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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젊은 내관이 조심스럽게 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환이 부질없는 생각을 흩어 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오늘도 기대 따위는 없었다. 친정을 시작하였어도 여전히 두 손이 비어 있는 자신에 대한 환멸을,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바짝 쫓아다니는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잠시 잊을 장소가 필요할 뿐이었다.
하필 태양이 대문 꼭대기에 매어 달리는 바람에 괴로운 기억이 살아났지만 낯선 여인과 얼굴을 맞대는 것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어딘가 청승맞은 곡조가 끊어질 듯 계속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환이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겼다.
항상 무감한 표정을 짓는 박 상궁의 얼굴에 여느 때와 달리 초조한 기색이 어린 것을 무시한 채로 방문을 열었다. 단정하게 앉아 있는 소녀의 뒷모습이 환의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단장한 머리가 어색한 듯 고개를 숙였다 드는 동작이 뻣뻣했다. 체구도 작고 앳된 얼굴을 한,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게 분명한 어린 소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환이 몸을 반쯤 돌리고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낯선 소녀의 얼굴 위로 낯익은 환영이 포개어졌다. 분칠을 하고 입술을 물들인 데다 가래머리까지 하여 완전히 성장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어려 보였다. 통상적인 혼기에 접어들려면 아직도 몇 년은 남은 것처럼 보이는 외모는 작은 몸이 상대적으로 큰 옷에 파묻히듯 감싸인 것으로 더 극대화되었다.
중전. 환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눈앞의 어린 소녀는 그가 처음으로 보았던 중전과 꼭 닮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궁인의 대부분을 품에 안아 본 그가 자신을 찾지 아니하여도, 종내는 궐 담 바깥에 떠오른 고운 달 같은 기녀에게 미혹되어도 아무런 감정을 드러낸 적 없는 여인의 첫인상과 몹시 닮아 있었다.
소리를 흘려 내지 않는 입 모양의 의미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어린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움직임과 함께 한 꺼풀 덧씌워진 환영이 자취를 감추었다. 가문을 짊어진 동시에 만백성의 어미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득하던 창백한 얼굴 대신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이 그를 향했다.
아무리 보아도 예상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풍경에 당황한 것도 잠시, 환은 태연히 발을 옮겼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돌아 나갈 생각 따윈 없었다. 때로 기대하지 못했던 유희에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는 법이었다.
유연은 문으로 들어온 사내가 의젓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여태 비어 있던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내, 그것도 난생처음 보는 외간 남자와 단둘이 방 안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던 유연은 문밖에 아까의 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같은 담장 안에 있으니 한패거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순진무구한 어린 아가씨의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전혀 알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환이 불쑥 물었다. 유연은 고개를 들고 남자를 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제 눈앞에 앉은 사내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미남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리 고운 이에게는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릅니다.”
굳게 다문 입술이 부드럽게 활등 모양으로 굽어지자 눈을 피한 보람도 없이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쩔 수 없이 눈을 조금 들어 올렸다. 쭉 뻗은 콧날까지 나무랄 데 없이 조화를 이룬, 그야말로 완벽한 용모를 갖춘 사내였다.
“당연한 일이지. 다행이구나.”
유연은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물론 제가 한참이나 어릴 것이지만 초면이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함부로 하대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잘생긴 얼굴에 혹해서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은 아니 되는 일이었다.
유연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제법 점잖게 말을 꺼냈다.
“초면에 하대하심은 상대에 대한 실례입니다, 선비님.”
유연은 떨림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 제 말투에 내심 만족했으나 환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비님이라니. 그가 세상을 살면서 그런 호칭을 몇 번이나 들어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볼 때 그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양반 댁 자제일 것이니 딴에는 합당한 부름이라 여길 것이다. 환이 조금 더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하고 천연스레 말을 받았다.
“네 나보다 연소한 것이 분명한데 어찌 공대를 해야 한단 말이냐?”
“그것이 반가 규수를 대하는 예이고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반가, 규수를 대하는 법도.”
환이 천천히 유연의 말을 따라 하며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토막 냈다. 대개 그와 마주하고 앉은 여인들은 스스로를 반가 규수라고 칭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이며 처지 따위를 불문하고 얌전히 얼굴을 붉힌 채 수줍은 대답을 짧게 이어 가는 게 고작이었다.
흥미 따위는 요만큼도 일지 아니하지만 조롱을 품은 채 시간을 보내는 데는 나쁘지 않았다.
누구도 이 아이처럼 당당히 반가 규수를 대하는 법도를 논하는 이는 없었다. 몇 푼 돈을 바라고 호기심에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곳에 날아드는 행동을 부끄러이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제 행실이 어떠한지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당당하게 굴었다.
환의 눈이 위험스레 반짝였다. 단정하게 앉아 반가 규수의 법도를 논하던 것은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어린 중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녀의 눈빛에는 의무감에 짓눌리지 아니한 선망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의젓하게 앉아 있는 소녀가 쓴 가면을 벗겨 내어 여느 몸 가벼운 ‘반가 규수’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곧 머리를 얹어야 하는 동기(童妓)가 아니더냐. 나는 네가 여기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인 줄 알았는데.”
환이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건 채로 유연의 턱을 가볍게 받쳐 들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뜻밖의 말과 행동에 유연이 하얗게 질렸다. 낯선 사내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놓인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차게 응시했다.
유연이 입술을 깨물며 사내의 손을 사나운 기세로 쳐 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소녀라 하더라도 동기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말이 틀림없었다. 몸을 쭉 펴 곧게 앉은 환이 빙글거리며 덧붙였다.
“생각해 보거라. 반가 규수가 어찌 이 좁은 방 안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단둘이 앉아 있단 말이냐. 내 지금이라도 당장 네 옷깃을 헤치고 너를 안아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을 터이니, 이런 행동은 필경 사내에게 웃음을 파는 기녀의 것이 아니겠느냐.”
빈정거리는 어조에 실린 말들이 유연의 마음을 쿡쿡 찌르고 날카롭게 박혔다.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음악 소리에 혹하고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눈길을 빼앗겼어도 이런 일을 당하도록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아니한 건 생각이 깊지 못한 제 탓이었다. 바깥에 사람이 있는 것을 믿고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는 행동은 조신하게 자란 숙녀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했다. 호의로 건넨 말 한마디에 폄하당하고 조롱받는 것은 싫었다. 유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흐릿한 시야에 어렴풋하게 비치는 환의 형체를 쏘아보았다. 환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연이 그를 따라 고개를 치켜들며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의 힘을 풀지 않은 채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양반 댁 자제가 되어 기녀를 불러 노닥거릴 생각 따위나 하고 있으니 조선이 썩었다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요.”
“돈 몇 푼을 바라고 알지도 못하는 집에 발을 들여 낯선 사내와 노닥거리려던 반가 규수의 행실은 어찌 생각하느냐?”
여전히 환의 말투에는 조롱기가 다분하고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조금 전에 비해 한술 더 뜬 언사에 유연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돈을 바라다니, 누가. 세상에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이 널려 있음을 실감하며 폭언을 견뎌 내지 못한 유연이 주먹을 꾹 쥐었다 펴고는 팔을 치켜들었다.
환이 그다음에 이어질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마음에 품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보기도 전에 들어 올린 손목을 잡힌 유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있는 대로 용기와 힘을 끌어모은 시도는 단번에 수포로 돌아갔다.
환의 눈길은 제 얼굴로 날아들려던 손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로 천천히 옮아갔다. 눈망울이 부풀어 오르도록 차오른 물방울을 보자 마음 어느 구석에서부터 찌르르한 엷은 통증이 밀려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 경탄을 담아 반짝이던 눈동자에 깃든 매서운 기운과 아로새겨진 상처의 흔적에 움찔했다.
지금껏 대개 나이가 어린 소녀들에게는 상냥하게 굴었고 나이가 찬 처녀라면 환의 빈정거림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는 일이 많았다. 누구에게든 눈물을 보이게 한 적은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번지는 날카로운 통증이 호의를 보인 소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죄책감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환이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때린들 얼마나 아프겠느냐마는…….”
유연의 눈꼬리에 매달린 맑은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또르르 굴러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넘실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환의 가슴에 기묘한 통증이 일었다.
“내 너에게 그리 쉬이 뺨을 내어 주어서는 아니 되니 막을 수밖에 도리가 없구나.”
환은 유연의 반대편 손이 움찔대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남아 있는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미 한껏 감정이 상해서 열이 오른 소녀가 금방이라도 그 손을 들어 올릴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소녀의 손목은 환의 손이 한 바퀴 감고도 손가락 한 마디가 넘게 남을 정도로 가늘었다. 꼭 쥔 주먹은 그의 손안에 완전히 숨어들 정도로 작았다. 유연이 어린 탓도 있지만 본디 손이 작고 손가락이나 뼈마디 따위가 가느다란 편이기도 했다.
환이 유연의 손목을 쥔 손에서 조금 힘을 풀어내고 손목에서 손등으로, 다시 손가락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대개 환에게 손목을 쥐이거나 몸을 맡겨 오던 이들은 하나같이 여인의 향기가 짙게 배어든 이들이어서 이리 조그맣고 약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손목을 움켜쥐고 팔을 잡힌 채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연은 환의 손이 제 손을 감싸고 흘러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퍽 단단한 손에서 전하는 따스함과 미끄러지듯 옮겨 가는 느낌이 기묘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여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유연의 손가락 끄트머리로 미끄러져 내려가던 환의 손이 뜻밖의 지점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의 왼손 안에 담긴 소녀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첫 마디 언저리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피부가 딱딱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손등이며 손바닥을 쓸어내릴 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계집아이들은 대개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하여 손끝이 단단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골무를 씌워 손가락을 보호하고 바느질도 쉬이 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어릴 적 침방상궁이 하는 양을 몇 번 본 적 있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환의 손끝에 걸린 부분은 바늘귀에 짓눌린 흔적이 남기에는 애매한 자리였다.
환이 유연의 손끝을 쥔 채로 손을 잡아당겨 얼굴 가까이로 끌어왔다. 희미하게나마 묵향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잠시 눈을 들어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문이나 익혀 간단한 서간이나 쓰는 정도라면 손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붓을 쥘 필요는 없었다. 반가 규수의 도리를 논하던 이 아이는 글도 쓸 줄 아는 것일까.
“묵향이 배어 있구나. 언문은 당연히 쓸 줄 알겠지만 혹 진서도 배웠느냐?”
환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어 표정을 읽어 낼 수 없는 소녀의 둥근 이마에, 묵향이 번져 나오는 손끝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에 당혹스러워하며 허리를 쭉 폈다.
여전히 자신의 손이 유연의 손가락 마디 끝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얼굴 가까이 끌어당겨 놓은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의 손 위로 온기가 가시지 않은 물방울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환이 유연의 두 손을 모아 그 앞에 살짝 놓았다. 온기가 빠져나간 그의 손에 닿는 공기는 서늘하고 마음 또한 허전했다.
유연이 고개를 들어 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눈가가 젖어 있는 모양이 아릿하게 다가왔다.
환은 눈가에 머무르고 있는 눈물방울 위를 조심스레 훔쳐 냈다. 엷은 온기가 배어든 물방울이 손끝을 적시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내가 무례하였소, 낭자.”
그의 목소리가 깊은 울림과 함께 유연의 마음에 닿았다. 유연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움직였다. 끄덕임인지 도리질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환이 숨을 삼켰다. 아직도 눈물 맺힌 흔적이 여실히 남은 눈가에 입술을 올려 그 흔적을 지워 내고, 앙다문 입술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엷은 숨결을 앗아 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마음을 흔들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손가락, 발가락 따위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인을 만나고 품어 왔지만 이렇게 어린 소녀를 어찌해 보려는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며 뒤로 물러난 환이 자리로 돌아와 단정히 앉았다.
곤란하다 여기는 것이 그뿐이 아님을 알았으면 환의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웠으리라. 다만, 그러하였다면 아마도 납득할 수 없는 충동을 행동으로 옮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연이 환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저 말뿐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사과 한마디에 끓어올랐던 감정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낮게 속삭이는 감미롭고 은근한 목소리에 굳게 다문 입매가 느슨해지고 상종도 못 할 인간이라는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진정 곤란한 일이었다. 사람은 그 내면이 중요하니 겉모양에 현혹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책 내용에 항상 공감했었는데 지금의 마음은 왜 이러한 것일까.
“이제 그만 앉으시오. 내 잘못하였소.”
그의 목소리가 마치 다리의 힘을 풀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유연이 자리에 스르르 앉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찾으셨사옵니까.”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먼저 튀어나온 대답은 희봉의 것이었다. 아가씨를 대령해 놓았으니 염려할 것 없다 생각하고 있다가 덕해에 이어 박 상궁까지 걱정을 늘어놓자 조바심이 일어 말이 앞섰다.
희봉은 문을 열며 생각했다. 분명 전하께오서는 용안을 저쪽 벽을 향한 채 시선도 주지 않고 아가씨를 뫼셔다 드리라고 명을 내리리라. 조금 떨어져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웃음소리가 아닌 언성이 흘러나온다면 좋은 것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 어찌할 줄 모른 채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어뜯고 있을 어린 소녀를 이끌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던지는 질책의 말은 시간이 없어 어찌할 수 없었다는 말로 덕해가 무마해 줄 것이다.
그러나 희봉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소녀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그린 듯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환이 심상한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다담상을 들이거라.”
“예에……에?”
습관처럼 대답을 길게 늘어뜨리던 희봉은 명의 뜻을 깨닫자마자 말꼬리를 올렸다. 되묻는 것 따위는 결코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지만, 환의 곁을 지킨 지 제법 오래인 그로서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어서 멍하니 선 채로 눈만 끔벅거렸다.
“찻상이라도 올리란 말이다. 설마 벌써 귀가 먹었는가.”
“예, 예.”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젊은 내관이 조심스럽게 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환이 부질없는 생각을 흩어 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오늘도 기대 따위는 없었다. 친정을 시작하였어도 여전히 두 손이 비어 있는 자신에 대한 환멸을,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바짝 쫓아다니는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잠시 잊을 장소가 필요할 뿐이었다.
하필 태양이 대문 꼭대기에 매어 달리는 바람에 괴로운 기억이 살아났지만 낯선 여인과 얼굴을 맞대는 것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어딘가 청승맞은 곡조가 끊어질 듯 계속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환이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겼다.
항상 무감한 표정을 짓는 박 상궁의 얼굴에 여느 때와 달리 초조한 기색이 어린 것을 무시한 채로 방문을 열었다. 단정하게 앉아 있는 소녀의 뒷모습이 환의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단장한 머리가 어색한 듯 고개를 숙였다 드는 동작이 뻣뻣했다. 체구도 작고 앳된 얼굴을 한,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게 분명한 어린 소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환이 몸을 반쯤 돌리고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낯선 소녀의 얼굴 위로 낯익은 환영이 포개어졌다. 분칠을 하고 입술을 물들인 데다 가래머리까지 하여 완전히 성장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어려 보였다. 통상적인 혼기에 접어들려면 아직도 몇 년은 남은 것처럼 보이는 외모는 작은 몸이 상대적으로 큰 옷에 파묻히듯 감싸인 것으로 더 극대화되었다.
중전. 환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눈앞의 어린 소녀는 그가 처음으로 보았던 중전과 꼭 닮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궁인의 대부분을 품에 안아 본 그가 자신을 찾지 아니하여도, 종내는 궐 담 바깥에 떠오른 고운 달 같은 기녀에게 미혹되어도 아무런 감정을 드러낸 적 없는 여인의 첫인상과 몹시 닮아 있었다.
소리를 흘려 내지 않는 입 모양의 의미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어린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움직임과 함께 한 꺼풀 덧씌워진 환영이 자취를 감추었다. 가문을 짊어진 동시에 만백성의 어미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득하던 창백한 얼굴 대신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이 그를 향했다.
아무리 보아도 예상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풍경에 당황한 것도 잠시, 환은 태연히 발을 옮겼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돌아 나갈 생각 따윈 없었다. 때로 기대하지 못했던 유희에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는 법이었다.
유연은 문으로 들어온 사내가 의젓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여태 비어 있던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내, 그것도 난생처음 보는 외간 남자와 단둘이 방 안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던 유연은 문밖에 아까의 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같은 담장 안에 있으니 한패거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순진무구한 어린 아가씨의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전혀 알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환이 불쑥 물었다. 유연은 고개를 들고 남자를 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제 눈앞에 앉은 사내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미남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리 고운 이에게는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릅니다.”
굳게 다문 입술이 부드럽게 활등 모양으로 굽어지자 눈을 피한 보람도 없이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쩔 수 없이 눈을 조금 들어 올렸다. 쭉 뻗은 콧날까지 나무랄 데 없이 조화를 이룬, 그야말로 완벽한 용모를 갖춘 사내였다.
“당연한 일이지. 다행이구나.”
유연은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물론 제가 한참이나 어릴 것이지만 초면이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함부로 하대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잘생긴 얼굴에 혹해서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은 아니 되는 일이었다.
유연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제법 점잖게 말을 꺼냈다.
“초면에 하대하심은 상대에 대한 실례입니다, 선비님.”
유연은 떨림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 제 말투에 내심 만족했으나 환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비님이라니. 그가 세상을 살면서 그런 호칭을 몇 번이나 들어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볼 때 그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양반 댁 자제일 것이니 딴에는 합당한 부름이라 여길 것이다. 환이 조금 더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하고 천연스레 말을 받았다.
“네 나보다 연소한 것이 분명한데 어찌 공대를 해야 한단 말이냐?”
“그것이 반가 규수를 대하는 예이고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반가, 규수를 대하는 법도.”
환이 천천히 유연의 말을 따라 하며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토막 냈다. 대개 그와 마주하고 앉은 여인들은 스스로를 반가 규수라고 칭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이며 처지 따위를 불문하고 얌전히 얼굴을 붉힌 채 수줍은 대답을 짧게 이어 가는 게 고작이었다.
흥미 따위는 요만큼도 일지 아니하지만 조롱을 품은 채 시간을 보내는 데는 나쁘지 않았다.
누구도 이 아이처럼 당당히 반가 규수를 대하는 법도를 논하는 이는 없었다. 몇 푼 돈을 바라고 호기심에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곳에 날아드는 행동을 부끄러이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제 행실이 어떠한지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당당하게 굴었다.
환의 눈이 위험스레 반짝였다. 단정하게 앉아 반가 규수의 법도를 논하던 것은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어린 중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녀의 눈빛에는 의무감에 짓눌리지 아니한 선망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의젓하게 앉아 있는 소녀가 쓴 가면을 벗겨 내어 여느 몸 가벼운 ‘반가 규수’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곧 머리를 얹어야 하는 동기(童妓)가 아니더냐. 나는 네가 여기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인 줄 알았는데.”
환이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건 채로 유연의 턱을 가볍게 받쳐 들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뜻밖의 말과 행동에 유연이 하얗게 질렸다. 낯선 사내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놓인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차게 응시했다.
유연이 입술을 깨물며 사내의 손을 사나운 기세로 쳐 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소녀라 하더라도 동기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말이 틀림없었다. 몸을 쭉 펴 곧게 앉은 환이 빙글거리며 덧붙였다.
“생각해 보거라. 반가 규수가 어찌 이 좁은 방 안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단둘이 앉아 있단 말이냐. 내 지금이라도 당장 네 옷깃을 헤치고 너를 안아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을 터이니, 이런 행동은 필경 사내에게 웃음을 파는 기녀의 것이 아니겠느냐.”
빈정거리는 어조에 실린 말들이 유연의 마음을 쿡쿡 찌르고 날카롭게 박혔다.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음악 소리에 혹하고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눈길을 빼앗겼어도 이런 일을 당하도록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아니한 건 생각이 깊지 못한 제 탓이었다. 바깥에 사람이 있는 것을 믿고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는 행동은 조신하게 자란 숙녀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했다. 호의로 건넨 말 한마디에 폄하당하고 조롱받는 것은 싫었다. 유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흐릿한 시야에 어렴풋하게 비치는 환의 형체를 쏘아보았다. 환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연이 그를 따라 고개를 치켜들며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의 힘을 풀지 않은 채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양반 댁 자제가 되어 기녀를 불러 노닥거릴 생각 따위나 하고 있으니 조선이 썩었다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요.”
“돈 몇 푼을 바라고 알지도 못하는 집에 발을 들여 낯선 사내와 노닥거리려던 반가 규수의 행실은 어찌 생각하느냐?”
여전히 환의 말투에는 조롱기가 다분하고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조금 전에 비해 한술 더 뜬 언사에 유연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돈을 바라다니, 누가. 세상에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이 널려 있음을 실감하며 폭언을 견뎌 내지 못한 유연이 주먹을 꾹 쥐었다 펴고는 팔을 치켜들었다.
환이 그다음에 이어질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마음에 품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보기도 전에 들어 올린 손목을 잡힌 유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있는 대로 용기와 힘을 끌어모은 시도는 단번에 수포로 돌아갔다.
환의 눈길은 제 얼굴로 날아들려던 손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로 천천히 옮아갔다. 눈망울이 부풀어 오르도록 차오른 물방울을 보자 마음 어느 구석에서부터 찌르르한 엷은 통증이 밀려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 경탄을 담아 반짝이던 눈동자에 깃든 매서운 기운과 아로새겨진 상처의 흔적에 움찔했다.
지금껏 대개 나이가 어린 소녀들에게는 상냥하게 굴었고 나이가 찬 처녀라면 환의 빈정거림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는 일이 많았다. 누구에게든 눈물을 보이게 한 적은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번지는 날카로운 통증이 호의를 보인 소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죄책감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환이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때린들 얼마나 아프겠느냐마는…….”
유연의 눈꼬리에 매달린 맑은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또르르 굴러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넘실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환의 가슴에 기묘한 통증이 일었다.
“내 너에게 그리 쉬이 뺨을 내어 주어서는 아니 되니 막을 수밖에 도리가 없구나.”
환은 유연의 반대편 손이 움찔대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남아 있는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미 한껏 감정이 상해서 열이 오른 소녀가 금방이라도 그 손을 들어 올릴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소녀의 손목은 환의 손이 한 바퀴 감고도 손가락 한 마디가 넘게 남을 정도로 가늘었다. 꼭 쥔 주먹은 그의 손안에 완전히 숨어들 정도로 작았다. 유연이 어린 탓도 있지만 본디 손이 작고 손가락이나 뼈마디 따위가 가느다란 편이기도 했다.
환이 유연의 손목을 쥔 손에서 조금 힘을 풀어내고 손목에서 손등으로, 다시 손가락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대개 환에게 손목을 쥐이거나 몸을 맡겨 오던 이들은 하나같이 여인의 향기가 짙게 배어든 이들이어서 이리 조그맣고 약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손목을 움켜쥐고 팔을 잡힌 채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연은 환의 손이 제 손을 감싸고 흘러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퍽 단단한 손에서 전하는 따스함과 미끄러지듯 옮겨 가는 느낌이 기묘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여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유연의 손가락 끄트머리로 미끄러져 내려가던 환의 손이 뜻밖의 지점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의 왼손 안에 담긴 소녀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첫 마디 언저리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피부가 딱딱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손등이며 손바닥을 쓸어내릴 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계집아이들은 대개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하여 손끝이 단단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골무를 씌워 손가락을 보호하고 바느질도 쉬이 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어릴 적 침방상궁이 하는 양을 몇 번 본 적 있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환의 손끝에 걸린 부분은 바늘귀에 짓눌린 흔적이 남기에는 애매한 자리였다.
환이 유연의 손끝을 쥔 채로 손을 잡아당겨 얼굴 가까이로 끌어왔다. 희미하게나마 묵향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잠시 눈을 들어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문이나 익혀 간단한 서간이나 쓰는 정도라면 손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붓을 쥘 필요는 없었다. 반가 규수의 도리를 논하던 이 아이는 글도 쓸 줄 아는 것일까.
“묵향이 배어 있구나. 언문은 당연히 쓸 줄 알겠지만 혹 진서도 배웠느냐?”
환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어 표정을 읽어 낼 수 없는 소녀의 둥근 이마에, 묵향이 번져 나오는 손끝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에 당혹스러워하며 허리를 쭉 폈다.
여전히 자신의 손이 유연의 손가락 마디 끝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얼굴 가까이 끌어당겨 놓은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의 손 위로 온기가 가시지 않은 물방울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환이 유연의 두 손을 모아 그 앞에 살짝 놓았다. 온기가 빠져나간 그의 손에 닿는 공기는 서늘하고 마음 또한 허전했다.
유연이 고개를 들어 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눈가가 젖어 있는 모양이 아릿하게 다가왔다.
환은 눈가에 머무르고 있는 눈물방울 위를 조심스레 훔쳐 냈다. 엷은 온기가 배어든 물방울이 손끝을 적시며 천천히 흘러내렸다.
“내가 무례하였소, 낭자.”
그의 목소리가 깊은 울림과 함께 유연의 마음에 닿았다. 유연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움직였다. 끄덕임인지 도리질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환이 숨을 삼켰다. 아직도 눈물 맺힌 흔적이 여실히 남은 눈가에 입술을 올려 그 흔적을 지워 내고, 앙다문 입술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엷은 숨결을 앗아 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마음을 흔들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손가락, 발가락 따위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인을 만나고 품어 왔지만 이렇게 어린 소녀를 어찌해 보려는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며 뒤로 물러난 환이 자리로 돌아와 단정히 앉았다.
곤란하다 여기는 것이 그뿐이 아님을 알았으면 환의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웠으리라. 다만, 그러하였다면 아마도 납득할 수 없는 충동을 행동으로 옮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연이 환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저 말뿐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사과 한마디에 끓어올랐던 감정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낮게 속삭이는 감미롭고 은근한 목소리에 굳게 다문 입매가 느슨해지고 상종도 못 할 인간이라는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진정 곤란한 일이었다. 사람은 그 내면이 중요하니 겉모양에 현혹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책 내용에 항상 공감했었는데 지금의 마음은 왜 이러한 것일까.
“이제 그만 앉으시오. 내 잘못하였소.”
그의 목소리가 마치 다리의 힘을 풀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유연이 자리에 스르르 앉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찾으셨사옵니까.”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먼저 튀어나온 대답은 희봉의 것이었다. 아가씨를 대령해 놓았으니 염려할 것 없다 생각하고 있다가 덕해에 이어 박 상궁까지 걱정을 늘어놓자 조바심이 일어 말이 앞섰다.
희봉은 문을 열며 생각했다. 분명 전하께오서는 용안을 저쪽 벽을 향한 채 시선도 주지 않고 아가씨를 뫼셔다 드리라고 명을 내리리라. 조금 떨어져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웃음소리가 아닌 언성이 흘러나온다면 좋은 것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 어찌할 줄 모른 채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어뜯고 있을 어린 소녀를 이끌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던지는 질책의 말은 시간이 없어 어찌할 수 없었다는 말로 덕해가 무마해 줄 것이다.
그러나 희봉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소녀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그린 듯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환이 심상한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다담상을 들이거라.”
“예에……에?”
습관처럼 대답을 길게 늘어뜨리던 희봉은 명의 뜻을 깨닫자마자 말꼬리를 올렸다. 되묻는 것 따위는 결코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지만, 환의 곁을 지킨 지 제법 오래인 그로서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어서 멍하니 선 채로 눈만 끔벅거렸다.
“찻상이라도 올리란 말이다. 설마 벌써 귀가 먹었는가.”
“예, 예.”