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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킬 다운은 언제나 그랬듯 정신없이 번쩍였고, 고막이 나갈 듯 시끄러운 음악들로 쾅쾅 울렸다. 술이든 약이든 무언가에 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엉켜 있는 것을 지나니, 바(bar)에서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칼튼이 보였다.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매달았다.
“칼튼!”
“하진 씨!”
조수호의 팔을 뿌리치고 칼튼을 품에 안으며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키가 작고 살이 잘 올라 통통한 이 사내는 검정색 페르가모 정장을 입고 있었다. 흰 피부의 그는 어딜 보나 하얀 병아리와 꼭 닮아 있었다. 이 귀여운 사람에게 돼지새끼라니, 개장수 눈은 역시 믿을 게 못 돼.
“칼튼 씨 일이라고 해서 왔습니다만, 청공작은 어디에?”
“청공작이라- 안규진에게 딱이야. 위층에 넣어 뒀어.”
“걱정 말아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만들어 줄 테니까. 당신을 위해서.”
이미 본 내용이지만, 바에 앉아서 칼튼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공작을 어디에서 만났고 또 그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조수호를 먼저 청공작이 갇혀 있는 방에 들여보냈다. 매직미러가 달린 이 방은 평소에는 엿보기 쇼를 위한 이벤트성 공간이지만- 용도야 필요에 따라 바뀌는 법이다.
“칼튼?”
“으음?”
“역시 보는 눈이 있군요. 저 공작은 정말 아름다워요!”
칭찬에 칼튼의 뺨이 붉어졌다. 그는 이미 새를 세 마리나 사간 VIP손님이다. 그중 한 마리는 가엽게도 죽어 버렸지만. 어쨌든 세 마리는 마저 채울 셈인지 어디서 또 그럴듯한 장난감을 주워 왔다. 물론 칼튼에겐 장난감 이상의 의미는 없겠지만, 나는 되도록 저 선천적인 아름다움이 잘 살아나도록 충분히 공을 들일 생각이다.
그러는 사이 창 너머로 조수호가 안규진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패고 있었다. 깃털이 뽑히고 피가 흐른다. 칼튼은 그 모습에 발기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쯤해서 저 새가 더 망가지지 않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칼튼.”
“하아- 네?”
“다시 한 번 내가 보낸 새를 죽이면, 다시는 새 장난감을 주지 않을 생각이에요.”
“화내는 건가?”
“아니요, 그냥 비즈니스예요. 망가지기 쉬운 장난감이란 소문이 돌면 장사가 안 되거든요.”
“걱정 말아, 하진.”
“약속이에요. 칼튼이라도 미워할 수 있어요. 걱정 말라는 말 대신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죽이지 않을게.”
“착하네요.”
칼튼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칼튼은 붉어진 뺨을 더욱 붉히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라 더 예뻐하는 편이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방 안을 바라보았다. 개장수가 잡고 있는 청공작이 불쌍할 지경이라 다소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땀에 절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청공작이 새로운 등장인물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 이곳을 보았다. 얼굴은 형편없이 얻어터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표정이 굳었다.

저벅저벅저벅.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조수호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이 씨발!”
격하게 욕을 내뱉으며 주먹을 들어 올리던 개장수는 내 얼굴을 보고서 이를 악물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그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묶여 쓰러져 있는 청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굳은 목소리로 그의 안위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묶여 있는 줄을 풀자 그가 힘겨운 듯 눈을 떴다.
“아니, 괜한 걸 물었군요. 우선은 여기에서 나갑시다.”
“누구야?”
“김하진, 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요.”
“그게 크윽, 씨발. 누군데?”
나는 그가 말을 이을 틈을 주지 않고 그를 일으켰다. 단단히 부축한 후 조수호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 앞으로 찾지 마십시오.”
“닥치고 꺼지기나 해. 씨발, 쪽팔리게 사람을 패고 지랄이야.”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터진 입가를 건드리는 조수호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나는 말없이 청공작을 부축해서 그곳에서 나왔다. 칼튼이 저 구석에서 얼굴을 붉히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는 척하지 않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청공작을 킬 다운에서 데리고 나오는 데만 집중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그를 내 차 안에 앉혔다. 그리고 물병을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 넋을 놓고 있던 청공작은 그제야 물병을 잠시 응시하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급하게 물통을 비운 그는 정신이 좀 드는지 백미러로 터진 얼굴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얼마간의 정적, 그 후 안규진이란 이름을 가진 청공작이 말했다.
“누군데 그런 얼굴로 쳐다보는 거지? 내가 그쪽을 알았던가?”
“당신은 절 모를 겁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이제 당신은 내 보호를 받는다는 거죠.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원래 있던 집으로 데려다 드릴까요?”
“이봐.”
“네?”
“누군지는 몰라도 나를 빼내 올 정도면 사정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는 처참한 얼굴을 하고서도 눈을 빛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제기랄! 그 새끼들. 큭!”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나는 급하게 가방에서 지혈제를 찾아 꺼내 그의 입술에 발랐다.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움찔거렸다.
“이봐.”
“말하지 말아요, 상처 벌어져요.”
“제길.”
그는 자신의 입술에 와 닿은 내 손을 거칠게 밀어내더니 와락 내 멱살을 잡고를 끌어당겼다. 상체가 무너지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눌렀다. 뜨거운 숨결이 맞부딪힌다. 배려를 모르고 침입하는 혀끝과 함께 비릿한 피비린내도 같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뜯어 먹히는 줄 알았다. 그는 내 아랫입술을 마지막으로 한 번 살짝 물어 당기고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다.
“어차피 이런 걸 원하는 거지?”
나는 대답 대신 쓸쓸한 얼굴로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에서 손으로 온기가 전해졌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 고요한 적막은 그를 부드럽게 위로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오히려 자신이 상처 입은 얼굴로 내 품에서 무너져 내렸다. 오늘의 현실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으리라.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물이 셔츠를 적시는 동안, 나는 백미러를 바로잡으며 부어오른 입술을 살폈다.
이거, 야생의 아기 새네. 제법 성가시겠는걸?
나는 네 어미가 아니라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고 엄마가 안 가르쳐 줬니? 그를 꽉 껴안고 그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가끔은 세상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다정함이란 걸, 아마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폭력이라는 수단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폭력 속에서는 복종이 탄생하지만, 순종이란 좀처럼 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개장수들은 간혹 대상의 인격이 완전히 박살 날 때까지 폭력을 휘둘러 말 잘 듣는 개로 재조립하곤 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어느 구석이 재미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청공작은 조수호의 패거리에게 집이 불태워지고, 재산은 쓰레기가 되어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사채에 허덕이다 기일을 맞추지 못해 결국 납치당했다. 그는 신체포기각서까지 쓴 상태였다. 자신이 이리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알았다며 진작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자존심만 센 철부지. 화려한 깃털로 온갖 종류의 사내들을 유혹하던 호스트 안규진은 그렇게 칼튼이란 남자의 욕망에 의해 사회로부터 지워졌다.


한참 만에 진정한 그는 편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좀 진정됐나요?”
나와 시선을 맞춘 청공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경이 되고서도 넘버원의 자존심인지 뭔지 묘하게 가오를 잡는다. 거울을 한 번 보기만 해도 괜한 짓이란 걸 알 텐데. 그는 지금 형편없이 얻어터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실소를 터뜨리는 대신 오히려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오히려 그가 코웃음을 친다.
“저어.”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렇게 말문을 떼자 그가 바짝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같이 가시겠어요?”
대답이 없다. 하지만 댁은 갈 곳이 없잖아? 조수호가 아니더라도, 너를 찾아 부채를 요구할 채무자들은 많다. 절대 네 신변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는 찾아갈 수 없겠지. 나는 눈앞의 남자가 부어오르게 만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규진 씨만 괜찮다면요.”
그리고 화악 붉어진 얼굴을 다시 떨구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공작은 어느새 여유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까.”
그가 낮게 귓가에 속삭였다.
“부탁할게.”
고마워, 인도 청공작 군. 당신이 유치원 교육만 제대로 받았었더라도 난 당신을 유혹하지 못할 뻔했어. 해리스 군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아요. 그 낯선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약해 보이고 천사의 얼굴을 한 사람이더라도. 절대, 절대 쉽게 따라가서는 안 된답니다.
운전하는 내내 청공작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운전했다. 긴장하는 태도로 중간중간 큼! 헛기침을 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의 탐색하는 시선에는 웃음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게 두는 게 가장 좋다.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좋겠지.
나는 그의 상상 속에서 회원제 호스트클럽 레드벨리의 넘버원을 동경하는 수많은 손님 중에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뒷세계와도 손이 닿아 있는 미지의 인물이겠지.
의외로 많은 아기 새들이 조류원장의 존재를 알면서도, 나를 보고 그를 떠올리는 일이 드물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김하진과 천사 같은 구원자 김하진은 백만 광년이나 동떨어져서, 도저히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없는 것이리라. 기껏 김하진이란 이름의 익숙함을 깨닫고도 동명이인이려니 하는 것이다. 사람의 외관이란 내면을 위장하는 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어쨌든 나는 누군가를 해치기에는 지나치게 연약하게 생겨 먹었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그와 함께 내렸다.
“저어.”
말을 잇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나를 보던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매만졌다. 제법 자연스러운 스킨십이다. 흠칫 떨며 시선을 맞추자 그가 옅게 웃었다.
“그럼 우선은 좀 편안히 눈 좀 붙이게 해 주겠어?”
“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딱딱한 걸음걸이로 앞서 가자 다시 한 번 작게 웃은 소리가 들려왔다. 5층의 집에 도착해서 열쇠로 문을 여는 대신 벨을 눌렀다. 금방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리스가 문을 열었다.
“하진?”
그리고 나의 눈이 숨길 수 없이 가늘어진다. 아아, 해리스의 깜짝 놀란 얼굴도, 청공작의 모래를 씹은 뜻한 얼굴도 지나치게 즐거워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급히 혀끝을 깨물어 웃음을 삼키고는 규진을 집 안으로 떠밀었다. 해리스가 비스듬히 서서 비켜 주었다.
“해리스, 내 손님이에요.”
해리스는 내가 처음으로 터너 군, 대신 해리스라고 친근하게 부르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규진 씨, 이쪽은 제 친척, 해리스예요. 당분간 한국에 있을 예정이라 함께 생활하고 있어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하는 태도로 급히 말하자 청공작은 별다른 안색의 변화도 없이 도도하게 서 있다가 해리스에게 인사했다.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진의 친구라면 얼마든지요. 일단 저도 이 집의 식객이거든요.”
해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청공작의 엉망으로 터진 얼굴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이건 대체 뭔가 싶은 눈치다. 그의 시선이 규진의 팔을 잡고 있는 내 두 손을 다분히 의식하는 듯 힐끔거린다.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청공작을 그가 묵을 방으로 이끌었다.
조류원은 충분할 정도의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수많은 동거인을 거치는 동안 이 집은 꽤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이 되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호금조가 꾸미고 간 베란다는 아직도 봄가을마다 화사한 꽃들을 피워 냈고, 각각 저마다의 취향대로 채워 넣은 벽면의 수납장에는 이런저런 음반들로 가득했다. 신혼 기분을 내던 카나리아는 부엌을 여성 취향의 식기들로 꾸며 놓았다. 집 안 곳곳에는 화병도 장식되어 있었다. 참, 꽃은 해리스의 취미다. 그는 외출 후에는 항상 꽃을 한 아름 사와 내게 안겨 주곤 했다.
그러니까 이 집은 겉보기엔 열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의 훌륭한 휴식 공간처럼 보였다. 그중 내 것은 별로 없지만, 삭막한 내 방과는 완전히 다른 집 안의 공간들은 대개 손님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사람은 가정적이고 정이 많을 것 같아, 하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청공작이 있을 방은 집 안에서 내 방 다음으로 심플한 공간이었다. 수많은 새들이 거쳐 간 곳이지만, 나는 그곳에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새가 팔려 나가는 날, 나는 그 방의 개인 물건들을 싹 다 치워 버렸다.
청공작은 의외로 더블 사이즈의 침대 하나, 테이블 하나, 전등 하나로 이뤄진 단순한 구성에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여긴, 가끔 오는 부모님들이 쓰는 손님방이에요. 최근엔 건강이 나빠지셔서 제가 찾아가는 편이지만요.”
“부모님.”
“아! 두 분 다 외국에 계세요.”
그러니까 댁을 주워 온 사람을 조금 더 파악해 봐. 쉬워. 단서는 많아. 해리스의 존재도 재미있는 힌트잖아.
“그럼 편히 쉬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방 안으로 끌어들여 문을 닫았다.
“네?”
멍청하게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황해하며 품에서 벗어나려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청공작이 ‘왜?’ 하는 얼굴이 된다.
“이러려고, 데려온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러고 싶어서 규진 씨를 데려온 게 아니라고요.”
“왜, 내 얼굴이 엉망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런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 정도로 주제 모르지 않아요.”
그가 내 얼굴에 손을 올려 손가락으로 볼을 훑는다. 나는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이 집을, 써 주세요. 전 신경 쓰지 마시구요.”
그는 어쩐지 멍한 얼굴로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쩜 기막혀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윽고 청공작은 몇 걸음 물러서서 돌아섰다.
“그럼, 쉬세요.”
나는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돌아서서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는 해리스가 뚫어져라 이쪽 방을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마주치자 그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눈시울이 붉어져 있자 놀란 것이다.
“하진.”
“쉬이, 터너 군. 손님이 쉬어야 하니,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그, 눈이, 괜찮아요?”
“괜찮고말고요. 터너 군, 세상에 내 눈물처럼 값싼 건 없으니 수선 떨지 말아요. 우리 커피나 한 잔 해요.”
속삭이듯 그렇게 말하고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커피 물을 내리자 해리스는 아무 말 않고 조용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는 눈웃음을 치며 그에게 금방 내린 커피 한잔을 내 밀었다.
“으음. 왠지 자지 않고 기다릴 것 같았는데, 정말 그랬네요.”
내가 즐겁다는 듯 말하자 터너 군은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었다.
“터너란 성에서 로만을 떠올릴 사람들은 꽤 많으니까, 이제 터너 군을 해리스로 부를게요. 괜찮겠어요?”
“전 처음부터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는걸요. 물론이죠.”
“로만은 의외로 화류계에선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아들 입장에선 좀 듣기 곤란한 이야기려나?”
“아니, 괜찮아요. 아버지의 여성 편력 및 남성 편력은 뉴욕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자식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게 그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 알려 주는 단적인 예이다.
“해리스, 처음부터 생각했는데, 좋은 울림이에요. 해리스, 해리스, 해리스.”
몇 번이고 본인을 앞에 두고 그렇게 이름을 종알거리자 해리스는 쑥스러운 듯 소년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