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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12화)
4. 카챤터스(5)


하연은 사건이 일어난, 학교에 도착했다.
노랑색 접근 금지 벨트가 여기저기 엉켜 있었다.
수많은 경찰 관계자들이 아직도 사건을 수사하고 매스컴이 쉴 새 없이 참사 현상을 찍어 대고 있었다.
학교는 참혹했다.
모든 유리창이 깨어져 있었고 다행히 아예 무너지진 않았지만 안에 남아 있는 전기용품이라던지 전기가 통할 만한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 있었다.
400여 구의 시체들은 모두 치워진 상태였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사방에서 애도와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미련한 녀석이군. 이 지경까지 일을 터뜨리다니.’
하연은 상태를 좀 더 파악한 후에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능력자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번개의 능력자가 아직 주변에 있을 것이었기에 누구보다 먼저 그를 빨리 찾아내야 했다.
어쩌면 벌써 결판이 났을지도 몰랐다.
번개의 능력을 원하는 강한 능력자들이 이미 많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너무 평온하군. 다른 능력자들의 기운이 미미해.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불길한 기운이 하연을 엄습해 왔다. 그의 발걸음이 한층 더 빨라졌다.
하늘은 여전히 어둑했다. 거대한 먹구름이 하연이 있는 주변을 넓게 짓누르고 있었다.

한참 골목을 걷던 하연은 문득 걸음을 멈춰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먹구름이 그의 위를 잠식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구름이군. 기운이 요란해. 저 구름 속의 번개들…… 설마 그 녀석의 능력이 저 수준인 건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설마.’
하연을 포함한 다른 강한 능력자들은 번개의 능력을 가진 자를 취하러 일본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연이 있는 이곳에 아무런 능력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상위의 능력자는 자신의 기척을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출 수 있었지만 이것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짓뭉개진 능력들의 냄새가 났다.
‘혹시…… 녀석에게 당한 건가?’
번개의 능력을 가진 자가 정말 강력한 은둔고수이거나 막 능력을 받아 제어조차 못하는 초보 능력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한 뒤 사태를 파악한 후 초보 능력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연을 제외한 다른 능력자들에게로 같이 느껴졌을 것이었다. 녀석이 뿌리고 다닌 기운에서 갓 능력을 받은 자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누구보다 빨리 녀석을 찾아내 능력을 취하기만 하면 되었을 터였는데 이제 보니 자신에게 덤벼 온 능력자과 싸워 제압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위험해진다.
만에 하나 한 명이라도 제압했을 경우, 그 녀석의 힘의 증가 폭이 엄청날 것이었다.
갓 태어난 능력자가 경험이 많고 능력을 많이 보유한 능력자를 죽이게 된다면 보상받는 기운은 엄청나다.
능력을 흡수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치더라도 강한 힘을 흡수하게 되는 것이었다.
녀석이 지니고 있을 ‘전기를 다루는 능력’이 위험한 능력이라 각오하고 일본에 온 것은 맞다. 그리고 녀석이 그보다 훨씬 더 상위의 단계 능력인 ‘대자연 번개를 다루는 능력’을 소유한 자일 가능성도 염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대자연 번개를 부리는 능력자였으면 조금 더 신중했을 필요가 있었다.
전기를 조금 부릴 줄 아는 것과 대자연 번개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은 상위의 능력들 중에서도 그 차이가 천지 차이였다.
카챤터스의 기준에 따라 전기의 능력이 A급이라고 한다면 대자연 번개를 부리는 능력이 바로 S급은 족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연을 비롯한 다른 능력자들이 일본으로 냅다 달려온 것은 상대가 초보 능력자일 가능성을 품고 온 것이다.
상대가 경험이 없으면 없을수록 경험 많은 능력자에겐 먹잇감과 같아 보인다.
아무리 엄청난 능력이 세상에 등장했다 할지라도 그가 그 능력에 익숙해지기 전에 제거해 버린다면 간단했다.
하지만 이 불길한 기운을 볼 때 녀석은 능력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파직거리는 번개들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초보 능력자라고 했을 때 이런 기운을 뽐내는 정도라면 가히 엄청난 적응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연은 발길을 머뭇거렸다.
고민에 빠졌다. 위험률이 높아졌으니 몸을 사릴 것인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그 능력자를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인가.
후자 쪽이 더 끌렸다.
최소한 전기를 다루는 능력 이상이지 않은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보상이고 다른 이들이 그 보상을 채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피어 올라오는 분노가 하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하연과 그 먹구름을 피어오르게 한 녀석의 신이 다르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하연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먹구름에서 능력의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어. 번개의 능력이라…… 설마 저 먹구름이.’
그는 갑자기 손바닥에 화염의 기운을 잔뜩 모았다.
금세 그의 왼손에서 둥그런 불덩이가 이글거리게 되었다.
손바닥에 마찰을 주었을 때 그 작은 마찰력을 ‘불’의 기운으로 바꾸어 주는 그의 능력이었다.
거대한 구름 덩어리에 불을 던져 구름을 이루고 있는 수증기를 증발시킬 심산이었다.
하연이 왼팔을 뒤로 길게 뺀 뒤 불덩이를 쏘아 올리려는데 별안간 그의 감각에서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응? 이것은!’
그의 근처에서 어떤 결계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분명 상위급 능력자가 펼친 결계였다. 상위 능력자는 자신의 전투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 강력한 결계를 펼쳐 낼 수 있다.
그것은 카챤터스에서 거래할 수 있는 자주색 구슬을 통해서였다.
자주색 구슬은 발동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상위 능력자만이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싸우고 있어.’
하연은 재빨리 불덩이를 없애 능력의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결계를 펼쳐 내 싸우고 있었다.
‘역시 그런 건가.’
하연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 들어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계가 이토록 요동치고 있는 상태라면 결계 시전자의 힘이 거의 바닥났다는 뜻이었다.
금방이라도 결계가 부서져 누군가가 튕겨져 나올 것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결계가 부서지겠군.’
하연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능력자라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였다.
녀석과 전투를 하고 있거나 녀석을 잡기 위해 모인 능력자 둘이 붙어 싸우고 있거나.
하연은 정신을 집중해 다른 능력자들이 주변에 있는지 파악했다.
최소한 느껴지는 기운은 없었다.
하연의 모든 예리한 감각마저 속여 낼 강력한 능력자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곳엔 결계 안에 있을 두 명의 능력자와 자신밖에 없었다.
그는 왼손과 오른손을 펼쳐 다시 한 번 불의 기운을 모았다.
적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망설일 것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왼손의 불덩이를 하늘 위로 쏘아 올리려는 찰나 공간이 일그러지며 누군가가 튕겨져 나왔다.
결계가 깨진 것이었다!
털썩.
검게 타 버린 남성이었다.
마른 체구의 몸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의 몸통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처참했다.
그는 일그러진 몸을 배배 꼬아 신음을 하더니 이내 죽어 버렸다.
능력자가 죽자 이루고 있던 기운이 허공에 모아졌다. 그리고 그를 죽인 누군가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공간이 일그러진 사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다. 그 신형에게로 기운을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연은 튕겨져 나온 자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 안을 쳐다보았다.

***

정욱은 서울 시내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낮 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은 장소였다.
그들은 끼리끼리 데이트를 즐기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을 쥐고 돌아다녔다.
수많은 음식점 간판들이 즐비했고 차들의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차라리 요즘엔 혼돈들이 익숙했다.
사람들을 보니 왠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들은 혼돈과 능력자, 신들의 내기. 이 모든 것들과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된 건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저들 사이에 다시는 못 끼게 될 것 같은 소외감이 들었다.
우우웅.
‘왼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세요.’
문자메시지는 그런 정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챤터스로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정욱은 한동안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메시지의 지시대로 몸을 움직였다.
카챤터스로 가는 길은 공간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능력자들이 서로 마주칠 일이 없고 보호될 수 있도록 카챤터스로 향하는 출입구는 무한대에 가까웠다.
정욱에게 부여된 입구로 문자메시지가 안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폐허가 된 가정집 앞에 정욱은 서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초록 부적을 쓰면 되는 건가?’
정욱은 주머니에서 초록 부적을 꺼내어 손에 말아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동어를 외쳤다.
“샤크툼!”
그러자 그의 몸이 일렁거리면서 의식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공간을 뚫고 부유하는 기분이 이럴까. 한없이 가벼워진 육체 때문에 의식이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 느낌도 잠시, 정욱은 이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어느 카페로 들어서게 되었다.
바로 카챤터스였다.
‘이런 곳이.’
널찍한 공간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여유롭게 대화를 하거나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기운으로 봐서 하나같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욱 앞으로 깔끔하게 생긴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옷차림새로 보아 안내인쯤 되는 듯하였다.
“아, 저, 아티팩트를 거래하러 왔습니다.”
“흐음. 소개를 받고 오신 겁니까?”
그는 정욱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카챤터스는 초보 능력자를 환대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초보 능력자가 구할 수 없는 수준의 구슬로 거래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안내인에서부터 초보 능력자를 알아보고선 출입을 막아 버리는 것이었다.
정욱은 순간 그런 그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지만 이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상대했다.
“라힌델의 천하연 씨의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호, 갓센드 하연 씨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좋지요. 인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갓센드는 능력자들을 높여 부르는 용어였다.
하연이 자신의 소개를 받았다는 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준 인장을 말하는 듯했다. 정욱은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는 인장을 유심히 살펴본 후 정욱에게 건네주었다.
“됐습니다. 카챤터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따라오시지요.”
정욱은 앞서 가는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기운을 감추고, 몸을 사리랬지.’
정욱은 하연이 일러 준 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앞서 가는 안내인의 발걸음만을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