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그림자 세계 1권(14화)
5. 운명(2)


전 세계의 다른 언어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문양들로 이루어진 이름들이 대부분이었다.
‘흠, 초월의 단검, 암흑의 구슬, 악마의 발톱, 동결의 검…….’
정욱은 아티팩트 정보를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것의 재료부터 해서, 만들어지는 원리까지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외우고 적어 가려 노력했다.
복잡한 수식어로 난무한 아티팩트 조합법이었지만 왠지 구슬의 능력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이해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은 환영술을 응용한 ‘구현화’였기 때문에 아예 창조적인 접근보다는 그 구성 하나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신 그 재료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기능과 역할들을 살필 정도는 돼야 했다.
‘뭐 그런 건 집에 가서 생각해 보지.’
일단 무작정 적고 보는 정욱이었다.
시간은 금세 흘러 거의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 얼마 못 베꼈는데!’
아쉬운 마음에 옮겨 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를 마저 다 베끼고 얼른 다른 하나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정욱의 눈에 또렷한 문구 하나가 들어왔다.

신급, 아티팩트 차원의 저편에 존재

‘신급 아티팩트? 차원의 저편?’
정욱은 뭔가에 홀린 듯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뭔가 보기에도 대단한 것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처럼 생긴 상자였다.
‘왜 이걸 진작 못 봤지?’
정욱은 얼른 상자를 살피고, 그것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때였다.
“허허, 그 상자는 안 열린다네.”
맥델런이 어느새 들어와 정욱의 뒤에 나타나 있었다.
“열쇠가 있어야 하지. 위험한 것들을 만드는 비급서들이 담긴 상자야.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팩트들의 구성 원리들을 밝혀 모아 두었지.”
맥델런은 자랑스럽게 말하며 정욱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나갈 시간이 된 것이었다.
“결정할 시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네. 찬찬히 생각해 보고 답변 주게. 아, 대신 이 일은 모두에게 비밀이네. 카챤터스와 관련된 일은 모든 능력자에게 비밀이지. 만약 누군가에게 발설한다면 우리는 총력을 다해 그 비밀을 사수할 것이네. 아무쪼록 주의하길 바라네.”

***

하연은 피어 나오는 분노의 기운을 느끼며 재빨리 왼손에 모은 불의 기운을 먹구름으로 쏘아 던지고, 오른손에 모인 불덩이는 드러난 그 형체에게 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빠져 거리를 두었다.
능력자 하나를 죽여 기운을 흡수했다 하더라도 엄청난 전투를 치른 뒤일 것이었다.
게다가 이 능력의 기운을 보았을 때 하연이 본 능력자 외에도 수많은 능력자들이 녀석에게 덤벼 죽어 나갔을 것이 뻔했다.
그러므로 많은 전투를 치르고 가장 지쳐 있을 때 마구 공격을 해서 제압하는 쪽이 유리했다.
하연이 던진 불덩이가 하늘로 치솟아서 구름을 일부분 헤쳐 놓았다.
어찌나 불덩이가 대단한 위력을 가졌는지 구름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렸다.
‘저 먹구름이 능력 발동 조건일 가능성이 높겠어!’
강력한 능력일수록 능력 발동 조건이 뚜렷하다.
하연의 능력의 경우 손을 문질러야지만 불의 기운을 모을 수 있고 정욱의 경우 머릿속으로 물체를 분석하고 구현화하는 작업을 거쳐야지만 환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연이 던진 또 다른 불덩이가 녀석에게 닿았다.
아니, 닿는 듯싶었다.
불덩이는 그의 몸에 닿기 바로 직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멸해 버렸다.
그의 몸 주위에 푸르스름한 전기의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하?”
결계가 완전히 해제되어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는 것을 보면서 하연은 허탈한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불덩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막히다니.
결계가 사라진 뒤 나타난 능력자의 모습이 더욱 가관이었다.
뚱뚱한 체격에, 안경을 쓴 평범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소중하게 인형을 품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쇼우이였다.
“날 그만 놔둬. 텟츠짱과 날 그만두란 말이야!”
“뭐?”
하연은 쇼우이의 말을 알아들을 새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를 피해야 했다.
콰광!
“우욱!”
재빨리 몸을 날려,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러자 하연의 몸 주변에서 굵직한 불의 기운이 뱀처럼 꾸불꾸불 형성되어 그의 몸을 원형으로 감싸 올라갔다.
‘네 녀석이 전기로 몸을 보호한다면 나도 철저히 보호하고 싸우겠어!’
하연은 동시에 쇼우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연의 손에서 생성된 굵직한 불줄기가 그를 향해 쏘아져 나아갔다.
파지지직!
쇼우이를 덮은 전기의 막과 불줄기가 부딪히면서 요란한 진동을 내었다.
“으아아악!”
전기의 장막 안에 든 쇼우이가 고통스러운 듯 소리 질렀다. 불의 뜨거운 기운이 그를 달궈 갔던 것이다.
하연은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위에서 내려치는 번개를 피한 뒤 이번엔 하늘로 불덩이를 쏘아 올렸다.
‘아무리 최강의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렇게 지친 상태라면 빈틈은 많지.’
다시 먹구름에 적중한 불덩이는 또 한 움큼의 구름을 몰아냈다.
그러자 쇼우이를 감싸고 있던 전기의 장막도 그 푸른 색깔이 조금 옅어진 것 같았다.
‘역시, 먹구름이 능력 발동 조건이었어!’
하연은 경험 많은 능력자였다.
대번에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능력을 봉쇄할 길을 찾아냈다.
하연은 불줄기가 끊어지자 다시 손을 비벼 주위를 보호하고 쇼우이를 공격해 댔다.
붉게 타오르는 불이 푸른 장막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때 장막의 안에서부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 내버려 두란 말이야! 제발 나를!”
번쩍!
어찌 된 일인지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먹구름의 기운이 좀 더 짙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먹구름 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연은 그 기운을 느끼고 공격은 멈춘 채 하늘을 경계했다.
‘뭐, 뭐야! 완전히 하늘을 지배하는 거냐. 이 정도의 기운이면 저 녀석 설마!’
하연은 검게 모인 먹구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설마, 설마 했던 번개를 다루는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구름의 움직임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 번에 구름을 태워서 순간 소멸을 시켜 버리지 않는 이상 그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기는 힘들었다.
‘엄청난 능력이 이 세상에 나타났구나!’
이 정도 능력이면 잘만 활용한다면 쥬히뎀을 제외한 능력자들 사이에선 거의 최강이라고 불릴 만했다.
쥬히뎀은 신의 신체 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능력자들이었다.
신들이 자신의 능력들을 무작위로 선택해 인간들에게 분배했을 때 신의 신체 고유의 능력들마저도 임의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었다.
신의 직접적인 신체의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쥬히뎀, 그들이야말로 지금으로선 신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내기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하진 않았다.
무슨 일인지 그들은 자아가 신과 일부 연결된 것 같았다. 또 신들의 내기가 있은 이후로 발견된 쥬히뎀은 단 두 명이었다.
하연은 먹구름이 짙어질수록 기운이 강대해지는 쇼우이를 보면서 몸을 떨었다.
‘잘못하면…… 죽는다!’
자신보다 먼저 왔던 능력자들이 자신보다 실력이 낮으리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 녀석에게 당한 것은 분명했다.
그들이 하연 자신처럼, 이 갓 태어난 능력자에 대해선 방심했는지는 몰라도 베테랑인 그들이 하나같이 당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하연은 자신도 온몸 가득 불의 기운을 머금었다.
이윽고 짙어진 먹구름에서 한줄기 거대한 번개가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하연도 위로 불을 쏴 올려 기운을 충돌시켰다.
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대기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쇼우이가 자신의 손을 뻗어 전기의 기운을 하연에게 쏘아 보냈다.
하연은 재빨리 몸을 뒤로 튕겨 그 기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고 다시 반격으로 불을 쏘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쇼우이의 몸 근처에 가지도 못한 채 불덩이가 소멸해 버렸다.
하늘에서 내려친 또 다른 번개가 그것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하연은 경악하며 재빨리 손을 문질러 다시 불덩이를 하늘에 그대로 띄웠다.
검은 하늘 아래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자 모든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왜? 텟짱과 날 가만두지 않는 거야!”
쇼우이는 요 며칠간 자신에게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들에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능력자들이 하나하나 자신을 죽이려 할 때마다 과거 이타치에게 괴롭힘당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그는 텟짱의 목이 찢어지는 광경을 떠올리며 능력자들과 맞서 싸웠다.
결과는 쇼우이의 승리들이었다.
쇼우이는 여전사 텟짱을 상상하면서, 능력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기분, 텟짱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의 남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쇼우이는 싸늘하게 하연을 쳐다보았다.
‘네놈도 같을 거야. 심판을 받아야 해! 텟짱! 나에게 힘을 빌려 줘!’
쇼우이의 양손에 다시 거대한 전기의 기운이 뭉쳤다.
‘잘 가라, 이 인류의 적! 텟짱과 내가 널 심판하겠어!’
쇼우이는 양팔을 뒤로 빼내어 전기의 구체를 던질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멈칫하며 누군가 자신의 양팔을 잡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 뭐야?”
쇼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번개가 그를 보호하고 있었고 방어막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양팔은 누군가에게 꽉 붙잡혔다.
씨익.
하연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큭! 나도 능력자를 한두 명 없애 본 놈은 아니야. 내 본래의 능력을 오랜만에 다뤄 보는구나.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의 능력이지. 어두운 밤하늘 아래…… 그림자 축제를 벌여 보자꾸나!”
하연의 불덩이가 만들어 낸 쇼우이의 그림자에 이상한 것들이 엉켜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니 나무줄기 같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정확히 쇼우이의 그림자 양팔에서 엉켜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변엔 실제로 나무줄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그림자 속에서만, 쇼우이의 양팔에 나무줄기가 묶여 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