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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시지요.”
유연이 반쯤 떠밀려 신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며 자애로운, 그러나 어딘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실례가 될 것 같아 대놓고 흘끔거리지는 못하였으나 텁수룩하게 수염이 자라 있어야 할 턱이 미끈했다. 나이가 어린 소년도 아니고 중년을 훌쩍 넘긴 사내의 턱이 마치 처음부터 그러하였던 것처럼 수염 한 올 없이 매끈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조심해, 누이. 다정하다고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신기하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지 말고.”

문득, 아까 들은 치서의 목소리가 떠올라 유연이 머뭇거렸다. 마치 그녀가 처할 상황을 짐작한 것만 같은 그 말에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열린 문틈으로 나타난 빠르고 망설임 없는 손길이 유연을 잡아당겼다.
아까는 대문 안에서, 이번에는 방 안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유연이 그대로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나타난 덕해가 희봉을 쿡쿡 찔렀다. 눈짓 턱짓을 다 동원하여 눈치 없는 벗을 불러낸 뒤 누가 들을까 염려하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대로 연통을 넣은 게 확실한가.”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어찌 저 아가씨를 대문간에서 만날 수 있었겠나.”
“초행길에 혼자 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일세.”
“말만 전해 놓고는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있겠지. 정신 멀쩡할 때야 두말할 필요 없는 사람이지만 술이 들어가면 정신을 반쯤 놓아 버리던 작자 아닌가.”
평소와 달리 태평한 희봉의 대답에 덕해가 눈썹을 반쯤 치켜 올렸다. 일단 아가씨를 불러 놓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탓인지 필요 이상으로 느긋하고 저 좋을 대로 생각하여 마음을 푹 놓아 버리는 것이 영 께끄름했다. 그러나 희봉의 말에 따로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입성이 썩 좋지 않아 보였고 치맛자락이며 신에 먼지가 묻어날 정도로 먼 거리를 걸어왔다는 점을 미루어 그들이 손톱으로 눌러 표시한 남산골 소저가 맞을 것이었다. 그래도 의심이 지워지지는 않아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열여섯이라 적혀 있지 않았나.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던 것을.”
“아마도 나이를 속인 모양이지. 나중을 기약하며 모르는 척 집어넣었을지 모를 일일세. 아직 어리기는 하여도 이목구비가 반듯한 게 조금 더 성장하면 썩 고운 아가씨가 될 것 같지 않았는가.”
말이 많지 않은 희봉에게서는 듣기 드문 칭찬의 말이었다.
“세월이 흘러 보아야 알 일이지만 지금으로써는 눈에 띄게 고운 용모도 아니었단 말일세.”
“금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텐데 세월이 흐른 뒤를 걱정하여 무엇하나.”
덕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남에서 나중을 기약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 조그마한 계집아이에게 눈길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틀림없이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닫힌 채로 열릴 기미가 없는 방문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이던 늙은이들이 몸을 돌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명의 여인이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서고, 그 앞에는 꽤 엄격한 입매와 날카로운 눈모를 한 여인이 서서 유연을 훑어보았다.
유연은 받아 본 적 없는 눈길에 움츠러들어 저도 모르게 반 발짝 정도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만큼의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양 여인들의 손이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잡았다. 잊고 있던 불안감이 다시 밀려들었다. 집에서 나와 활기 넘치는 별세계 같은 거리를 지나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것 같은 거대한 저택에 발을 들였다. 그 설렘이 훑고 지나간 자리, 알지도 못하는 위험한 곳에 발을 들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유연의 모습을 훑어보던 여인은 소녀의 얼굴에 떠오르기 시작한 두려움을 읽어 냈다. 짧게 숨을 내쉬고는 유연의 옆에 서서 옷을 받쳐 들고 있는 다른 여인에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던졌다.
“자네는 눈썰미가 그리 없나. 이 아가씨에게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을 것을 멍하게 들고 서서 무엇을 하자는 겐가. 따로 말하지 아니하여도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겠다는 판단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어야지.”
여인은 말을 맺기도 전에 유연에게 한 발짝 다가와서는 전혀 망설임이 없는 손놀림으로 앞섶을 여민 고름을 세게 잡아당겼다. 유연이 반사적으로 반 발짝쯤 물러나며 양손을 가슴께에 모아 쥐고 슬쩍 벌어진 앞섶을 꼭 눌렀다.
“이, 이 무슨…….”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가씨. 늦으셨어요.”
조금 전 유연을 대문에서 맞아들인 턱이 미끈한 늙은이는 생각보다 이르게 왔다고 하였는데 눈앞의 엄격한 여인은 늦었다며 채근하고 있었다.
희봉은 연통을 넣은 시간에 비해 이르게 도착하였음을, 여인은 평소와 비교하여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부족함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알 도리 없는 유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그러니까…….”
“생각이 바뀌신 모양인데 어쩔 수 없습니다. 벌써 오셨잖습니까.”
상냥하지만 단호하게 나무라는 목소리로 대꾸한 엄격한 여인이 유연의 손을 잡아 내렸다. 유연은 힘을 주어 버텨 볼 생각이었지만 조금 전 타박을 들었던 여인이 팔에 받쳐 들고 온 것에 눈길을 빼앗겼다.
본디도 썩 풍족한 편이 아닌 데다 가풍 자체도 검박한 편이기에 화사한 꽃잎만큼 고운 빛깔로 물들여진 천도, 만지기만 하여도 손이 미끄러질 것처럼 하늘거리는 치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책을 끼고 앉아 있을 적에는 보이는 것에 연연하면 아니 된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여 놓고서 고운 것에 눈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인의 손길은 단호하고 빠른 말투만큼이나 신속해서 유연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가지가 줄줄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저 스스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는 누군가의 눈에 고스란히 온몸을 내보인 적이 없어 유연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내 몹시 부드러운 천으로 지은 속옷이 입혀지고, 그 위로 꽃송이로 물들인 것처럼 고운 빛깔의 치마와 피부를 스치는 게 간지럽다 싶을 만큼 매끄러운 감으로 지어진 저고리가 걸쳐졌다. 어느 것이든 단 한 번도 몸에 닿아 본 적 없을 만큼 호사스러웠다.
“아니, 나는…….”
“오래 걸리지 않아요, 아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눈앞의 소녀의 얼굴에 가득 담긴 당혹스러움은 여인에게는 꽤 익숙한 것이었다.
혼기에 접어들었어도 엉덩이가 가볍고 몸을 들썩이기를 좋아하는 처녀들이 금기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부나비처럼 날아들었다. 혹여 구설에 오르기라도 하면 곤란해지겠지만 애초부터 여염의 사람들이 머물거나 관심을 갖기 어려운 곳이고 드나드는 사람도 몹시 적었다.
설령 이야기가 새어 나가더라도 한철의 나비나 새처럼 날아들었다 사라지는 아가씨들에 대해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여인의 정조야 예나 지금이나 몹시 중요한 것이지만 외간 사내와 몇 마디 담소를 나누는 게 고작인 잠시간의 비밀스러운 일탈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도 아니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희롱조의 말을 듣기도 하고 손목을 쥐인다거나 좀 더 친밀한 접촉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 자란 아가씨가 마음에만 담아 두고 얼굴을 붉힐 일이지 누군가에게 토로할 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간혹,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받아 온 요조숙녀가 되기 위한 교육이 호기심에 의한 충동과 맞부딪치면 지금처럼 난감한 상황을 눈앞에 두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제 손으로 이름자`―`라고 하여도 반가 부녀의 이름이란 남에게 알려 주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대개는 대략적인 집의 위치와 김 소저, 박 소저 따위의 성만 남아 있었지만`―`를 적고 제 발로 문 앞까지 걸어와 놓고서도 자기가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노라 둘러대던 소녀들이 여럿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예, 그렇습니까’ 하고 납득하며 순순하게 보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경험이 쌓이며 단련된 나름의 기술과 약간의 완력으로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아직 순진한 어린 소녀인 탓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약한 항의만 할 뿐 그 이상의 반항은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머리와 얼굴만 단장하시면 되어요.”
여인이 유연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자리에 앉혔다. 조금 전 타박을 들었던 궁인은 얼른 좌경을 가져다 놓고 이런저런 화정 도구를 늘어놓으며 소녀의 턱을 조금 들어 올렸다.
여인은 유연의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댕기를 풀고 꼭꼭 눌러 땋은 머리채를 빗어 내리며 거울 안에 비치는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너무 어려.’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국혼을 준비하려 금혼령을 내리면 여덟 살부터 단자를 올리고, 조혼의 풍속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열두어 살만 되어도 당장 혼례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오는 이들은 대개 열다섯을 훌쩍 넘어 다 자란 처녀들이었는데,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얌전히 앉아 단장을 받고 있는 이 소녀는 반짝이는 눈망울이 귀엽게만 느껴지는 십 대 초반의 어린 소녀였다.
‘부모라는 작자들이 어지간히 돈에 시달린 모양이지.’
유연은 등 뒤에 앉은 여인이 마음에 품은 생각 따위는 모른 채로, 거울 안에 비치는 제 모습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둔갑한 여우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일이 몰아치는 대로 몸을 내맡긴 사이, 설게만 느껴지는 소녀의 얼굴이 거울 안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본디 피부는 흰 편이었지만 분칠을 하니 조금 더 희어졌다. 하얀 얼굴이 창백해 보이지 않도록 연한 산호빛이 돌게 볼 위를 가볍게 두드리고 붉게 물들여 놓은 입술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해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머리까지 혼인이 결정된 여인마냥 양쪽으로 땋아 올려 가래머리를 하고 있으니 낯섦은 배가 되었다.
제 자신을 향해 건네기는 남사스럽긴 하나 더 고운 듯 보이기도 하고,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몇 년이 지나 혼인을 하거나 계례를 올려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날에야 이런 모습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끝났습니다, 아가씨.”
여인이 유연을 잡고 일으켜 방을 나섰다. 먼지 묻은 소박한 신은 그대로 놓아둔 채 화려하게 수놓인 다른 신에 발을 꿰었다. 약간 헐렁한 신은 벗겨질 정도로 크지는 않았으나 손목을 꼭 움켜쥔 여인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여 질질 끄는 걸음이 되어 있었다.
“잠깐만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에 넋이 팔려 까맣게 잊었던 두려움은 낯선 여인이 손목을 잡아끄는 것으로 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이렇게 급히 어딜 가려는 것인지, 곱게 단장시켜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인지.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제법 다부지게 말을 시작했어도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다.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유연의 얼굴에 여인의 눈길이 부드러워지더니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제가 보증하지요.”
“오래 걸릴까요?”
낯선 사람이 아무렇게나 던질 수 있을 약속을 그대로 믿어 안심하고는 진지하게 눈망울을 굴리며 묻는 말에 순간 여인의 말문이 막혔다. 첫인상 그대로 호기심 많고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였다.
“아마 얼마 걸리지 아니할 겁니다.”
유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뼘 기울었던 해가 다시 반 뼘 정도 더 내려앉아 있었지만 저녁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은 게 분명해 보였다.
헐거워 뒤꿈치가 덜렁거리는 신을 신고 달아날 수도 없지만 이 차림으로는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녀는 상냥한 여인의 목소리에 마음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조금 전보다 더 따스해진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섰다. 유연은 조금 큰 신이 질질 끌리지 않게 성큼성큼 발을 디뎌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본디 호기심 많고 태평한 어린 소녀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같은 시각, 조금 전 소녀가 숨어들었던 대문 앞에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궐 안에서도 얼마고 갈 길이 있었으나 굳이 빙 돌아 문 앞에 선 것은 순전히 환의 충동에 따른 것이었다.
내관은 환이 붉은 용포 대신 화사하니 밝은 빛깔의 도포를 걸치고 무거운 익선관 대신 성근 갓을 눌러쓴 차림이 되고 보니 잠행 흉내를 내고 싶어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환이 대문 위에 손을 얹었다 무심코 저 위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이마 위쪽을 가리지도 않고 눈살도 찌푸리지 않은 맨눈으로 반쯤 걸쳐진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계가 일순 어두워지며 조금 전에 바라보았던 반쪽짜리 해가 대문 위에 잠깐 아로새겨졌다. 그 모습은 흡사 어두운 하늘에 떠오른 반달인 듯 보였다. 이 대문 안에 반달이 머물고 그의 마음이 깃들었던 때가 있었다.
수렴청정을 끝나고 허울뿐인 친정을 시작하고 난 후에도 정무에서는 어심을 논할 수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통제받았다. 그러나 그가 여인에게 갖는 관심에는 다들 관대했다.
중전을 피하는 것에 대해 대왕대비는 따가운 질책을 보냈으나 그가 궁인을 품에 안는 것까지 나무라지는 않았다.
늘 보는 궁인은 그의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궐을 둘러친 담 중 가장 바깥쪽에 달라붙은 전각 하나를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수시로 찾았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반가 부녀를 끌어들이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전각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구중궁궐의 담장 안에 피어나 그의 관심만을 애타게 바라는 궁인이 아니었다. 원하는 누구에게라도 웃음을 던지고 청하는 누구를 위해서라도 음률을 연주할 수 있는 기녀였다. 웃음을 담뿍 머금은 눈은 부드럽게 이지러진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중전에게 그토록 바랐어도 얻지 못한 그 웃음이 고와서, 여느 궁인의 눈빛에 담긴 간절함이 없어서 마음이 끌렸다. 달처럼 창백하고 요염한 여인이 곁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파에 시달리며 세상의 변덕과 멸시를 견뎌 내야 했던 여인은 그를 이용하려 들었다. 부귀를 탐하는 여인은 누구에게든 웃음을 팔았다. 그의 마음이 기우는 달처럼 스러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전각에 발을 들이는 것은 기녀가 아닌 쇠락한 양반가의 규수가 되었다. 기녀는 세상사에 대한 짧은 풍월을 주워섬길 수 있을 만큼의 떠도는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만큼 제가 가진 이야기를 남에게 쉽게 흘렸다.
그에 비한다면 혼기에 접어들었거나 조금 넘긴 처녀들은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기녀보다 세상 물정에 둔하니 만난 사람이 왕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귀한 댁에서 태어나 무위도식하는 한량 같은 도령이라고만 생각했다.
환은 자신이 불러들이는 반가 규수들이 현모양처가 되기를 소망한다 말하면 입술 꼬리를 비틀었다. 앞뒤 분간 없이 뛰어든 부나방 같은 행동에는 어울리지 않는 언사였다.
다정한 눈웃음 한 번에 볼을 붉히고 손목을 잡으면 온몸을 배배 꼬다가 입이라 맞출라치면 저에게까지 전해질 것 같은 두근거림을 담은 채로 눈을 꼭 감는 제 또래의 여인을 마음으로 조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