며 아홉 개의 칼을 향해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두 개의 칼이 핏 하면서 사라졌지만 남은 7개의 칼이 혼돈의 몸을 파팟 하고 꿰뚫고 지나갔다.
크아아아.
혼돈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정욱이 날린 7개의 칼 중에 두 개는 실체를 가지고 있는 칼이었다.
그 두 개가 혼돈의 양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정욱은 혼돈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조차 주지 않았다. 칼을 날린 동시에 붉은 구슬도 재빨리 던졌던 것이었다.
쾅!
“조, 좋았어!!!”
운 좋게도 공격계 상위의 능력이라는 폭파술의 기법이 발동해 혼돈에게 적중했다.
붉은색의 눈에 적통으로 폭파술을 적중당한 혼돈은 순식간에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그 밑으로 구슬 하나가 툭 떨어졌다.
‘주황색?’
항상 붉은 구슬만 보았던 정욱에겐 생소한 구슬이었다.
기운이 강한 혼돈을 잡은 탓인가.
정욱은 조심스럽게 주황색 구슬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새벽 2시.
하연에게 연락을 하기로 약속했던 시간이다.
최근 들어 정욱은 혼돈 사냥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어 갔다.
그리고 동시에 하연과 함께 능력자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하연과 정욱은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라힌델의 능력자들을 하나하나 규합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하연은 따로 ‘능력자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신들의 내기에서 능력자 사냥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상대 능력자를 죽이면 능력을 추가적으로 얻게 될지도 모르고 능력을 못 얻는다 하더라도 그 기운을 흡수한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욱은 하연의 능력자 사냥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람에게 이 능력을 쓰는 것이 꺼림칙했고 하연과 달리 능력자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도 없었다.
정욱에겐 그것은 살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마주치면 상대해 주리라 하는 생각뿐이었다.
정욱은 저장해 둔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간의 통화음 후에 전화기 너머로 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정욱이 일 다 봤냐?”
“네, 한바탕 정리했어요. 어디세요?”
“너네 집 앞이야. 집으로 와.”

가로등 불빛 밑에서 하연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정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를 한 지 얼마 안 있어 저 멀리서 정욱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왠지 힘든 기색이었다.
“여―.”
“헉, 헉, 언제 오셨던 거예요?”
“그냥 조금 전에.”
정욱은 하연의 옷을 바라보았다.
핏자국이었다.
처음 만난 이래로 하연은 정욱을 가족처럼 잘 챙겨 주었다.
위험할 경우엔 언제나 나타나 기운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지켜 주었고 꽤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정보도 아낌없이 공유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신들의 내기는 아직 정욱에게 낯설었다.
하연의 옷에 묻은 핏자국이 그래서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가끔씩 자신을 보며 웃는 하연이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근데 조금 힘들어 보인다?”
“네. 오늘 대단한 녀석을 만났어요. 전엔 보지 못한 녀석이었는데.”
정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역시, 일본에 그 또라이 자식 때문인가?”
“또라이라뇨?”
“넌 뉴스도 안 보냐. 일본 고교에 학생 400명이 순식간에 감전으로 돌연사했다는 이야기. 그 여파로 혼돈들도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아.”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 그런데 그게 왜요?”
“어떤 무식한 능력자 녀석이 그런 일을 저지른 것 같다.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을 봐선 감당 못할 능력을 가진 바보 초짜 놈이거나 대단히 강한 녀석이라는 건데, 그것 때문에 요즘 분위기가 흉흉해. 아마 얼마 안 있어 일본으로 강한 능력자들이 모일 거다. 그 녀석 잡아서 능력을 흡수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니까.”
“무슨 능력인데요?”
“당연하잖냐. 전기 혹은 번개를 다루는 능력. 최고의 능력 중 하나지.”
번개를 다루는 능력!
“그런…… 엄청난.”
“나도 가 볼까 해.”
“네?”
하연은 벽에서 등을 떼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은 하연의 의지대로 담배 끝에서 스스로 피어올랐다.
“이렇게 소란을 벌이고 다녔으니 얼마 못 버티고 다른 능력자에게 먹히고 만다. 그 전에 얼른 움직여서 녀석의 능력을 빼앗던지 숨기던지 결판내야 할 것 같아.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놈이 그 능력까지 얻게 되면 난감해져. 안 움직일 수가 없지.”
“그렇다면……?”
“그래, 얼마간 자리를 비워야겠다. 그래서 너한테 부탁할 일들이 있어. 자세한 건 이 쪽지에 적어 놓았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

일주일 전.
일본 오사카.
“쇼우이∼ 돼지 쇼우이∼ 오늘은 돈 가져왔냐?”
“내, 내일 정말 줄게…… 요즘엔 정말 돈이 없어서.”
“이 새끼가 말로 하니까 우습게 보이나.”
어느 고등학교의 옥상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에 건장한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색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학생들이 한 학생을 가운데로 두고 원을 둘러친 상태였다.
가운데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학생이 있었다.
바로 쇼우이였다.
터질 듯 쪄 오른 살과 어울리게 쇼우이의 행동은 조심스러웠고 굼떴다.
자신의 배를 꼭 끌어안고서 뭔가를 지키려는 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티셔츠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듯 볼록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열댓 명의 학생 중 한 명이 쇼우이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발을 들어 그의 무릎에 올려 보였다.
폭력 서클의 우두머리 이타치였다.
“또 발길질 당하긴 싫지?”
“으……응.”
“그런데 왜 그래?”
“미, 미안.”
“네놈 인형 꾸밀 돈은 있으면서 친한 친구 빌려 줄 돈은 없다 이거냐?”
쇼우이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앞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나운 눈빛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쇼우이는 자신의 티셔츠 안에 고이 감춘 ‘텟츠짱’ 인형을 꼬옥 껴안았다.
낌새를 눈치챈 이타치가 말했다.
“인형 꺼내 봐.”
“무, 무슨 인형을?”
“내가 바본 줄 아냐? 티셔츠 안에 있는 거 꺼내라고.”
“아, 안 돼. 이건…… 텟츠짱은, 안 돼.”
포동포동한 쇼우이의 팔이 배를 소중하게 감쌌다.
집에 있는 큰 텟츠짱보다는 덜 아끼는 거였지만 이것 또한 애정 있게 지켜온 분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록 인형이었지만 쇼우이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어제는 몰래 옷도 새로 사서 입혀 주었던 참이었다.
옷이 바뀐 걸 그에게 들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안 돼?”
이타치가 무릎에 올려놓은 발에 서서히 힘을 줬다. 그의 몸무게가 쇼우이의 무릎을 짓눌렀다.
“으윽.”
“좋은 말로 할 때 꺼내 봐.”
“아, 안 돼, 이건.”
“말 안 들어?”
무릎을 짓누르던 이타치의 발이 높이 들어 올려져, 쇼우이의 가슴팍을 퍽 하고 걷어찼다.
“아악.”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쇼우이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티셔츠에 안에 감춰져 있던 플라스틱제 인형이 바닥으로 내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