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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15화)
5. 운명(3)


정욱은 카챤터스의 출구로 몸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주머니엔 선물(?)받은 팔찌와 몇 개의 레시피를 옮겨 적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
맥델런이 레시피를 베껴 가는 것에 대해선 주의를 주지 않았지만 왠지 제 발이 저렸다.
출구에 서니 안내원이 다가왔다.
“거래는 다 끝나셨습니까?”
“예. 잘 마쳤습니다.”
“그럼 어느 출구로 나가시겠습니까?”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겠습니다.”
카챤터스 이용자들의 안보를 위해 회원이 원하는 곳으로 출구를 열어 워프시켜 주는 시스템이었다.
정욱은 달리 갈 곳이 없었기에, 예언자로부터 보호를 받는 자신의 집 쪽으로 출구를 지정했다.
안내원이 초록 구슬을 어루만지자 정욱의 몸이 전과 같이 일렁거리더니 픽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정욱이 다시 나타난 곳은, 아까 들어왔던 으슥한 골목 쪽이었다.
나타난 정욱의 신형이 앞으로 훅 쏠렸다.
“우웩, 진짜 즐길 만한 경험은 아니야!”
카챤터스로의 출입은 아직 정욱의 몸엔 익숙지 않았다.
올라오는 역겨움을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욱은 잠시 자리에 앉아서 속을 진정시킨 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로 나갔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한 일곱 시였고 빽빽한 밤거리는 흥겨운 음악에 젖어 있었다.
정욱은 거리의 밤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얼른 주머니에 든 레시피를 분석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다.
잘만 된다면, 아티팩트 하나 구입하지 않고도 그것들을 구체화시켜서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 하나 연구해 보면 반드시 길이 보일 거야. 가능할 것 같아.’
정욱은 요리조리 사람을 잘 피해 다녔다.
그런데 그때 정욱의 어깨를 밀치고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나갔다.
긴 머리칼이 정욱의 앞을 가리고 지나갔다.
‘여자……?’
앞을 스쳐 간 여자의 신형을 볼 새도 없이 다시 뒤쪽에서 어떤 남성이 그를 강하게 밀치고 지나갔다.
번잡한 거리를 밀치고 뛰는 두 신형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정욱 또한 기분이 확 상해 버렸다.
‘젠장! 사람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고 난리야!’
그리고 그 순간!
‘음?’
정욱의 감각에서 뭔가가 걸렸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그 감각은 아주 미묘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마…….
‘그녀다!’
전에 최초로 만났던 여성 염력 능력자, 소연의 느낌이었다. 정욱은 그녀의 기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카챤터스에서 소연을 추적할 만한 기운을 지운 것은 오직 하연뿐이었다.
그 기운을 느끼고 나니 정욱은 그녀를 따라 안 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쫓는 남자의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욱도 사람들을 밀치고 그들을 쫓아 뛰었다.
그러고 보니 언뜻언뜻 그녀를 쫓는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정욱을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저 녀석도 눈치챈 건가?’
정욱 자신이 느끼기 시작했다면 녀석도 느꼈을 것이 당연했다.
소연과 사내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어느 으슥한 공사장에 닿았을 때는 이제 완전히 따라잡혀 버렸다.
소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를 쫓아오던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띤 채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여유롭다는 듯 팔과 허리를 스트레칭 하자 마른체구에서 우둑우둑 뼈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감히 우리 쪽에 먼저 접근해 와? 그 덩치 녀석도 없는데 무슨 깡으로 들이댄 거야? 킬킬.”
소연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이 소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넓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신 계통의 능력자인가…….’
변신계의 능력자를 상대로 근접전을 펼치는 것은 굉장히 큰 모험이었다.
소연은 그제야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자책했다.
철웅이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떠난 뒤 소연은 혼자 남게 되었다.
그 후 철웅에게서 도르힘의 능력자들의 세력이 왠지 수상하다는 말을 들은 뒤, 혼자서 그들의 움직임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철웅이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진 절대로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가 전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경솔하게도 도르힘의 능력자의 기운을 추적해 그들을 살피러 갔다가 이렇게 발각당한 것이었다.
소연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그를 쳐다보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도르힘의 능력자들을 떼어내기 위해, 능력을 무리하게 썼던 탓이었다.
소연의 능력 발동 조건은 체력이었다.
따라서 능력을 무리하게 쓸 경우 소연은 체력 고갈로 졸도할 수도 있었다.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간다는 것은 체력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이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굳건하게 자신을 지켜 주던 철웅을 떠올리며 천천히 왼손을 그에게 겨냥했다.
염력을 쓰려는 것이었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고 마지막까지 싸워 보는 것이 그녀의 남은 선택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말했다.
“후후, 그렇게 나와야지. 네년의 염력. 내가 취하겠다. 그런데 그 전에…….”
사내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전에 웬 애송이 하나가 또 딸려 온 것 같군. 킬킬.”

정욱은 숨을 헐떡이며 공사장에 막 도착했다.
딱 보기에도, 여자가 궁지에 몰린 형상이었다.
정욱은 우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신이 전에 마주했던 그녀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맞아!’
그런 정욱을 본 소연의 눈동자도 휘둥그레졌다.
‘제길! 카챤터스 쪽에서 이놈의 추적 기운은 건드리지 않았던가.’
그녀는 정욱마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것인 줄 알고 완전히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블랜더까지 나타났으니.’
그런 소연과 정욱의 미묘한 재회를 갈라놓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네 녀석은 뭔데 여기까지 따라와서 죽고 싶은 게냐! 킬킬, 널 보니 화가 끓어오르는 게……. 우리 쪽 능력자는 아닌 것 같고 습격할 생각이었으면 잠깐만 기다려라. 이쪽 여자부터 끝내고 바로 네놈을 없애 주지.”
남자는 정욱의 기운을 대충 파악했다.
다른 능력자들의 냄새가 묻어 있지 않은 것이 딱 봤을 땐 능력을 부여받은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능력자였다.
그리고 이런 몽타주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남자의 실력에 대비해 볼 때 만나면 피해야 할 상대는 아니란 말이었다.
남자는 정욱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재빨리 도약 자세를 취해 소연을 노려보았다.
남자의 다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의 어깨가 더욱 단단하며 거대해졌다.
머리통도 거대해지고 이빨과 귀도 길게 자랐다.
‘늑대 인간?’
소연은 자신을 향해 기운을 내뿜는 남자는 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염력을 사용했다.
그녀의 염력을 활용한 속박에 잠시 사내의 도약 자세가 주춤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남자의 거대해진 몸이 밧줄을 풀어 헤치듯 탄력적으로 몸을 뻗어 내는 것 같더니 속박을 파괴해 버렸다.
“마지막까지 잔기술을 부리는구나. 잘 가라.”
이제 두 발로 걷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으로 변한 남자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전의 염력으로 다리가 이제 쭉 풀려서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멈춰!”
그때였다. 달려드는 늑대의 몸이 멈칫하며 정지했다. 별안간 소연의 형체가 빠르게 일렁이는 듯싶더니 수십 개로 나뉘어져 버렸던 것이다.
소연은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자신의 분신에 깜짝 놀랐다. 자신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똑같은 자신의 분신 수십 개가 나타난 탓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늑대 인간은 달려가던 도약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정욱을 쳐다보았다.
정욱의 뒤에 여덟 개의 다과용 칼이 둥둥 떠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실체가 있는 칼의 환영이었다.
늑대 인간의 미간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뭐지 저 녀석. 무슨 능력을 부리는데 물체를 띄우고 조종을 하기까지 하지? 그리고 이 수많은 분신은 뭐야!’
그는 정욱의 뒤에 떠 있는 칼과 자신의 거리를 짐작해 본 뒤 도약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거리임을 알고 빠르게 판단했다.
일단 소연을 마무리 짓고 정욱에게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늑대 인간은 순식간에 다시 소연에게로 도약했다.
하지만 많은 분신이 소연을 둘러싸고 있는 터라, 분간이 쉽지 않았다.
늑대 인간의 손이 조금 멀리서 허공을 훅 하고 갈랐다.
“이 따위 잔재주 한꺼번에 날려 주겠다!!”
그러자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소연과 그녀의 분신이 있던 자리를 휙 쓸고 지나갔다.
후우웅.
묵직한 바람의 소리였다.
그 바람의 여파를 받은 소연의 환영이 픽픽 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진짜 소연마저도 뒤로 날아가 벽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버렸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녀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정신을 놓으며 정욱이 늑대 인간에게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

늑대 인간은 자신에게 겁 없이 달려오는 정욱을 보고는 움찔했지만 이내 자세를 취해 공격을 맞받아칠 준비를 했다.
‘애송이인 줄 알았더니 꽤나 강하게 나오는군!’
달려오던 정욱의 칼이 늑대 인간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늑대 인간은 칼의 궤도를 파악한 뒤 자신의 긴 발톱을 들어 올려 단숨에 내리쳤다.
후웅.
공격한 늑대 인간조차 감탄할 만한 카운터 공격 타이밍이었다. 정말 제대로 된 공격이 들어갔구나 싶었다.
그러나 허공을 가르는 허무한 느낌만이 발톱에 감돈다.
공격을 받아 뭉개졌어야 할 상대의 몸이 한순간 일렁이더니 픽 하고 사라진다.
“뭐, 뭐야!”
늑대 인간은 당황한 듯 주변을 살폈다.
연기처럼 상대방의 형체가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늑대 인간은 뭔가 눈치챈 듯 날카롭게 눈을 뜨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한편, 정욱은 공사장의 사각지대에 잠시 몸을 숨겨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눈속임으로 환영을 소환해 보냈지만 정말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큰일 났구만!’
맥델런이 준 초록 구슬을 지금이라도 사용한다면 자신은 안전하게 이 장소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그녀를 버리고 가기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지금 그가 사라진다면 늑대 인간은 그녀를 죽인 뒤 능력을 취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아, 너무 대책이 없었나?’
정욱은 얼른 머리를 굴려 보았다.
자신의 최고 기술인 실체화로 다과용 칼을 동시 3개까지 소환이 가능했다.
대 능력자전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그가 정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혼돈들은 대부분 힘과 속도가 비슷했기에 패턴 파악이 다 된 상태라 용이하게 상대해 왔지만 이 경우는 정말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욱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늑대 인간의 낌새를 보아하니 자신의 기운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자. 나도 이제까지 놀고만 있진 않았잖아!’
언젠가 능력자를 상대할 때가 올 것임을 각오하고 있었다.
정욱은 지금껏 하루도 빠짐없이 혼돈들을 상대하고, 능력을 성장시켜 왔다.
그래서인지 늑대 인간의 기운이 강대할지라도 그다지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어느새 싸움에 익숙해져 버린 모습이었다.
일단 자신의 뒤로 다과용 칼을 다시 소환시켰다.
10개의 다과용 칼이 정욱의 뒤에 둥둥 떴다.
그중 3개는 실체가 있는 칼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기습적으로 늑대 인간에게 날렸다.
피슝!
“응?”
늑대 인간은 갑자기 쏘아져 오는 칼을 감지하고 깜짝 놀라며 손을 휘둘러 그것을 쳐 냈다.
사각지대에서 날아온 칼이었지만, 그는 정확하게 칼을 상쇄한 것이다.
“거기로구나.”
늑대 인간은 칼의 방향을 토대로 드디어 정욱이 숨어 있는 자리를 찾아내었다. 그의 신형이 빠르게 공사장의 한구석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정욱은 자신의 쪽으로 달려오는 늑대 인간을 보고 흠칫 놀라며, 몸을 피했다.
물론 자신이 있던 자리엔 환영을 남겨 두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늑대 인간이 정욱의 환영을 공격해서 없앴다.
‘이 녀석 능력이…….’
정욱의 능력에 대해 감을 잡아 가는 늑대 인간이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눈속임이로구나!’
정욱은 빠르게 몸을 움직여 다시 늑대 인간과 거리를 두었다. 생각보다 늑대 인간의 움직임이 훨씬 재빨랐다.
이렇게 도망만 다녀선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맞서 싸우자니 늑대로 변한 그의 움직임과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일단 벽이다.’
정욱은 자신의 주변으로 시멘트와 비슷한 모양의 벽을 둘러쳤다.
눈으로 볼 때는 구분이 불가능한 환영이 주변을 감쌌다.
늑대 인간은 정욱의 기운을 끊임없이 쫓으며 그를 찾았다. 그의 감각은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능력을 가진 자와의 싸움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도망치는 쥐새끼 같은 놈이라니!’
그는 도무지 정욱이 보이지 않자 자리에 멈춰서 정신을 집중했다.
퓨슈슈슉!
그때였다.
별안간 등 뒤에 있던 벽 속에서 정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다과용 칼 아홉 개가 늑대 인간에게로 쏘아져 들어갔다.
늑대 인간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예기를 감지하고 재빨리 돌아서 손톱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