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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소녀를 아는 누군가와 만나게 되면 퍽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누이.”
막 몸을 돌리던 소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대문간에서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염려하던 상황에 맞닥뜨린 셈이었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허름한 옷에 감싸인 뒷모습만 보았으리라. 소녀가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두어 발짝 움직였을 때 조금 전보다 또렷하고 낭랑해진 목소리가 다시 발길을 붙잡았다.
“앞서가는 저 낭자는 주부 댁 외동딸 유연 낭자가 분명…….”
“치서.”
소녀, 유연이 목소리를 무시하기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장난기 어린 눈동자 한 쌍이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 곱게 단장하고 어딜 가는 길일까.”
유연이 자기도 모르게 제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거친 감으로 지어진 새 옷과 검박한 신은 아무리 좋게 보아 주어도 곱게 단장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반어적 표현을 알아듣지 못한 척 유연이 딴청을 부렸다.
“글공부에 전념해야 할 도령이 이 시간에 어찌 나왔어?”
“사랑에 있으면 듣기 싫어도 소리가 다 들리는걸.”
치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유연에게로 다가왔다. 부모의 대화와 하인들의 잡담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내는 것은 아주 쉬웠다. 게다가 한두 시진쯤 전, 모처럼 만에 대문을 나서는 이웃 안방마님의 행차는 평소에 비해 소란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치서는 이쯤이면 몸 가벼운 소녀가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잠깐 나와 본 참이었지만, 발견한 것은 기대 이상이었다.
유연의 옷차림은 가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규수가 평소에 입을 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는 거야?”
유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어머니, 신 씨가 불공을 드리러 나선 뒤 한 시진도 넘게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반닫이 안에 감추어 둔 옷을 두르고 남몰래 집을 나선 참이었다. 그녀 자신이 만들어 냈을 소음은 기껏해야 방금 전 대문이 삐걱거린 소리에 불과했으리라. 그런데 이웃 소년은 어떻게 알고 나왔을까. 유연의 반응에 치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이는 역시 귀여워.”
“하지 마.”
치서가 뻗은 팔이 제 머리 위쪽으로 오는 것을 본 유연은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손을 가볍게 쳐 냈다. 말이 맞물리는 바람에 들은 것은 치서의 웃음기 어린 ‘누이’ 소리뿐이었다. 유연이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숨을 터뜨렸다.
“누이 소리도 그만해. 오라비도 아니면서.”
유연의 부모가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인 사촌 오라비는 같은 집에서 산 적도 없고 때때로 문안 인사나 드리러 오는 정도였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기 때문인지 본성이 그러한 것인지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다소 서툰 편인 유연과는 자연 서먹할 수밖에 없어 누이니 오라버니니 하는 다정한 말이 오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유연에게 서슴없이 누이라고 부르는 이는 하필이면 이웃에 사는 동갑내기 소년이었다. 같은 해에 태어난 데다 생월까지 늦으면서 손아래 동생을 부르듯 능청스러운 말투로 꼬박꼬박 누이라고 호칭하는 모양새가 얄미웠다.
유연이 몇 번이나 타박했으나 치서는 그저 싱글거리기만 할 뿐 그 습관을 고치지 않았다.
“변복을 하고 생쥐처럼 몰래 나오는 성정만 보아도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걸.”
“글줄이나 읽는 대신 남의 집 대문 소리에 귀 기울이는 도령은 성숙한가.”
유연이 눈살을 찌푸려 보였지만 치서는 그 말에 반박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차림으로 어딜 가려는 거야?”
“으음…… 세상 구경?”
잠깐 망설이던 유연이 가볍게 대꾸했다. 치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연의 뒤편을 건너다보다 다시 물었다.
“혼자서?”
“응.”
“몸종은? 이번엔 좀 오래 버틸 것 같더니 그새 또 짐 꾸려 나간 모양이지?”
짓궂은 데가 있는 목소리에 유연이 땅바닥을 가볍게 걷어찼다. 엷은 먼지가 피어올라 신코와 치맛단 끄트머리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치서가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아답지 않게 수놓기보다 글 읽기를 즐기는 이웃 아기씨는 때때로 불쑥 일어나 대문 밖으로 달음질치는 바람에 몸종 여럿이 그 수발을 들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종복들에게서 쉽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아냐. 어머니를 따라간 거라고. 믿을 만한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 이상으로 누이를 잘 지키는 일도 중요할 텐데.”
치서의 말에 유연이 어깨를 움츠렸다.

“너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네 아버지께서 못마땅하게 여기실 것 같아 그냥 두고 가는 것이야. 혹시라도 허튼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면 좋겠구나.”

어머니 신 씨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별걱정을 다 한다며 웃어넘긴 것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몸종을 채근하여, 혹은 몸종이 따라올 것을 알고 쪼르르 달려 나가던 어린 소녀는 이제껏 혼자서 집을 나서는 법이 없었다. 아마 신 씨는 유연에게 몸종으로 붙여 놓은 삼월이를 데려가면 그녀가 바깥나들이를 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치서는 사내니까 모르는 거야. 안채 담장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게 얼마나 지루한지.”
유연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치서는 유연의 아버지인 재청의 사랑에 들를 적이면 두 번에 한 번 꼴로 그녀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사랑채는 안채 담장 바깥에 있지 않으냐는 놀림을 입에 올리자니 유연의 얼굴에 풀이 죽은 기색이 너무나도 역력했다.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지. 나도, 어른들도.”
“어린아이도 아닌데 다들 무얼 그리 걱정하는지 몰라.”
유연이 여전히 불만 섞인 어조로 투덜거리다가 치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무어라 해도 난 갈 거야.”
“그렇겠지.”
결연한 유연의 목소리를 흘리듯 치서가 가볍게 대답했다. 유연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뭐…… 그리 걱정되면, 같이 가든가.”
집에서 일각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를 나올 때에도 몸종이나 다른 종복이 따라붙었기에 가족도 없이 혼자 나서는 길은 처음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치서와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멀거리고 밀려든 불안감에 충동적으로 말을 꺼내어 놓고 곧 후회했다.
치서도 장차 선비가 될 사람이어서 그런지 은근히 꼬장꼬장하게 구는 면이 없지 않았다. 유연과 동행하는 것보다는 말리는 쪽을 택하는 게 자연스러웠고 설령 같이 간다 하여도 피곤하게 굴 게 분명했다. 유연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서가 신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유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형님이 오시는 날이거든. 평소대로라면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치서의 말에 유연이 서둘렀다. 얼마 전에도 과거 준비를 하느라 산사인지 지방 서원인지에 들어갔다는 치서의 형을 얼핏 본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와 달리 융통성 따위 하나도 없는 고지식한 선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 이웃 소녀가 이런 꼴로 몰래 외출을 감행한다는 걸 알면 그대로 붙잡아 대문 안에 들여놓고 제 부모에게 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난 간다.”
“조심해, 누이. 다정하다고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신기하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지 말고.”
유연이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길을 쏘아 보내고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유연이 서 있던 자리를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치서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일로 마중을 나왔구나.”
치서가 몸을 돌리고 고개를 위로 젖혔다. 말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이는 그의 형, 치상이었다. 치서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네 방향감각도 여전하구나. 어쩌면 매번 그쪽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단 말이냐.”
치상은 치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말고삐를 쥔 채 대문 앞에서 몇 번 헛기침을 하자 행랑아범이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와 고삐를 받아 들었다.
치상이 치서를 향해 손짓했다. 치서가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유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형을 따라 대문 안으로 몸을 들였다.

몸종인 삼월이가 지어 놓은 소박한 옷에 가장 평범한 신을 신은 유연은 치서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허락받지 않은 외출인 데다가 작정하고 빠져나온 게 금방 표가 날 이런 옷차림을 하고 행랑 사람들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한 일이었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온 유연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양이 제가 사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규모도 작고 고색창연한 느낌이 드는 유연의 집에 비해 더 화려한 위용을 뽐내는 느낌이 드는 정도랄까.
가쁘던 숨결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다시 발을 딛기 시작했다. 길 한가운데로 걸어가면서 맞부딪치는, 코끝을 간질거리는 봄바람에 설레면서도 그것이 너무 드러나면 이상해 보일까 봐 신경을 썼다.
기와집이 가득한 거리가 끝나는 저쪽, 야트막한 담과 담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이 자꾸만 마음을 잡아당겼지만 홀로 나온 첫 외출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곤란하다 싶어 큰길로만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도 이 길만 따라가면 지금과 썩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은 예전에 재청을 따라 나왔던 경험을 통해 기억하고 있었다.
저만치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연처럼 몰래 나오지 아니하여도 좋을, 아무렇게나 땋은 머리를 달랑거리는 초라한 차림의 어린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 중 하나가 즐거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누구랄 것도 없이 입을 모아 따라 불렀다.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를 귀동냥으로 얻어듣고 흉내 내고 있을 그 목소리는 어려운 말이 늘어선 앞부분을 뭉뚱그려 흥얼거린 뒤 분명히 알아들은 뒷부분을 신나게 불러 젖히고 있었다.
“반달이냐, 왼달이냐.”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노래 끄트머리에 다시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 아이들은 술래잡기라도 하려는지 부산하게 흩어졌다.
밤하늘에 떠오른 고운 달을 시샘하기라도 하는 노래인가 보다, 여상히 넘긴 유연은 이내 귓전에서 웅웅거리는 거리의 소란스러움에 정신을 빼앗겼다.
가끔 뒤를 돌아 제가 온 길을 되짚어 보려 했지만 온 길을 확인하기 전 이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눈길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소박한 차림의 어린 소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리에는 어깨를 스치다시피 분주히 지나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갖가지 냄새가 조금의 여과도 없이 바로 코끝을 찔렀다.
집 안에서 느껴 본 적 없는 낯선 감각은 불쾌감과는 거리가 멀어, 유연은 그때마다 자기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려 대다 보면 시선은 자연히 길 양쪽에 늘어선 좌판이며 상점에 머무르기 마련이었다.
어린 계집아이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노리개라든가 보는 것만으로 군침을 삼키게 하는 먹을거리 따위는 물론이고, 소금에 잔뜩 절이거나 말린 바닷고기를 늘어놓아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어물전부터 색색의 고운 천이나 온갖 종이를 잔뜩 걸어 놓은 곳까지 유연의 눈길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별천지에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계집아이로 태어났다고 이런 걸 모르고 지내야 한다는 건 억울해.”
유연이 입술을 비쭉 내밀고 걷는 사이에 양편으로 늘어서 있던 것들이 사라졌다. 길은 여전히 넓었고 제법 높다란 담에 둘러싸인 안쪽으로 삐죽하게 기와지붕이 솟아 있었으나 왕래하는 사람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낯선 풍경을 접하자 잊고 있던 불안감이 슬그머니 솟아올랐음에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이 인 탓이었다.
궁금증을 품고 나서도 일각 남짓은 지난 것 같은데 주변의 풍경은 여전히 비슷했다. 갑작스레 혹사를 당한 소녀의 발바닥에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더 가도 딱히 다른 게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출발할 적에는 중천에 떠올라 있던 해도 어느새 한 뼘 넘게 기울어 있었다. 신 씨가 불공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는 대개 저녁나절이었다.
이제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가 집 근처에서 조금 쉬고 있으면 신 씨의 가마가 대문간에 닿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사라졌음을 알고 찾기 시작하면 바로 얼굴을 내밀면 되었다.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조용한 길 끄트머리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들려온 것 같지만 어쩌면 아까부터 울리고 있었으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재청이 퉁소를 부는 일이 종종 있기는 하였으나 그 외의 악기는 책 속에나 등장했지 직접 보거나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유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끌리듯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높은 담장이 길게 이어진 길 끄트머리에 닿아 솟을대문이 우뚝 솟은 그 앞에 섰다. 소리는 분명 그 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유연이 손을 대문에 살짝 얹었다. 결이 매끄러운 나무 위에 가볍게 손이 얹혔을 뿐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남산골에서 오신 아가씨군요. 생각보다 이르게 오셨습니다.”
“네?”
무어라 다시 되물을 새도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걸음을 떼지 않는 유연이 답답한 듯, 문 안에서 나타난 나이 든 남자가 손가락 두 마디나 겨우 보일 법하게 손등을 덮고 있는 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유연의 몸이 앞으로 휘청이며 대문을 넘어섰다. 문은 육중한 모양에 어울리지 않게 소리 없이 스르르 닫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또 다른 바깥세상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한 풍경이었다. 언뜻 그녀의 집과 다른 것은 웅장한 규모뿐인가 싶어도 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산골에서 예까지 거리가 가깝지 아니할 텐데 어찌 걸어오셨습니까.”
늙은이의 자못 다정한 어투를 들으며 유연이 눈을 깜박거렸다. 남산골. 글줄깨나 읽는 고지식한 샌님이나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있기는 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였어도 학식이며 기개는 남 못지아니하니 함부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하였다. 남산골에 대해 아는 것은 딱 그만큼이었다.
낯선 늙은이가 어찌하여 그녀를 보자마자 남산골에서 온 아가씨라고 속단하였을까. 유연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실까요.”
주름진 손가락 끝이 유연의 어깨에 닿더니 앞으로 살짝 밀었다. 유연은 그게 아니라 대답하는 것도, 낯선 곳에 있다는 두려움도 잊고 걸음을 옮겼다.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음악 소리는 재청의 평범한 퉁소 실력과 비할 수도 없어 애간장을 녹일 듯 미묘한 떨림이 마음을 홀려 냈다.
유연이 눈치채이지 않게 눈을 굴렸다. 눈에 닿는 기둥이며 문살은 퍽 미끈하게 반들거렸다. 그 반들거림은 유연의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세월의 손때가 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러 섬세하게 문질러 낸 흔적이 역력했다.
단청이 입혀진 모양은 절에서나 보던 것이지만 쇠락한 세월의 기운은 하나도 묻지 않은 맑고 선명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