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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13화)
4. 카챤터스(6)


많은 사람들의 어깨가 스쳤지만, 정욱은 요리조리 잘 피해 내며 그를 쫓고 있었다.
이윽고, 그와 정욱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이곳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지요.”
정욱의 눈앞에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안내인이 사라지자 정욱은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여러 가지 장비구들이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아티팩트를 보러 온 사람 몇몇 구경을 하고 있었고 소문으로만 듣던 카챤터스의 상인이라는 사람이 여우 같은 눈웃음을 치며 장비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한국인이었다.
그는 새로 접근해 온 정욱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구,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예. 무기 좀 보러 왔는데.”
정욱은 당황했다. 마치 동네 슈퍼마트 아저씨를 보는 듯했다.
‘훈훈한데.’
상인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정욱을 테이블로 이끌었다.
수많은 장비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장비 옆에는 가격을 의미하는 듯한 각양각색의 구슬의 개수가 적혀져 있었다.
정욱의 눈에 가느다란 나이프 하나가 들어왔다.
‘어? 다과용 칼이랑 크기가 비슷하잖아. 저것이라면 쓰기도 편하겠는데…….’
정욱은 자세히 보기 위해 그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상인이 정욱의 손을 잡았다.
“고객님, 눈으로만 보시길 바랍니다. 후후.”
죽 찢어진 눈이 생글거리며 정욱을 쳐다보았다.
‘별수 없지.’
정욱은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포기하고 그 나이프 밑에 딸린 설명을 읽어 보았다.

메디움 나이프
속성 : 얼음
특징 : 약간의 동결 능력이 있다. 벤 자리를 얼린다. 베인 상대는 고통을 덜 느끼겠지만, 몸이 둔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가격 : 노랑 구슬 2개.

‘괘…… 괜찮은데?’
정욱은 수중에 노랑 구슬과 같은 가치를 가진 노랑 부적 다섯 개가 있었다.
하연이 준 것이었다.
이런 나이프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환영의 능력을 적용하기 위해선 이 나이프의 성분과 구성 원리를 알아야 했다. 레시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욱은 상인을 향해 물었다.
“저기 혹시, 여기 들어간 재료들 좀 알 수 있을까요?”
“아…… 만드는 과정이 담긴 비급서 말입니까?”
“네.”
상인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저희가 제작한 아티팩트라 함부로 원리를 보여 드릴 순 없지요.”
“흠.”
곤란했다. 정욱의 능력인 환영을 전개하기 위해서라면 정작 아티팩트보다 그 레시피가 필요했다.
구성 원리를 모른다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정욱의 눈에 또 다른 아티팩트가 눈에 띄었다.
‘응? 저건 좀 다른데?’

증강의 팔찌 속성 : 무
특징 : 능력자가 능력을 시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능력 발휘력을 높여 준다.
가격 : 노랑 구슬 12개.

‘헉.’
가격에서 숨이 턱 막혔다.
상인은 정욱이 팔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 슬며시 팔찌를 들어 정욱에게 갖다 주었다.
“가까이서 보시렵니까? 흐흐.”
“크흠. 조금 싸게는 안 될까요?”
상인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
“안 됩니다.”
정욱은 크게 낙담했다.
자신의 기본적 능력을 증가시켜 주는 아티팩트들은 저 팔찌처럼 모두들 비쌌다. 그리고 방어구들은 아직 정욱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고 무기들은 레시피가 없으면 구매를 하나마나였다.
자신의 환영술과 연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거래장으로 들어왔다.
“구슬이 부족하신가 보구만.”
흑인이었다. 정욱은 처음에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흑인과 같이 들어온 자가 손가락을 튕겨 주니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정욱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상인이 쥐고 있던 팔찌를 뺏어 들더니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인은 웬일인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흑인은 바로 맥델런이었다.
“증강의 팔찌. 좋은 아티팩트지. 아, 그리고 레시피를 찾고 계신다고?”
정욱은 왠지 모를 기운에 다시 주눅이 들었다.
카챤터스의 상인을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상인이 아무런 제지를 하지 못하는 자였다.
“아, 예, 레시피가 좀 보고 싶어서…….”
정욱은 말끝을 흐렸다.
맥델런은 웃으며 말을 되받았다.
“난 맥델런이라고 하네. 이 상인들을 총괄하고 있지. 서로 초면인 걸 보니, 자네도 날 잘 모를 테지. 이 팔찌, 내 그냥 자네가 가지고 있는 부적들만 받고 싸게 드리도록 하지. 그리고 레시피들을 보고 싶다고 했던가? 그럼 모든 레시피들이 저장되어 있는 곳으로 가서 조금 보여 줄 수 있네.”
정욱은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했다.
갑자기 상인들의 총괄이란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와 호의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당황스러워서 계산이 안 섰다.
그저 갑자기 들어온 이런 행운 같은 제의에 어색한 미소만이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5. 운명(1)


“그러니까…… 카챤터스는 자네를 원한다는 말이네.”
정욱은 맥델런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엔 엉겁결에 받은 팔찌가 들려 있었다.
“자네의 능력 정도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지. 카챤터스 최고의 회원 대우를 해 주지. 어떤가?”
“아…….”
카챤터스의 회원 제의라면 수준 높은 능력자들도 심각하게 고려해 볼 만한 것이었다.
비록 카챤터스에 속하게 되어 그 전보다 활발하게 활동은 하지 못하게 되지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굉장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능력자들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아티팩트들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도 있다.
또한 아티팩트가 만들어지는 레시피 또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현재 마땅히 입지가 불분명한 정욱으로선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연과의 일도 그리 소홀해질 것 같진 않았다.
카챤터스가 현재 정욱에게 제시한 의뢰는 다름 아닌 혼돈 사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연과의 작업을 낮에 하고 평소의 패턴대로 밤에 카챤터스의 작업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저한테 이런 제의를…… 이해가 안 됩니다.”
의심스러웠다.
정욱이 생각해 볼 때 자신은 도저히 카챤터스에 메리트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작 상대하는 혼돈이라고 해 봐야 붉은 구슬을 주는 녀석이었고 주황색 구슬을 주는 녀석도 벅찬 실정이었다.
게다가 카챤터스에서 주로 거래되는 구슬은 노랑 구슬이었다. 그것을 모아 카챤터스는 아티팩트를 만들곤 했는데 노랑 구슬을 주는 녀석이 얼마나 강력할 것인지 정욱으로선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맥델런의 생각은 달랐다.
‘후후, 겸손하군. 역시 강자야.’
맥델런은 폭파술과 염력술의 블랜더로 정욱을 간주하고 있었다. 소연에게 전해 들은 블랜더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맥델런은 그 믿음은 굳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상부로부터 파견한 능력자가 정욱을 관찰하던 도중, 칼들이 날아다니며 칼이 혼돈의 몸에 닿자 폭발한 것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실 그때도 소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붉은 구슬의 효과였다.
원래 붉은 구슬이 폭파의 능력을 낼 확률이 굉장히 낮기에 맥델런은 그 경우를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연의 말을 전제로 조사한 터라 그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맥델런은 강한 블랜더를 회원으로 등록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정욱의 능력에 대한 의심 없이 그에게 무턱대로 제의를 해 오고 있었다.
게다가 직접 대고 능력을 묻거나 하는 엉터리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능력자 간에 서로의 능력을 물어보는 것은 정말 크나큰 결례였다.
처음 보는 자가 능력을 물어온다면 ‘목숨을 걸고 한판 붙자’라는 뜻과도 같았다.
상대의 능력과 능력 발동 조건을 물어오는 것은 ‘내가 널 잘 파악한 뒤 조만간 죽이겠다’라는 위협과도 같았다.
자신의 목숨을 건 운명의 내기판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비밀을 하나라도 알려 주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일전에 하연도 정욱에게 무턱대로 능력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맥델런은 그런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아무리 카챤터스에 속하게 될 자라고 해도, 직접적으로 능력을 물어보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다.
결국엔 최후의 일인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들의 예언이 있었다.
그것은 능력자들 사이에서 만연한 믿음 중에 하나였다.
같은 카챤터스 회원이라고 해서 그들이 언제고 같은 편일 순 없다는 것이다.
맥델런은 정욱도 분명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간주하고 최대한 심기를 안 건드리기로 했던 것이다.
어차피 회원이 된 능력자의 실력은 업무 수행 성과에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맥델런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니야, 정욱 자네라면 우리 카챤터스에 딱 들어맞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는 것도 아니야.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겠네. 그동안에만 생각해서 알려 주면 돼. 가끔 주어지는 임무가 그리 고되진 않을 거야. 혼돈의 구슬을 모으는 수준일 테니까. 허허.”
“혼돈의 구슬이라……. 그것뿐입니까?”
“그렇지, 노란색 구슬 이상 급들만 모아 주면 된다네. 그럼 카챤터스에서 적절한 보상을 주는 시스템이지.”
“으흠.”
정욱은 짐짓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맥델런이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노란색 구슬을 남기는 혼돈이라면, 정욱은 여태 보지도 못한 수준의 것이었다.
주황색 구슬을 남기는 혼돈을 상대할 때만 해도 그렇게 쩔쩔맸었는데 노란색 구슬 녀석은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욱은 선뜻 거부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 상황만은 태연히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실망한 카챤터스가 어떤 불이익을 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카챤터스에 오자마자, 그들에게 찍히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팔찌도 다시 빼앗겠지. 그리고 레시피를 모아 둔 곳도 못 볼 거야. 최소한 한 번만 보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맥델런은 정욱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었다.
“허허,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네. 천천히 생각하게. 일단 팔찌는 가져가고, 아티팩트 비급서들이 있는 곳으로 내 안내하도록 하지.”
그리하여 정욱은 맥델런을 따라 어느 허름한 지하 창고에 오게 되었다.
그리 깔끔하게 유지되어 있지 않은 이곳이 바로 아티팩트의 정보들이 담긴 창고라고 하였다.
맥델런이 말했다.
“한 시간 동안 맘 놓고 구경하게. 어차피 우리 회원이 되면 맘껏 드나들 수가 있지. 이곳에 가끔 와서 구슬들이 어떻게 아티팩트로 바뀌게 되는지 알게 된다면 우리의 일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걸세. 허허.”
맥델런이 사라진 뒤 정욱은 혼자 남게 되었다.
밝은 전구 몇이 정욱의 시야를 밝혀 주고 있었다.
‘뭐가 뭔지…….’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맥델런이 당장에 자신에게 해를 입힐 것 같진 않은 태도였다.
정욱은 일단 이곳에 오게 된 김에 자신이 의도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레시피를 최대한 외워 가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환영술의 최고 경지는 실체화야. 이곳에서 레시피를 얻어 가 연구를 하면,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아티팩트들을 복제해 낼 수 있어.’
정욱은 차근차근, 아티팩트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양과 정보는 엄청나게 많아서 정욱이 이곳에서 한 달을 머문다고 해도 이곳의 오 분의 일조차 보지 못 할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 유용한 아티팩트가 있을 것 같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음……. 뭔가 강해 보이는 이름을 갖고 있는 아티팩트부터 찾아봐야지.’
하지만 실제로 정욱이 알아볼 수 있는 ‘한글’ 이름으로 된 아티팩트는 얼마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