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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런데 저 사람은?”
“새로 들인 청공작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
“내가 처음에 한 부탁 기억나죠?”
해리스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에는 개입해선 안 됩니다. 해리스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 거예요. 기왕이면 호기심조차 안 갖는 게 제일이지만, 뭐 그런 개인감정까지 뭐라고 하진 않을게요.”
해리스의 안색이 흐려졌다.
“저, 하진?”
“네?”
“저 규진이라는 사람, 얼마 동안이나 있는 거죠?”
“그건 나도 몰라요. 아기 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런데 이런 이야길 여기서 그냥 해도 되나요?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걱정 말아요. 단, 앞으로는 좀 조심해 줘요.”
“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터너 군. 청공작은 지금 약에 취한 상태거든. 그 물을 다 마셨으니 지금쯤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지 정글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 푹 잠들었다 깨어나면 청공작에게 딱 맞는 새로운 새장 속이겠지. 당분간 심심할 틈이 없을 것 같아 몹시 흥분돼.
나는 청공작의 눈물과 핏물에 얼룩진 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넣다가 몸을 웅크리고는 숨죽이고 한참을 웃었다.
3. 인도 청공작의 생태


샤워실 앞에 깨끗한 새 옷을 가져다 놓고, 속옷과 다른 소모용품들, 그러니까 전동 면도기와 칫솔, 치약들을 공작새의 공간에 넣어 주는 요정 대모님의 일이 며칠이나 반복되었을까?
얼굴에 부기가 조금 빠지고 나니 청공작, 요 깜찍한 새는 밤 시간 좀처럼 집에 붙어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낮에는 해리스와 함께 외출을 한다. 청공작은 어련히 내가 출근하는 줄 알고 있겠지만 천만에. 요즘 들어서 나와 해리스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바람을 쐬고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 잘 듣는 친척 동생과 신나게 관광객 기분을 내며 돌아다니는 동안 공작새는 얌전히 집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6시 반. 딱 우리가 외출에서 돌아올 시간쯤, 그는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뻔했다. 예전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굳이 뒤로 알아보지 않아도, 그의 깃털이 점점 화려해지고 걸음에 힘이 실리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언제 한 번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정말로 우연히 밖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는 예전 동료와 함께 웨스트카운트 바(bar)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길고 단단한 몸을 나른하게 소파에 뉘이고서 다른 공작 계열의 수컷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먼저 온 손님이었던 나는 해리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잊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바로 내 이야길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옛 동료는 내 이름을 듣고는 청공작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청공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몸짓조차도 묘하게 사람의 정욕을 부추기는 맛이 있었다.
“동명이인이야. 조류원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오히려 아기 새면 아기 새지, 무슨. 조금만 손대도 파다닥거리며 손바닥 안에서 떠는데, 한입에 먹어 치워 버리고 싶을 정도야.”
아아, 귀엽게 봐 주어서 고마워, 공작 군. 규진은 거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것도 못해. 기껏 집에 데려다 놓고 말도 한 마디 제대로 못 붙이던데? 호구야, 호구. 내가 그 원장한데 걸렸으면 지금 이렇게 나돌아 다닐 수나 있었겠어? 조류원이 어디 그런 데던가?”
응. 원래 그런 데야. 내가 키우던 새들은 얼마든지 외출하고, 쇼핑하고 그랬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새장이란 그래서 더 무서운 법이다.
“모르는 소리 마. 킬 다운 쪽 손님이 말한 적 있는데, 의외로 버드하우스의 악마는 선이 부드러운, 그러니까 소년 같은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야. 뭣하면 좀 알아봐 줄까?”
“집어치워, 임마. 그리고 킬 다운 쪽으론 얼씬도 하지 마. 잘못하다간 너도 내 꼴 나는 수가 있어, 새꺄.”
남이 뭐라 건 결국 자신이 한 경험과 판단을 과신한다. 고집이 세다거나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란 거겠지. 그에겐 안된 일이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몰래 웨스트 카운트에서 빠져나왔다.
운전석에 앉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던 해리스는 기다린 기색 하나 없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수석에 오르며 나는 해리스를 마음껏 귀여워해 주었다. 요즘 같이 놀아 주니까 좋지? 오늘은 같이 유원지라도 가자. 롤러코스트를 타고 싶은 날이야. 흰색 후드 티에 회색 유로 스키니 진, 흰색 하이탑 운동화를 신은 나는 설령 인도 청공작이 봤다 하더라도 못 알아볼 인상이었다. 해리스는 자기가 더 귀여운 주제에 귀엽단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해사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해리스는 집에서의 내 태도와 집 밖에서의 내 태도가 너무 달라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인지, 내가 데리고 다니는 대로 실컷 다니며 하루하루 아주 알차게 놀았다.
아마도 반듯한 그에겐 하이스쿨을 졸업한 후, 아니 그 전에라도 이렇게 놀기만 하는 생활이 처음일 것만 같았다. 로만의 성격상 아들과 둘이서 이런저런 추억 만들기에 정성을 기울였을 리는 없고.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해리스는 점잖은 청년이라 개구쟁이 시절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자기보다 훨씬 작은 친척 형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해리스를 보면 그저 흐뭇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런 반면, 가끔 이 아이의 색다른 면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오르곤 했지만 참을 만한 정도다. 로만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해리스를 이유 없이 내 곁에서 쫓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참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곤란해. 그래도 재밌을 것 같은 일을 가끔은 참을 줄도 아니까 나름 인간 구색을 하며 살아갈 수가 있겠지.
어쨌거나 나는 해리스가 마음에 들었다. 미남에, 아름다운 체격에, 상냥해 보이는 인상까지. 더불어 순종적이기까지 하다. 퍼펙트. 여자를 사귀는 일도 없이 ‘하진’이라고 부르는 형과 둘이서 매일같이 쏘다니기만 하니 내심 성향이 의심되기도 한다. 로만도 악명 높은 난봉꾼 바이섹슈얼이고. ……아무렴 어때!
우리는 정말로 남자 둘이서 유원지에 놀러 갔다. 그는 고소공포증도 없는 듯 롤러코스터도 신나게 잘 탔다. 다 큰 남자 둘이서 유원지를 누비고 다니는 것에도 별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다만 가끔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거나 공책에 뭔가를 끄적였다.
그런 그가 작게나마 불만을 보이는 때는 단 한 시점뿐이었다.
집에 들어갈 때.
해가 떠 있을 때는 자기 새끼 보살피듯이 아껴 놓고서는 집 안에만 들어가면 소 닭 보듯 자신을 취급하는 내가 불만인 거다. 하지만 해리스, 이 순한 녀석아. 집에서의 나는 오직 한 마리 아름다운 수컷 공작만을 위한 존재인걸.
거짓말쟁이 음유시인은 말하는 전부가 거짓말이야. 가끔 진실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걸 알아채려면 아주 예민해야 해. 그 사람이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거짓말은 ‘사랑해’라는 마법의 언어라는데, 그 누구도 이 거짓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지 뭐야?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데, 그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더라도, 조금은 으쓱해지고, 뿌듯해지고 또 황홀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웃으면서 누구보다 상냥하게 ‘사랑해, 네가 가장 소중해.’라고 말하면, 뻔히 거짓말인 줄 알아도 심장은 두근두근 빠른 박자로 뛰게 된다. 마법의 언어. 그리고 마음을 열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하고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쉬운 일이다. 특히나 진심이 아니라면 더더욱.
거짓말을 해 봤자, 진실을 보는 사람은 본다. 그렇긴 해도 그 거짓말이 마음에 들면 그 거짓말 속에 행복하게 미소 지으면 되는 거야.
청공작 군은 진실을 보지 못했다. 내가 몸을 붉히고 그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으로도 승리욕에 도취되어 금세 나를 만지려 들었다. 내가 부끄러워하면 그는 오만한 정복욕에 대한 만족을 얻는다. 이미 나를 손에 넣은 것처럼.
어리석은 수컷이로다.
화류계의 사람들, 특히 공작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어리숙한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잘못 취급하기 십상이었다. 무엇보다 문제가 있다면 정작 내가 전혀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작에게는 학습이 필요했다. 칼튼은 오만한 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의 자존심을 꺾으려다 실수로 죽여 버린 일이 있을 정도다. 그나저나 이번 공작새는 상냥한 사람에 대한 내성이 어느 정도나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한 지 며칠 만에 공작군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아, 곤란해. 이건 좀.
상처가 완전히 아문 안규진은 레드벨리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건지 페르몬을 마구잡이로 분출했다. 거실에서 티비를 보다 소파 위에서 잠들어 버렸는데, 묵직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진 않았지만 이건 어딜 보나 공작 군의 짓이었다. 그는 거의 겹칠 듯 내 위에 엎드려 귓가에다 속삭였다.
“자는 거야?”
간지러워.
“일어나, 눈 떠.”
속삭이지 마.
“어서.”
움찔 떨며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쿡, 웃는 공작군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모양 좋은 입술을 묘하게 말아 올리며 말했다.
“떨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그러면서 내 귓바퀴를 뭉근하게 쓸어 매만졌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공작군이 두 손으로 어깨를 내리누르는 바람에 털썩 다시 뒤로 넘어졌다. 이 버릇없는 녀석.
“비켜 주세요.”
고작 한 말이 그거냐? 하는 얼굴로 녀석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짙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살 만진다. 정말 스킨십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한숨을 참고 당돌하게 올려다보니 그가 상체를 굽렸다. 쿡!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귀여워.”
그렇게 보이려고 의도 중이다만 이 공작 군은 참 성가시구나. 나는 가쁜 숨을 겨우 내뱉고는 그를 불렀다.
“규진 씨.”
“말해.”
“좋아해요.”
눈을 못 마주치고 그렇게 말하자 대답이 없다.
“좋아해요.”
그가 귓불을 핥는다. 눈을 꼭 감고 있자 그가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섹스하자.”
그래, 그런 순서인 건가? 아니, 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자기가 좀 전에 문 자국에 입 맞추는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더니, 그가 색정적인 눈빛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는 정말 버릇없게 굴 기세였다. 흠, 곤란한걸. 그랬다간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로 이 공작새의 머리를 찍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지. 나는 천천히 호흡을 내쉬고는 말했다.
“정말로 좋아하니까.”
그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그의 몸을 떠밀어 소파 아래로 떨어뜨렸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니까 세, 섹스하지 않을 거예요!”
“뭐?”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내 방으로 뛰었다. 그리고 쾅! 방문을 힘차게 닫았다. 달칵! 하고 방문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와. 역시 전직 호스트! 물고 빨고 엄청 기분 나쁘네. 기세를 타서 목에도 잇자국이 나 있었다. 사람을 함부로 쪼다니, 버릇을 제대로 들여야겠구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아― 그나저나 이거 생각보다 훨씬 재밌잖아! 버릇없는 청공작 군의 말썽과는 별개로 서재 문틀에 기대서서 나를 보던 해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뭔가 억울해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래도 약속했던 것처럼 착하게- ‘내 일에 개입하지 않고’ 인내하는 모습이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정말 순종할 줄 아는 아니라니까.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
해리스였다.
“그 사람, 나갔어요.”
나는 살며시 문을 열어 주었다. 해리스는 내 목에서 시선을 못 박은 채 ‘억울해!’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청공작 군은 전공을 한껏 살려 하고 싶은 섹스 실컷 하고, 더불어 돈도 벌어 내일 늦은 아침나절에야 돌아올 것이다.
“괜찮아요?”
눈치를 보는 해리스의 말에 그의 커다란 등을 쓸어 주었다. 미스터리다. 어쩜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아들이 로만에게서 나왔을까? 로만, 네 아들 나 주면 안 될까? 기르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아.
“걱정 많은 사람, 이리 와요. 같이 놀아요.”
“그 사람이 싫어요.”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해리스는 잠자코 이끄는 대로 내 방에 들어왔다. 처음 들어오는 것도 아니면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싸늘한 가운데 수많은 향수가 놓인 방의 풍경에 살짝 몸을 떨었다.
“이상하죠? 내 체온은 정상인데, 항상 이 방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에요.”
해리스는 향수병들을 보며 말했다.
“무슨 향수가 이렇게 많아요?”
“선물 받은 것들도 있고, 새들의 취향이 워낙에 제각각이라서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해리스는 어떤 향수를 쓰죠?”
“조말론 향수요. 여러 개를 같이 써요.”
해리스의 어깨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해리스는 놀랐는지 움찔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야, 용감한데? 상이에요.”
그를 침대에 앉히고는 그의 발치에 앉았다. 그리고 허락 없이 그의 양말을 벗겼다. 쉬이― 놀라지마. 댁 머리 젖어 있는 거 보니 방금 샤워했네, 뭐. 것 봐. 근데 참 발도 크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발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 손 따뜻하죠?”
두 손바닥으로 그의 발을 감싸 쥐자 해리스는 붉어진 얼굴로 숨을 깊게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군, 귀엽다는 건 바로 저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야. 꾹꾹 발바닥을 누르자 해리스는 입술을 깨물고 입을 꼭 다물었다. 나는 부드럽게 쓸기도 하며 천천히 자극했다. 해리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결국 두 눈을 감고서 한숨처럼 말했다.
“잘하시네요.”
“배웠거든요.”
“……기분 좋아요.”
“해리스, 나는 말 잘 듣는 사람에겐 꼭 상을 주는 주의랍니다.”
아까 눈 마주쳤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요?
“규진 씨에게는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대해 주세요. 피해 주세요. 오늘처럼만 하면 돼요. 그와 상대하지 말아요.”
대답이 없어 복숭아뼈 아래를 살짝 간질여 주자 해리스는 끄응 앍는 소리를 냈다.
“대답?”
“네.”
“착해요.”
나 달라고 로만에게 졸라 볼까? 진심으로 0.3초쯤 그런 생각을 했다.


4. 느와르


해리스가 내 침대에서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나는 그의 미간 사이의 주름을 손으로 펴 주고는 방에서 나왔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청공작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음? 이 번호는 원장님?]
“조수호, 우리 청공작 군 좀 한번 밟아 주지 않을래?”
[아, 안규진 이 새끼 회복 겁나 빠른가 보네?]
“병신 만들지는 말고 겁 좀 집어먹게 해 줘.”
[어디다 버려 놓을까?]
“확실히 정신 놓게 만들어서 우리 집 앞에다 버려 줘. 참, 칼튼은 어때?”
[돼지새끼야 늘 잘 있지. 안규진이 다시 자기 고객들 만나러 다니니까 좆이 바짝 서나 보던데?]
“칼튼 괴롭히지 마.”
[미친놈. 도대체 누가 그런 변태돼지 근처에 가고 싶어나 한다는 건지, 쯧!]
“공작 군은 요즘 어디로 다녀?”
[지난주쯤 레드벨리에 얼굴 내밀었다던데?]
“알았어.”
잘은 모르지만 이미 조수호는 칼튼에게 꽤나 받아 처먹은 걸로 알고 있다. 이 녀석이 고분고분할 때는 돈이 들어갔을 때 밖에 없어요. 전화를 끊으려니 조수호가 말한다.
[새끼곰은 어때? 듣자 하니 거의 매일 원장 옆에 붙어 있다던데. 무사한 거야?]
“해리스? 물론. 착한 녀석이야.”
[염병. 아빠곰한테 맞아 죽고 싶지 않음 적당히 해라.]
“잡소리 지껄이지 말고 끊어.”
그리고 먼저 뚝! 끊어 버렸다. 내참, 내가 뭘 어쩐다고 이 야단이람? 귀여운 동생과 좀 놀러 다닌 게 그렇게 욕먹을 짓인가?
아무튼, 다시 청공작에게 집중해 보자. 공작 군, 자꾸 들러붙는데 역시 게이인가?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반 바, 레드벨리의 호스트 중에는 일반도 많다. 여자 친구는 있지만 일이라면 괜찮다는 타입까지. 넘버 원 호스트가 실은 게이가 아니었어요, 하는 스캔들도 별로 놀라울 것 없는 일이다.
다만 직업의식 탓인지, 단지 꼴리는 건지- 아직은 모르겠단 말이지. 틈만 나면 슬슬 다가와 문지르지를 않나? 어디까지나 내 타입은 바로 전 비둘기 같은 아이로, 척 봐도 어딘가 위축되어 있는 가엾은 것들이다. 1년 365일 눈가가 축축한, 날개 꺾인 아기 새를 주로 예뻐했다. 즉 ‘유혹하고 있어! 유혹하고 싶어!’를 온몸으로 외쳐 대는 공작 타입은 아니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