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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렇게 다시 동거인이 생겼다.
나는 로만과는 꽤 사이가 좋아 그의 아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집을 제공하는 건 전혀 큰일이 아니었다. 남과 한 공간을 쓰는 일에 별다른 거부감도 없고, 나름 사람을 잘 다루는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이다. 게다가 꽤 착해 보여 마음에 들기도 하니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할 일은 로만의 정신 상태겠지. 아들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맡기다니,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흐음, 그나저나 다시 봐도 참 감상하기 좋은 얼굴에 몸이다.
하지만 이 청년은 내 것이 아니다. 조금은 조심히 다뤄야 할 손님.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는 새장 밖의 도련님이니까.
“우리 같이 잘 지내 봐요.”
나는 선량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 * *
해리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6시쯤 말끔히 씻고 거실로 나와 그 큰 몸을 쭉쭉 펴며 몸을 풀었다. 어둠 속에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는 마치 거대한 육식동물처럼 보였다.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는 훌륭한 손님이 아닐 수 없다.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자니 그가 부엌으로 불을 켜고 들어서다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데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내가 괴이쩍게 보였을 것이다.
“좋은 아침.”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그도 놀람을 추스르고 생긋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조용하지요?”
“일찍 일어나시네요.”
“잠이 별로 없는 편이라.”
해리스는 할머니의 나라이자 로만이 사랑하는 이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여행 왔다는데, 처음 한동안은 시차 부적응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아침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은 일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하진, 아버지 말이 여기가 버드하우스로 불린다고 했어요.”
극히 조심스런 태도로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맞아요.”
“그런데―”
“새가 없다는 말이지요?”
미묘한 표정의 해리스를 보자니 그는 새가 그저 상징적 의미일 뿐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듯싶었다.
“언제나 한 번에 한 마리씩. 지금은 쉬는 중. 으음, 어쩜 지금은 바로 터너 군이 그 새일지도? 종으로 치자면 구관조일까?”
내 말에 해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반응을 보니 로만이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생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군요, 터너 군은.”
“아버지만큼은 합니다.”
“터너 군은 로만을 참 많이 닮았어요.”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듯 가만히 있었다.
“걱정 말아요. 난 로만을 참 많이 좋아하거든요.”
아무래도 묘한 소문을 많이 달고 다니는 동거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싶었다. 나는 화제를 돌릴 겸 다른 것을 물었다.
“한국에서는 뭘 할 생각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딱히. 우선은 관광? 아버지는 한국 요리를 좀 배웠으면 하는 눈치지만요.”
로만 터너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비롯하여 일류 레스토랑을 뉴욕에 세 개나 운영하는 유명한 요리사이자 경영인이었다. 그의 아들에 대해서는 딱히 들은 바가 없었지만 섬세한 손가락을 보면 연상되는 직업은 많았다. 로만이 딱 한 번 지나가는 이야기로 말하길, 아들이 음악을 한다고.
그러나 나는 해리스가 내 집에 묵은 며칠간 음악과 연관된 어떠한 일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터너 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로만과의 의리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으니까요. 그의 아들에게 얼마든지 호의를 보일 수 있을 만큼은 된답니다.”
해리스는 턱을 긁적이고는 피식 웃었다.
“아버지께선 하진의 호의를 늘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죠.”
퍽 당돌하지 않은가?
“타인의 호의는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랍니다. 당신의 정신이 건강하다면요.”
“그렇다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함께 외출해요.”
그리고 나는 “좋아요.” 하고 가볍게 승낙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리스 터너는 가로수길을 걸으며 호기심 왕성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와 살짝 떨어져서 걸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순박한 사내를 관찰했다.
터너가(家)의 사내들은 로만을 위시하여 대체로 호기로운 탐험가 기질이 충만했다. 해리스 역시 터너가의 남자답게 혈기왕성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다 큰 사내임에도 어딘가 소년 같은 인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법한 싱그러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가슴에 만성 통증을 달고 그저 살아가고만 있을 뿐인 그전의 동거인들과는 아주 달랐다. 새장 속에 갇히기 위해 태어난 새들과는 달리, 잡으려 들었다간 보란 듯 자유롭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직업병인지 나는 그를 상품화 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저런 자는 길들이기 통 쉽지 않는 유형이다. 그들은 좀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는다. 제 발로 새장에 기어들어 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잘생긴 이 동거인은 쉽게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팔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김하진!!”
거의 넘어질 뻔한 걸 겨우 균형을 잡고 돌아보자 덩치 큰 남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진성아. 오랜만.”
“너, 이 개새끼!!”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해리스가 급하게 끼어든다. 덩치가 저보다 훨씬 큰 방해물을 보는 이진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장난감이냐?”
“무례한 짓은 그만둬. 한국어가 능숙한 분이니까 다 알아들어.”
해리스는 이진성이 휘두른 주먹을 잡아채고는 곤혹스러워했다.
“이 사람은?”
“내 친구. 이름은 이진성.”
“친구? 친구라고?!”
“아아, 진정해.”
진성은 우리 사이에 낀 덩치 큰 외국인에게 위압감을 느꼈는지 조금 주춤거렸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상대가 친구일 리 없지. 그는 나에 대한 증오심과 백주 대낮의 대로 위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게 원래 본인의 성격이 아니라는 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진성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
“선규 씨 어디 있냐?”
이제는 숫제 빌기라도 할 기세다.
“우리 알고 지낸 시간 생각해서라도 너 그러면 안 된다. 니가 인간이면 그래선 안 되는 거야. 제발, 선규 씨 제발 좀 돌려보내 줘!”
“무슨 말이야? 일단 좀 진정하고―”
“이, 개새끼! 알아봤어. 내가 다 알아봤다고! 니가 선규 씨 팔아먹었잖아! 니가, 니 이 씨팔 개새끼가!”
그는 다시 광분하며 점차 이성을 잃어 가는 것 같았다. 저런.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했다.
사랑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니까. 3년 전만 해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였는데.
나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이진성. 선규 씨 제 발로 나한테 온 거야. 그리고 널 떠났듯이 내 곁에서도 떠났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네 추잡한 소문 들었다. 어떻게 그동안 뻔뻔스럽게 내 옆에서 일반인 흉내 내며 지냈냐? 생각해 보니 나는 네가 어디 사는지, 뭐하고 사는지도 몰랐어. 있는 거라고는 전화번호 달랑 하나였다고. 내가 너 찾느라 한 달을 귀신처럼 살았다. 절대로 못 놓쳐.”
이놈의 서울 바닥, 좁긴 좁구나. 그래도 널 보니 마음이 좀 뿌듯하다. 인간 같지도 않던 놈을 이렇게 다채롭게 만들어 놓다니 인간개조의 달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겠군. 나는 걱정과 선의를 얼굴에 가득 담아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선규 씨는 절대 네게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거야. 네가 원해도 그녀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 내 소문 듣고 열 받은 모양인데, 내가 한 건 진짜 아무것도 없어. 그 여자는 애초에 네 짝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 너 많이 힘들어 보인다. 그 아가씨 행방은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지금껏 네가 알아 온 나를 좀 믿어 주면 안 되겠냐? 꼭 내일까진 연락할게.”
나는 늘 그렇듯이 그를 달랬다. 3년 동안 그가 알아 왔던 모습 그대로, 정직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내 곧은 시선에 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손을 놔주었다.
“믿어 줘서 고맙다.”
“널 믿는 게 아니야. 그날도 넌 결국 나오지 않았잖아.”
“그날은 사정이 있었어.”
“닥치고, 이번에야말로 꼭 연락해야 한다.”
“걱정 마.”
나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어수룩할까?
해리스는 진정한 이진성이 곧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사라져 버리자 말을 걸어왔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까?”
“아뇨, 흔치 않은 이벤트죠. 즐거웠나요?”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괴상해졌다.
“연락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연락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되는 건지?”
“물론이죠. 어차피 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자세한 건 물어 오지 않았지만 해리스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것이 즐거워서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기로 했다.
이진성은 내가 기르던 백문조 한 마리를 만났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때가 되어 이 작은 문조를 잘 어울리는 주인에게 팔았다. 문제가 될 만한 게 있다면, 이진성은 내가 조류원장이란 걸 몰랐고, 나를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백문조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뿐. 그리고 아마도 백문조는 이진성이라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그 과정들은 사실 별로 중요할 게 없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니까. 이진성이 백문조를 만나도 변하는 건 없다는 것.
“터너 군?”
“네?”
“사람 함부로 믿지 마세요.”
그는 모르겠다는 얼굴이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남자였다.
2. 킬 다운의 천사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아늑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로만은 이쪽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좋은 대화 상대였는데, 해리스도 나쁘지 않았다. 현대판 노예 상인을 보통의 룸메이트 대하듯 대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배짱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집 근처 유학생에게 한국말을 배웠어요. 그리고 학부 과정 때 한국어를 서브랭귀지로 배웠고요.”
“그래도 아주 능숙한데? 그밖에 외국어는?”
“스페니시를 해요. 이탈리아어도 조금. 이건 일 때문에.”
“멋지네요.”
해리스 터너는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덩치가 큰 덕분도 있겠지만 역시나 그가 한국 사람의 기준에도 상당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애인은?”
“있었다면 한국엔 오지 않았을걸요.”
“착실하군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담배는 피우나요?”
“아니요.”
“다행이다. 되도록 집에 담배 냄새가 배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문 앞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 있었다. 손짓으로 해리스를 먼저 집 안에 들여보내고는 남겨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잠깐 들리고 곧 연결되었다.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
-여보세요?
“문 앞에 연락처를 남기고 갔더군.”
-아! 원장! 이제 들어왔나? 요즘 뉴페이스가 들어왔다며? 미남이라고 들었는데- 어때? 좀 보여 줘.
“흐음. 로만의 아들인데도?”
-로만? 로만이라면…… 아아~! 뭐야? 조류원에 웬 곰을 들인 거야?
“곰이라니?”
-곰 자식이 새끼 곰이지. 뭐겠어?
하긴 둘 다 덩치가 곰만 하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됐고, 그게 용건이면 끊는다.”
-잠깐, 원장. 여기 꽤 재밌는 게 한 마리 있거든. 데려가지 않으려나 싶어서.
“미쳤냐? 개장수가 맡아 놓고 있는 게 개새끼밖에 더 있겠어?”
-나도 웬만하면 조류원에 연락하고 싶지 않거든? 아, 근데 여기 씨발놈의 돼지새끼가 새 한 마리 갖고 싶다고 생지랄을~ 지랄을. 조건은 무지 좋아. 근데 돼지새끼가, 꼭 이 싹수 노란 새끼를 길들이고 싶다네?
개장수가 돼지새끼라고 부를 만한 고객님 한 명을 떠올리고는 나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좋아. 11시에 킬 다운에서 만나지.”
전화를 끊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서 스트레칭 중인 새끼곰이 보였다. 아니, 이건 절대 곰이 아니야. 어딜 봐서 곰이란 거야? 위압감을 풍길 만큼 탄탄하고 큰 체격이긴 하지만, 전혀 난폭해 보이지 않아. 오히려 쉬스빌(남극의 비둘기)과 느낌이 비슷할까? 맑다, 사람이.
현관에 놓여 있던 붉은 장미를 그의 귀 위에 올려놓았다. 해리스는 장미를 떼려 하지 않고 그대로 싱긋 웃었다.
“잘 어울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근 두 달을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축낸 것이다. 이대로라면 조류원은 너무 쓸쓸해. 샤워를 하고 정장을 입었다. 넥타이 모양이 잘 잡혔는지 거울을 통해 확인한다.
향수가 놓인 곳에는 거의 수십 종류의 다른 향수들이 같이 놓여 있었다. 모으는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분위기를 달리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잠시 손길을 망설이다 이윽고 병 하나를 골라 아주 옅게 몸에 뿌렸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티비를 보던 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본다.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제대로 차려입으니 의아한 모양이다.
“외출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해요.”
“고마워요, 터너 군. 그럼 기다리지 말고- 좋은 밤 보내요.”
“질투 나네요.”
“네?”
“이렇게 차려입고 나가게 불러낸 사람이 누군가 싶어서요. 아까 들어오기 전에 전화한 사람이죠?”
귀엽기도 하지. 쿡, 눈을 휘며 웃었다.
“재미있네요. 나랑 연애하고 싶어요?”
해리스는 그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아요. 세상엔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죽을 만큼 빌고 또 비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좀 중이병 같은 대사지만 진짜여서 어쩔 수 없다. 주로 내가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이 그랬지. 인사를 하고 집에서 나와 천천히 차를 몰고 킬 다운으로 향한다. 가는 동안 카나리아가 종종 부르곤 했던 ‘The Girl from Ipanema’를 오디오로 반복해서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재미없어지면 어떡하지?
장난이 재미없어지는 날이 올까? 그러면 정말로 떠나야 할 때겠지, 이 지구를.
* * *
킬 다운으로 들어가기 전, 조수호를 불러내 정보를 받았다. 개장수가 조류원에 양도하고 싶어 하는 꼬마는 이런 저런 사정을 듣고 보니 그냥 가출 소년이었다. 소년이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해리스는 몇 살이었지?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던 것 같았는데- 정확하진 않다.
여하간 이 꼬마는 해리스와 또래겠군.
“안규진, 성격은- 뭐, 원만하진 않고, 근처 클럽 호스트였지. 돼지새끼가 찍기 전에는. 불쌍한 인생이야. 하필 눈에 들어도 그런 변태영감 눈에 드냐?”
손가락에 끼운 사진을 보며 빙글거렸다.
“흐음, 귀엽게 생겼네.”
“이게?!”
“응, 여기 이 가는 눈매가 마음에 들어.”
“그래, 네 눈깔엔 뭔들 안 예쁘겠냐? 돼지새끼도 귀엽다고 싸고도는 판에. 쯧!”
전신사진과 이런 저런 조사 내용이 들어 있는 서류를 그 자리에서 휙휙 넘겨 살펴보고는 일어났다.
“이 꼬마, 나 알고 있어?”
“아마도.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들으면 눈치챌걸?”
어깨를 으쓱였다. 가명을 쓰지 않는 이유는 딱히 없지만- 굳이 꼽자면, 쓸데없이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는 건 머리가 안 좋아서 무리다. 게다가 재미도 스릴도 없고. 나도 참, 아마추어라니까!
“마음에 들어. 새장 속에서 넣어 두면 꽤 예쁠 거야. 만나기 전엔 모르지만 이미지가 딱 인도 청공작인걸. 확실히 강아지감은 아니지. 이렇게 예쁜데, 아깝잖아.”
“미친. 돼지새끼랑 쿵짝이 잘 맞아서 좋네. 들어가지.”
킬 다운으로 들어가는 길에 몇몇 나를 알아본 자들이 알아서 급히 몸을 돌려 피한다. 조수호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그 꼴을 보며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이런 놈과 한 덩어리로 보인다니 썩 내키지 않았다. 말했던가? 별 분란 없이 지내기는 하지만 나는 개장수들이 싫었다.
그렇게 다시 동거인이 생겼다.
나는 로만과는 꽤 사이가 좋아 그의 아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집을 제공하는 건 전혀 큰일이 아니었다. 남과 한 공간을 쓰는 일에 별다른 거부감도 없고, 나름 사람을 잘 다루는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이다. 게다가 꽤 착해 보여 마음에 들기도 하니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할 일은 로만의 정신 상태겠지. 아들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맡기다니,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흐음, 그나저나 다시 봐도 참 감상하기 좋은 얼굴에 몸이다.
하지만 이 청년은 내 것이 아니다. 조금은 조심히 다뤄야 할 손님.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는 새장 밖의 도련님이니까.
“우리 같이 잘 지내 봐요.”
나는 선량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 * *
해리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6시쯤 말끔히 씻고 거실로 나와 그 큰 몸을 쭉쭉 펴며 몸을 풀었다. 어둠 속에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는 마치 거대한 육식동물처럼 보였다.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는 훌륭한 손님이 아닐 수 없다.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자니 그가 부엌으로 불을 켜고 들어서다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데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내가 괴이쩍게 보였을 것이다.
“좋은 아침.”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그도 놀람을 추스르고 생긋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조용하지요?”
“일찍 일어나시네요.”
“잠이 별로 없는 편이라.”
해리스는 할머니의 나라이자 로만이 사랑하는 이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여행 왔다는데, 처음 한동안은 시차 부적응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아침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은 일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하진, 아버지 말이 여기가 버드하우스로 불린다고 했어요.”
극히 조심스런 태도로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맞아요.”
“그런데―”
“새가 없다는 말이지요?”
미묘한 표정의 해리스를 보자니 그는 새가 그저 상징적 의미일 뿐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듯싶었다.
“언제나 한 번에 한 마리씩. 지금은 쉬는 중. 으음, 어쩜 지금은 바로 터너 군이 그 새일지도? 종으로 치자면 구관조일까?”
내 말에 해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반응을 보니 로만이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생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군요, 터너 군은.”
“아버지만큼은 합니다.”
“터너 군은 로만을 참 많이 닮았어요.”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듯 가만히 있었다.
“걱정 말아요. 난 로만을 참 많이 좋아하거든요.”
아무래도 묘한 소문을 많이 달고 다니는 동거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싶었다. 나는 화제를 돌릴 겸 다른 것을 물었다.
“한국에서는 뭘 할 생각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딱히. 우선은 관광? 아버지는 한국 요리를 좀 배웠으면 하는 눈치지만요.”
로만 터너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비롯하여 일류 레스토랑을 뉴욕에 세 개나 운영하는 유명한 요리사이자 경영인이었다. 그의 아들에 대해서는 딱히 들은 바가 없었지만 섬세한 손가락을 보면 연상되는 직업은 많았다. 로만이 딱 한 번 지나가는 이야기로 말하길, 아들이 음악을 한다고.
그러나 나는 해리스가 내 집에 묵은 며칠간 음악과 연관된 어떠한 일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터너 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로만과의 의리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으니까요. 그의 아들에게 얼마든지 호의를 보일 수 있을 만큼은 된답니다.”
해리스는 턱을 긁적이고는 피식 웃었다.
“아버지께선 하진의 호의를 늘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죠.”
퍽 당돌하지 않은가?
“타인의 호의는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랍니다. 당신의 정신이 건강하다면요.”
“그렇다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함께 외출해요.”
그리고 나는 “좋아요.” 하고 가볍게 승낙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리스 터너는 가로수길을 걸으며 호기심 왕성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와 살짝 떨어져서 걸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순박한 사내를 관찰했다.
터너가(家)의 사내들은 로만을 위시하여 대체로 호기로운 탐험가 기질이 충만했다. 해리스 역시 터너가의 남자답게 혈기왕성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다 큰 사내임에도 어딘가 소년 같은 인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법한 싱그러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가슴에 만성 통증을 달고 그저 살아가고만 있을 뿐인 그전의 동거인들과는 아주 달랐다. 새장 속에 갇히기 위해 태어난 새들과는 달리, 잡으려 들었다간 보란 듯 자유롭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직업병인지 나는 그를 상품화 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저런 자는 길들이기 통 쉽지 않는 유형이다. 그들은 좀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는다. 제 발로 새장에 기어들어 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잘생긴 이 동거인은 쉽게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팔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김하진!!”
거의 넘어질 뻔한 걸 겨우 균형을 잡고 돌아보자 덩치 큰 남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진성아. 오랜만.”
“너, 이 개새끼!!”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해리스가 급하게 끼어든다. 덩치가 저보다 훨씬 큰 방해물을 보는 이진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장난감이냐?”
“무례한 짓은 그만둬. 한국어가 능숙한 분이니까 다 알아들어.”
해리스는 이진성이 휘두른 주먹을 잡아채고는 곤혹스러워했다.
“이 사람은?”
“내 친구. 이름은 이진성.”
“친구? 친구라고?!”
“아아, 진정해.”
진성은 우리 사이에 낀 덩치 큰 외국인에게 위압감을 느꼈는지 조금 주춤거렸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상대가 친구일 리 없지. 그는 나에 대한 증오심과 백주 대낮의 대로 위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게 원래 본인의 성격이 아니라는 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진성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
“선규 씨 어디 있냐?”
이제는 숫제 빌기라도 할 기세다.
“우리 알고 지낸 시간 생각해서라도 너 그러면 안 된다. 니가 인간이면 그래선 안 되는 거야. 제발, 선규 씨 제발 좀 돌려보내 줘!”
“무슨 말이야? 일단 좀 진정하고―”
“이, 개새끼! 알아봤어. 내가 다 알아봤다고! 니가 선규 씨 팔아먹었잖아! 니가, 니 이 씨팔 개새끼가!”
그는 다시 광분하며 점차 이성을 잃어 가는 것 같았다. 저런.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했다.
사랑은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니까. 3년 전만 해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였는데.
나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이진성. 선규 씨 제 발로 나한테 온 거야. 그리고 널 떠났듯이 내 곁에서도 떠났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네 추잡한 소문 들었다. 어떻게 그동안 뻔뻔스럽게 내 옆에서 일반인 흉내 내며 지냈냐? 생각해 보니 나는 네가 어디 사는지, 뭐하고 사는지도 몰랐어. 있는 거라고는 전화번호 달랑 하나였다고. 내가 너 찾느라 한 달을 귀신처럼 살았다. 절대로 못 놓쳐.”
이놈의 서울 바닥, 좁긴 좁구나. 그래도 널 보니 마음이 좀 뿌듯하다. 인간 같지도 않던 놈을 이렇게 다채롭게 만들어 놓다니 인간개조의 달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겠군. 나는 걱정과 선의를 얼굴에 가득 담아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선규 씨는 절대 네게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거야. 네가 원해도 그녀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 내 소문 듣고 열 받은 모양인데, 내가 한 건 진짜 아무것도 없어. 그 여자는 애초에 네 짝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 너 많이 힘들어 보인다. 그 아가씨 행방은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지금껏 네가 알아 온 나를 좀 믿어 주면 안 되겠냐? 꼭 내일까진 연락할게.”
나는 늘 그렇듯이 그를 달랬다. 3년 동안 그가 알아 왔던 모습 그대로, 정직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내 곧은 시선에 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손을 놔주었다.
“믿어 줘서 고맙다.”
“널 믿는 게 아니야. 그날도 넌 결국 나오지 않았잖아.”
“그날은 사정이 있었어.”
“닥치고, 이번에야말로 꼭 연락해야 한다.”
“걱정 마.”
나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어수룩할까?
해리스는 진정한 이진성이 곧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사라져 버리자 말을 걸어왔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까?”
“아뇨, 흔치 않은 이벤트죠. 즐거웠나요?”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괴상해졌다.
“연락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연락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되는 건지?”
“물론이죠. 어차피 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자세한 건 물어 오지 않았지만 해리스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것이 즐거워서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기로 했다.
이진성은 내가 기르던 백문조 한 마리를 만났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때가 되어 이 작은 문조를 잘 어울리는 주인에게 팔았다. 문제가 될 만한 게 있다면, 이진성은 내가 조류원장이란 걸 몰랐고, 나를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백문조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뿐. 그리고 아마도 백문조는 이진성이라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그 과정들은 사실 별로 중요할 게 없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니까. 이진성이 백문조를 만나도 변하는 건 없다는 것.
“터너 군?”
“네?”
“사람 함부로 믿지 마세요.”
그는 모르겠다는 얼굴이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남자였다.
2. 킬 다운의 천사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아늑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로만은 이쪽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좋은 대화 상대였는데, 해리스도 나쁘지 않았다. 현대판 노예 상인을 보통의 룸메이트 대하듯 대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배짱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집 근처 유학생에게 한국말을 배웠어요. 그리고 학부 과정 때 한국어를 서브랭귀지로 배웠고요.”
“그래도 아주 능숙한데? 그밖에 외국어는?”
“스페니시를 해요. 이탈리아어도 조금. 이건 일 때문에.”
“멋지네요.”
해리스 터너는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덩치가 큰 덕분도 있겠지만 역시나 그가 한국 사람의 기준에도 상당한 미남자였기 때문이다.
“애인은?”
“있었다면 한국엔 오지 않았을걸요.”
“착실하군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담배는 피우나요?”
“아니요.”
“다행이다. 되도록 집에 담배 냄새가 배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문 앞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 있었다. 손짓으로 해리스를 먼저 집 안에 들여보내고는 남겨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잠깐 들리고 곧 연결되었다.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
-여보세요?
“문 앞에 연락처를 남기고 갔더군.”
-아! 원장! 이제 들어왔나? 요즘 뉴페이스가 들어왔다며? 미남이라고 들었는데- 어때? 좀 보여 줘.
“흐음. 로만의 아들인데도?”
-로만? 로만이라면…… 아아~! 뭐야? 조류원에 웬 곰을 들인 거야?
“곰이라니?”
-곰 자식이 새끼 곰이지. 뭐겠어?
하긴 둘 다 덩치가 곰만 하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됐고, 그게 용건이면 끊는다.”
-잠깐, 원장. 여기 꽤 재밌는 게 한 마리 있거든. 데려가지 않으려나 싶어서.
“미쳤냐? 개장수가 맡아 놓고 있는 게 개새끼밖에 더 있겠어?”
-나도 웬만하면 조류원에 연락하고 싶지 않거든? 아, 근데 여기 씨발놈의 돼지새끼가 새 한 마리 갖고 싶다고 생지랄을~ 지랄을. 조건은 무지 좋아. 근데 돼지새끼가, 꼭 이 싹수 노란 새끼를 길들이고 싶다네?
개장수가 돼지새끼라고 부를 만한 고객님 한 명을 떠올리고는 나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좋아. 11시에 킬 다운에서 만나지.”
전화를 끊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서 스트레칭 중인 새끼곰이 보였다. 아니, 이건 절대 곰이 아니야. 어딜 봐서 곰이란 거야? 위압감을 풍길 만큼 탄탄하고 큰 체격이긴 하지만, 전혀 난폭해 보이지 않아. 오히려 쉬스빌(남극의 비둘기)과 느낌이 비슷할까? 맑다, 사람이.
현관에 놓여 있던 붉은 장미를 그의 귀 위에 올려놓았다. 해리스는 장미를 떼려 하지 않고 그대로 싱긋 웃었다.
“잘 어울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근 두 달을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축낸 것이다. 이대로라면 조류원은 너무 쓸쓸해. 샤워를 하고 정장을 입었다. 넥타이 모양이 잘 잡혔는지 거울을 통해 확인한다.
향수가 놓인 곳에는 거의 수십 종류의 다른 향수들이 같이 놓여 있었다. 모으는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분위기를 달리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잠시 손길을 망설이다 이윽고 병 하나를 골라 아주 옅게 몸에 뿌렸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티비를 보던 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본다.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제대로 차려입으니 의아한 모양이다.
“외출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해요.”
“고마워요, 터너 군. 그럼 기다리지 말고- 좋은 밤 보내요.”
“질투 나네요.”
“네?”
“이렇게 차려입고 나가게 불러낸 사람이 누군가 싶어서요. 아까 들어오기 전에 전화한 사람이죠?”
귀엽기도 하지. 쿡, 눈을 휘며 웃었다.
“재미있네요. 나랑 연애하고 싶어요?”
해리스는 그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아요. 세상엔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죽을 만큼 빌고 또 비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좀 중이병 같은 대사지만 진짜여서 어쩔 수 없다. 주로 내가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이 그랬지. 인사를 하고 집에서 나와 천천히 차를 몰고 킬 다운으로 향한다. 가는 동안 카나리아가 종종 부르곤 했던 ‘The Girl from Ipanema’를 오디오로 반복해서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재미없어지면 어떡하지?
장난이 재미없어지는 날이 올까? 그러면 정말로 떠나야 할 때겠지, 이 지구를.
* * *
킬 다운으로 들어가기 전, 조수호를 불러내 정보를 받았다. 개장수가 조류원에 양도하고 싶어 하는 꼬마는 이런 저런 사정을 듣고 보니 그냥 가출 소년이었다. 소년이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해리스는 몇 살이었지?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던 것 같았는데- 정확하진 않다.
여하간 이 꼬마는 해리스와 또래겠군.
“안규진, 성격은- 뭐, 원만하진 않고, 근처 클럽 호스트였지. 돼지새끼가 찍기 전에는. 불쌍한 인생이야. 하필 눈에 들어도 그런 변태영감 눈에 드냐?”
손가락에 끼운 사진을 보며 빙글거렸다.
“흐음, 귀엽게 생겼네.”
“이게?!”
“응, 여기 이 가는 눈매가 마음에 들어.”
“그래, 네 눈깔엔 뭔들 안 예쁘겠냐? 돼지새끼도 귀엽다고 싸고도는 판에. 쯧!”
전신사진과 이런 저런 조사 내용이 들어 있는 서류를 그 자리에서 휙휙 넘겨 살펴보고는 일어났다.
“이 꼬마, 나 알고 있어?”
“아마도.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들으면 눈치챌걸?”
어깨를 으쓱였다. 가명을 쓰지 않는 이유는 딱히 없지만- 굳이 꼽자면, 쓸데없이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는 건 머리가 안 좋아서 무리다. 게다가 재미도 스릴도 없고. 나도 참, 아마추어라니까!
“마음에 들어. 새장 속에서 넣어 두면 꽤 예쁠 거야. 만나기 전엔 모르지만 이미지가 딱 인도 청공작인걸. 확실히 강아지감은 아니지. 이렇게 예쁜데, 아깝잖아.”
“미친. 돼지새끼랑 쿵짝이 잘 맞아서 좋네. 들어가지.”
킬 다운으로 들어가는 길에 몇몇 나를 알아본 자들이 알아서 급히 몸을 돌려 피한다. 조수호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그 꼴을 보며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이런 놈과 한 덩어리로 보인다니 썩 내키지 않았다. 말했던가? 별 분란 없이 지내기는 하지만 나는 개장수들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