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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이별을 고하다





“유연.”
청년이 한 발 내디디며 팔을 뻗어 뒤돌아선 소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몸을 뒤틀어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굳건하지만 숨을 조일까 염려하는 듯 부드럽기도 했다. 입매를 굳히고 있던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추었다. 알려 준 적 없는 자신의 이름이 청년의 다정한 목소리에 실려 들려왔다.
청년의 달콤한 목소리는, 엷은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전해지는 그의 체온만큼이나 거센 바람을 마음에 불러일으켰다.
‘알고 계셨습니까.’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연(由緣). 인연이 닿았음을 의미하는 그 말. 조금 전 돌려준 인장에 새겨 넣은 글자를 보고 입에 담은 것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설령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라 한들, 고작 이름자 따위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미동도 없이 굳어진 소녀의 귓가에 다시 한 번 다감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가지 마라, 김유연.”
다시금 덧붙은 말은 조금 전 청년이 입에 올렸던 것이 다만 인장에 찍어 두었던 글자가 아니라 소녀의 이름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유연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의 목소리는 그적이나 지금이나 소녀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할 듯 감미로웠다. 이대로라면 다시 다음을 기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만남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소녀가 지금껏 댕기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로 머무르듯이.
소녀는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팔 안에서 몸을 뒤로 돌렸다. 뺨이 청년의 가슴께에 닿았다. 줄곧 아래를 향하고 있던 팔을 들어 청년의 허리를 휘감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한 청년의 팔이 느슨해졌음에도 소녀는 그대로 몸을 붙인 채 기대어 있었다.
청년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둥근 이마에 이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눈썹이 드러나더니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운 까만 눈동자가 청년을 향했다.
“이대로 지금처럼, 내 곁에 머무르지 않겠느냐.”
소녀의 말간 눈동자에 이는 파랑이 청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후회도 없었다. 청년은 여전히 부드럽지만 확고한 뜻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내 곁에 있어다오.”
소녀가 발돋움하여 청년의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시야에 담기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눈동자, 그 안에 담긴 자신의 얼굴이 전부였다. 오늘이 마지막. 굳게 결심한 소녀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돌려주십시오.”
청년이 그 뜻을 짐작하려 들 새도 없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그의 입술 위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소녀가 뒤로 물러서는 것을 느끼며 조그만 몸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소녀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목덜미 뒤쪽을 받쳐 들고 그대로 다가들어 꼭 다물린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몸 안에 남은 숨을 모조리 토해 내야 할 것 같은 거센 힘에 소녀의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더없이 상냥한, 나른하고 유혹적인 움직임으로 잔뜩 겁에 질린 소녀의 마음을 정성스레 달랬다.
청년을 밀어내던 손길은 어느샌가 부질없는 시도를 멈추고 그의 등마루 위에 가볍게 얹혔다. 끈기 있게 얼러 내던 그의 혀끝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온 것도 비슷한 때였다.
소녀의 마음에 아직 망설임이 남아 있었으나 청년이 이끄는 대로 사푼하게 움직여 입술을 스치고 조금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마치 처음인 듯 빠져들어 가던 입맞춤에서 청년을 일깨운 것은 등줄기를 꼭 누르는 소녀의 손가락이었다. 엷은 한숨과도 같은 가냘픈 성음은 무척 매혹적이었으나 조금 전 그가 스쳐 들은 목소리를 고스란히 살려 냈다.

“돌려주십시오.”

청년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줄곧 허공에 떠오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하느작거리던 소녀의 발 전체가 온전하게 바닥에 닿았다.
청년의 팔은 힘을 풀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 같은 소녀의 허리를 여전히 휘감고 있었으나 한 치의 간격도 용납하지 않던 조금 전에 비해 느슨했다.
청년의 시선이 소녀의 얼굴 위를 배회했다. 발갛게 물든 입술은 다시 머금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사랑스러웠지만 입맞춤의 여운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아니한 것처럼 굳게 다물린 채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위태로이 넘실대는 까만 눈동자에는 항상 그를 향하던 부드러운 미소도 찬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슨 뜻이냐.”
“받은 것 돌려 드리고, 드렸던 것 되돌려 받아 모두 제자리를 찾았사옵니다. 무엇을 더 말씀드리오리까.”
소녀의 차분하고 건조한 말투에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간 듯 울려 대던 가슴의 고동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소녀의 접촉은 앞으로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들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제 마지막이라는 선고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다시금 자신을 끌어당기는 청년의 행동에 완강한 거부를 표한 소녀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한마디를 터뜨리듯 토해 냈다.
“대사성 어른 댁 따님도…….”
채 맺지 못한 말과 함께 밤물결처럼 넘실거리던 눈동자에 숨어 있던 아물지 않은 상흔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겨진 것은 오로지 그녀 자신뿐. 소박맞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초라하고 하잘것없는 모습을 직시하며 얻게 된 상처는 청년이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어라 변명할 수 없는 청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 이제는 소녀를 놓아주십시오.”
겁도 없이 낯선 집에 발을 들이던 경솔한 아이는 손목을 쥐이고 입술이 눌리어도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무의미하게 얽어매는 종잇장을 보고는 제 발로 찾아와 상대는 떠올리지도 못할 기억의 조각을 붙잡고 먼저 입술을 맞부딪쳤다. 그렇기에 지금, 소녀의 처지가 이러한 것이다. 전혀 귀할 것 없는 행실이 단정치 못한 여인이기에.
“그럴 수 없다.”
청년의 무거운 목소리가 답으로 돌아왔다. 소녀의 얼굴에 얼핏 조소가 어렸다.
전혀 유쾌하지 못했던 일 년 전의 만남을 끝으로 자신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이가, 귀한 꽃 두 송이를 쥐어 더 꺾어 들 손도 없으면서 갑자기 다정스레 구는 이유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면 소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중전의 자리라도 약조하여 주시겠사옵니까, 상감마마.”
소녀의 목소리에 빈정거림이 실렸다. 청년의 눈동자를 거칠게 흔드는 드센 풍랑을 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소녀가 보기에 전하께서는 이미 양팔 가득 안고 있으면서 떨어뜨린 하나를 아쉬워하는 어린아이와 다름없으시옵니다. 어찌어찌 집어 먼지를 털어 내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아니하더라 하면 다시 버리셔도 누가 감히 무어라 말씀 올리겠사옵니까. 하오나 소녀, 여러 여인을 마음에 품은 사내의 하잘것없는 여인 하나가 되고 싶지 아니하옵니다.”
소녀가 눈에 띄지 않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픈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청년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정중하게 예의를 차린 인사 후에 돌아선 단정한 걸음은 문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흐트러졌다.
급하게 멀어지는 신발 소리를 들으면서도 청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꿈속에서 본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아니하였으나 표표히 걸음을 딛는 뒷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한참을 망연하게 서 있던 청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 너머로 소녀가 힐끗 내려다보던 자리에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노리개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몸을 구부려 주워 드는 손길에 떨림이 묻어났다.
인장(印章)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조그맣게 깨진 조각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손톱보다도 더 작게 조각난 날카로운 편석(片石)을 집어 들었다.
인장 몸체의 팬 홈에 조각을 끼워 꾹 눌렀다. 손끝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너를 놓아줄 수 없다. 설령 이것이 내 이기심이라 하여도.”





하나. 봄볕에 취하여 길을 잃고





“덕해, 갑작스럽게 이 무슨 일인가 말일세.”
“언제는 전하께서 미리 말씀해 주시는 법 있었는가.”
“그래도 근래에는 걸음을 아니하시지 않았나.”
“그런 핑계를 대면 전하께서 아니 찾으신다고 소홀히 여겼으니 왕을 능멸한 것이라 하셔도 드릴 말씀이 없네, 희봉.”
두 늙은이의 대화가 그것으로 잠시 멈추었다. 덕해는 전갈을 듣자마자 해쓱해진 희봉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무튼, 좀 보세.”
이미 그들 주변은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이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이것저것을 팔에 잔뜩 끼고 몹시 서두르고 있었으나 그들만큼은 그 분위기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탁 트인 마루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소맷부리 안에서 폭이 좁은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어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덕해의 모습은 퍽 신중했다. 희봉도 그 옆에 이마라도 맞댈 기세로 바짝 붙어 앉아 새끼손톱만 한 글자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이리 급히 불러들여야 할 것 같으면 여간한 아가씨는 아니 올 것이니.”
종이 위를 종횡무진 배회하던 그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한곳에 모였다. 남산골. 글줄이나 읽을 줄 알아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의 집촌이나 진배없는 곳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살림에 넌더리가 난 호기심 많은 처녀들은 큰 망설임 없이 두루마리 위에 이름자를 올려놓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올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대략 혼기에 접어들었거나 조금 넘은, 얼굴이 반반하고 몸태도 나쁘지 아니하며 행동거지도 어느 정도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여야 했다.
“권 소저.”
희봉이 남산골 아래 적힌 여러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금방 혼인하여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 열여섯. 다소 어려 보이는 것이 흠이지만 용모가 곱다는 첨언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덧붙어 있었다. 덕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사람을 보내세.”
눈길이 닿았던 글줄 위에 손톱자국이 났다. 누구를 불러들였는지 표시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세필도 없고 무명지를 물어뜯어야 할 만큼 긴한 사항도 아니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인 두 내관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서 분주한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움직임이었다.

“날이 좋으면 꽃구경을 갈 것이라 한 그 말, 잊지는 아니하였겠지.”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젊은 내관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리자 용포를 걸친 청년이 웃음을 흘렸다. 젊은 내관은 환이 말하는 그 ‘꽃구경’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개를 내민 연약한 꽃송이를 완상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간혹 제가 간관이라도 된 듯 직언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자였으니 그 전갈을 넣으러 가는 길을 몸서리나도록 싫어하였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기를 바라느냐.”
“……아니옵니다.”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대답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젊은 임금, 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경연에 참여하고 신료를 만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아주 걷어치운 것은 아니었으나 성실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굳이 성실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일은 그의 귀보다 대왕대비의 귀에 먼저 들어갔고 그가 의견을 표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그가 할 일은 그저 인장을 눌러 찍는 것이 전부였다.
“나가 볼까.”
환의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상념을 몰아내고는 호젓하게 걸음을 옮겼다. 곧, 눈부신 햇살이 흩어지는 밝은 세상과 대면했다.
“이렇게 나와 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내리쬐는 햇볕을 음미하며 환이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불어 드는 바람은 아직 서늘했지만 망울을 터뜨린 꽃송이가 여기저기 매달리고 연둣빛 새싹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 모양은 완연한 봄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혼잣말이긴 하였으나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는 젊은 내관을 향해 환이 말을 던졌다.
“그대는 춘흥을 알지 못하는가?”
“봄바람은 처녀 바람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다소 짓궂은 데가 있는 질문에 무뚝뚝한 목소리로 꺼낸 대답 안에는 악의 없는 놀림이 담겨 있었다.
“매양 잔소리를 늘어놓아 희봉에게 일을 배우는가 하였는데 의외로 덕해와도 비슷하군.”
환이 젊은 내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관이나 궁인은 궐에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그러나 그의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환이 즉위하기 전부터 곁에 있던 두 늙은 내관과 대령상궁, 그리고 이 젊은 내관뿐이었다. 자연 그들끼리도 얼굴을 자주 맞대게 될 것이고 늙은이의 경험과 지혜는 대개 젊은이에게 전해지기 마련이었다.
“너 또한 새로 피어난 꽃송이가 궁금한 것이냐 물으려 하였건만.”
환의 곁을 지키는 젊은 내관은 인물이 퍽 준수한 편이었다. 봄바람에 일렁이는 처녀의 마음을 잡아채어 가슴앓이를 하게 할 만한 그 모습 어디에서도 여느 내관과 비슷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간혹 그가 어찌 내관이 되었는가 궁금증이 이는 일이 있었으나 환이 입 밖으로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에게는 제각기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대신 환은 자리에 없는 이들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 늙은이들의 우의(友誼)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비단 과인만은 아닐 터인데.”

“모든 것이 다 소신의 업보 아니겠사옵니까.”

환은 긴 한숨을 섞어 답하는 덕해의 목소리가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그 말투는 시름이 섞인 것보다는 오히려 다정한 쪽에 더 가까웠다. 도무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희봉과 어떤 상황이든 유들유들하게 헤쳐 나가는 덕해의 조합은 누구의 눈에나 의외였고, 덕해가 희봉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보통이었다.
“그리 긴 시간 동안 기꺼이 짊어지고 갈 정도의 업보라면 과인도 지고 싶군.”
환이 무심결에 외로움을 털어놓았다. 젊은 내관이 잠깐 걸음을 머뭇거렸다. 진심으로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갈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애달팠다. 그러나 환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표표히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걸음은 몇 개의 담과 문을 지나 마침내 궐 가장 바깥의 담까지 도달했다. 한 발 더 딛는 것으로 구중심처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걸음이 있지도 아니한 권위와 지키지도 못하는 책무 따위를 벗어던지고 영영 떠나는 첫걸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환이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익선관과 용포 따위는 벗어 던지고 흑립에 결 좋은 비단옷을 걸친 팔자 좋은 한량인 양 행세하는 그 잠깐의 시간이 짧게나마 위안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그 순간을 해결할 수도 없는 고민 따위에 휘둘리느라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 * *

조심스럽게 대문을 빠져나온 소녀가 주변을 살짝 두리번거렸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의 한낮, 때마침 길에는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소녀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담장 안과는 사뭇 다르게 살아 움직이는 청량한 공기와 햇살을 만끽하다가 눈을 반짝 떴다. 모처럼 누리게 된 온전한 자유를 제대로 즐기려면 집 앞에서 미적거릴 게 아니라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